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기도: 겟세마네 기도 (4)

힘을 더하더라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가셔서, 하나님의 뜻(계획)이라면 앞에 닥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옮겨주시길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솔직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셔야 할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보여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이뤄지길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과 함께 우리 모두 닮아야 할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습관을 쫓아서 감람산에 가셨습니다. 감람산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특정한 장소, 그곳(the place)이 있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소원을 솔직히 간청하신 후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러나 기도>로 마무리하셨습니다.

 
누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독특합니다. 마태과 마가와 달리 예수님의 기도가 한 번뿐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힘을 더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43절).

 
누가복음에 천사가 등장하는 본문이 몇 군데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을 사가랴와 마리아에게 각각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천사의 거룩한 영광으로 오신다고 예고하셨습니다(9:26). 거지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거지가 죽었을 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16:22).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한 우리의 모습은 천사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20:36).

 

구약 성경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을 피해서 광야로 나갔을 때, 로뎀 나무 아래서 죽음을 생각하는 엘리야에게 힘을 준 것도 천사였습니다(왕상19:5-8). 중간기 문서인 마카비서에도 엘리에젤이라는 제사장이 순교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천사가 내려와서 그를 돕는 장면이 나옵니다.

 
처럼 누가복음은 물론 이스라엘 전통에서 천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使者, messenger)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에 내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고, 하나님 백성을 돕습니다. 그 천사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도우신 것입니다. 기도 역시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배웁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도 천사의 도움과 하늘의 힘이 임하길 기대합니다. -河-

 

그러나 기도

좋은 아침입니다.

 

1.
2022년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는
누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가 본문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습관대로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계획)이라면
앞에 있는 잔을 옮겨주시길 요청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 22:42)

 

2.
저는 주일 설교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그러나 기도>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듯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Abba)”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솔직하게 구하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최선이라는 믿음에서 “그러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기도를 예수님처럼
“그러나 기도”로 마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신앙입니다.

 
3.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드린 기도의 응답 여부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신앙이 좌에서 우로 크게 움직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기도가 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내가 드린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나님의 계획도 나의 계획에 맞춰서 조정되길 바라는
이기심이 우리 기도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 여부, 신앙의 확신이
하나님이 아닌
내가 드린 기도의 응답에 매이게 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신앙은 나에서 하나님께 중심축을 옮기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를 나누면서
기도가 습관이 되고
참빛 식구들께 “그러나 기도”가 온전히 장착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 22:42)

 

하나님,
우리의 기도와 신앙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16 이-메일 목회 서신)

2022 기도: 겟세마네 기도 (3)

아버지의 뜻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그곳(the place)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부탁하신 후에 조금 더 나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눈에 그립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신 겸손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순종입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시는 모습입니다.
지난 두 시간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예수님 닮기를 원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입니다. 우선, “아버지여”하고 하나님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대상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교제를 이어 오셨습니다. 모든 종교마다 기도하는 예식이 있지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있음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요즘 시대에 아버지라는 표현이 가부장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아버지는 모든 것을 주관하고 책임지시는 가장, 왕, 주인을 뜻했습니다. 아버지를 성적인 편향으로 읽기보다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둘째는 예수님 앞에 닥치는 잔을 옮겨주길 기도하십니다. 곧 잡히셔서 심문받으시고 결국 십자가에 죽게 되실 예수님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예수님도 수치, 조롱, 핍박, 죽음 앞에서 고뇌하고 괴로워하셨다는 사실에 깊은 공감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고,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가는 길을 가셨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공감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키케로와 같은 당대의 사상가들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로마의 철학자들이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과 비교하면서 예수님께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지 않으셨다고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간과한 생각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고백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알고 계셨기에 그 길을 가시겠답니다. 예수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겠다는 예수님의 <그러나> 기도와 무릎 꿇은 모습이 일치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이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 역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고백으로 모든 기도를 마무리하기 원합니다.-河-

 

감사

좋은 아침입니다.

 

1.
찬송가 288장을 작사한
시각장애인 패니 크로스비에 대한 말씀을 지난번에 나눴더니
아내가 우연히 재미 금융인 신순규씨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을 유튜브에서 보았다고 알려줍니다.

 

신순규는 녹내장과 망막 바리라는 질병으로
아홉 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에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갖는 직업이었던
안마사가 되는 것보다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라서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점자책을 손수 만들어서 아들에게 주었고
어머니의 수고에 감사한 아들은 그것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열다섯 살에 홀로 미국에 유학와서 피아노 수업을 하다가
일반 학교로 전학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만난 미국 양부모님의 격려와 도전이 큰 힘이 되었고,
일반 학교 선생님들도 신순규라는 학생을 위한 특별 교재를 만들고
양궁 수업까지 시켜 주었답니다.

 

앞을 못 보지만 활달하고 도전적인 성격 덕분에
학생회장도 하고, 결국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에 입학했고
MIT에서 석사과정을 밟다가 월스트리트와 연결되어서
27년째 세계적인 금융회사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2.
이분에 대해서 검색해 보니
이미 한국에서 두 권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가운데 2021년 팬데믹 기간에 출판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을 전자책을 구입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헬렌 켈러와 패니 크로스비가 그랬듯이
결코 자기의 장애(disability)를 장애가 아닌 능력(ability)으로 바꿨습니다.
앞에 있는 세 가지 철자 dis를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겠다는 결심(determination),
장애인이 아닌 우리 사회의 일원이라는 정체성 (identity)
자신만의 기술(skill)로 바꾸면서 가능성의 문을 열었습니다.

