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좋은 아침입니다.

 

1.
2023년은 비가 많이 내리고
겨울 폭풍도 찾아오고
심지어 베이 지역의 높은 산에 하얀 눈이 쌓였습니다.
샌프란에 온 지 올해로 18년째인데
가장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어쩌면 샌프란에도
약간의 눈이 내릴 수 있다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우박으로 바뀌었지요.

 

찾아보니 샌프란에도 눈이 내린 적이 몇 번 있습니다.
1882년과 1887년에는 3인치가 넘는 눈이 내렸고,
가장 최근 1976년에 약간의 눈이 내렸답니다.
눈이 내린 집 앞에서 썰매를 타는 사진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번 겨울 폭풍이
기후 위기의 맥락에서 진행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민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눈이 온 적은 있으니까요!
단지 경각심을 갖고 지도자들이나 정부가
현명하게 대처하길 바랄 뿐입니다.

 

무엇보다
비가 많이 내리고 날씨가 추우면
집이 없는 분들이 염려됩니다.
물가가 오르니 춥고 배고픈 분들도 계실 겁니다.
우리 사회 음지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께
정책과 도움의 손길이 임하길 바랍니다.

 

2.
그래도 어느덧 3월을 맞았습니다.

 

우리 지역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 날씨가 차지만,
교회 앞에 자두나무에 하얀 꽃이 피었습니다.
봄입니다.

 

너무 움츠리지 말고
새봄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의 순례길, 함께 걷는 순례길,
푯대를 향해서 앞으로 나가는 길이 되길 바랍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3.
2023년 새봄을 맞아서
그리고 다시 못 올 2023년 사순절 길을 걸으면서
우리 모두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어 걷는 봄 길로 살기 원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 37:4-6)

 

하나님
예수님을 따라
길을 만들고 길이 되는 참빛 식구들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2 이-메일 목회 서신)

2023년 사순절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절(Lent)을 맞이합니다. 지난 3년여 사순절 가운데 팬데믹 이전의 모습을 가장 많이 되찾은 사순절인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역사의 추를 되돌려서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팬데믹을 맞으면서 뉴-노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팬데믹 이후는 치솟는 물가를 비롯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요즘 세상은 인공지능(AI)에 매료된 듯합니다. 무슨 질문을 하든지 척척박사처럼 답해주고 심지어 아이들 숙제와 대학 논문까지 불과 몇 분 내에 써서 보여주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공 지능이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인류는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살 것 같습니다.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2천 년 전 초대교회부터 지켜왔던 사순절을 맞이합니다. 복음의 은혜와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에도 일정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변해도 하나님의 일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함께 하심을 인정하고 믿기에 변치 않는 마음으로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사순절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동참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을 앞두고 금식하면서 절제와 경건 훈련에 힘썼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사순절은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처음에는 1년 365일의 십분의 일인 36일간의 금식을 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7세기 말 또는 8세기 초에 와서 재의 수요일부터 4일을 더하여 40일을 사순절로 지키게 되었답니다. 40일이라는 날 수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간 금식하신 것(마4:2, 눅4:2), 시내 산에서 모세가 40일간 금식한 것(출24:18, 신9:9),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에 가기 전 40일간 금식(왕상19:8)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봅니다. 40일이란 기간이 성경에서 왔음을 뜻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기간이지만,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니 지나치게 금욕하면서 우울하게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사순절의 끝에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금식이 행하여졌다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꼭 금식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는 사순절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구제와 선행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기억합시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기도와 말씀에 더욱 힘쓰기 원합니다. 교회와 가정, 공동체 속에서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예배합시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눕시다. -河-

순례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존 번연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중심으로
올해 표어인 <푯대를 향하여>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우리 모두 길을 걷는 순례자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말이 통하고 생각이 같은 길동무를 만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믿음과 소망이라는 진실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판치는
허영의 도시에서 믿음이 순교합니다.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야 함을 친구 믿음이
크리스천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

 

소망은 크리스천과 함께 천국에 들어갑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소망을 잃지 않고 푯대를 향해서 걸어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친구로 삼은 크리스천은 행복한 순례자였습니다.

