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이러니(irony)는

반어(反語)로 불리는 문학 용어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날씨 한번 참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과 속뜻이 정반대일 때

이것을 언어적 아이러니(verbal irony)라고 합니다.

 

영화나 연극에서 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데

등장인물만 모른 채 전개되는  것을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라고 부릅니다.

 

상황이 예상과 전혀 다르게 펼쳐지는

상황적 아이러니(situational irony)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죄인들이 달리는 나무에 달리셨지만,

그 죽음이 오히려 죄인들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으니,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아이러니입니다.

 

2.

엊그제 읽은 기사 역시

아이러니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요즘 구직 시장에는

AI를 이용한 지원서(job applications)가 많답니다.

손쉽게 지원서를 만들 수 있으니

지원서의 숫자도 크게 늘었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돋보이려고 사용한 AI 기술이

지원서들의 형식, 어투와 내용을

비슷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답니다.

그러다 보니

AI로 작성한 지원서를

AI로 걸러내는 기업까지 등장했습니다.

 

AI를 사용해서 훌륭한 지원서를 준비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적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입니다.

 

기사 속에서 전문가들은

AI로 초안을 만들고,

실제 경험과 구체적인 수치,

그리고 지원자 개인만의 이야기가 포함된

‘나만의 개성 있는 지원서’를 작성하라고 조언했습니다.

 

3

첨단 기술을 이용해서 돋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결과적으로 서로 닮아가고 있습니다.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한 기술이

서로를 비슷비슷하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행여나 자신까지 잃어버리는 경우가 생길까

염려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남을 닮은 모습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조금 부족해도

참되고 솔직한 모습을 더 기뻐하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길 원하십니다.

 

겉모습보다

우리 안의 <참됨과 선함>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나만의  삶”을 살아봅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9)

 

하나님,

‘참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5. 28이-메일 목회 서신)

배움

좋은 아침입니다.

 

1.

5월은

미국 대학들의 졸업 시즌입니다.

 

방송에서는 유명인들이 어느 대학에서

졸업 연설을 했는지가 소개되고

훌륭한 연설은 두고두고 회자됩니다.

 

2년 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눈길을 끄는 분이 계셨습니다.

 

당시 105세의 나이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으신

버지니아 히스롭(Virginia Hislop)여사입니다.

 

히스롭 여사는

1936년에 스탠퍼드 교육학과에 입학했고

1940년에는 교육 대학원에 진학해서

모든 과정을 마치고 논문만 남겨둔 상태였습니다.

 

교육자 집안 출신이던 히스롭 여사도

학업을 마친 뒤

교육자로 살아가길 꿈꾸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1941년,

남자 친구가2차 세계 대전 중 군대에 소집되면서

갑작스럽게 결혼하느라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히스롭 여사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이 그랬듯이

자신의 커리어를 쫓기보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장학기금을 조성하고

지역 교육은 물론 교육 관련 법을 고치는 데 동참하면서

평생 교육을 향한 열정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손자가 스탠퍼드 대학에 할머니의 상황을 알렸고

혹시 졸업이 가능한지 문의한 것입니다.

 

히스롭 여사가 공부할 때는

교육 대학원 졸업을 위해서 논문이 필요했는데,

현재는 논문이 필수 요건에서 제외되면서

1940년대 이수한 학점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렇게 히스롭 여사는

2024년,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83년 만에 받은 학위였습니다.

 

히스롭 여사는

생각지도 못한 학위를 받게 되었다고 감격했습니다.

졸업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축하해 주었습니다.

105세에 석사 학위를 받으셨으니 말입니다.

 

2.

요즘은 너도나도 “100세 시대”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 동네 샌프란시스코 노인회에

100세가 넘으신 어르신이 몇 분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의학이 더 발달하고,

건강 관리에 힘을 쏟으면

100세 시대가 활짝 열릴 가능성도 큽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사느냐?”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105세에 그것도 83년 만에

석사 졸업장을 받으신 히스롭 여사가

더욱 대단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오늘 하루도

감사함으로, 그리고 의미 있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인생길 굽이굽이 마다

깜짝 놀랄 선물과 기쁨을 준비해 두시는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16:31)

 

하나님,

특별히 우리 교회 권사님들을 축복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5. 21이-메일 목회 서신)

극복

좋은 아침입니다.

