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고 담대하라 (3)

시편 27편 7-10절

 

시편 27편에는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지은 시라는 뜻도 있고, 다윗을 위한 시라는 뜻도 있습니다. 전자는 다윗이 직접 지은 시임을 강조하는 해석이고, 후자는 다윗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누군가 다윗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든지 시편 27편은 다윗의 신앙과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별명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하나님 마음속에 다윗이 있고, 다윗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자신은 멋진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텐트에 있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에게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삼하7:3).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음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시편 27편 속의 다윗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에 걸맞습니다. 원수들과 대적들이 군대처럼 쳐들어왔습니다. 다윗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자신을 숨겨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언젠가 자신을 원수들보다 더 높이 세워주실 것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구원이 되시고, 생명의 능력이 되시는데 사람이 왜 무섭냐고 담대히 선포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확실하게 마음에 모신 다윗의 고백이 아름답고 멋집니다. 닮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시편 7-10절은 하나님께 드리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넘어서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사랑 고백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큰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아이가 큰소리로 “엄마”하고 찾는 것이 생각납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찾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살아가는 공식이었습니다.

 

다윗은 평생에 하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윗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체험한 하나님 사랑에 근거해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7절)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8절)고 하실 때,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8절)라고 진심으로 응답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 일등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의지했습니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고 고백할 정도입니다. 다윗의 믿음이 부럽습니다. -河-

선지자 에스겔

좋은 아침입니다.

 

1.

<생명의 삶>의 순서에 따라서

아침마다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편의상 순서만 따를 뿐, 제가 묵상한 글을 보내고,

참빛 식구들도 본문을 읽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시길

제안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삶>에 실린 본문 해설이

마치 해답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우리만의 성경 읽기입니다.

 

<생명의 삶>을 통한 성경 읽기의 유익은

아침마다 조금씩 읽다 보면

8-9년 마다 성경을 통독한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로 모이지 못했던 2018년부터

<생명의 삶>을 읽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2-3년 후면 우리 모두 성경을 통독하게 됩니다.

 

제가 갖고 있는 기도 제목 가운데 하나가

모든 참빛 식구들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을 통독하는 것입니다.

이 꿈이 이뤄질 날이 멀지 않았네요!

 

2.

이번 달에 읽기 시작한 본문이

구약성경 에스겔서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는 읽기가 어렵습니다.

주로 심판 메시지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범한 비슷비슷한 죄들을 지적합니다.

우리와 매우 다른 시대적인 간격도 있고,

아무래도 심판 메시지를 읽는 것이 불편합니다.

에스겔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에스겔 (“하나님이 강하게 하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10년 전인 주전 597년에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제사장 가문 출신인 에스겔이

바빌론 그발 강가에서 신비로운 환상을 보면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로 준비하는 과정이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좌우로 누워서 420일을 지냈고,

심판의 말씀이 가득 쓰인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지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에스겔의 몸속에 임하고,

에스겔이 선지자로 완전히 거듭 태어났습니다.

 

3.

에스겔의 예언을 듣게 될 청중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가증하고 완악했습니다. 성전에서도 우상을 섬길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고

듣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길 부탁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끈질긴 열심입니다.

 

질투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한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확률은 “제로(0)”에 가까웠지만,

하나님 말씀은 선포되어야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신앙이나 삶이

허공을 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기는 순간입니다.

 

그때도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길을 가야 함을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배웁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몸으로 느끼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3:27)

 

 

하나님,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 안에 머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24. 이-메일 목회 서신)

강하고 담대하라 (2)

시편 27편 4-6절

 

시편 27편을 통해서 “강하고 담대하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시편 27편의 처음 세 구절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1절은 시편 27편의 마지막 14절과 함께 시편 27편의 샌드위치 구조를 형성하는 시작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절). 하나님께서 빛과 구원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능력이 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대상이 없다는 강력한 고백입니다.

 

시편 27편의 상황은 깜깜한 어둠입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달려듭니다. 대적들과 원수들 그리고 진을 치고 있던 군대들도 달려듭니다. 아슬아슬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대적들이 스스로 실족해서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하심이 임했습니다. 그러니 시편 기자는 태연합니다. 평안합니다.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했습니다.