 

크리스천이 믿음과 소망 두 친구와 나눈
대화와 우정이 곧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하고
그 가운데 사랑이 최고입니다.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2.
지난주 점심 친교 시간,
각 테이블을 돌면서 인사를 나누는데
한 집사님이 설교를 들으면서 느낀 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순례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섰을 때,
어깨에 지고 있던 짐이 풀리고 은혜를 체험했으면
거기서 끝나거나 그 은혜가 쭉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유혹과 어려움이 계속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생명수 강가에서 쉼을 갖고 떠나는 크리스천과 소망에게
절망과 자포자기가 위력을 발휘하는
의심의 성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집사님께서 귀한 발견과 나눔을 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세심하게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3.
우리가 알다시피
신앙이나 인생이 말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일 더하기 일은 이(1+1=2)처럼 공식화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유혹과 위협이 이곳저곳에 숨어있고 계속 닥칩니다.
엉뚱한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도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많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항상 깨어서 기도”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순례길 곳곳에
쉼터, 해석자의 집, 아름다운 집(교회), 기쁨의 산
생명수 강가와 같은 ‘미리 보는 천국’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힘으로 순례길을 가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 각자의 순례길을 걷습니다.
누구도 걸어줄 수 없는 독특하고 유일한 길입니다.
“파라-클레토스(옆에서-부르시고 이야기 걸어 주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도 믿습니다.

 

올 한 해 근사하게 말 그대로 성공적으로
푯대를 향한 순례길을 걸어갑시다.

파이팅!!!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12)

 

하나님,
주님과 함께 걷는 순례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2. 23 이-메일 목회 서신)

순례자의 길 (7)

존 번연의 <천로역정 Pilgrim’s Progress>을 통해서 올해 표어인 <푯대를 향하여>에 관한 말씀을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허영의 도시에서 신앙의 동지 믿음(Faithful)이 목숨을 잃었기에 크리스천은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허영의 도시에서 믿음과 크리스천의 말과 행실을 보고 신앙의 순례길을 시작한 소망(Hopeful)을 만납니다. 다시 길동무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힘겨운 신앙의 순례길 길목마다 쉼의 장소를 허락하셨습니다. 해석자의 집, 크리스천이 성경 두루마리를 두고 왔던 쉼터, 예수님께서 주인이셨던 크고 아름다운 집에서의 환대에 이어서 생명수가 흐르는 강가를 만납니다. 강둑을 따라서 크리스천과 소망이 걷습니다. 기쁨의 길입니다. 강물을 마시니 지친 마음에 활기가 생깁니다. 강 양편에 각종 열매를 맺는 푸른 나무들이 있었는데 그 열매는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온전케 하는 능력입니다.

 

강가를 걷는데 앞에 두 길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좁은 길이고, 다른 하나는 푸른 초장이 펼쳐진 큰길입니다. 소망은 계단을 올라가고 싶었지만, 크리스천은 천국이 가까웠으니 큰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푸른 초장이 펼쳐진 넓은 길을 가는데 앞에 절망 거인과 그의 아내 자포자기가 사는 의심의 성이 있습니다. 신앙의 순례길을 시작할 때 절망의 늪에 빠져서 혼쭐이 났는데 순례길 마지막에 다시 절망을 만난 것입니다. 절망과 그의 아내 자포자기는 크리스천과 소망을 위협합니다. 신앙의 순례길을 중단하고 심지어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깊은 감옥에 가둬버렸습니다.

