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의 기도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는

야베스의 기도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고통, 수고”라는 이름 뜻 그대로

어머니가 심한 산고 끝에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탄생뿐만 아니라

야베스와 그의 가족은 힘겹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야베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자기 인생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저는 야베스의 기도를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과 비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야베스가 기도로 자기 인생의 운명을 바꾸었듯이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도 기도로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세워가길 바라면서,

역대기 사가는 야베스의 기도를

이스라엘의 긴 족보 한가운데 포함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였습니다.

 

2.

역대상 4장 10절의 <야베스의 기도>를

히브리어 본문의 느낌을 살려서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께서 정말로 복을 주신다면,

그리고 나의 경계를 넓혀 주신다면,

그리고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신다면,

그리고 내가 고통당하지 않도록 악(환난)에서 건져주신다면…

 

히브리어 본문에는 계속해서 “그리고”가 나옵니다.

야베스는 차근차근

한 가지씩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설교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야베스의 기도가 “if”로 시작하는데, 그 끝이 없습니다.

 

창세기 28장의 야곱은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만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주신다면(if),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주신 것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외삼촌 집으로 피신해 가는 노숙자 야곱이었지만,

그에게는 그래도 하나님께 약속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베스는 다릅니다.

야베스도 “if”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처를 구하지만,

기도를 들어주시면 자신이 무엇을 하겠다고

아무것도 약속하지 못합니다.

약속조차 할 수 없는 가난한 야베스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힘없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이 드리는

겸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을 정도로 빈손이었습니다.

그의 에너지 레벨은 0이었습니다.

야베스는 그때도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형제들보다 아니 그 누구보다

존귀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3.

우리도 많이 힘들 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야베스처럼 솔직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강한 모습이 아니라 약한 모습 그대로,

무엇인가를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빈손으로,

무릎 꿇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배웁니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 4:10)

And God granted what he asked. (1 Chronicles 4:10)

 

하나님,

빈손으로 엎드려 주님의 선처를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0. 1 이-메일 목회 서신)

핑계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주 예전에 유행했던

<핑계>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남자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이 헤어지자고 말하면서

구차한 핑계를 댄 것 같습니다.

 

혼자 있는 법을 가르쳐준다면서

안개꽃 한 다발을 선물했는데

그 속에 숨겨진 편지에는

“안녕”이라는 두 글자뿐이었습니다.

 

슬픈 사랑을 가르쳐 주겠다는 핑계도 댔습니다.

그 마음을 다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핑계를 대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2.

핑계는 모든 인간의 생각 속에 도사리고 있는

에덴동산 아담과 이브의 오랜 속성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신 여자 하와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이브는 뱀에게 탓을 돌렸습니다.

 

모세의 형 아론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과 함께 섬겼습니다.

 

모세가 묻자,

“금을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다”며

거짓말에 가까운 핑계를 댔습니다.

아담과 이브 이후 최고의 핑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의 핑계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말재주가 없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아이’라고 부르면서

선지자의 사명 앞에서 머뭇거렸습니다.

핑계의 내용은 달라도 결국 “나는 할 수 없습니다”였습니다.

 

3.

돌아보면,

우리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살아왔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잘못한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았어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모세나 예레미야처럼 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댄 적은 꽤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도생활입니다.

 

지난 주일에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기도를 놓고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곤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기도할 시간은 언제나 있습니다.)

기도할 줄 몰라서 (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니까(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도 소용이 없어서 (과연 그럴까요?)…

 

노래 속의 핑계가

사랑을 떠나기 위한 핑계였다면,

우리에게는 기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런저런 핑계가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가지고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는 앞으로 3주간은

핑계는 뒤로 하고 우선 무릎 꿇고 기도합시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기쁘다”는

찬송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시편 86:3)

 

하나님,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9. 24 이-메일 목회 서신)

얼기설기

좋은 아침입니다.

 

1.

구약성경의 욥기는

처음과 끝, 그리고 중간이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처음에는 재산과 자식,

건강까지 잃은 욥의 신실한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동방의 의인답습니다.

 

마지막에는 긴 고난을 지나온 욥에게

하나님께서 충분히 보상해 주십니다.

재산을 되찾고 자녀들도 새로 얻습니다.

그야말로 전화위복입니다.

 

3장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바뀝니다.

1-2장의 의연했던 욥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할 만큼 무너집니다.

 

게다가 세 친구는

욥에게 거친 말을 쏟아냅니다.

