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 (2)

내가 주는 물은…

 

갈릴리로 내려가시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한가운데 수가성에 가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앙금이 깊었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고 서쪽 광야로 돌아서 갈릴리로 내려가는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땅을 밟으신 것입니다. 700여 년 동안 이어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갈등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사마리아 방문은 파격이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물려준 세겜 근처 수가라는 동네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쉬셨습니다. 한낮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동네로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혼자 우물가에 계실 때,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먼저 말을 거십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여성이었습니다.

 

물을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나이까”(9절)라고 약간 쏘아붙이듯이 대답합니다. 예수님께 말대답하는 사마리아 여인도 생각보다 강합니다. 물이라는 주제를 갖고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living water)를 네게 주었으리라” (10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구원,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하나님의 선물을 주기 위해서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예수님 말씀에 그리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생수라는 말에 관심을 갖고, 예수님께서 누구신데 깊은 우물에서 생수를 길어서 줄 수 있느냐고 또다시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수를 말씀하셨는데, 여인은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신선한 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 여인은 자기에게도 그 물을 주셔서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여인의 마음이 많이 열렸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물” “생수”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은 마법의 물(magic water)을 구할 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여기까지 마음을 열고 예수님과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굉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방문하신 목적이 분명해졌습니다. -河-

스캠이 판치는 세상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모든 길은 AI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인공지능(AI)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스마트 폰”이라고 불리는 휴대전화가 대표적입니다.

한글이나 영어 번역기도 성능이 약해서 그렇지

벌써 오래전에 나왔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세상 속으로 들어오던 인공지능(AI)이

갑자기 게임체인저가 되고 주인공이 된 느낌입니다.

 

인공지능으로 인해서

우리 삶은 훨씬 편리해질 것입니다.

요즘 번역기의 성능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 준  전통적인 직업들이 사라지는

슬픈 일도 눈으로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우려가 현실이 되고,

과연 그럴까 했던 기대도 현실이 되는 느낌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2.

인공지능에서 직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요즘 전화, 메시지, 이메일 등에

스캠(scam상대방을 속이는 사기성 연락)과

스팸(spam, 원치 않는 정크 메일들)이 판을 칩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무심코 클릭해서 정보를 잃어버릴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사용한 메일 계정은

누군가 제 이-메일로 로그인하면

저에게 곧바로 연락이 오고, 특정 숫자를 클릭해 주어야 합니다.

계정 정보에 들어가 보니, 성공하지 못한 로그인 시도가

인도를 비롯한 전 세계로부터 여러 개 있었습니다.

 

은행에서 보낸 텍스트 메시지로 가장한 스캠도 종종 받습니다.

클릭하기 전에 은행에 가서 보고하니

절대로 은행에서는 그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고

모두 거짓 메시지라고 명쾌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사기꾼들의 수법이 점점 발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인공지능을 사용한다면,

우리 같은 범인에게 큰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큽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대낮에 코를 베어 간다는 옛말이

현실이 되게 생겼습니다.

 

3.

성경에도 스팸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했던

거짓 선지자 (junk prophets)들이 꽤-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가 대표적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나라도 멸망하고

성전도 무너진다는 심판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했습니다.

 

그때,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운 나라여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평화” “안전”을 역설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던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지금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현혹하는

스팸(거짓 메시지) 또는 사기(스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단들이 대표적이지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신 바짝 차리고 분별해야겠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음을 믿습니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편120:2)

 

 

 

하나님,

진리와 정직이 통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11 이-메일 목회 서신)

사마리아 여인 (1)

물을 좀 달라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에 관한 말씀에 이어서, 앞으로 한 달여 요한복음 4장 속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남성이었고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거듭남에 관한 복음(기쁜 소식)을 듣고 숨은 제자로 살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니고데모와 모든 면에서 비교 불가입니다. 유대인들이 차별하는 사마리아 출신입니다. 당시에 매우 열등한 위치에 있던 여성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이 찍혔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면, 사마리아 여인도 대부분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 우물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을 피해서 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과 달리,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에 물을 길러 왔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납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니고데모에 비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훨씬 수동적입니다.

 

“물”이라는 주제는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과 더불어 요한복음 2-4장에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를 향해서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도 요한복음 3장 후반부에 나옵니다.

 

물은 정결 예식과 함께 깨끗함 즉 회개의 상징입니다. 또한 물은 생명수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라고 했고(렘17:13). 에덴동산에도 네 개의 강이 흘렀고, 마지막에 성취될 하나님 나라에도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등장합니다. 그런 점에서 “물을 좀 달라”는 사마리아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마실 물을 넘어서는 영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우물가에서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난 것도 우물가였고, 미디안 광야로 나간 모세도 우물가에서 아내 십보라를 만났습니다. 이처럼 우물가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우연한 만남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야곱의 우물”이라고 불리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이렇게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과 대화가 시작됩니다. ‘물을 좀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을 복음으로 초청하는 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름도 없는 사마리아 여인을 먼저 찾으셨습니다.-河-

세 가지 돌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큰 돌로 막아 놓았던 무덤 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던 여인들이

돌을 어떻게 옮길까 걱정하던 것을 보면

무덤을 막은 돌이 매우 큰 돌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도둑이 자기 발이 저린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큰 돌로 무덤을 막아 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

무덤을 막은 큰 돌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신비한 몸을 입으시고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2.

