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헤어짐

처음 담임 목회를 인디애나주의 블루밍턴이라는 학원촌에서 시작했습니다. 교인 대부분이 유학생이었습니다. 한 학년이 끝나고 졸업 시즌인 5월이 되면 수십 명의 교인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동안 정들었던 교인들을 떠나 보내기가 쉽지 않아서 예배 시간마다 감정을 추슬러야 했습니다. “울보 목사”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방학 동안 남아 있는 교인들과 관심사 소그룹을 만들어서 운동, 요리, 성경통독, 유적지 탐사를 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새 학기가 되면 영락없이 새로운 교인들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외향적이지 못한 제 성격 탓에 새로운 교인들과 다시 정이 드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별의 아쉬움이 새로운 만남으로 치유가 되었지만 매년 반복되는 이별이 쉽지 않았습니다.

 

14년 전 샌프란시스코로 목회지를 옮기면서, 이민 교회이니 헤어짐 없이 교인들과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정주목회라고 할까요! 그런데 이민 목회 역시 이런저런 일들로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교인들의 이동이 생각보다 잦았습니다. 목사인 저의 부족함이 컸지만, 교회를 떠나는 이유도 다양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 이별이 반복되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지금까지 목회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가수가 노래했듯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어쩌면 운명입니다.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삶을 나누는 만남은 그 끝이 어떠하든지 축복이고 모든 만남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반면, 이별은 언제나 아쉽습니다. 함께 있을 때, 더 잘해 주어야 했습니다. 헤어짐 없이 함께 할 수 있기를 서로 노력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서로 축복하면서 헤어질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은혜입니다.

 

2020년대를 여는 경자년(庚子年) 새해를 맞았습니다. 올해는 쥐띠 해입니다. 쥐띠에 “아들 자(子)”를 쓰는 것은 서생원(鼠生員) 쥐님들의 빠른 번식을 강조한답니다. 새해에는 우리 삶이 번창하길 원합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이민 생할에 열매가 있고, 약하고 가난한 이웃들까지 허리 펴고 살 수 있는 정의로운 세상이 되길 기도합니다.

 

새해에도 만남과 헤어짐을 끊임없이 경험할 것입니다. 마음 설레는 만남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외롭고 힘든 이민 생활에서 잠시라도 만나서 회포를 풀고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만남이 소중하기에 옷깃을 스치는 만남도 귀하게 여기고 눈인사라도 나누기 원합니다. 세상의 만남과 차원이 다른, 하나님과의 영원한 만남도 지속해야 합니다. 매일 아침, 삶의 고비마다 하나님과 만남이 풍성하길 원합니다. 아무쪼록 헤어짐이 필연적이라면 좋은 이별이길 바랍니다.

 

2006년 6월부터 13년 6개월 동안 매월 마지막 주에 한국일보에 종교 칼럼을 기고했습니다. 번호를 매기면서 칼럼을 저장했더니 오늘이 161번째입니다. 첫 번째 칼럼 제목이 “인연(因緣)”이었는데,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인연이 꽤 길게 이어졌습니다. 제 글을 빼놓지 않고 읽으신다면서 격려해 주시던 분들, 13년 전 사진을 교체하지 않았더니 실물을 보면서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시던 분들, 전화로 칼럼에 대한 내용을 토대로 상담을 요청하신 분들이 종종 계셨습니다. 종교 칼럼이 맺어준 인연이었기에 더욱 특별한 만남이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칼럼입니다. 그동안 썼던 글의 제목을 훑어보았더니 샌프란시스코에서 제 목회와 칼럼이 맥을 같이 했습니다. 지난 십여 년 세상의 변화도 제목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칼럼을 쓴지 십 년이 지나면서 더 훌륭하신 필진께 이 공간을 물려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사진을 교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이 푹- 들어서인지 쉽게 펜을 놓지 못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칼럼을 보내려니 더 좋은 글로 독자들을 만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생기지만,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 우리 인생길에서 또 하나의 헤어짐을 마주할 시간입니다. 십 년 이상 글을 쓸 기회를 주신 한국일보와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20년 1월 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믿음의 길

저는 종종 기도의 반대말은 염려라고 말합니다. 염려하고 있다면 기도하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염려가 밀려오면 기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려와 기도는 서로 상극입니다. 어디 기도만 그럴까요? 믿음 자체도 염려와 반대입니다.

