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11)

평안

 

한 해를 돌아보면서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처음으로 함께 모여서 감사예배를 드리고 추수감사절 만찬을 갖습니다. 그동안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 원합니다.

 

팬데믹을 지내면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염려와 불안이 생겼습니다. 연초에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계속되고, 물가는 치솟고, 경기 침체가 온다는 소식까지 들립니다. 그러니 팬데믹 이후의 삶이 녹록치 않아 보입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365번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두려움은 우리 안에 늘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매일같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두려움을 마주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세상이 불확실할수록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신앙의 기본인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서, 성경에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그동안 나눈 말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도 기억합니다:“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스바냐 선지자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을 다음과 같이 격려했습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습3:16). 이사야 선지자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끝까지 견딜 것을 당부했습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바빌론과 페르시아 제국에서 살아남은 다니엘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도 기억합니다. 다니엘이 기도하던 첫 날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천사를 보내서 세상을 구원하실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단10:12).

 

참새 한 마리의 목숨까지 간섭하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을 믿으니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마10:31), 폭풍 속에서 쩔쩔매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도 기억합니다:“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막6:50).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지난 석달 가까이 살았습니다.

 

오늘 나눈 말씀도 강력합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치든지,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평안을 누리기 원합니다.-河-

성경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예배의 교독문은
시편 104편이었습니다.

 

시편 104편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와 대비되는
시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에 좋은 선한 창조였습니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을 묘사하는데
그 표현이 구수하고 소박합니다.
아이들이 그려 놓은 그림처럼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과학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기 쉬운 감수성이
시편 104편 속에 깃들어 있어서
읽다 보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2.
시편 104편이 묘사하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몇 가지 창조 세계의 모습들입니다.
천천히 눈에 그리면서 읽으면, 말씀이 그림 언어로 다가옵니다.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3절)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8절)

 

“그가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13절)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삶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20절)

 

게다가, 시편 104편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30절).

 

3.
성경은 그림책으로 말하면
흑백이 아닌 천연색의 다채로운 그림입니다.
밝은 색깔, 어두운 색깔,
기쁜 색깔, 우울한 색깔,
감사한 색깔, 불평과 탄식의 색깔
– 이 모든 것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의 말로 하나님의 창조를 표현하고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너무 딱딱하지 않게
객관적인 또는 과학적인 진실에 얽매이지 않고
시편 104편 말씀처럼,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듯이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을 다양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묘사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성경 속에 푹 빠지고
말씀 속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104:33)

 

하나님,
말씀의 바다에 풍덩 온 몸을 담그는 은혜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17 이-메일 목회 서신)

두려워하지 말라 (10)

폭풍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우리 안에 깊게 드리운 불안과 두려움을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다스리고 몰아내길 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신약성경보다 구약성경에 더 많이 등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질곡의 역사를 걸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그릇 행해서 자초한 실패의 역사였습니다. 게다가 제국에 둘러 쌓인 이스라엘의 삶은 언제나 불안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깨우치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힘을 주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지난 주부터 신약 성경에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쳐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하찮은 참새 한 마리의 생명까지 주관하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 호수 건너편 벳세다로 서둘러 보내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달려들었기 때문입니다(요6:15). 예수님께서 손수 군중들을 해산시키시고 자신은 산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날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는데 갑자기 바다에 폭풍이 일었습니다. 바람이 워낙 강해서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서 쩔쩔매며 노를 젖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해서 폭풍 속에서도 소리를 칩니다. 제자들 곁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50절). 예수님께서는 폭풍속에 있는 제자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배에 오르시니 폭풍이 잠잠해 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것을 눈으로 보고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폭풍이 찾아오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아직 마음이 둔해서 그렇습니다. 배가 도착한 게네사렛 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침을 받는 장면과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위를 걸으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바다와 폭풍을 예수님께서 잠잠케 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河-

 

끄덕끄덕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구약성경 레위기를 읽고 있습니다.

 

레위기라는 말은
“레위인과 관련된”이라는 뜻의 라틴어
<레비티쿠스 Leviticus>에서 왔습니다.
영어도 제목도 <Leviticus>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레위인들 또는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로서
광야 시대에는 성막에서
솔로몬 이후에는 성전에서 제의를 전담했습니다.

 

레위기는 제목에 걸맞게
레위인들 즉 제사장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와 관련된 규정들이 많습니다.

 

2.
지난 3주 동안 배운 레위기 첫 세 장에는
소, 염소와 양 그리고 새를 불에 태워 드리는 번제(burnt offering)
곡식을 빻거나, 조리해서 드리는 소제(grain offering)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화목제(peace offering)가 나옵니다.

 

희생 제물은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기에
소와 양에게 안수하면서
우리의 허물과 죄는 물론, 우리 자신을 제물에게 이전시킵니다.