 

크리스천과 소망이 이름에 걸맞지 않게 믿음을 잃고 절망 가운데 빠졌습니다. 그때 크리스천이 자기에게 있는 한 가지 능력을 발견합니다. 약속입니다. 크리스천이 몸에서 약속이라는 열쇠를 찾아냅니다. 의심성에 있는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만능열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절망의 감옥을 빠져나온 크리스천과 소망이 천국이 보이는 기쁨의 산에 올라갑니다. 그곳에 있는 목자들이 크리스천과 소망을 맞이합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기쁨의 산의 주인이십니다. 목자들이 천국에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줍니다. 마지막 관문이 남았습니다. 강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거칠게 흘러가는 강물을 건널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강물은 믿음으로 걸으면 낮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깊어지는 신비한 강물입니다. 크리스천은 거의 빠져 죽을 뻔하지만, 소망이 크리스천을 격려하면서 믿음으로 강물을 건넜습니다.

 

마침내 천국문에 이르렀습니다. 나팔수들이 크리스천과 소망을 맞이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평안과 기쁨만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천국입니다. 할렐루야! -河-

이름짓기

좋은 아침입니다.

 

1.
2월 6일 튀르키예-시리아에 강도 7.8의 지진이 일어나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마켓 스트릿은 물론
샌프란시스코가 폐허가 되었는데, 그때 지진의 강도가 7.8이었습니다.
1836년부터 현재까지 베이지역에 7 이상의 지진은 4번 있었습니다.
최근의 지진은 권사님들도 기억하시는 1989년입니다.

 

기록만 보아도 이번 시리아-튀르키예 지진이
얼마나 큰 재난인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온 세계가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돕기 위해서 나섰습니다.
우리도 지난주에 구호품을 보내려고 하다가 일찍 마감되어서
다른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돕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작은 힘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2.
“튀르키예(Türkiye)”는
우리가 잘 아는 “터키(Turkey)”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튀르키예”는 “터키인의 땅” 이라는 뜻으로 이미 터키 국민들은
자신을 튀르키예라고 불렀고, “용맹한”이라는 의미도 있답니다.

 

반면, 터키는 영어 명칭으로 칠면조를 연상시킵니다.
게다가 어리석은, 겁 많은 등의 뜻을 갖이 있다니
터키 국민들이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합니다.

 

한국 언론은 대부분 “튀르키예”로 부르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영문 명칭 그대로
“터키”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 국무부 홈페이지에도
<터키(튀르키예): Turkey(Türkiye)>”라고 표기해 놓았습니다.

 

사소한 일 같지만, 어려움을 당하는 튀르키예 분들이
미국의 언론을 접한다면 마음이 상할 것 같습니다.

 

3.
이름(Name)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여럿 등장하는데
각각의 이름에 하나님의 성품과 의도가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를 에덴동산을 관리하는 동산지기로 임명하신 후에
각종 짐승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짐승들에게
각각의 이름을 주어서 그들이 고유한 생명체임을 드러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하나님 말씀대로 짐승의 이름을 지으면서
에덴동산의 모든 동물과 어울려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아담이 대신했으니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조연으로 참여한 셈입니다.

 

이름을 짓는 것,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
– 특별한 사랑의 행동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일을 위임받은 인간에게 주어진
계속되는 창조 사역입니다.

 

4.
재난을 당하면 희생자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기억하고 추모합니다.
그때 희생자의 이름을 바르게 부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름에는 고유함과 특별함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언론이 <튀르키예>라고 부르지 않고
Turkey라고 보도할 때 아쉬움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우리도 종종 땅이 흔들리는 동네에 살아가기에
이번 <튀르키예-시리아 지진>이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가족과 친지를 잃은 분들께 하늘의 위로가
집과 삶의 터전을 잃은 분들께 실제적인 도움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하나님,
말할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있는 분들의 위로와 힘이 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2. 16 이-메일 목회 서신)

순례자의 길 (6)

존 번연의 <천로역정 Pilgrim’s Progress>을 갖고 올해 표어인 <푯대를 향하여>에 관한 말씀을 나누는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믿음(Faithful)이라는 신앙의 동지를 만난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한결 힘차게 순례길을 걷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결국 지식에 그친 수다쟁이와의 대화는 신앙의 길이 요란한 빈 수레가 될 수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허영의 도시(Vanity Fair)”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사고파는 시장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표출된 곳입니다. 허영의 도시를 주관하는 세 사람은 귀신의 왕들인 바알세불, 아폴리온, 그리고 군대(Legion)입니다. 화려해 보이지만, 크리스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 가셔서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는 욕망과 물질에 관한 시험,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구해 줄 것이라는 하나님 아들로서 명예에 관한 시험, 마귀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권력에 대한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이처럼 허영의 도시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물질, 명예, 권력이 판치는 곳입니다.