욥이 잘못했기에

고난을 겪는 것이라고 몰아붙입니다.

 

욥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자신을 변호하고 친구들에게 맞서고,

하나님을 향해 탄식합니다.

 

2.

이처럼 욥기의

첫 두 장과 마지막 장은 쉽습니다.

내용이 명쾌합니다.

그런 욥을 닮고 싶다는 기도도 하게 됩니다.

 

문제는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운데 부분입니다.

친구들의 말은 그럴듯하고 논리도 반듯합니다.

반면, 욥의 말은 오락가락합니다.

처음에 만났던 동방의 의인 욥과도 사뭇 다릅니다.

 

그런데 욥기를 여러 번 읽다 보면,

처음과 끝의 잘 정돈된 이야기보다

시처럼 이어지는 가운데 부분에 자꾸 눈이 갑니다.

 

친구들과 다투고, 자신을 변호하고,

하나님께 따지고,

그러다가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욥,

– 그에게서 우리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3.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명쾌한 답을 얻기도 어렵습니다.

우리 삶이 원래 얼기설기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풀리지 않는 일은 남아 있고,

기대했던 일이 어긋나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도 생깁니다.

 

“왜 저입니까? Why me?”

“왜 이런 일이 저에게 닥쳤습니까?”

“제가 하나님 잘 믿으려고 했는데요?”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사는 질문들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그 모든 것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얼기설기 펼쳐진 우리 삶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서 눈을 하나님께 고정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꼭 붙들고

꿋꿋하게 삶의 파도를 헤쳐 나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하나님,

흔들림 없이 주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9. 17 이-메일 목회 서신)

세 가지 명령

좋은 아침입니다.

 

1.

지금은 하나님께 가신

구십이 넘으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웃음소리가 소녀 같으셨습니다.

 

권사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성경 말씀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였습니다.

돌아보니 권사님은 정말 그 말씀대로 사시다가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권사님뿐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이 좋아하는 성경 말씀입니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가정을 방문하면

거실에 많이 걸려 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2.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앞에 붙어 있는 표현이 어렵습니다:

“항상”

“쉬지말고”

“범사에(모든 일에)”

 

그러다 보니 목사 입장에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해 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하늘의 기쁨, 생명을 얻는 구원의 기쁨을

마음에 간직할 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24시간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앞의 두 가지를 실천했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결실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한다면,

모든 일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3.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때마다, 곳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다가옵니다.

 

요즘 저에게 이 말씀은

특별한 설명보다

제게 주시는 세 가지 명령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꼭 붙들고 살아갑니다.

 

명령이라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 세 가지 명령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놀랍게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겪는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생로병사(生老病死),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강력한 말씀의 무기를

우리에게 장착해 주셨습니다.

 

오늘만큼은

설명을 시도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 부치면서 토(吐)달지 말고,

그냥, 주님 말씀대로 살아봅시다:

항상 기뻐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하나님,

오늘 하루라도 말씀대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9. 10 이-메일 목회 서신)

닮은 꼴

좋은 아침입니다.

 

1.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마다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육신(incarnation)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최고의 겸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성육신은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모범이 됩니다.

 

모두 위로 올라가려는 세상이기에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움직임은

금세 눈에 띄고 세상은 주목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치지만,

속으로는 “대단한 걸”하면서 은근히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는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보여주신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전에 배운 요한복음의 일곱가지

“나는(에고 에이미)가 대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품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너머에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죽음에 매이지 않고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근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이기 위해서 행하신

기적, 또는 초월적인 선포는 우리의 몫이 아니지만,

우리가 따를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을

우리 신앙의 푯대(목표 goal)라고 했습니다.

 

2.

엊그제 동네를 산책하면서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여성분과 마주쳤습니다.

 

자연스럽게 “굿 모닝”하고 인사했더니

“굿 모닝”하고 인사해 주셨습니다.

작은 눈을 살짝 감으신 듯했고,

입에는 옅은 미소를 띠셨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옆에 있는 강아지를 보니

그 여성분의 인사하는 표정과

깜짝 놀랄 정도로 닮아 있었습니다.

제 마음까지 환하게 만드는 미소였습니다.

 

자칫 우리를 강아지에 비유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지만,

예수님을 닮는 것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면

“어쩌면 저 분은 예수님을 똑같이 닮았을까!”라고 말할 겁니다.

 

감히 우리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닮을 수는 없지만,

주인의 웃는 모습을 닮은 강아지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어떤 모습/표정/특색을 닮기 원합니다.

