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심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노년에 지은

감사와 고백의 찬양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삶 구비구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기억하고 경험했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2.

지난 주일 예배에서는

익숙했던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부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야훼 하나님은 생소했을 것입니다.

아닌 밤에 홍두깨처럼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 약속을 믿고

말씀대로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갔습니다.

 

누구든지 떠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떠남에는 위험과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대의 서사나 이야기에 나타난 영웅들의 삶은

떠남과 귀환, 다시 떠남으로 이뤄집니다.

서양 문학의 근간이 되었다는

호머의 오딧세이아가 대표적입니다.

 

그래도 익숙한 곳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딧세우스같은 영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갈데아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브라함도 떠남이 무서웠을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매우 강력한 말씀을 주십니다: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12:3).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입니다.

사물은 쳐부수면 되고 상황을 극복하면 되지만,

사람은 예측불허입니다. 통제할 수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명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끝까지 지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100% 아브라함 편에 서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단,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저주하는 사람을 저주하신다는 말씀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실 것을 최상급으로 강조하신 수사(rhetoric)입니다.

 

4.

우리 모두 외롭습니다. 힘이 듭니다.

관계는 불안정합니다.

믿을 사람도, 믿을 것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가 믿고 바라봐야 할 분은

끝까지 함께 하시고, 우리 편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외면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23:4)

 

하나님,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19 이-메일 목회 서신)

믿음은 (4)

지금부터 4천년 전,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라고 불리는 바빌론 땅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가족을 이끌고 북쪽의 하란이라는 곳으로 이주합니다. 가족의 안전과 먹거리를 생각해서 살던 곳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당시는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 아브라함이 갈데라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는 말씀도 있습니다(행7:2).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길을 떠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떠나는 길입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절대 순종과 더불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게 만든 사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 자신이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재차 확인하셨습니다.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시면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한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18:18)고 질문하듯이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해서 아들 이삭을 바친 후에도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창22:18).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풀어갑니다. 아브라함은 말 그대로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그의 행위도 믿음에 걸맞게 훌륭했지만, 고향을 떠난 것과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과 연결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자손”이 단수로 쓰였기에 2천 년 후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세상의 복이 되었듯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도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똑같이 복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을 넘어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통해서 복을 받고, 우리는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딱 한 가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을 잠깐 언급했습니다.

 

당시 바빌론은 이집트와 더불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고 있던 세상 제국이었습니다.

신약성경 계시록에서 바빌론을

악을 대표하는 세상 제국으로 표현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다니엘은 이곳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식민지 국가의 젊은이들 가운데

총명한 사람을 데려다가 특별 교육을 시켜서

국제 외교의 특별한 직무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바빌론에 잡혀간 다니엘은

이름이 벨드사살로 바뀝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으로

그의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벨드사살은 “왕의 명령을 지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당시 왕은 바빌론 신의 대행자로 여겼으니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바빌론 신과 왕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사람에서

바빌론 왕의 사람으로 정체성이 바뀐 것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 언어와 학문을 배웠습니다.

당시 학문은 별을 보고 국가의 미래를 가늠하는 점성술이고,

이것은 모세 율법에서 금하는 일이었습니다(신18:10-14).

 

하나님을 믿던 다니엘이

거의 대부분 제국의 문화에 동화(assimilation)된 것입니다.

 

다니엘의 심적 갈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제국의 권력 안에서 다니엘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2.

그때 다니엘은 한 가지 “뜻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우상에게 드린 음식으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으로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것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정한 <구별점>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었습니다.

 

다니엘서 6장에 나오지만,

그와 세 친구는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상 제국에서 살아남았고,

어려움도 겪었지만 바빌론 총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제국 한 가운데 드러내는 멋진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함께 하신 덕분입니다.

그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3.

우리 각자도

적어도 한 가지, <구별점>을 세우고

그것을 꼭 지키시길 부탁했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구별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21세기 세상 제국에 살아갑니다.

포로로 잡혀 온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삶에 동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칫,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세상에 완전히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꼭 한 가지 구별점을 만듭시다.

그것을 붙들고 지키면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갑시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을 사시려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단1:8)

 

 

하나님,

뜻을 정한 것을 지켜 나갈 믿음과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12 이-메일 목회 서신)

믿음은 (3)

믿음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믿는 것 같지만,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믿음은 복음의 신비로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믿음이 구체화되고 복음의 신비 속으로 들어갑니다.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 순간 신비에 싸여 있던 복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힘과 능력을, 믿음을 통해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믿음이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임을 공부하겠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남유다 출신이지만 북이스라엘에 올라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부흥했지만, 빈부격차가 컸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백성들을 학대하고 착취했습니다. 정의가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다림줄(plumbline)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다림줄은 끝에 무거운 추를 매단 줄을 가리킵니다. 다림줄 자체가 납이나 주석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나크>인 것과 연결됩니다. 벽을 쌓을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서 벽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합니다.

 

아모스는 다림줄을 드리우고 성벽을 쌓고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손에 들고 서 계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한 가운데 다림줄을 드리워 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나 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삶은 하나님의 다림줄에 미치지 못하고 삐뚤삐뚤 일 것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고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불과 20여 년 후에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다림줄을 내린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요즘 시대에 다림줄을 내린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드리우는 다림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맞추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기를 부탁합니다. 사람의 속임수, 간사한 유혹, 온갖 그릇된 풍습에 쉽게 넘어가는 어린 신앙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옳고 그름을 헤아리는 분별력이 요청됩니다. 믿음이 분별력입니다. 믿음이라는 다림줄을 갖고 우리 자신은 물론 세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과 삶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河-

패럴림픽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파리에서는

장애인들이 겨루는 패럴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포털 사이트의 스포츠 란을 즐겨 보는데

얼마 전까지 한국의 모든 매스컴이 올림픽에 집중했습니다.

