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의 길/ 이사야 50장 1-10절
종려주일: 고난의 길/ 이사야 50장 1-10절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황제에 반기를 들었거나 세상을 어지럽힐 정도의 극악한 죄인들이 달리는 형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죗값을 치르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의롭게 되므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년 또는 수시로 제물을 드리던 성전 중심의 형식적인 신앙이 예수님을 믿는 내면과 삶의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성전이 되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때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 예수님의 여정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에 비유했습니다(사53장).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음 자체보다도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쉬운 길이 아니었기에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3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들(the servant songs)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50:1-3) 앞에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마음이 완고해진 백성들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종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종은 학자의 혀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탁월한 능력입니다. 본문의 종은 메시아 예수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수염이 뽑히고, 뺨을 맞고, 모욕과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수치를 당해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입니다. 이사야 시대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어두운 세상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에게 빛이 임했습니다. 구원이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십자가 길을 묵상하는 고난 주간이길 바랍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샌프란의 올겨울은 꽤 길었습니다.
여느 해보다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몇 해 전, 겨울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서
캘리포니아가 사막으로 변할 것 같다고
설레발을 떨 때가 머쓱할 정도입니다.
비가 충분히 내리니
삼라만상이 초록으로 변했습니다.
멀리 보이는 민 등성이 산들도 파랗게 변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멀지 않게 비가 내리니
캘리포니아 특유의 맑은 날씨가 그리웠습니다.
기온도 꽤 내려가서 쌀쌀하고 추웠습니다.
코로나는 잦아들었지만,
독감이 유행해서
여러 날 고생하는 분들도 많으셨습니다.
매번 겨울이 그렇듯이,
이처럼 올겨울도 꽤 길었습니다.
2.
이번 주 들어서
봄기운이 완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차가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바람입니다.
맑은 날이 많아지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캘리포니아 날씨의 귀환입니다.
이따금 비 소식이 있는데
우기(雨氣) 끝에 찾아오는
성경에도 나오는 늦은 비입니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니
길가의 가로수와 이웃집 정원의 나뭇가지에
아기 손처럼 귀여운 연한 순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봄이 찾아왔습니다.
3.
우리에게 봄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부활절이 있는 계절입니다.
춘분(春分) 이후 보름이 지나고
첫 번째 맞는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올해는 3월 31일이 부활절이니 여느 해보다 빠릅니다.
봄이 빨리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새봄과 더불어
부활의 생명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바랍니다.
새봄에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 차가움,
겨우내 꽁꽁 싸 놓은 것들이
예수님 부활의 생명의 빛으로
밝아지고 따뜻해지고 술술 풀어 지길 바랍니다.
새봄에 찾아오실
부활의 주님을 기다립니다.
생명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 (아가 8:14)
하나님,
새 봄을 맞아서 주의 동산에 뛰어노는
사슴처럼 발걸음이 가볍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21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과 니고데모 (4): 거듭남 2/ 요한복음 3장 16-21절
거듭남 (2)
예수님께서는 밤중에 찾아온 바리새인이자 유대의 지도자인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을 어머니를 통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리와 위력으로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예로 드시면서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 바람은 모두 성령을 가리킵니다. 비로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에 매어 들어 올린 구리 뱀을 예로 드십니다.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는 순간 살아났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도 살 것입니다. 장대에 달린 뱀을 쳐다보는 것,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쯤에서 니고데모는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차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고 그때부터 예수님의 숨은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께 나오길 바라십니다. 그런데 어두운 세상은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이 심판입니다:“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9절).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도 행위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악한 행실이 빛으로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 자체가 심판입니다. 벌써 심판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는 심판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을 통해서 심판에서 구원으로 옮겨집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필수적인 이유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십니다. 악한 길을 떠나서 참되고 선한 주님의 길을 걷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품고 삽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로 이사 온
13년 전부터 미뤄왔던 숙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이웃집과 공유하는 담이
지난번 심한 바람으로 쓰러졌고
보험회사의 도움을 받아서 이웃집과 얼굴 붉히지 않고
새로운 담으로 교체하였습니다.
담이 워낙 낡았고
혹시 아이들이 장난치다가 넘어지면
담벼락에 다칠 위험이 있어서 염려가 되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웃집 할머니에게 함께 담을 교체하자고 요청했지만,
자기는 돈이 없으니, 우리가 알아서 하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비바람으로
담을 교체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우리 교회에 임했습니다.