 

저도 염려가 많은 편에 속합니다. 아마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염려를 달고 살았을 것 같습니다. 염려와 근심, 불안으로 인해서 우울증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서 염려와 불안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염려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말없이 기도하는 침묵 기도가 마음을 잡는데 무척 도움을 줍니다.

 

4년 전쯤에 아내와 제가 한꺼번에 대장 내시경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건강검진을 받으니 검사 시기가 겹친 것입니다. 정기검진인데도 스트레스가 컸습니다. 행여나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 큰 병은 없겠지, 대장 내시경도 잘못하면 의료사고가 난다는데 마취에서 잘 깨어나겠지 등등 쓸데없는 염려가 꼬리를 물더니 검사 날짜가 다가오면서 잠까지 설쳤습니다. 저희 부부에게 아무 문제가 없어서 10년 후에 다시 오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감사하고 홀가분한 마음도 잠시, 목사인 저의 믿음 없음을 한참 동안 자책했습니다. 솔직히 창피했습니다.

 

교회를 향한 염려도 항상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지금처럼 평안하고 가족같은 교회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기대 반 염려 반입니다. 연로하신 권사님들께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시면 안 되는데, 교회를 지키는 젊은 집사님들이 직장을 옮겨서 교회를 떠나면 어떻게 하지, 저의 부족함이 교회에 걸림돌은 되지 않을까 등등 염려가 밀려옵니다. 믿음을 외치는 목사에게 염려가 상존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입니다.

 

물론 염려하는 것들이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대부분의 염려가 염려에서 끝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염려하는 우리네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강한 것 같아도 한없이 약한 질그릇이라는 반증입니다.

 

과연 믿음이 무엇일까? 매주 예배에서 함께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우리가 믿는 삼위 하나님과 신앙공동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잘 요약해 주지만, 믿음이 머리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알고 있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으니 확신이 부족합니다. 손과 발 즉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허공을 맴돕니다. 그 자리를 염려와 불안이 차지하면 우리의 믿음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곤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조들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더욱 귀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이유도 이제야 감이 조금 잡힙니다.

 

믿음의 반대말이 염려라면, 믿음의 비슷한 말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완하고 완성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는 바울의 고백이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목사이면서도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염려와 불안으로 밤잠을 설칠 때도 밤의 달이 상치 못하도록 지켜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과 은혜로 무장했다고 염려와 불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우리의 실존이 그만큼 힘겹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부르면서 믿음의 길을 가야 할 이유입니다.

 

올해도 예외 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니 인생의 구비 구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인생길 골목 골목에 하나님께서 미리 가셔서 은혜의 깃발을 꽂아 놓으셨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말씀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어진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힘들 때는 기도하고, 좋을 때는 감사하며 찬양하고, 속절없이 무너질 때는 주의 은혜를 구하며 걸어가는 믿음의 길입니다. (2019년 11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세상속의 기독교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임하게 하자.” 1974년에 열렸던 엑스폴로74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최대 백만이 넘는 인파가 여의도 광장에 모였습니다. 만 명이 철야기도를 했고, 정부는 집회 기간 동안 여의도 일대에 통행 금지를 해제하였습니다. 체신부에서는 기념 우표를 발행하는 등 기독교가 주관한 전도 부흥 집회가 온 국민의 관심과 국가의 지원 속에 말 그대로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나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세속화로 불리는 세상의 가치관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세상에서 서서히 잊혀가는 후기 기독교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이미 60년대부터 기독교가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는 다원주의 사회에 돌입했습니다. 대학촌에서 목회할 때, 캠퍼스에서 종교활동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행여나 캠퍼스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피켓을 들고 외친다면 누군가 고발해서 금세 경찰이 출동할 기세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종종 기독교가 세상을 주도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울의 한 대형 교회는 공공도로 밑에 성전을 건축했다가 최근 대법원으로부터 불법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이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교회가 공공의 영역을 침범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단 총회가 부자 세습을 인정해주기로 결의한 것을 일반 언론까지 앞다투어 보도하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일반 언론이 종교 문제 다루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교회나 종교를 일종의 성역으로 대우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특집 보도까지 만들어서 교회의 잘못된 관행을 세상에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변화한 세상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동화 속의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은 모습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서 손가락질하고 뒤로 실소를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기독교는 세상 속에서 신뢰를 잃을 것입니다. 세상을 올바로 읽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욕심까지 더한다면 교회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할 것입니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세상을 탓할 것도 아니고 무작정 세상을 등질 것도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는, 이의 없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이 제공하는 문명의 이기와 삶의 방식을 따라 삽니다. 스마트 폰을 사용하고, 자율 자동차가 나온다면 편하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신앙의 관점에서 세상의 것들을 변혁, 또는 용도 변경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문화 안에서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창조성이 요청됩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적합한 복음을 제시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은 세상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최근 유행인 인공지능(AI)이나 드론이 폭력과 테러에 사용된다면 당연히 거부해야 합니다. 악에 저항하고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믿으면 교회 안에서야 편할 수 있지만,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서 외면당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가 요청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죄 많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도 구합니다. 개인의 신앙을 넘어서 우리의 신앙을 공적인 영역까지 확대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부탁을 마음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장 16절).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임하게 하자고 외쳤던 45년 전의 구호가 현실이 되는 ‘새로운’ 부흥을 소망합니다. (2019년 10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그레타 툰베리

