Author: 참빛
2024년 여름성경학교 (VBS) 1
2024년 8월 2주 말씀
돌보시는 하나님 (7):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 시편 23편
돌보시는 하나님 (7)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
“주가 돌보신다”는 찬양 가사에서 감동을 받고 지난 7주 동안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각자 살기도 바쁩니다. 경쟁은 치열하고 격차는 더 커지면서 공동체 의식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선 내가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틋하게 생각하시고 실제로 돌보신다는 말씀은 복음(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는 길을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몸과 건강, 염려와 불안, 두려움을 포함한 마음과 생각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하나님께서는 가정, 교회, 세상을 돌보심을 배웠고, 지난 시간에는 특별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약한 자들을 돌보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보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돌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땅을 약속하셨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땅을 잃어버리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길 선지자들을 통해서 촉구하셨습니다. 돌아오면(회개) 모든 것을 용서하고 회복시키신다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에게만 은혜와 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길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꾸로 이해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도하시는 새로운 구원입니다. 대상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삼으셨습니다. 끝까지 돌보시고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우리와 더불어 일하시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河-
지극히 작은 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주일에는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약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공부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을 무조건 돌보십니다.
약자의 편에 서십니다.
약자를 보시면 하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 )이 발동합니다.
2.
마태복음 25장은
마지막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관한 비유입니다.
전반부 달란트 비유는
맡겨 주신 달란트를 갖고 최선을 다했을 때 하나님께 받을 칭찬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했기에 하나님의 잔치에 초청받습니다.
후반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오른편(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 도와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왼편(염소)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돕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3.
우리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우리가 예수님이고
어려운 이웃은 우리가 도울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유 속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4.
주일 말씀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점에서 고민이 생깁니다.
과연 우리의 도움이 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돕는다고 해서 이들이 변화되거나 세상이 좋아질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섞인 고민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돕는 심정으로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커다란 전제입니다. 달리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대입해서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하면 됩니다.
지속적이지 않고 한번만 도울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만 도울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예수님”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그때는 꼭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5.
거리의 노숙자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절대적 약자가 아니어도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이 언제나 있습니다.
우리가 도와야 할 예수님입니다.
힘껏 도웁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 25:40)
하나님,
도움을 주는 인생,
돕는 손과 발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8 이-메일 목회 서신)
2024년 8월 1주 말씀
돌보시는 하나님 (6): 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 마태 25장 31-46절
돌보시는 하나님 (6)
약한자를 돌보시는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연속 설교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알려주는 나그네, 고아, 과부로 대표되는 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는 백성들입니다.
나그네는 정착할 곳 없이 타향에 살거나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유목민이었습니다. 가나안 땅도 그들의 원래 터전은 아닙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훗날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면서 나그네 삶의 서러움을 톡톡히 경험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빌3:20). 이 땅이 결코 고향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나그네로 살아갈 뿐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야말로 나그네입니다. 미국에 터전을 잡았지만, 마음은 조국에 가 있습니다. 나그네로 살다 보니 타향살이의 설움도 느낍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미국에 왔고 그 목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그네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기에 나그네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깊이 다가옵니다.
고대사회에 고아와 과부는 돌봄이 꼭 필요했습니다. 고아는 부모가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남편이 없는 과부는 세상에서 이용당하기 쉬웠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고아나 과부의 권리는 거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 고아, 과부와 함께 가진 것이 없는 사회적 약자도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권력의 압제 속에 살아가는 민초를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물질이 없는 가난한 자들도 돌보십니다. 또한 이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잠19:17).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돕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심판 날에 예수님께서 찾으시고 칭찬하시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약한 자들을 돌봤으니,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인/상대적인 약자들을 배려하고 존중하기 원합니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河-
넉넉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교회 음향 시스템은
훌륭한 편이 아닙니다.
용량이 크다면,
중간 정도의 볼륨을 조절해 놓아도 될 듯합니다.
마이크에서 조금 떨어져도
목소리가 편안하게 전달될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앰프의 용량이 작으니
마이크 볼륨을 높이면 “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니 방송실에서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볼륨을 조절하느라 늘 긴장합니다.
2.
캘리포니아를 떠나는 사람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오클랜드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분의 사연이 소개되는데
훔친 트럭으로 사업장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현금 입출 기계(ATM)를 떼어서 그 안에 있는 돈을 가져갑니다.
자동차 유리를 깨는 것은 이제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경찰에 연락해도 오지 않거나
와서는 대충 둘러보고 떠납니다.
웬만한 범죄는 하루 이틀 만에 다시 석방되니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개인의 삶도 뻑뻑한데
세상 질서도 어지럽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비해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여유가 확실히 줄었습니다.
서로 옳다고 자기주장만 하고 듣지 않습니다.
이해득실에 빠르고 결코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서두릅니다. 초조한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우리 교회 앰프 용량이 작아서
볼륨을 조금만 올려도 “삐—“하고 듣기 힘든 소리가 나듯이
사람들을 자극하거나, 남이 자기 영역을 침범하면 경고음을 냅니다.
듣기 힘든 ‘삐—’소리가 세상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넉넉함을 잃어버린 소치일 것입니다
3.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웬만해서는 ‘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앙과 마음, 인격의 용량을 넓혀야겠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우리이니
하나님 자녀라는 느긋함, 넉넉함, 자긍심을 갖고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넉넉함을 주시길 간청합니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살지만,
우리 삶에 여백을 남겨 놓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납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차고 넘쳐서
세상으로 흘러가는 근사한 삶도 기대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16:11)
하나님,
우리 마음과 삶에 넉넉함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1 이-메일 목회 서신)
2024년 7월 4주 말씀
돌보시는 하나님 (5): 공동체를 돌보시는 하나님/ 시편 127편 1절
돌보시는 하나님 (5)
공동체를 돌보시는 하나님
지난 4주 동안 몸과 마음을 돌보시고,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되시고 우리가 가는 길을 친히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일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그 길을 계획해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잠16:9)이심을 수없이 경험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심을 더욱 신뢰합니다.
미국의 전문 설문 조사기관 퓨 리서치가 선진국에 해당하는 17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는 물질적 풍요, 건강, 가족이었습니다. 물질적 풍요를 제일 먼저 꼽은 것은 한국이 유일했습니다. 가족을 최고로 꼽은 나라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33%가 건강이라고 답했습니다. 가정, 신앙, 돈이라고 답한 경우는 각 18%, 17%, 17%였습니다. 팬데믹을 지나면서 신앙과 가정의 중요성은 줄어들고, 물질과 건강이 합쳐서 50%를 차지한 결과입니다.
물질과 건강은‘집착’하기 쉽습니다. 거기에 빠지면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답게 물질과 건강까지 하나님께 맡기고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세상 가치관에 치우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물론 몸까지 돌보심을 믿습니다.
오늘은 공동체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에 관해서 공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에 이름을 짓고 다스리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가정을 이룬 아담과 이브의 몫이었습니다. 이처럼 가정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힘을 다해 자녀들과 부모님, 형제자매를 섬기지만, 가정을 돌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가정과 가족을 멋지게 세워가야 합니다.
가정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의 사도 바울이 가정에 대한 교훈의 끝에 교회를 언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교회 역시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우리가 사는 샌프란의 교회들도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돌보심을 믿습니다. 교회의 주인 되신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책임지실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장차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예표입니다. 전쟁과 갈등, 갈라치기와 기후위기까지 어지러운 세상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도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음을 믿고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기에 하나님의 손길과 돌보심을 간절히 구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