뒤뜰이 안전하게 정리되니
10여 년 앓던 이를 빼고 임플란트를 해 놓은 것처럼 상쾌합니다.
늘 가탈스러운 이웃집 할머니도 “하나님이 했다”면서 좋아하니
말 그대로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2.
다른 한 가지 역시
미루고 미루던 숙제였습니다.
주일마다 강단을 장식하는 종려나무의 화분 갈이입니다.
강단의 종려나무는
현재 교회로 이사올 때부터 강단을 지켰습니다.
작은 종려나무 세 그루를 사서 화분 하나에 심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훨씬 작았습니다.
매주 물을 주면서 정성껏 관리했더니
가지가 계속 나오고 키도 부쩍 컸습니다.
생명력이 강했습니다.
최근에 화분을 옮기다 보니
한쪽 화분 겉에 금이 간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칫, 화분이 쪼개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광고하니
화분 갈이의 달인들이 모여서
미뤄둔 숙제를 순식간에 해치웠습니다.
얼마나 개운한지요!
딱딱한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버텨준
종려나무에게도 감사했습니다.
3.
새봄을 맞이하고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과 삶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살다 보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오랫동안 찜찜한 상태로 지내는 것들이 종종 발생합니다.
우리 교회 담장 공사처럼
이웃이나 누군가의 협조가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화분 갈이처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데
차일피일 미루면서 쌓아 놓고 있던 것들은
날을 잡아서 깔끔하게 해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생명의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고전14:40)
하나님,
오래된 숙제를 얼른 끝낼 수 있는
부지런함과 지혜를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14 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과 니고데모 (3): 거듭남/ 요한복음 3장 6-15절
거듭남 (1)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였습니다.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황한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 대화의 주제는 “거듭남”이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이 뜻하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즉,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체로 태어난 것에 그치지 않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태어남 “신생(新生)”입니다. 여전히 니고데모는 거듭남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을 갖고 설명하십니다. 바람이 불어오지만, 바람을 볼 수 없고 단지 느끼고 경험할 뿐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바람의 위력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거듭남 자체는 실체이고 동시에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핀잔 섞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 진정한 선생은 예수님 뿐입니다. 땅의 생각을 갖고 하늘의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일을 알려주어도 믿지 못합니다. 니고데모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에 정통한 니고데모에게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예로 드십니다(민21:4-9).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했습니다. 자기들 생각과 달리 광야 생활이 막연하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시니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구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구리로 뱀의 형상을 만들어서 기둥 위에 매달아 놓으면,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뱀에게 물린 사람이 기둥 위에 매달린 구리 뱀을 보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둥에 달린 광야의 구리 뱀을 장차 십자가에 달리실 자신과 연결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쳐다보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거듭남의 신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누구나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는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Nicodemus)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백성의 정복자 conqueror of the people”라는
이름에 걸맞게 성공한 인물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를 70인으로 구성된
입법과 사법 그리고 행정을 관할한 최고 의결 기구였던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봅니다.
게다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손색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나오지만,
바리새인들은 랍비로 대표되듯이
유대교 안에서 영향력이 무척 컸습니다.
2.
예수님 당시 종교적으로/사회적으로
흠잡을 것이 없는 니고데모가
밤중에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에 비하면 출신성분은 물론
나이도 훨씬 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랍비(스승)라고 부릅니다.
신분 격차와 차별이 확실히 존재했던 당시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파격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본문에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추측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이룬 니고데모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갈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존재의 가장 밑에 있는 고민입니다.
3.
저는 지난주일 설교에서
니고데모에게 이런 영적인 고민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공회원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바빴을까요!
워낙 바쁜 일상이어서
예수님을 찾아올 정도로 영적인 일이
다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그것도 모르냐?”는
예수님의 핀잔 섞인 말에도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니고데모는 갈급했습니다.
영원한 진리를 향한 갈급함입니다.
물질과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영역에 대한 고민이고 질문입니다.
성경은 니고데모가 답을 얻고 돌아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더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놓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논쟁할 때,
온건하지만 예수님 편에서 발언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장례에 향품 70파운드를 갖고 찾아옵니다.
니고데모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선언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결과입니다.
예수님께 질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한 덕분입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문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놓고 고민한 결과입니다.
니고데모의 영성(신앙)을 닮고 싶습니다.
끝까지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것을 두고 고민하고 신앙 안에서 풀어내기를 원합니다.
우리 시대의 니고데모가 되기 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하나님,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7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