그레타 툰베리는 16세 스웨덴 소녀입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특정 상황에 몰두해서 하고 싶은 말과 행동에 집착하는 일종의 자폐증입니다. 툰베리는 작년 8월부터 스웨덴 의회 앞에서 파리기후협약의 약속대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라는 푯말을 들고 학교도 결석한 채 11월까지 1인시위를 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런던과 파리를 비롯한 유럽 전역을 돌면서 정치인들과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서 토론하고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노르웨이 의회의 추천으로 올해 노벨 평화상 후보까지 올랐고, 타임지가 선정한 2019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의 인사에 들었습니다.

 

툰베리는 “환경을 위한 학교 파업”이라는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온난화로 지구가 파국을 향하고 있으니 공부보다 일단 지구 온난화를 막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학교에서 편하게 공부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툰베리의 뜻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서 올 3월부터 10대 학생들의 환경을 위한 학업중단 선언이 이어졌습니다. 어른들의 게으른 대처에 분노한 10대들이 직접 나선 것입니다.

 

지난 9월 20일에는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서 지구를 살리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뉴욕 타임즈 보도로는 전 세계적으로 4백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베이 지역에서도 각 지역 또는 학교별로 시위를 벌였고, 샌프란시스코에만 4만여 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됩니다.

 

거리로 나온 학생들은 기존 정치인들의 안일한 대처에 분노했습니다. 장차 자신들이 살아갈 지구를 안전하게 물려 달라고 외쳤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방탄소년단(BTS)을 인용해서 “지구가 BTS보다 더 뜨겁다”는 푯말을 들었습니다. 하루속히 온실가스를 줄이라는 요청입니다.

 

실제로 지구의 온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 내립니다. 세계 곳곳에 이상 기온 현상이 발생합니다. 겨울에는 한파가, 여름에는 폭염이 밀어닥칩니다. 한쪽에서는 홍수가 나고 어떤 지역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립니다. 북극곰이 한쪽 남은 빙하 위에 앉아 있는 사진이나, 심지어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사진이 지구 온난화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전문가들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석탄이나 석유같은 화석 연료와 산업화에 따른 온실가스 때문으로 봅니다. 대기권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온실처럼 머무는 가스들로 인해서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온도가 섭씨 2도 상승하면 북극의 빙하 28%가 녹는 답니다. 해수면의 상승으로 물에 잠기는 도시가 생길 수 있고 생태계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합니다. 지금 같은 속도라면 2050년에 2도 상승이 예측되고 그 이상으로 기온이 상승한다면 지구에 큰 재앙이 찾아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합니다. 2도의 기온 상승이 실감나지 않을 때, 우리 몸의 체온이 2도 올라간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생각하면 지구 체온 2도의 심각성이 확실하게 다가옵니다.

 

물론 지구 온난화를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그 가운데 속해서 미국은 2017년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했습니다. 온난화는 지구가 겪어온 일상적인 과정이라는 입장인데, 그동안의 연구와 기온 상승 속도를 고려하면 결코 낙관할 수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장차 지구에서 살아야 할 10대들이 나섰을까요!