부활절에 성경을 읽으면서

무덤 문을 막아 놓았던 돌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에게는 세 가지 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무덤을 막아 놓은 것처럼

길이나 입구를 막아 놓은 돌입니다.

헤치고 나가야 할 걸림돌(stumbling stones)입니다.

 

길에 툭- 튀어나온 돌에 걸리면

영락없이 넘어집니다.

 

우리가 가는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 문제, 사람이 걸림돌이 되어서 넘어지곤 합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문제가 걸림돌이 될 때도 있습니다.

 

둘째는, 디딤돌(stepping stones)입니다.

걸림돌과 반대로 디딤돌은 길을 이어줍니다.

 

다리가 발달하기 전에는

웬만한 냇가나 작은 하천에 디딤돌을 놓아서 건넜습니다.

높은 선반 위에 있는 물건을 꺼낼 때도

디딤돌을 놓고 그 위에 올라갑니다.

 

인생길 이곳저곳에 놓인 디딤돌을 밟으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와서 영적 슬럼프에 빠질 때나

어려움이 찾아와서 깊은 시름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디딤돌을 놓아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마지막 세 번째는 산 돌(living stone)입니다.

우리에게는 산 돌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산 돌로 묘사한 것은

예수님께서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되신 것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을 모퉁잇돌 삼고 건물을 세워갑니다.

그 위에 우리가 신앙의 집을 짓고, 그 집에 하나님을 모십니다.

우리 인생과 신앙의 기초가 산 돌이신 예수님이십니다.

 

4월이 되었습니다.

교회력으로 오순절 성령 강림절로 이어지는

부활절기입니다.

 

우리 신앙과 인생의 기초가 되시는

산 돌,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을 살기 원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디딤돌이 되실 것도 믿습니다.

 

힘차게, 담대하게 새달 맞읍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벧전 2:4-5)

 

 

하나님,

우리가 가는 길에 디딤돌이 되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4. 4 이-메일 목회 서신)

부활의 은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서 그가 살아났다고 헛소문을 낼 것을 염려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제안으로 무덤 문을 큰 돌로 막아 놓았었습니다. 병사들을 배치해서 무덤을 단단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비어 있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겁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마28:7)는 천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인들이 땅에 엎드려서 부활하신 주님의 발을 잡고 경배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언제나 “샬롬 – 너희가 평안하냐?”고 인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말도 헛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물론 500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한꺼번에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던 시기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20여 년 후로 추정하니 사도 바울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열흘이 지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증인(마르튀스)” 이라는 헬라어에서 “순교자(martyr)”라는 영어가 나왔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목숨 걸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자신들도 부활해서 영원히 살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에 힘이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냅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깁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부활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승리의 완성입니다. 우리도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세상 속에서 부활을 삽니다. 부활의 은혜입니다.-河-

고의적 무지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도 십자가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난 주간이라고 해서

지나친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겪으신 조롱과 비난, 외로움에 동참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난주간은

부활을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고 나누는 시간입니다.

고난의 끝에 부활이 있음을 믿습니다.

 

2.

고의적 무지(willful ignorance)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행동하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예수님 주변에는 “고의적 무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언도한

빌라도 역시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알았지만,

백성들의 민란(민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른 척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도

예수님이 단지 나사렛 청년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알면서 모른 척 했습니다.

 

백성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성전에서 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생각하면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의 인물이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맹목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쳤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던 예수님께서

쓰러지셨을 때, 군병들이 십자가를 대신 질 사람을 찾았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군병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외면했을 것입니다.

얼굴을 돌려 외면하는 것도 일종의 고의적 무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꿰뚫어 보셨기에 더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위엄 있게 꿋꿋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3.

고난주간을 보내고 부활절을 준비하는 오늘,

하나님을 향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향한

“고의적 무지”가 우리에게 없는지 살피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리사욕에 빠져서 하나님의 아들을

고소하고 죽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맹목적으로 비판하고 군중에 휩쓸릴 것도 아닙니다.

나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길 원합니다.

 

담대한 신앙,

정직한 신앙,

힘과 권력 앞에 숨지 않고 대면하고 저항하는 신앙,

예수님 앞에 담대히 나설 수 있는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부활절 새벽이 밝으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나님,

신앙에 대해서 담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28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