 

눈이 두 개를 넘어서 세 개 네 개여야 하고
쏟아지는 정보를 읽고 분석해서 투자를 결정하는 월스트리트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신순규씨가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감사”라고 했습니다.

 

불평하고 절망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이분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감사하면서
앞에 놓은 과제와 삶을 마주하고 해결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았습니다.

 

3.
신순규씨는 특별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두 신순규씨가 될 수 없고 그렇게 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장애와 역경을 이겨내고
자기만의 삶과 직업을 개척한 분을 보면서
인간의 가능성이 무한함을 발견합니다.
은근히 부끄러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때로
의기소침하고 주춤거릴 때가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삶이 쉽지 않고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느낌도 듭니다.
그때, 장애를 이기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분들의 삶이 도전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줍니다.
앞으로 나갑시다.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 갑시다.
길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10)

 

하나님,
어려움과 방해물을 만났을 때
그것을 훌쩍 뛰어넘을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9 이-메일 목회 서신)

2022 기도: 겟세마네 기도 (2)

무릎을 꿇고

 

우리도 누가복음 속의 예수님처럼 기도가 습관이 되길 바라면서 한 주간 살았습니다. 습관은 생각하고 의도해야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저절로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기도의 자리로 나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수시로 또는 무심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 하나님 앞에서 부족함을 뉘우치는 회개의 기도, 필요한 것을 구하는 간청, 이웃을 위한 기도를 저절로 실천합니다. 기도가 습관이 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가신 예수님께서 늘 가시던 “그곳(the place)”에 도착하자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부탁하신 후에, 돌을 던질 만한 곳까지 조금 더 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습관처럼 기도하기로 정해 놓으신 특정한 장소, 예수님의 기도처였습니다. 40절의 “유혹”과 마지막 46절의 “시험”이 짝입니다. 우리 성경은 유혹과 시험으로 다르게 번역했지만, 같은 헬라어 <페이라스모스>가 쓰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곧 유혹에 넘어간 결과였습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이 요구”하고 있다고 하셨듯이(21:31),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부탁하십니다. 끝까지 가능성을 놓지 않으시고, 제자들의 실패를 안쓰럽게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것을 방해합니다. 믿음을 사방으로 흩어 놓습니다. 그것을 이기는 비결이 기도입니다.

 
마태/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은 한곳에 머물게 하시고, 세 명의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를 데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혼자 더 깊이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홀로 가신 것을 강조합니다. “돌 던질 만큼”의 거리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잠이 들었다니 유혹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항복의 표시입니다. 또한 특별하고 다급한 기도를 위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눈에 그리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됩니다. -河-

 

예외가 없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과 올 초에
고난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햇볕이 비치고 비가 내리듯이
고난도 맥락 없이 찾아옴을 배웠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만 고난에서 면제된다면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자연법칙은 망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크고 작은 고난에서 면제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면제되는 곳(시간)은
이다음 완성된 하나님 나라뿐입니다.
그곳에는 의와 기쁨과 평화만 있고 고난은 없습니다.

 

고난이 면제되는 곳이
이다음 완성될 하나님 나라뿐이라면,
세상을 살면서 고난에서 면제되길 기도하기보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고난을 이길 힘과 지혜를 주시길 구해야겠습니다.
고난을 믿음으로 마주하고, 파도를 타듯이 뛰어넘어야겠습니다.

 

2.
저도 예외 없이
5월 초에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2-3일은 열도 오르고 목도 아프고
두통과 몸살기로 몸이 무거웠습니다.

 

심한 증세는 아니었지만,
작은 집에서 세 식구가 격리해서 지내는 것이나
주일 예배를 저 혼자 온라인으로 전송하는 등 한 차례 큰일을 겪었습니다.

 

코로나를 앓으면서,
세상에 예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전염병에 노출되어 있고, 아무리 조심해도
언제 어떤 경로로든 감염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이겨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3.
다시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그동안 감염되지 않은 분들을
도미노를 쓰러뜨리듯이 차례로 감염시키는 느낌입니다.
이토록 끈질긴 팬데믹에서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지요!

 

저는 교회에 다음과 같이 광고했습니다:
“가능하면 조심하셔서 코로나에 걸리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행여나 감염되면 너무 겁내지 말고, 코로나와 마주하시고,
증세가 심하고 기저 질환이 있으시면 의사에게 코로나 치료제를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맥락 없이 코로나가 찾아옵니다.
까닭 없이 고난도 닥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답게
담대하게 마주하고, 싸우고, 넉넉히 이겨내야 합니다.
그 힘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주시는 힘으로
찾아오는 삶의 파도를 훌쩍 뛰어넘기를 원합니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시편 34:17)

 

하나님,
예외 없이 닥치는 어려움에서 건져주시고, 이길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2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