 

또한, 지구를 지키는 것은 기독교인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들을 지구를 지키는 청지기로 임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문명의 발달과 안이한 관리로 아름다운 지구가 망가진다면 그 책임은 인류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지구 살리기에 나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제 기성세대와 특별히 정책을 입안하는 지도자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온 10대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10대 청소년들을 학교로 돌려보내고 그들이 쾌적한 지구에서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전 세계가 힘을 합쳐 온실가스 배출을 확실히 줄여야 합니다. 적어도 파리기후협약에서 약속한 대로 섭씨 2도 이하의 기온 상승만은 꼭 지켜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손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의 문이 곧 닫힐 것입니다”는 툰베리의 외침에 귀 기울 때입니다.(2019년 9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 칼럼)

만남의 기쁨

지난주에는 19년 전 인디애나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함께 교회를 세웠던 옛 교인들을 만나기 위해 시카고에 다녀왔습니다. 시카고 근교에 정착한 두 분 집사님의 가정이 호스트가 되었고, 시카고, 인디애나, 위스콘신, 오하이오에 정착한 동문들의 가정이 참석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이번 모임을 주선한 집사님 가정과 우리 부부가 참석했습니다.

 

지난 목요일, 아내와 저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카고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이 쉽지 않았습니다. 공항에 무슨 사고가 있었는지 경찰견이 모든 승객의 짐과 몸을 수색하더니 비행기도 지연되었습니다. 시카고에 도착해서도 아침에 내린 폭우로 비행장이 만원이 되어서 비행기 안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렵게 도착했지만, 고등학교 동창의 라이드를 받아서 모임 장소에 가니 모두 반갑게 맞이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가장 커다란 차이는 아이들이 훌쩍 큰 것입니다. 주일 학생이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키가 6피트가 넘는 남자아이가 저를 안아줍니다.

 

함께 나눌 성경 공부도 준비해 갔는데, 그동안의 근황을 나누고 업데이트하느라 말씀 전할 틈이 없습니다. 말씀도 중요하지만,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이 더 다급하고 흥미진진했습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근사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틈을 내서 말씀을 전하지만 자연스레 각자의 삶과 연결되어 또다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저녁 늦게 모임을 마치고 다음날을 기약했습니다.

 

시차를 고려해서 느지막하게 두 번째 날을 시작했습니다. 인디애나와 위스콘신에서 두 가정이 새롭게 참가했습니다. 새로운 가정이 올 때마다 모임을 접고 그들의 근황을 듣고 마주 앉아 그동안의 삶을 주고받습니다. 요즘은 카톡과 SNS가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같은 장소에서 모임을 하는 것에 견줄 수 없습니다. 웃음꽃이 핍니다. 아이들이 크니 모임을 갖기가 한결 편해졌습니다.

 

대부분의 재상봉(reunion)모임이 그렇듯이 우리들도 그때 그 시절을 회고했습니다. 함께 교회를 세웠던 일들, 만났던 분들, 함께 나눴던 비전과 잊지 못할 사건들을 추억하면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인디애나 교회는 유학생들이 주축이었습니다. 대부분 형편이 풍족하지 않고 앞날이 불확실한 채 학업에 전념하던 때였습니다. 어려울 때 만났던 신앙의 동지들이기에 더욱 각별했습니다.

 

지금은 사는 곳이나 하는 일이 다르지만,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니 다시 한 마음이 됩니다. 물론, 얼굴이나 모습에 조금씩 연륜이 느껴집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연장자인 저의 외모가 가장 변했습니다. 그래도 “목사님과 사모님,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으세요”라고 말해주니 기분이 좋습니다. 40대 초반으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는 함께 찬양하고, 말씀을 나누고, 어떻게 참았는지 꼭꼭 싸매어 두었던 신앙과 인생의 질문을 풀어놓습니다. 쉽게 꺼내 놓기 힘든 얘기도 나눕니다. 그래서 옛 친구가 좋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 제목을 나누고 그 시절 주일예배 마지막에 불렀던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라는 찬양을 손을 잡고 불렀습니다. 모두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습니다.

 

재상봉 모임의 의미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흘렀어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서 첫사랑을 회복하고 흐트러진 삶을 다시 조율(reset)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거만 생각하면 안 되기에 그때 배웠던 신앙을 “씨앗” 삼아서 현재와 미래의 삶을 설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근사하게 살아가길 부탁했습니다.