 

“참- 예수 믿는 분 같습니다”는 얘기를

듣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하나님,

어느 한 가지라도 예수님 닮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9. 3 이-메일 목회 서신)

아디아포라

좋은 아침입니다.

 

1.

가능하면 쉽게 설교하려고 하는데,

지난 몇 주간 헬라어가 자주 등장하면서

설교가 딱딱해지는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됩니다.

 

달리 설명하기가 어려워

고대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함께 공부하면서 조금 ‘유식해지는’ 면도 있습니다. ㅎㅎ

 

지난주에 소개한 헬라어 <아디아포라(adiaphora)>는

사실 꽤 중요한 용어입니다.

“어느 쪽도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things indifferent)”,

즉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는

가치중립적인 것들을 가리킵니다.

 

저는 설교에서

사과와 오렌지를 예로 들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사과이지만,

제가 좋아한다고 사과가 최고라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는 오렌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입니다.

 

로마서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런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 심각한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적인 이유로

시장에서 고기를 사 먹는 것조차 꺼리고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크신 하나님을 믿기에

세상의 거짓 신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라면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입장을 놓고

어느 한쪽이 무조건 옳고 다른 쪽이 그르다고

판단하지 말라고 지혜롭게 교훈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물론이고

세상의 역사에서도 <아디아포라>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쟁하고 갈등하고

심지어 싸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2.

우리 역시 <아디아포라>,

즉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필요가 없는

일상의 자잘한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치약을 밑에서부터 짜는 것과

중간에서 짜는 것을 두고 대판 말다툼을 벌였다는

신혼부부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돌아보면,

커다란 문제에는 쉽게 동의하면서도

오히려 사소하고 자잘한 것에 의견이 갈렸고,

그것 때문에 관계에 금이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리의 속이 그리 넓지 않아서

자잘한 것에 신경이 쓰이고, 그것이 자꾸 눈에 들어오고,

결국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디아포라>야말로 우리의 성숙함을 측정하는

아주 실제적인 척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소한 것에 대해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양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아디아포라>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사람에게도 칭찬받는

멋진 하루를 만들어 봅시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하나님,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8. 27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림자 자아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호머의 <오디세이>와 연결해서

우리가 배우는 로마서의 환대(hospitality)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디세이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낯선 손님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크세니아 Xenia>라고 했습니다.

 

<크세니아>는 오디세이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서 제우스의 법으로 여겨질 정도로

자연스러운 환대 방식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듯이,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 신이 낯선 사람으로

변장해서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일에 나눈 로마서 12장 13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의

“손님 대접”에는 “필록세니아(philoxenia)”라는 헬라어가 쓰였다고 했습니다.

 

그리스의 <크세니아>가 사회적인 규범이라면,

로마서의 <필록세니아>는

낯선 나그네를 친구처럼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기꺼이 베푸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실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는

언제나 세상의 기준보다 높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서 가능성을 보십니다.

 

2.

설교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찬송을 마치고 기도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낯선 손님을 짧게 언급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스스로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모습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융은

우리가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내면의 모습을 ‘그림자(shadow)’라고 불렀습니다.

어릴 때부터 겹겹이 쌓여 있는

억압된 분노, 질투, 절망, 미움 등등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낯선 나를 받아주어야 합니다.

환대해야 합니다. 그것도 나의 한 모습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한 부분이기에 일단 받아들인 후에

그것을 긍정적으로, 창의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나의 그림자, 나의 연약함, 나의 상처받은 자아,

그리고 감추고 싶은 모습들까지

내 안에 있는 낯선 손님(그림자 자아)을

내가 먼저 받아주고 환대하지 않으면,

밖에 있는 낯선 손님들도 진심으로 환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내 안의 부정적인 것들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데 쓰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좋은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싶은 모습까지도 아시고 품어 주십니다.

그림자 자아, 낯선 모습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통째로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 안에 숨겨진 낯선 자아까지도 품길 원합니다.

 

가슴에 두 손을 포개고

“아무개야, 사랑해.”라고 진심으로 말해봅시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하나님,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8. 20 이-메일 목회 서신)

사랑의 빚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 우리는

로마서 13장 8절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세상의 빚은 부담이 되고

절제와 통제가 필요하지만,

사랑의 빚은 무제한입니다.