 

1.

은행에 갔는데 창구에

앞을 보지 못하는 축구선수이자 코치

안토니 크레이그(Antonie Craig)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데 축구를 한다는 것이 신기해서

은행 직원에게 물어보니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집에 와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안토니 크레이그는 시각장애인 미국 대표팀 선수였고,

시각장애인 청소년 축구팀 코치였습니다.

장애인 단거리 육상선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유전성 망막 질환으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다가

2010년에는 거의 앞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육상팀에 도전해 메달을 땄고,

시각장애인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었습니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무슨 일이든 도전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이미 그것을 해낸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멘토로 삼아 도전하라고 말했습니다.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2.

세상에는 보통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우리에게 힘과 희망을 주시는 분들입니다.

 

시각장애인 축구 경기가 있다는 것을

처음 들었기에 검색해 보았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부터

장애인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었습니다.

 

2024년 프랑스 올림픽에서는

프랑스가 승부차기 끝에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선수들을 위해

축구공 안에는 방울이 들어 있습니다.

선수들은 상대에게 다가가며

“내가 간다”는 뜻의 스페인어“보이(Voy)”를 외칩니다.

경기 중에는 관중들도 조용해야 합니다.

선수들이 공 소리와 목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경기를 보니

선수들은 일반 선수들 못지않게

멋지게 공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을까요?

존경스러웠습니다.

 

3.

생각해 보면

우리도 저마다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숨기고 싶은 문제,

극복하기 어려운 것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평소에는 잊고 살다가도

문득 그 문제와 마주하면

좌절과 절망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 순간, 눈을 돌려보면

이미 그것을 극복한 분들이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데 공을 찰 생각을 했으니 말입니다.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절대 주저앉거나 물러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 짐이라 (고후12:9)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2Cor 12:9)

 

하나님,

극복할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5. 14이-메일 목회 서신)

샬롬

좋은 아침입니다.

 

1.

히브리어 <샬롬 shalom>을

우리말로 “평화(peace)”라고 번역하지만,

그 의미는 훨씬 넓고 깊습니다.

 

샬롬은,

개인의 몸과 마음의 건강, 관계, 생각, 하는 일 등

삶 전체가 부족함 없이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개인이 속한 공동체(세상)에

완전한 평화, 질서, 형통이 임해서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샬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하늘을 향하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개인의 삶과 세상 속에서 성취된 상태가 샬롬입니다.

 

성경의 <샬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갈 때

하나님의 선물, 샬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교회의 역사에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분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세상의 이치를

자연법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자연법을 준수할 때

구약의 샬롬과 같은 온전한 질서와 조화를

누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연법(Natural Law)”이라는 용어 그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깃든 질서입니다.

자연, 세상, 인간의 양심과 이성에

인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법을

설정해 놓으셨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모든 인류가 자연의 질서와 조화,

양심과 상식을 따르면 될 일입니다.

 

3.

요즘 세상이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막막하고 답답합니다.

 

구약의 사사시대처럼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나만 또는 우리 편만’ 옳은 것입니다.

 

샬롬이 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주셨는데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스스로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주범입니다: 소유욕, 권력욕, 명예욕.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행복할 수 있는

질서(자연법), 자원, 능력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것을 지키고 누리면 되는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샬롬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세상에 영원한 샬롬이 임했건만,

예수님을 향한 믿음도 힘을 쓰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고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새 날을 맞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우리 마음은 물론 세상에 “샬롬”이 임하길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로다 (시편 119:165)

Great peace have those who love your law;

nothing can make them stumble. (Ps 119:165)

 

하나님,

어지러운 세상에 주님의 샬롬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5. 7이-메일 목회 서신)

삐끗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 살펴보는 <성경 속 예배자>는

창세기 속 예배자로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는 야곱의 마지막 예배와

요셉이 드린 삶의 예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집트 제국에 노예로 팔려 간 요셉은

겉으로 보이게 하나님을 예배할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은 함께 간 친구가 있었지만,

요셉은 그 커다란 제국 이집트에 혼자였습니다.