 

크리스천과 믿음은 허영의 도시에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유혹에 말씀과 신앙으로 담대하게 대처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재판까지 받게 됩니다. 재판 과정에서 믿음이 순교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허영의 도시 사람들이 믿음을 죽인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간신히 살아남습니다.

 

허영의 도시에서 믿음과 크리스천이 꿋꿋하게 버텼습니다. 자신이 믿는 신앙을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어떤 한 사람이 감동을 받고 신앙의 순례길을 따라나서기로 결심했는데, 그의 이름이 소망(Hopeful)입니다. 믿음에게 소망이라는 새로운 길동무가 생긴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사심(By-ends)을 만납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사심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하나님만 믿는 것은 어리석고 세상의 즐거움도 적당히 맛보면서 신앙의 길을 갈 것을 유혹합니다. 믿음과 소망은 이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길을 가다 보니 은광(Silver-mine)도 만납니다. 은광에 가는 길목에서 예수님을 잘 믿다가 세상으로 나간 데마가 크리스천을 유혹합니다. 힘들지 않게 돈을 벌 수 있는 은광이 가까운 곳에 있으니 잠시 와서 재물이 주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만났던 사심과 그의 친구들은 데마의 말을 듣고 은광으로 향합니다. 그곳이 멸망의 길인 줄도 모르고 잠시 잠깐의 욕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크리스천과 소망은 허영의 도시와 은광을 뒤로하고 다시 순례길을 떠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을 뿌리치는 것이 쉽지 않은데 크리스천은 세상의 유혹을 근사하게 극복했습니다. -河-

그리스도의 편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시편 23편을 설명하면서
양의 시력이 -10에 가까워서 1미터(3ft) 정도 앞만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진으로 재난 가운데 있는 터키(튀르키예)에서
목자들이 한눈을 판 사이에 양 한 마리가 절벽으로 뛰어내리자
500여마리의 양들이 따라서 절벽으로 뛰어내렸다는 예전 외신 보도도 생각났습니다.

 

앞에 가는 양들의 궁둥이만 보고 가니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양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목자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양뿐만 아니라
우리도 한 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많은 것을 예측할 수 있다지만,
예측불허의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앞서가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신앙의 길을 갑니다.
믿음이 주는 유익이고 힘입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재를 믿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요,
믿음은 우리 속에서 생기는 ‘느낌’일 뿐이라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실재와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분들께
만족할 만한 답을 드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해 내는 통로가 되길 바랄 뿐이지요.

 

하나님을 눈으로 본 사람이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요일 4:12)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예수님 말씀도 기억합니다(마5:16).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2.
“어떻게 살 것인가?”
– 우리 모두의 고민입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도 우리 몫이니
더욱 고민이 깊어집니다.

 

억지로 할 것이 아닙니다.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질 것도 아닙니다.
자칫 신앙이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이 지고 가던 어깨 위의 짐이 되거나
겉으로만 빛과 소금인 척하는 위선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계속 생각하고
예수님의 흔적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길 기도하고 노력할 뿐입니다.

 

3.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몸)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비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필요 없는 것, 예수님을 따라 사는데
거추장스러운 것을 비우고 덜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운 곳을 예수님 마음으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고 자라가는 존재(being)의 채움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순간순간 많이 생각하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매사에 던져야겠습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세상에 펼쳐 보이기 원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참빛 식구들의 발걸음을 응원합니다.ㅇ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12)

 

하나님,
우리 생각과 몸짓 어느 한 곳에라도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2. 9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