 

제물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매우 세심했습니다.
제물을 직접 죽이고 (죽음은 꼭 필요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결됨)
가죽을 벗기고, 제물을 정성껏 분리해서 제사장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나오는 예배자의 마음과 자세를 새롭게 배웠습니다.

 

3.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소, 양과 염소, 새,
그리고 곡식까지 다양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은
대가족이나 부족의 경우나 가능했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부분 서민은 새나 곡식을 갖고 왔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제물을 드리든지
레위기에서 알려주는 절차를 지켜서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가 됩니다.
제물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화목제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내장의 기름(당시는 최상의 것)과
콩팥(고대 사회에서는 마음의 자리라고 생각함),
그리고 제사장 몫을 제외하고
화목 제사를 드린 당사자들이 나눠 먹습니다.

 

감사의 예물을 드린 후에
거룩한 제물을 갖고
다 함께 모여서 기쁨의 식탁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4.
레위기의 제사법들은
우리 신앙이 과하거나, 분에 넘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역임을 알려줍니다.

 

신앙을 지나치게 신비롭고 특별한 것으로 만들다가
상식과 합리성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것은 자연스럽고 상식적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 2:2)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자연스러우면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향기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10 이-메일 목회 서신)

두려워하지 말라 (9)

섭리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이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부탁하시는 말씀입니다. 장차 제자들은 세상의 미움을 받고 심지어 세상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입니다. 그래도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이니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것을 부탁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0:1-23절).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이라고 했으니 예수님과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제자들에게 험한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주인 되신 하나님만 두려워할 뿐입니다.

 

첫째로, 감춘 것이 모두 드러나고, 숨은 것이 모두 알려질 것입니다.  결국에는 무엇이 진리이고 누가 옳은 지 확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미움과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담대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큰 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몸은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몸과 삶은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 이후를 주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고, 몸과 영혼을 모두 지옥에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삶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실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까지 아십니다. 참새는 작고 헐값에 팔리는 새입니다. 앗사리온은 우리 식으로 페니에 해당합니다. 영원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참새 두 마리의 거래 가격까지 아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아주 작고 하찮은 곳까지 임한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작은 것까지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참새보다 귀합니다. 그렇다면 참새까지 돌보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시인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인정하고 함께하실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담대하게 하나님 백성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크신 하나님께서 작고 작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참새 한 마리와 머리카락까지 세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기에 큰 것은 물론 작은 것까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입니다.-河-

재난 가운데

1.
지난 주말,
조국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참사가 있었습니다.

 

팬데믹 이후,
마스크를 벗고 맞이한 핼러윈 주말에
150명이 넘는 아까운 청춘이 목숨을 잃었으니 말입니다.

 

핼러윈 날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독교인들은
감정이입 없이 나름 냉철하게(?) 이태원 참사를 판단했을 것입니다:
“왜 핼러윈을 지킬까? 왜 그곳에 갔을까? 쯧쯧”

 

물론, 내 자식이, 형제자매가, 친구가 그곳에 가서 희생되었다면
참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180도 바뀌었겠지요.
조금 미숙하고 이기적 관점입니다.

 

사고 전체를 관망하듯이 보지 말고
사고 속으로 들어가서
희생당한 분들의 마음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세심함이 요청됩니다.

 

2.
하루는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난 특별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서
그 피를 제물에 섞는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죽은 사람들이
그럴 만한 죄를 지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속단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비통한 일을 당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외의 답변을 하십니다:
“너희들, 죄가 작아서(없어서)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죽은 사람들에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나쁜 것이다.”
누구든지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실로암 망대 사고를 아실 정도로
시사에 밝으셨고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죽은 열여덟 명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커서 죽었겠냐고 반문하시면서
“No, 아니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죄와 상관없는 재난입니다.
일종의 사고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죽은 사람에게 죄인 프레임을 씌우고
살아있는 자신들이 의로운 척,
무엇보다 살아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일침을 가하신 것입니다.

 

의기양양하게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멋쩍어서 자리를 떴을 것입니다.

 

3.
두 가지 사건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단어가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누구도 회개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이같이 망하리라”)은
사고와 희생으로 죽은 특정한 죽음이 아니라
누구나 가는 죽음의 길을 가리킵니다.

 

재난 또는 사고를 보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길을 떠올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다시 조율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대명제 앞에 겸손하고
적극적으로 회개하라는 당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를 두고,
빌라도와 같은 악한 인물이 사라지는 것,
실로암 망대를 허술하게 지은 건축가들이 대가를 치르는 것,
백성들이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확보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찍어 버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기억합니다(눅13:6-9).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임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4.
자연재해 또는 사고와 같은 참사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두고 정죄하지 않으시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회개라는 커다란 의무를 부여하셨습니다.

 

유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분들에게 완전한 쾌유가 임해서
더욱 씩씩하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5)

 

하나님,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