 

2박3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만남의 기쁨을 만끽하고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시작된 만남이었기에 우리의 재상봉 모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망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만남의 기쁨 역시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먼 훗날, 현재 제가 섬기는 교회의 교우들과도 재상봉 모임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날을 위해서 더욱더 진실하게 목회해야겠습니다. (2019년 7월 25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온순한 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양극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흑백논리가 설득력을 갖고, 흑이든 백이든 한쪽을 취할 것을 강요합니다. 중간에 있으면 회색지대라면서 좌우 양쪽에서 협공을 시작하니 어느 한쪽에 속하는 것이 도리어 마음 편합니다. 그러다 보니 조화, 협력, 상생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양쪽이 혈안이 되어서 싸웁니다. 함께 뜻을 합쳐야 할 공동선(共同善)의 이슈를 갖고도 상대방을 깎아내립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와 태도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정치인들이 양극화를 주도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의견을 소신껏 주장하는 것을 뒤로 한 채 상대방을 깎아내리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무조건 반대하고 보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외도를 해도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이라는 말까지 생겼을까요! 이 말속에는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들어있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양극화 현상은 더욱 깊어 갑니다.

 

정치인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끔 한국에서 방영되는 예능프로그램을 시청하다 보면, 예전에는 방송에서 금지될 법한 용어나 말투가 난무합니다. 조용하고 온화하게 얘기하는 사람들의 말은 편집되고, 인상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거친 표현을 사용하는 출연자의 말이 자막과 함께 전파를 탑니다. 그들이 쏟아내는 말이 남을 비난하거나 상황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그런 식으로 방송 분량을 확보합니다.

 

물론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구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아야 합니다. 그래도 방송에서 무조건 상대방을 깎아내리거나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거친 표현을 마다치 않는 인기인들을 보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시청자들도 이런 식의 방송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아 씁쓸할 때도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알려주는 책에서 “급소를 찌르는 말을 삼가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치닫는 극단적인 말은 끝까지 마음에 품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급소를 찌르는 말로 상대방을 무너뜨렸다고 통쾌하게 여길 것도 아닙니다. 부메랑 법칙을 기억합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격언도 기억합니다. 자칫 자신도 똑같이 당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잠언에서는 온순한 혀를 생명 나무라고 했습니다. 생명 나무라는 표현은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인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그리고 잠언에만 등장합니다. “온순한”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마르페>는 “치료하다<라파>”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여호와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이처럼 온순한 말이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살립니다. 당시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들려도 온순한 말속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성경은 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심으로 폭풍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니 제자들이 각 민족의 말로 복음을 전하고 바벨탑 이래 갈라진 언어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말에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 말한 것을 현실로 만드는 성취, 다양한 사람까지 하나가 되게 하는 조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거친 말을 사용하고,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면서 자기주장을 펼칩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인상 찌푸리는 말도 서슴없이 사용합니다. 말로 내 편과 네 편을 가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점점 양편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 세상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의 인기를 끌지 못해도 아름답고 순화된 언어를 사용합니다. 사려 깊은 말을 통해서 상대방을 배려합니다. 온순한 혀가 생명 나무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언어 사용이 세상을 밝고 맑게 만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2019년 6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모비딕

1956년 그레고리 펙이 주연했던 영화 <모비 딕>을 인터넷으로 보았습니다. 허먼 멜빌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1820년 태평양 한가운데서 고래잡이 어선이 흰 향유고래에 받쳐서 침몰한 일이 있었는데, 그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허먼 멜빌이 우리 말로 “백경(白鯨)”이라고도 불리는 장편 소설 <모비 딕>을 1851년에 출판했습니다. 얼핏 읽으면 고래에 대한 논문처럼 보일 만큼 내용이 생소해서 세간의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대서사시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명작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유명한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도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모비 딕>은 인물과 주제에서 성경과 밀접합니다. 주인공이자 고래잡이 어선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합은 구약성경의 악명높은 아합왕의 이름입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내레이터 이슈마엘은 아브라함과 그의 종 하갈 사이에서 낳은 이스마엘에서 왔습니다. 훗날 이스마엘이 어머니 하갈과 함께 광야로 쫓겨나고 하나님께서 모녀를 살려 주시는데, 소설 속의 이슈마엘도 피쿼드호의 유일한 생존자로 사건을 세상에 알립니다. 피쿼드호가 침몰할 것을 예고한 사람은 아합왕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 엘리야와 동명이인입니다. 이 밖에도 고래잡이 어선 피쿼드호의 주인 이름이 구약성경 욥의 친구 빌닷입니다.