신분도 노예였으니, 조금만 삐끗해도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삶의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에 대한 말씀을 읽다 보면,

형들에게 은 20세겔에 노예로 팔려 간 요셉이

바로의 경호 대장 보디발의 집을 맡은 총무,

감옥에 갇혀서는 죄수들의 일을 관할하는 총무,

그리고 이집트 제국을 책임지는 총리로

점점 확장되면서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음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주일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성경의 맥락을 기초로 요셉의 삶을 유추하면,

하루하루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매 순간 닥쳤고,

요셉이 하나님을 부르고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일들도 다반사였을 것입니다.

수없이 삐끗하고, 좌절하고, 힘겹게 견뎠을 것입니다.

 

그런 날들이 모여서

창세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한 삶”이 된 것입니다.

 

2.

우리 역시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면서 살아갑니다.

매우 중요하고 다급한 기도부터

하루를 하나님께 맡기는 소소한 기도까지

쉬지않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살아가지만,

우리도 자주 삐끗합니다.

인생의 크고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집니다.

 

기도했는데도 마음이 쉽게 흔들리고,

일은 기대만큼 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에 여러 가지 신앙의 고민이 생깁니다.

 

요셉의 일상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요셉도 이해되지 않는 시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은 깜깜한 어둠이었을 것입니다.

조급한 마음에 불평하고 한탄한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때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에게 임한 최고의 은혜는 “함께하심”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의 삐끗함을 수없이 경험하고,

스스로 시험에 들 때도 많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든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너무 쉽게 결론에 이르기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우여곡절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체험하기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곳저곳에서 삐끗할 수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도로, 삶의 예배로 오늘 하루를 시작합시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 39:23)

 

 

하나님,

우리가 삐끗할 우리 손을 잡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4 30 이-메일 목회 서신)

돌베개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는

야곱의 예배(제사)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난 후에

그를 해치려는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이 사는 하란에 갑니다.

한달여 걸리는 길고 험한 여정입니다.

 

어느 날 돌베개를 베고

노숙(路宿)하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땅에서 하늘로 닿은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오가고

하나님은 사닥다리 맨에 위에 서서

장차 야곱이 받을 축복과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28:15)

 

잠에서 깬 야곱은

베고 자던 돌베개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야곱이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답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기까지

절대 야곱을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이 가장 힘들 때 만난 벧엘의 하나님은

평생 잊지 못할 뿌리기억(root memory)이 되었을 것입니다.

 

2.

돌베개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읽으면

“그의 머리 아래 두었던 돌”입니다.

우리 말이 한결 간편하고 분명합니다.

 

야곱이 딱딱한 돌을 베고 잤습니다.

하필 왜 돌배개였을까요?

 

그의 인생이 풀리지 않는 딱딱함 그 자체였습니다.

막연한 여정에 지쳐서 아무 생각 없이 돌을 갖다가

베개로 삼고 잠을 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돌베개가

야곱이 하나님께 첫 번째로 예배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결코 예배에 쓰일 것 같지 않은 물건인데 말입니다.

 

3.

살다 보면,

무심코 곁에 두고 있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야곱의 돌베개처럼 평범한 일상의 도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통로가 된다면 깜짝 놀랄 일입니다.

 

매일의 삶에도 돌베개 같은 ‘일들’이 있습니다.

집안일과 빨래, 아이들 라이드와 식사 준비는 물론

교회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들이 예배로 쓰일 수 있다면,

일상의 수고가 하나님을 만나는 “벧엘’이 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유독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에 두고 잠들기에 너무나 딱딱하고 불편한 관계들입니다.

