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시는 하나님 (6)

약한자를 돌보시는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연속 설교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알려주는 나그네, 고아, 과부로 대표되는 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는 백성들입니다.

 

나그네는 정착할 곳 없이 타향에 살거나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유목민이었습니다. 가나안 땅도 그들의 원래 터전은 아닙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훗날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면서 나그네 삶의 서러움을 톡톡히 경험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빌3:20). 이 땅이 결코 고향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나그네로 살아갈 뿐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야말로 나그네입니다. 미국에 터전을 잡았지만, 마음은 조국에 가 있습니다. 나그네로 살다 보니 타향살이의 설움도 느낍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미국에 왔고 그 목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그네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기에 나그네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깊이 다가옵니다.

 

고대사회에 고아와 과부는 돌봄이 꼭 필요했습니다. 고아는 부모가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남편이 없는 과부는 세상에서 이용당하기 쉬웠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고아나 과부의 권리는 거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 고아, 과부와 함께 가진 것이 없는 사회적 약자도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권력의 압제 속에 살아가는 민초를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물질이 없는 가난한 자들도 돌보십니다. 또한 이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잠19:17).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돕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심판 날에 예수님께서 찾으시고 칭찬하시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약한 자들을 돌봤으니,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인/상대적인 약자들을 배려하고 존중하기 원합니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河-

 

넉넉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교회 음향 시스템은

훌륭한 편이 아닙니다.

 

용량이 크다면,

중간 정도의 볼륨을 조절해 놓아도 될 듯합니다.

마이크에서 조금 떨어져도

목소리가 편안하게 전달될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앰프의 용량이 작으니

마이크 볼륨을 높이면 “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니 방송실에서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볼륨을 조절하느라 늘 긴장합니다.

 

2.

캘리포니아를 떠나는 사람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오클랜드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분의 사연이 소개되는데

훔친 트럭으로 사업장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현금 입출 기계(ATM)를 떼어서 그 안에 있는 돈을 가져갑니다.

자동차 유리를 깨는 것은 이제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경찰에 연락해도 오지 않거나

와서는 대충 둘러보고 떠납니다.

웬만한 범죄는 하루 이틀 만에 다시 석방되니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개인의 삶도 뻑뻑한데

세상 질서도 어지럽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비해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여유가 확실히 줄었습니다.

서로 옳다고 자기주장만 하고 듣지 않습니다.

이해득실에 빠르고 결코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서두릅니다. 초조한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우리 교회 앰프 용량이 작아서

볼륨을 조금만 올려도 “삐—“하고 듣기 힘든 소리가 나듯이

사람들을 자극하거나, 남이 자기 영역을 침범하면 경고음을 냅니다.

듣기 힘든 ‘삐—’소리가 세상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넉넉함을 잃어버린 소치일 것입니다

 

3.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웬만해서는 ‘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앙과 마음, 인격의 용량을 넓혀야겠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우리이니

하나님 자녀라는 느긋함, 넉넉함, 자긍심을 갖고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넉넉함을 주시길 간청합니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살지만,

우리 삶에 여백을 남겨 놓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납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차고 넘쳐서

세상으로 흘러가는 근사한 삶도 기대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16:11)

 

 

 

하나님,

우리 마음과 삶에 넉넉함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1 이-메일 목회 서신)

돌보시는 하나님 (5)

공동체를 돌보시는 하나님

 

지난 4주 동안 몸과 마음을 돌보시고,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되시고 우리가 가는 길을 친히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일하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그 길을 계획해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잠16:9)이심을 수없이 경험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심을 더욱 신뢰합니다.

 

미국의 전문 설문 조사기관 퓨 리서치가 선진국에 해당하는 17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는 물질적 풍요, 건강, 가족이었습니다. 물질적 풍요를 제일 먼저 꼽은 것은 한국이 유일했습니다. 가족을 최고로 꼽은 나라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33%가 건강이라고 답했습니다. 가정, 신앙, 돈이라고 답한 경우는 각 18%, 17%, 17%였습니다. 팬데믹을 지나면서 신앙과 가정의 중요성은 줄어들고, 물질과 건강이 합쳐서 50%를 차지한 결과입니다.

 

물질과 건강은‘집착’하기 쉽습니다. 거기에 빠지면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답게 물질과 건강까지 하나님께 맡기고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세상 가치관에 치우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물론 몸까지 돌보심을 믿습니다.

 

오늘은 공동체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에 관해서 공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에 이름을 짓고 다스리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가정을 이룬 아담과 이브의 몫이었습니다. 이처럼 가정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힘을 다해 자녀들과 부모님, 형제자매를 섬기지만, 가정을 돌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가정과 가족을 멋지게 세워가야 합니다.

 

가정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의 사도 바울이 가정에 대한 교훈의 끝에 교회를 언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교회 역시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우리가 사는 샌프란의 교회들도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돌보심을 믿습니다. 교회의 주인 되신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책임지실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장차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예표입니다. 전쟁과 갈등, 갈라치기와 기후위기까지 어지러운 세상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도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음을 믿고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기에 하나님의 손길과 돌보심을 간절히 구합니다. -河-

 

꼭 필요한 근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우리 안에서 독버섯처럼 생기는

염려, 불안, 두려움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그것들까지 친히 맡아 주시고 돌보심을 확인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염려, 불안, 두려움이 생기면

우선 멈추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으로

몰아내고, 견디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의학이나 상담을 비롯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해야 할 바를 하는 것도

마땅한 우리의 임무이자 특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

염려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필요 없는 염려, 해결할 수 있는 염려, 과거에 대한 염려,

일어나지 않을 염려, 불가항력적인 염려.