 

소설에 구약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신비로울 정도로 힘이 센 흰고래가 욥기의 레비아단을 연상시키고, 한 편에서는 선지자 요나를 삼켰던 바다의 큰 물고기를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모비 딕> 초반부에 메이플이라는 신부가 요나서를 갖고 열정적으로 설교하는데 요나서의 큰 물고기를 아예 고래라고 지칭합니다.

 

물론 성경의 인물과 주제만 소설에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 종교를 믿는 선원들, 인종과 민족이 다른 선원들 등 나이와 출신성분이 다양합니다. 고래잡이 어선인 피쿼드호가 바람 한 점 없는 적도에 멈춘 적이 있는데, 선원들 간의 경쟁과 갈등, 권력욕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다 보니 작품에 대한 감상평이 극과 극을 달리는 등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향유고래에 대한 견해입니다. 어떤 이들은 향유고래를 악의 상징으로 보았고 선장 에이합을 악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반대로 선장을 구약시대 아합처럼 악한 인물로, 흰색의 향유고래를 선으로 보면서 향유고래가 에이합 선장은 물론 피쿼드호를 침몰시킨 것을 선의 승리로 봅니다.

 

저는 <모비 딕> 영화를 보고 소설을 떠올리면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연약함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거대한 대양 한가운데 떠 있는 피쿼드호를 연상케 합니다. 몸에 여러 개의 창이 박혀 있지만 힘차게 대양을 헤엄치는   향유고래의 모습 속에서 자연의 위대함을 봅니다. 저는 소설 속의 향유고래가 선을 넘어서 창조주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합은 자신의 한쪽 발을 앗아간 고래를 향한 복수심에 불타 있습니다. 처음부터 고래 사냥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고래를 찾아서 복수하려는 생각뿐입니다. 급기야 자신이 찾던 고래를 만났지만 고래등에 줄이 걸려서 생명을 잃습니다. 고래잡이 어선도 고래에 받혀서 침몰합니다. 선장 한 사람의 지나친 집착이 낳은 참사입니다.

 

누구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집요하고 통쾌한 복수를 생각합니다.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는 구약의 율법에는 맞을 수 있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허먼 멜빌이 그의 소설에서 구약의 인물들만 등장시킨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우연히 옛날 영화 <모비 딕>을 보면서 신앙과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나친 집착이나 욕심은 금물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똑같이 갚아주겠다는 생각은 도리어 자신에게 해를 입힐 가능성이 큽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보다 더 큰 교만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신 분복(分福)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넉넉한 마음으로 살기 원합니다.(2019년 5월 2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부활절 그 이후

신약성경 요한복음은 21장으로 끝나지만, 마지막 21장은 에필로그와 같고 20장 마지막 절에서 요한복음이 마무리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20장 마지막 절(3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 )( )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공부 시간에 괄호 안에 들어갈 두 글자를 맞추는 퀴즈를 내면 대부분 “구원” “은혜” “사랑” “능력” 등으로 답하십니다. 그런데 정답은 “생명”입니다.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리적인 용어들이 아니라 괄호 안에 “생명”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이라고 하신 것과 예수님을 믿었을 때 생명이 임한다는 것은 지난주에 맞은 부활절과 관련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가는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인데, 예수님은 죄의 값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설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면서 많은 기적을 행한 특이한 인물, 또는 하나님 말씀을 잘 풀어낸 위대한 유대랍비 정도로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악한 세력을 이기고 “승리자 그리스도”로 다시 사셨습니다. 거기서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이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큰일을 하실 줄 알고 미리부터 인사청탁을 했던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증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스>에서 순교자에 해당하는 영어 martyr가 파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보고 현장을 떠났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3년을 회고하면서 요한복음을 저술했고, 그 말미에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을 얻는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부활 이후에 일어난 변화들입니다.