끝없이 갚아야 하고

때로는 끝없이 빌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평생 갚아도 불가능한 사랑의 빚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예수님께 받은 사람을 갚아 나가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에게 베푸는 이웃 사랑입니다.

 

2.

여기서 이웃을 향한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인데,

실제로 우리는 이기적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가 많습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자녀 자신이 아니라

한때 부모가 꿈꾸던 모습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애(自己愛)를 자녀에게 적용해서

자기가 바라는 자녀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의 대상은 자녀가 아니라

아이 안에 비친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내 기대를 벗어나는 순간 사랑이 식는다면,

그것은 상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던 상대, ‘내 그림자’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3.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사랑은

프로이트가 말한 것과 다른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도 이유도 없는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롬 5:8).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사랑의 빚도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이어야 합니다.

 

내 의지나 바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필요한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랑의 속앓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도 필요합니다.

힘든 만큼 가치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그 사람 안에 비친 나를 사랑하는지

잠시 멈춰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 봅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10)

 

하나님,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참된 사랑의 빚을 지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8. 13 이-메일 목회 서신)

조심조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종종 우리의 삶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환경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변수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루하루 주어진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그런데

모든 어려움이 다 외부에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수와 경솔함 때문에

스스로 어려움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2.

며칠 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올해

이정후 선수와 함께 외야 수비를 책임지기 위해 영입된

헤리슨 베이더 선수 이야기였습니다.

 

부상으로 재활 중이던 그는

새벽에 술을 마신 뒤 스쿠터를 타다가

소방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대학 시절에도 같은 사고를 낸 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이언츠 구단은

베이더의 올해 남은 연봉과 내년 연봉까지,

천만 불이 넘는 금액을 동결했습니다.

계약 해지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베이더의 경솔함이

선수 인생을 흔드는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진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작은 부주의가 쌓이면

관계가 멀어지기도 하고,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생각보다 큰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3.

새달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피할 수 없는 일도 있고,

조심하면 피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요.

 

조심하면 피할 수 있는 일은

한 번 더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경솔하면 안 됩니다.

 

매사를

한 번 더 고민하고 살피면서

새달 8월(영어의 August는 ‘늘리다, 성장하다’라는 헬라어에서 옴)을

멋지게 보내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바라보면서 담대하게,

그러나 ‘조심조심’ 지혜롭게 살아갑시다.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잠언 4:26)

 

하나님,

우리가 가는 길을 지켜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8. 6 이-메일 목회 서신)

일상 속에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부부는

매일같이 동네나

가까운 학교 운동장을 걷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하다 보니

매일같이 마주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집 앞에서 정원을 가꾸거나 집안일을 하다가

“굿모닝” 하고 인사를 나누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희가 아주 사교적인 편은 아니어서

발길을 멈추고 안부를 묻거나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저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는 정도입니다.

 

2.

그런데 매일 만나던 분이

며칠 보이지 않으면 왠지 안부가 궁금합니다.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시던 할머니 두 분이 요즘 보이지 않으십니다.

마주치면 아주 반갑게 인사하시던 분들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아주머니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리트리버에게 양말을 신겨 산책하시는 분입니다.

 

강아지 발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주머니가 깔끔하셔서

강아지가 흙을 밟지 않도록 양말을 신기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매일같이 학교 운동장을

경보하듯 아주 빠르게 걸으시는 할머니도 계십니다.

 

할머니의 몸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뒤에서 보면 기우뚱기우뚱,

뛰시는 모습이 결코 멋지지 않은데,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뛰시는 할머니를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젊으셨을 때

경보 선수셨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3.

아침마다 산책하면서 마주치는

이웃들의 일상은 이처럼 제각각입니다.

그분들의 인생 이야기는 더욱 다양하겠지요.

 

멈춰 서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산책하는 모습, 뛰는 모습,

정원을 가꾸는 모습을 보면서

그분들의 삶을 나름대로 상상해 봅니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이웃들의 삶을 축복하고,

그 모습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아침 산책길입니다.

 

그런데,

매일 같은 시간에, 거의 같은 옷을 입고

산책하는 저희 부부를 보면서

다른 이웃들은 어떤 생각을 하실지도 궁금합니다.

밝고 좋은 생각을 해 주신다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굿모닝” 인사하며 스쳐 지나가는 이웃들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일상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시는 참빛 식구들께도

“좋은 아침”으로 인사드립니다.

 

멋지게 하루 시작합시다.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가 3:23)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Lam 3:23)

 

 

하나님,

새날 주셔서 고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7. 30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