 

예를 들면, 필요 없는 염려는

스포츠 경기에서 자기 팀의 승리를 놓고 안절부절 염려하거나

유명인의 기사를 읽고 괜히 그들을 걱정해 주는 것,

해결할 수 있는 염려는

해결하면 될 일을 괜스레 염려하는 것

과거에 대한 염려는

이미 지난 일이어서 염려해도 바꿀 수 없는 것

일어나지 않을 염려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도 사서 염려하는 것,

불가항력적인 염려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모든 염려의 5%에 해당한답니다.

 

3.

우리는 염려를 갖고 삽니다.

염려를 뿌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

끊임없이 요청됩니다.

 

염려가 생길 때,

그 자리에서 <우선 멈춤>을 외치고

기도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기도는 염려를 막는 백신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염려를 극복하기 원합니다.

 

우리 염려의 대부분은

소위 쓸데없은 것임도 꼭 기억합시다.

 

4.

성경은

우리가 해야 할 근심[염려]과 하지 말아야 할 근심을

명쾌하게 구분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돌아보며 근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근심의 끝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필요 없는 근심은 믿음 가운데 통제하고,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올바로 근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고후 7:10)

 

 

하나님,

우리의 근심이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25 이-메일 목회 서신)

돌보시는 하나님 (4)

마음을 돌보시는 하나님 (2)

 

염려, 불안, 두려움 – 이 세 가지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가 수시로 또는 결정적인 순간에 불쑥 나타나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염려는 수시로 생깁니다. “염려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림나오>는 둘로 나누어진다는 뜻입니다. 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양쪽에서 당기니 둘로 갈라집니다. 마음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염려가 생깁니다. 조바심이 납니다.

 

염려는 불안으로 이어집니다. 염려가 마음과 생각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불안은 모습과 행동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초조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안절부절입니다.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염려와 불안의 끝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염려와 불안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라면 두려움은 최종적으로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것으로 결론지은 상태입니다. 밝은 것은 사라지고 어두움만 남았습니다. 염려와 불안의 단계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자 했다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손을 놓고 멍하게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요동칩니다. 힘이 들어서 절망으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은 자신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실존적 죽음이라고 했고 이것을 곧 죄라고 보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절망을 경험하는데, 절망 가운데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절망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염려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이 절망으로 이어지면 절대 안 됩니다. 중간에 빠져나와야 합니다. 염려는 수시로 찾아옵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빈도만큼 염려가 생긴다고 봐도 괜찮습니다. 염려가 생기면 우선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염려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던져 버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찬양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불안할 때 찬송을 부르거나 찬송을 들으십시오. 찬양에는 우리 마음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와 불안을 몰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불안이 심해지면 의약의 도움을 받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명령이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혹자는 365회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 말씀을 읽고, 말씀을 갖고 기도하고 외치면서 두려움을 몰아내고 다스려야 합니다.

 

염려와 불안, 두려움 그리고 그 어떤 절망이 찾아와도 변함없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기 원합니다. -河-

조바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처음 미국에 와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30대 후반의 늦깎이 유학생이자 두 아이의 아빠로 공부를 시작했으니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도 헛되게 쓸 수 없습니다.

젊은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했습니다.

게다가 점수도 잘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습니다.

 

비교적 좋은 성적을 받고 순항하고 있었는데,

한 과목에서 점수가 기대보다 덜 나왔습니다.

그리 중요한 시험도 아니었는데,

마음도 상하고 왠지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교수님을 찾아갔는데,

교수님은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지만,

점수는 올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때는 한 과목 점수에도 조바심을 하고 속상해했습니다.

 

2.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데

당시에는 너무 크게 보여서

집착하고 실망하고 마음 상했던 일이 꽤 많습니다.

 

계획한 일 전체가 망가지거나

인생 전체가 무너져서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와 불안에 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조바심’ 때문입니다.

 

조바심은

바라고 계획했던 일이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조바심이 찾아오면, 갖가지 경우의 수들이 생각나면서

모든 일을 그르칠 것 같은 ‘느낌’에 휩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광야에 있을 때,

약속의 땅이 멀어만 가고, 광야 생활이 길어지면서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잘 있었는데

왜 데리고 나왔냐고 모세를 향해서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면서 압제와 학대받을 때를

그리워하는 어이없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조바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이 절대 아닙니다.

믿음의 반대말일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인생사는 물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마음 같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기도해도 변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때 여지없이 ‘조바심’ 불쑥 찾아옵니다.

 

조금 멀리 보고 갑시다.

조바심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시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나갑시다.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29:11)

 

 

하나님,

마음속의 조급함을 통제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18 이-메일 목회 서신)

돌보시는 하나님 (3)

마음을 돌보시는 하나님 (1)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돌보다”의 사전적 의미는 “관심을 갖고 보살피다”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셨기에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행여나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어리석은(silly) 생각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인이거나, 기술과 과학의 발달을 의지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합니다. 믿고 싶은데 하나님의 돌보심에 확신이 없으니 어정쩡한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신하는 말씀을 듣거나 동료 그리스도인을 보면 부러울 수도 있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우리 삶에 깊숙이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살피고 함께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의 돌보심이 실체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몇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주목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었는데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움을 받은 것과 도움을 준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지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으니 하나님과 그 돌봄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을 하나님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 삶을 돌아보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노력의 결과이거나 우연히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롬8:28) 말씀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입해서 우리 삶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과 삶을 하나님께 연결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피고 해석하는 것에 노력(훈련)이 필요합니다. 생각하고 숙고하는 노력입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부터 시작해봅시다. 늘 강조하듯이 영적일지(spiritual journal)를 쓰시는 것도 권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삶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충분히 느끼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를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