그런 관계마저 예배의 수단이 될 수 있다면,

모든 관계의 지평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돌베개,

매일 머리 밑에 두어야 하는 딱딱한 현실과

때로는 억지로 품고 사는 고단한 삶의 영역까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6)

 

하나님,

돌베개를 베고 있는 곳이

예배의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4 23 이-메일 목회 서신)

달나라 여행

좋은 아침입니다.

 

1.

만우절이던 4월 1일,

인간이 약 50여 년 만에 다시 달 근처까지 접근하는

아르테미스 2호 우주선이 발사되어

열흘 간의 임무를 마치고 지난 10일 지구로 귀환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먼 거리까지 간

유인 우주 비행이었습니다.

우리는 평소 달의 한쪽 면만 볼 수 있는데

이번에는 달의 뒷면을 가까이서 관측하였습니다.

 

달의 궤도를 도는 동안

우주인들이 보내준 지구의 사진은

정말 아름답고 경이로웠습니다.

파란 바다와 육지, 밤과 낮의 대조가 선명했습니다.

 

아르테미스 우주 계획은

50여 년 전 아폴로 프로젝트와 다릅니다.

그때는 달 착륙이 목표였다면,

이번에는 달에 머무를 가능성을 탐색하는 여정입니다.

 

앞으로 인류는 달에 기지를 세우고,

더 나아가 화성 탐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치 영화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인간의 상상력과 탐구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2.

저는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고요의 바다”라고 불리는 달 표면에 착륙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았습니다.

 

우주복을 입고 둥실둥실 걸으며

달 위를 걷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인간이 달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이고,

그의 쌍둥이 누이가 달의 여신으로 알려진 아르테미스입니다.

우주인들이 탐승한 우주선 오리온은

비극적으로 끝난 아르테미스의 연인입니다.ㅎㅎ

 

아폴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17명의 우주인들은

모두 백인 남성이었습니다.

이번 아르테미스 2호에는

백인 대장, 흑인 조종사, 캐나다 출신 우주인과

여성 엔지니어가 탑승했습니다.

 

NASA의 계획대로 2028년에

우주 기지 자재를 실은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다면

여성 우주인이 첫발을 내딛을 것 같습니다.

 

3.

아르테미스 2호가 지구로 돌아올 때,

대기권에 진입하는 순간이 매우 위험하답니다.

우주인들은 강한 열과 중력을 견뎌야 합니다.

 

세 개의 낙하산이 펼쳐지고

우주선이 바다 위에 안전하게 착수하는 장면을 보며

저절로 박수가 나왔습니다.

 

저는 이번 달 탐사를 보며

지구와 달의 공전과 자전, 중력과 질서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우주가 신비했습니다.

 

만약 달과 지구의 운행이 들쑥날쑥하다면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주선을 띄우는 것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로 우주탐사가 가능해졌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지금도 운행하시는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시편 8:3-4)

 

하나님,

아름답고 신비한 세상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4 16 이-메일 목회 서신)

들꽃

2026년4월 5일 주일: 부활을 사는 것

https://www.youtube.com/watch?v=LKSYYMPVy10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동네 주택가에서 조금 벗어나면

시에서 조성해 놓은 작은 공원이 있습니다.

산책로를 제외하면

잡초들로 방치되다시피 하던 곳이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서 시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묘목을 갖다 심었습니다.

묘목 아래 사람들의 명패가 있는 것을 보니,

기부를 받아 수목 사업을 한 것 같습니다.

 

그전에도 일년에 한두 번 작은 트랙터를 동원해서

잡초들을 제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2년 전, 잡초를 모두 없애더니

작은 나무 조각(우드칩)으로 그 넓은 공터를 덮었습니다.

 

그렇게 일 년 정도는 묘목만 있고

잡초는 거의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잡초가 나무 조각을 뚫고 나왔습니다.

예전처럼 들풀이 무성해졌습니다.

 

2.