 

부활은 생명입니다. 기독교 자체가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찾아왔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같은 고백을 하면서 사순절을 보냈고 지난주에 부활 주일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부활 이후의 삶입니다. 연중행사로 부활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은혜와 능력, 아니 부활에 깃든 생명을 부활 이후에도 줄곧 경험해야 합니다.

 

부활 이후의 삶을 생각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역과 명령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시고 통치하는 세상입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공의, 약한 자들이 공평하게 대우받는 정의,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생명을 전하고 행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약속한 성령이 임하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길 부탁하셨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힘을 다해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사순절과 고난 주간을 지내면서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특별기도회를 가졌고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부활절 이후의 기도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기다리면서 기도했던 제자들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절 이후는 사순절 동안 행했던 신앙 훈련을 각자의 성품과 삶에 내면화하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이 그랬듯이 세상 속에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2019년 4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아몬드 나무

성경에는 수많은 식물이 등장합니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을 산다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나무부터 들에 피는 백합화, 가시덤불과 엉겅퀴까지 식물도감에 버금갈 정도입니다. 식물들은 씨가 뿌려지는 곳에서 평생 자리를 지키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누군가 옮겨 심지 않으면, 심지어 바위틈이나 계단 사이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지탱하면서 꽃을 피웁니다. 조변석개로 변하는 인간의 마음과 한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부평초와 같은 인간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그런데 식물은 언제나 배경화면이지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 속의 식물 역시 비유에 동원되거나,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로 사용될 뿐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몬드 나무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아몬드 나무를 살구나무라고 번역했는데 일종의 오역입니다. 영어 성경은 거의 아몬드 나무로 번역했습니다.

 

성경의 살구나무는 사과나무에 가깝고,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샤케드>는 아몬드 나무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감복숭아 나무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는데 우리가 미국에 살아서인지 아몬드 나무보다 훨씬 생소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몬드 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케드> 입니다. <샤케드>가 주목하고 지켜본다는 동사 <샤카드>와 비슷하고 때로는 발음이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아몬드 나무가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던 고라 일당이 땅이 갈라지면서 죽습니다. 그 사건으로 백성들이 모세에게 책임을 묻자 하나님께서 열두지파에서 각각 지팡이를 가져와서 언약궤 앞에 놓도록 하셨습니다. 이튿날 보니, 열두 지파의 지팡이 가운데서 아론의 지팡이에 아몬드꽃과 열매가 맺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자신이 세운 제사장으로 주목하고 계신다는 표시였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소에는 언제나 등불을 켜 놓았습니다. 등불을 받치는 등대 발판에 아몬드꽃 무늬를 새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예배하는 주의 백성들을 주목하고 지켜 보신다는 뜻으로 아몬드꽃 무늬를 새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그에게 두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몬드 나무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시니 예레미야가 아몬드 가지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몬드 나무 <샤케드>와 지켜본다는 <샤카드>를 동시에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성취될 것을 강조한 본문입니다. 이처럼 아몬드 나무 <샤케드>는 이름 때문에 성경의 중요한 대목에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아몬드 나무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것을 예고하면서 1-2월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이랍니다. 그러니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아몬드 꽃이 피면 봄이 멀지 않았음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겨울을 안전하게 <샤카드> 지켜 주셨기에 봄을 맞을 수 있었으니 <샤케드> 아몬드 꽃은 감사와 희망의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연분홍색 아몬드 꽃이 만발하면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서 노년의 백발에 비유했답니다. 우리 식으로 벚꽃을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몬드는 이스라엘의 특산물이어서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이집트에 갈 때도 아몬드를 선물로 챙길 정도였습니다. 아몬드는 우리도 즐겨 먹는 견과류에 속합니다. 아몬드를 먹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샤카드>지켜주시길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몬드 껍질은 고동색이지만 속은 하얗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서 우리의 내면이 아름답고 정결하기 원합니다.

 

우리 동네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올겨울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지만, 이제는 베이 지역 특유의 화창한 날씨가 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겨울 동안 우리를 지켜주신 덕분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과 삶에도 아몬드 꽃이 활짝 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신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 아몬드는 소망의 꽃입니다. 새날의 시작입니다. <샤케드> 아몬드를 통해서 <샤카드> 우리를 주목하시고,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기 원합니다.(2019년 3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