 

오늘은 시편 27편 4-6절을 공부하겠습니다. 4절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은 온데간데없고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평생소원이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23편 마지막 절이 생각납니다:“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는 하나님 백성이 누리는 평안이고 자신감입니다.

 

5절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미리 확신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뒤에서 악한 사람이 쫓아오는데 막다른 길을 만났습니다. 꼼짝없이 잡혔는데, 하나님께서 초막 속에 숨겨 주셨습니다. 초막은 앞에서 나온 “여호와의 집”과 함께 하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모세의 인도로 광야에서 40년을 지낼 때, 이스라엘은 초막을 짓고 그곳에 법궤를 모시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숨기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특별히 임하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적들이 물러가면, 높은 바위 위에 세우실 것을 기대합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피합니다. 바위 위에 세워주실 하나님의 날도 찾아올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하나님 백성의 확신입니다.

 

6절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시편23:5). 원수의 머리보다 시편 기자의 머리가 더 높게 올려질 것입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장막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즐겁게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바위 위에 굳게 서고, 원수들보다 높이 올려질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믿음의 힘입니다.-河-

아레테

좋은 아침입니다.

 

1.

“덕후”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어떤 분야에

깊은 열정을 쏟는 사람을 일컬을 때

종종 이 단어를 사용한답니다.

 

원래는 197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을 지칭하는 ‘오타쿠’에서 유래했지만,

이제는 단순히 ‘광적인 팬’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한 가지 대상에 진심을 다하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예수님의 덕후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연속 설교를 마쳤으니,

십자가 덕후들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2.

헬라어 “아레테”는

‘탁월함’ ‘최고의 상태’ 등을 뜻합니다.

개역 성경은 이 단어를 “덕(德)”으로 번역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기 재능이나 실력을 최고로 발휘한 상태입니다.

운동선수들이 갈고닦은 실력을 최고로 발휘해서

신기록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도덕적으로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네 가지 덕(정의, 지혜, 용기, 절제)을

추구하고, 갖춘 모습입니다.

 

이처럼 헬라어 “아레테”는

최고, 극치, 최선, 정상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3.

저는 예수님의 아레테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철학의 아레테는 ‘정상에 오르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아레테는

더 낮은 곳, 더 아픈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최고의 아레테, 영원한 아레테를 이루셨습니다.

 

4.

우리의 아레테는 무엇일까요?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남과 비교는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장착해 주신 재능과 은사를

최고로 발휘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 철학이 강조했던

“정의, 지혜, 용기, 절제”를 추구합니다.

동양에서 강조하는 “덕”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아레테, 탁월함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갑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친절), 충성 온유와 절제(갈 5:2-23)를

우리의 삶과 성품 속에서 맺어갑니다.

기독교인의 아레테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탁월함의 자리,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진짜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아레테]누리게 주신 분이십니다. (벧후 1:3, 새번역)

 

 

하나님,

하나님 주시는 능력으로

아주 근사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17. 이-메일 목회 서신)

강하고 담대하라 (1)

시편 27편 1-3절

 

코로나 팬데믹이 지나고 교회에서 모이기 시작하던 2022년 가을에 “두려워 말라”는 주제로 두 달여 연속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2020년 3월부터 교회가 문이 닫히고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거의 2년 가까이 교회에서 모이지 못했습니다. 과연 교회에서 다시 모여 예배할 수 있을지 막막했던 어둠의 터널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게 우리는 지구 전체를 뒤덮었던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쪽에 두려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변종이 나타났다는 뉴스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을 극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갖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지금도 유튜브에 있으니, 언제든지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습니다. 세상은 전쟁에 휩싸였습니다. 2022년 연초에 시작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3년도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두 나라에서 25만 명 이상의 군인들이 죽었습니다. 민간인 사상자의 숫자도 수만 명에 이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에 이어서 이란과의 전쟁도 아직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그렇지 조금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전쟁의 참혹함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텍사스에서 새벽에 갑자기 내린 폭우로 캠핑과 여름 휴가를 즐기던 아이들과 가족들 300명 가까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이지만, 갑자기 내리는 폭우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의 동부는 살인적인 더위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에 이은 기후 위기를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도 녹록지 않습니다. 물가가 너무 많이 올랐습니다. 세상은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도 사라졌고, 보장되고 확실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교회도 팬데믹 이후에 예배 참석 숫자부터 예전 같지 않습니다. 팬데믹 직전에 교회가 부흥했었는데, 많은 교인이 귀국하고 직장을 찾아 떠났습니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에 새로 오는 한인의 숫자가 매우 줄었습니다. 몸이 편찮으셔서 교회에 오지 못하시는 권사님들도 계십니다. 그래도 자리를 지키고 교회를 세우시는 참빛 식구들이 계시니 든든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시편 27편 1절 말씀에 힘이 있습니다:”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염려와 근심, 불안과 두려움이 일상이 된 시대에 시편 27편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河-

