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시는 하나님 (3)

마음을 돌보시는 하나님 (1)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돌보다”의 사전적 의미는 “관심을 갖고 보살피다”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셨기에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행여나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어리석은(silly) 생각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인이거나, 기술과 과학의 발달을 의지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합니다. 믿고 싶은데 하나님의 돌보심에 확신이 없으니 어정쩡한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신하는 말씀을 듣거나 동료 그리스도인을 보면 부러울 수도 있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우리 삶에 깊숙이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살피고 함께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의 돌보심이 실체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몇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주목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었는데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움을 받은 것과 도움을 준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지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으니 하나님과 그 돌봄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을 하나님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 삶을 돌아보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노력의 결과이거나 우연히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롬8:28) 말씀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입해서 우리 삶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과 삶을 하나님께 연결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피고 해석하는 것에 노력(훈련)이 필요합니다. 생각하고 숙고하는 노력입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부터 시작해봅시다. 늘 강조하듯이 영적일지(spiritual journal)를 쓰시는 것도 권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삶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충분히 느끼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를 바랍니다.-河-

미소 되찾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창이어서

반강제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할 때,

미소를 잃은 것이 아쉽다는 목요 서신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마스크를 쓰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미소”입니다.

이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미소로 인사했습니다.

 

지금도 습관적으로 마스크 안에서 미소를 짓지만

서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조금 허전하고 삭막합니다.”

(2020년 5월 28일 목회서신)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과연 마스크를 벗을 날이 찾아올지 막막했습니다.

 

지난 5월 여행을 떠나면서

짐을 싸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40일 가까운 여정입니다.

기차 여행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유럽 항공사들의 짐 규정이 까다로웠습니다.

최대한 짐을 줄여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마스크는 꼭 챙겨갔습니다.

 

여행하기 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마스크를 착용했기에,

생소한 나라에서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

마스크 착용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목적지인 런던에 도착했을 때,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거의 없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곤 했거든요.

 

외국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우리 역시 마스크 착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맨 얼굴로 다녔습니다.

 

유럽의 작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예전 한국의 지하철 1호선이 생각날 정도로 발 디딜 틈이 없었던 파리의 지하철에서도,

유명한 그림이나 조각상 앞에 빼곡하게 모인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았지만, 무사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2.

온 인류를 괴롭히던

코로나바이러스가 ‘거의’ 사라진 것이 놀랍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외출할 수 있게 된 것도 신기합니다.

이런 날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마스크 뒤에 숨겨놓았던 미소도 되찾았습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도 미소로 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 마음껏 웃어야겠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아름다운 미소로 정겹게 인사해야겠습니다.

 

무뚝뚝, 무표정이 아니라

활짝 웃으면서 서로 인사합시다.

교회에서는 물론,

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미소로 인사합시다.

날씨도 덥고, 속상한 뉴스들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미소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잠언 27:19)

 

하나님,

밝은 세상을 만드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11 이-메일 목회 서신)

길동무

좋은 아침입니다.

 

1.

기도해 주시고 염려해 주신 덕분에

두 달 간의 안식월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귀한 선물을 예비해 주신 하나님,

필요한 재정을 제공한 미국의 재단,

안식월을 가도록 허락하시고

교회를 섬겨 주신 참빛 식구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목요 서신을 받아 보시는 지체들 가운데

안식월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따로 연락을 주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매주 서신을 통해서 소통할 수 있고  관심 가져 주시니 고맙습니다.

 

2.

가족 여행을 포함해서

50일의 여정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제는 클래식으로 분류되는 <반지의 제왕>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었습니다:
“여행은 위험한 것이다.

집에서 나가면 어떤 운명이 닥칠지 모른다.”

 

지난 5월 6일, 여행을 떠날 때

기대와 불안함이 교차했습니다.

유럽의 대도시는 소매치기가 다반사라는 정보부터

기차를 타는 것, 정해진 숙소에 제날짜에 맞춰서 들어가는 것,

예순이 넘은 부부가 건강하게 여정을 끝낼 수 있을지 까지

영화 대사대로 집을 떠나는 순간 무슨 일이 닥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모든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했고,

“아- 이래서 여행을 떠나는구나”하는 마음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3.

영국 런던부터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태리, 그리스까지

40여 일 여행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몇 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우리가 가려는 곳을 찾지 못해서 캠퍼스를 헤매고 있을 때,

법을 전공한다는 대학원생이 친절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분명히 바쁜 걸음으로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길을 물었는데,

상냥하게 끝까지 안내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일부러 인지 영어를 못하는 척하면서 지나친 경우도 꽤 있었거든요.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기차는 저와 아내가 따로 앉게 되었습니다.

둘이 같이 앉기 위해서 옆에 있는 신사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했더니

생색을 내면서 딱- 잡아뗍니다. 머쓱했습니다.