매일 산책하는 곳이니

시가 관리하기 전의 모습,

관리를 시작한 모습,

그리고 지금 다시 원래로 돌아간 모습까지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잡초라고 불리는

들풀의 강인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들풀 사이로 노랗고 하얀 들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잠깐 피고 사라질 들꽃입니다.

누군가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저  잡초일 뿐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관심을 갖고 바라보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두껍게 덮어놓은 나뭇가지를 뚫고 나온

잡초들이 벌이는 승리의 향연 같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잠깐 있다가 사라질 들풀도

기르시고 입히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에 핀 꽃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물며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냐는 말씀입니다.

 

  1. S. 엘리엇은 <황무지, 1922>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라고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4월의 봄은 한 겨울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해 4월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상은 패권 경쟁에 들어섰고,

이미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니

우리 서민의 삶도 녹록치 않습니다.

 

이런 때일 수록

두껍게 덮인 나무 조각을 뚫고 올라와

예쁜 꽃을 피우는 들풀의 강인함을 닮고 싶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생명력입니다.

 

들풀까지 입히시고 기르시는

우리 하나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소망이고 확신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마 6:30)

 

하나님,

들풀처럼 살아남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4 9 이-메일 목회 서신)

힌네니

좋은 아침입니다.

 

1.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모리아 산의 사건을,

아브라함의 입장과 이삭의 입장에서

두 주에 걸쳐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상식과 윤리, 도덕을 존중하시는 하나님도

발견하기 힘든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부조리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두말없이 순종했습니다.

 

지난주에는

노년의 아브라함이 하나님 명령을 따르기 위해,

10대에 접어든 아들 이삭의 협조가

꼭 필요했음을 나눴습니다.

 

이삭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예수님의 모습도 발견했습니다.

 

2.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설교를 마친 후,

제 마음에 계속 머무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

그리고 칼을 들고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이 대답한 한 마디 히브리어  <힌네니>였습니다.

 

히브리어 <힌네니>는

“보시옵소서. 내가 여기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습니다” 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모세, 사무엘, 이사야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에 <힌네니>라고 대답했습니다.

 

3.

<힌네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Here I am)”는

하나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언어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나’라는 자아도 내려놓았습니다.

어떤 주장이나 생각, 제안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무장해제하고

드리는 고백이 바로 <힌네니>입니다.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힌네니>의 정신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 뜻에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힌네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가길 원합니다.

 

내 생각이나 세상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고난 주간,

아니 오늘 하루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여 만일 만하시거든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Here I am, Lord)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4 2 이-메일 목회 서신)

두려움과 떨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 뿐인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인신제사를 금지하는 성경 전체의 흐름,

오늘날의 상식과 윤리로 보아도

이해하기 힘든 명령입니다.

 

그런데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두말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멈추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물로 드릴 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기서 “여호와 이레(예비하시는 하나님)”가 나왔습니다.

 

2.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 Fear and Trembling>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기사(knight of faith)”로 부르면서,

그의 믿음은 보편적인 윤리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상식이나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개별자”의 결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매우 고유한 사명입니다.

이를 보편화하여 모든 신앙인에게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도

쉽게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을 근거로 하나님을 시험하시는 분으로 규정하면,

신앙이 “두려움과 떨림”에 매일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잘못 형성될 가능성도 큽니다.

 

이처럼 키에르케고르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확대하기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특별한 믿음의 사건으로

신중하게 이해할 것을 제안합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까요?

 

첫째, 이 말씀을 서둘러 결론 내리지 말고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야 합니다.

모리아 산을 향하는 두렵고 떨렸을 여정,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이삭을 묶고(아케다, 결박)

칼을 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성경 본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두렵고 떨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아브라함 믿음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시험을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설령, 우리에게 시험과 시련을 주셔도

아브라함에서 보듯이 분명한 목적을 이루십니다.

 

셋째, 믿음의 힘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상식과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경험하게 합니다.

신비의 세계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을 이루기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한 걸음 더 뛰어오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하나님,

온전한 믿음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3 26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