자기 십자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에는

십자가에 대한 연속 설교를 마친 후,

잠시 숨을 고르며 찬송가를 해설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에 깃든 이야기였습니다.

 

설교 말미에, 제가 좋아하는 예화를 소개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메고 산꼭대기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황금 십자가, 꽃으로 장식된 십자가 등

여러 십자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원하면 십자가를 바꿔서 지고 갈 수 있다는 예수님 말씀에

처음엔 황금 십자가를 들어보았지만, 너무 무거웠고,

다음엔 장미꽃으로 된 십자가를 선택했지만,

조금 가다 보니 가시에  찔려 포기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메고 온

십자가를 다시 지고 산을 내려가면서

그렇게 감사하고 기뻐했다는 예화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예화가 좋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그리고 앞으로 주어질 인생길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임을

다시금 되새기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2.

물론, 이 예화가 오늘날에도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실에 안주하라는 메시지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거운 건 가볍게, 불편한 건 편하게 바꿔서

최고로 만드는 시대를 살아고 있습니다.

문제를 감내하기보다는 해결할 때 경쟁력을 갖춥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 예화는 수동적이고

현실 순응적인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시대가 많이 변하고 있네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속담을

해학적으로 바꾼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는 “아는 길은 그냥 곧장 가라”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는 “가는 말이 고우면 얕본다”

“시작이 반이다”는 “시작은 시작일 뿐, 이미 늦었다” 등입니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한 해석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시대에 맞는

지혜와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을 배우고 장착하면서,

변화에 대처하고 더 나은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화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화에서 주목한 것은

여러 가지 십자가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 지점입니다.

결국에는 처음에 메고 온 십자가에 마음을 확정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산을 내려갑니다.

 

우리는 종종

남과 비교하며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런 십자가를 지고 있을까?’

‘왜 내 인생은 이리 무거울까?’

 

처음 마음을 꼭 간직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남과 비교하다가, 마음이 흔들리면 지는 겁니다.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우리 각자가 지고 가는 십자가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모든 지킬 만한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장 23절)

 

하나님,

십자가 붙들고

흔들림없이 주어진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10. 이-메일 목회 서신)

찬송가 해설 (14)

내 너를 위하여 (찬송가 311장)

 

십자가에 관한 연속 설교를 시작하면서, 찬송가 <갈보리산 위에>를 소개하였습니다. 아이오와 출신의 조지 버나드(1873-1958) 목사님은 십자가의 은혜에 관한 찬송가를 만들고 싶었지만,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미시간에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는데, 가사가 생각나면서 단숨에 써 내려간 찬송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버나드 목사님 자신이 갈보리산 현장에 있다고 생각하고 쓰신 은혜로운 찬송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연속 설교를 마치면서 오늘은 <내 너를 위하여>라는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찬송가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끝을 맺습니다:“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1절).

 

오늘 읽은 빌립보서 2장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고 자신을 비우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7).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케노시스(비움)”입니다. 케노시스라는 헬라어에는 “헛된 것이 되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케노시스(자기 비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종의 형체, 즉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군중들 앞에 세워놓고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19:5)라고 소개합니다. 예루살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외칩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부활로 이어질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비워서(케노시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헛된 것(케노시스)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배웠듯이 속죄, 화해, 승리였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찬송가 <내 너를 위하여>는 프란시스 해버갈(Frances Havergal, 1836-1879)이 “이 사람을 보라”에 해당하는 라틴어 <에케 호모 ecce homo>라는 주제의 그림을 보고 만들었습니다.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군중 앞에 서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림 아래에는 “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는데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내 너를 위하여>라는 찬송이 탄생했습니다. 훗날, 필립 블리스의 <케노시스>가 찬송가의 곡조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