 

조금만 양보하면 서로가 편할 수 있는데,

자존심인지 아니면 우리 부부가 함께 가는 것에 대한 시샘인지 완강했습니다.

그 신사의 불친절한 표정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래도 저희가 묶은 에어B&B의 아랍인 여주인,

길을 묻는 우리의 짐까지 들어주겠다던 독일 시골의 장난꾸러기 십 대들,

군말 없이 무거운 짐가방 두 개를 트렁크에 실어주던 아테네 택시 운전사,

시부모님같은 우리와 재미있게 얘기를 나눠준 서울에서 온 신혼부부까지

기억에 남는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부부는 과연 다른 여행객들에게

어떤 길동무가 되었을 지 궁금합니다.

 

4.

집을 나서는 순간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여행길이지만,

곳곳에 좋은 길동무들이 있으니

위험이 한결 줄고 편안하게 주어진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고,

우리가 좋은 길동무가 되는 것은 서로에게 커다란 축복입니다.

 

다시 매주 보내드릴 목요 서신도

여러분의 길동무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잠언13:20)

 

하나님,

우리 모두

서로에게 위로와 도움이 되는 길동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7. 4 이-메일 목회 서신)

사마리아 여인 (5)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동안 요한복음 3장과 4장을 연속해서 공부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유대인의 공회원이자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의 길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알려주셨습니다. 훗날,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식에 찾아옵니다. 밤중에 찾아온 이후, 비록 공개할 수 없었지만, 숨은 제자로 예수님을 믿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니고데모가 유대인 남성,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며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면,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니고데모와 정반대, 땅끝에 위치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서 한낮에 물을 길으러 와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었고, 그것은 계속 진행 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에게나 차별이 없음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우물물을 좀 달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생수 (living water),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샘물까지 여인에게 꼭 필요한 복음을 제시하셨습니다. 여인은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다는 말씀에 깜짝 놀라서 예수님께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사마리아 여인의 삶이 힘겨웠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장 깊은 곳까지 찾아가셔서 그곳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 “선지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을 경계하던 여인이 예수님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가운데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나 예루살렘과 같은 장소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메시아가 왔을 때 일어날 일을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밝히셨습니다.

 

음식을 구하러 동네에 갔던 제자들이 돌아와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을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우물가에 놓아두고 동네로 달려갑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만났고, 메시아가 사마리아를 찾아오셨다는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예수님 일행과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河-

변화

제가 5월과 6월에 안식월 갖게 되어서

동안 목요 서신은 쉽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요한복음 4장을 공부하면서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새로운 사건임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땅에 가십니다.

유대인 남성들이 무시하던 사마리아 여성에게 말을 거십니다.

땅끝을 살고 있던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던 일을 예수님께서 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 전하신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은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갇혀 있던 복음을

사마리아는 물론 땅끝까지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신 사건이기에

인류 역사를 예수님 전과 후(BC and AD)로 나누는 것은 당연합니다.

 

2.

지금부터 62년 전,

아칸소(Arkansas)에서 시작된 한 잡화점이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으로 성장했습니다.

 

오클라마호마의 농장주 아들이었던 샘 월튼(Sam Walton)의 가족은

대공황을 맞아서 미주리로 이사합니다.

월튼은JC Penney에서 월 75불을 받고 종업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후 고향에 돌아온 월튼은

장인에게 빌린 2만 불을 갖고 잡화점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월튼의 나이는 스물여섯이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저렴한 가격의 다양한 상품으로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싼 가격으로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서 종횡무진 뛰었습니다.

물론, 그의 저가 정책이 주변의 상점에 피해를 주기도 했습니다.

모든 일에 명암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샘 월튼이 시작한 월마트 사업은

훗날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일으킨 기술 혁명에 버금가는

백화점 사업의 혁신이었습니다.

실제로 샘 월튼은 1982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3.

월마트가 새로운 브랜드 “Better Goods”을

시작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Whole Foods 이나 Trader Joe’s와 경쟁하기 위해서

양질의 식료품을 저가로 공급하겠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기업이 착수하는 브랜드이니

얼마나 많은 숙고와 연구를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새로운 브랜드에 창업자 샘 월튼의 이름이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세상이 그만큼 변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기업을 일으킨 창업자이고

여전히 그의 가족들이 소유는 물론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만,

변화된 세상에 맞추기 위해서 옛것을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꾸준한 변화를 통해서 월마트가 지금의 위치에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4.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표지(mark)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지위에 걸맞게 성품이 변하고 삶이 변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땅을 찾아가셔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몸으로 알려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날을 사시고

인생과 삶에 새로운 장(chapter)을 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믿음 가운데서

한 가지라도 변화되고 새롭게 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하나님,

어김없이 새날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도 함께 해주시고 도와주세요.

저도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5. 2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