방송사들은 정규 방송까지 중단하고

올림픽 중계에 열을 올렸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스포츠 포털에서

패럴림픽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딘가 있을 텐데 제 눈에 띄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한 달 전 올림픽 기사로 도배하던 때와 비교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의 경우,

늦은 시간에 올림픽 주관 방송사인 NBC에서

패럴림픽 경기를 하이라이트 형식으로 내보냅니다.

미국 경기는 생중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패럴림픽은 사람들의 관심 밖입니다.

 

2.

패럴림픽에서는

모든 선수가 승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쪽 팔이 없는 선수가 육상 경기에 등장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농구 경기를 합니다.

모든 종목에 참여한 선수들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감동이 밀려옵니다.

 

한국 신문에도 보도가 되었고

유튜브 쇼트 영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열일곱 살 된 데비라는 인도 양궁선수가 눈에 띕니다.

 

선천적으로 팔다리가 짧게 성장하는 병을 앓고 있기에

두 팔이 거의 없습니다.

발가락으로 활을 잡고, 다른 발을 이용해서 화살을 활에 끼웁니다.

손이 없으니 입으로 잡아당겨서 활을 쏩니다.

 

발과 입에 얼마나 큰 힘이 들어갈까요!

그런데 이 선수가 10점을 쏘았습니다.

관중석에서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다고 하지만,

패럴림픽 선수들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메달이나 순위에 상관없이

어떤 선수와 인터뷰해도 각자의 이야기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꿈과 소망을 주는 위인들입니다.

 

3.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우 넓습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맨 앞에 서 있거나

눈에 띄는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주목을 받습니다.

 

조금만 부족해도 관심 밖입니다.

올림픽에 비해서 패럴림픽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부족함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진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패럴림픽에 참여한 모든 선수를 응원합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경기에 참여하지 못한

무명의 선수들도 기억합니다.

 

그분들이 계셔서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깊어집니다.

절망이 밀려오는 곳에서 소망을 발견합니다.

힘을 얻습니다.

고맙습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편 41:1)

 

 

하나님,

뒷전에 밀려 있는 분들을 기억하고

마음으로 몸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5 이-메일 목회 서신)

믿음은 (2)

구약 시대 하박국 선지자는 정의가 무너지고 패역한 세상에 살았습니다. 폭력이 난무합니다.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타락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안타까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는 언제까지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기다려야 하는지 한탄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당시의 제국인 바빌론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표범보다 빠른 말들, 이리보다 사나운 군대가 먹이를 가로채는 독수리처럼 이스라엘을 덮칠 것입니다. 섬찟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어떻게 세상 제국에게 공격을 당하고 심판을 받을 수 있냐고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 하나님을 모르는 훨씬 패역한 세상 제국에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망대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말씀을 멀리서도 읽을 수 있게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빌론을 동원해서 하나님 백성을 심판하시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서 잠시 세상 나라를 동원하실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시 회복되고 살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부터 포학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빌론은 영원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마지막으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게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진정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망대에 올라갔을 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는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망가졌고 세상도 망가졌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의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하박국 말씀을 인용했고, 훗날 마틴 루터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은 의롭게 사는 힘입니다. 세상을 이길 힘이요, 세상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의로운 길을 걷기 원합니다. 믿음이 힘과 능력입니다.-河-

여호야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열왕기하 11-12장에 등장하는

여호야다 제사장과 예루살렘 왕 요아스에 관한 말씀을 배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반역을 일으켜서

왕족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손자들을 죽이고 할머니가 왕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바알 신을 섬기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한 살 된 왕자 요아스를 침실에 숨겨서 구해냅니다.

어린 요아스는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성전에는 여호세바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여호야다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완전히 꺼질 뻔했던 다윗 가문의 등불이

여호세바의 기지와 여호야다 제사장의 돌봄으로 보존된 것입니다.

 

요아스 왕자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여호야다 제사장은 백부장들과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고, 아달랴를 처형합니다.

6년 만에 이방 여인 아달랴는 통치가 끝나고

요아스에 의해서 다윗 왕국이 회복된 뜻깊은 사건입니다.

 

2.

요아스가 겨우 일곱 살에 왕이 되었기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130살까지 살면서 요아스의 멘토가 되었습니다.

 

여호야다의 조언대로

바알 신전으로 변한 성전을 보수하고 회복합니다.

바알 종교의 잔재를 없앱니다.

요아스의 멘토 여호야다 덕분입니다.

 

문제는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으면서 발생했습니다.

다른 지도자들이 요아스에게 접근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아스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버리고

가나안 토착신인 아세라 목상을 섬깁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나서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 제국까지 의지하더니

결국 신하들에 의해서 살해됩니다.

 

안타깝게도 요아스는 왕들의 묘지에 묻히지 못합니다.

왕족이 아니면서도 왕들의 묘지에 묻힌

여호야다 제사장과 대조를 이룹니다.

 

요아스의 말년과 죽음이 안타깝습니다.

끝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4.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을 때,

요아스는 하나님 안에서 행하고 통치했습니다.

나라가 평안했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으면서

요아스가 새롭게 의지한 멘토 그룹은

그를 타락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요아스 역시 어려서부터

제사장 여호야다를 의지했기에

혼자서 판단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데 서툴렀을 것입니다.

 

신앙은 물론 인생의 멘토를 잘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따르는 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남의 복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참빛 식구들이 가는 길에

훌륭한 멘토를 만나고

더불어 참되고 선한 길을 걷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한가지,

우리에게 최고의 멘토가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대하 24:2)

 

 

 

하나님,

참빛 식구들께 훌륭한 멘토를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29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