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

예루살렘 회의: 현명한 결정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여행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과 무엇보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을 보고하고 안디옥 교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에 내려왔습니다. 이들이 교회로 들어와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교리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믿었어도 이방인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고 몸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차별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과 심하게 다투고 논쟁을 벌였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자문과 판단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들을 환영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여행 중에 임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하면서 다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안디옥에 내려온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에게도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하고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보다, 구약시대부터 전해지는 전통에 얽매여 있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나서서 로마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정에 임한 복음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은혜와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이방인들 가운데 행하신 성령의 역사, 기사와 이적을 소개합니다. 자기들이 직접 경험한 것을 증거하니 베드로, 바울과 바나바의 증언에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구약 성경(아모스 9:11-12)을 갖고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대신, 우상의 더러운 것, 생명과 같은 피는 삼가고, 음행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삼고,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문서로 정리해서 공포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은 장차 이방인 선교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현명한 판단과 결정으로 복음의 문이 온 세상과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할렐루야! -河-

한 가지 의도

좋은 아침입니다.

 

1.
팬데믹이 계속되면서
아무래도 신앙의 끈이 점점 느슨해집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안간힘을 쓰지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여러 방향으로 분산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신앙이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립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들이
하도 많아서 신앙이 치고 올라 틈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의 집에 물이 새고, 흔들거리고
여기저기 부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알면서도 당하는 것입니다.

 

2.
엊그제 목사님 모임에서
“순수한 의도 a single intention”라는 제목의
웨슬리 설교 한 편을 읽고 생각을 나눴습니다.
저는 “한 가지 의도”라고 옮기고 싶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는
두 가지 마음을 품는 것을 경고하고
한 가지 의도만 꼭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산상수훈 말씀을 본문으로
우리의 눈이 한 곳을 바라보길 부탁합니다.
눈이 바라보는 곳,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우리 생각의 목적지라는 것입니다.
그곳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
세상일도 하나님 안에서 실행하고,
먹는 것, 말하는 것, 심지어 오락의 영역에서도
하나님 생각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고 생각하든지
혹은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 한 분만이 여러분의 목적이 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 만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 만을 사랑하십시오. (웨슬리 설교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하나님 만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 만을 사랑하십시오.

 

3.
웨슬리 시대와 우리 시대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 삶이 훨씬 복잡해서
생각할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니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참빛 식구들께 부탁하고 싶습니다.
“처음 믿음, 순수한 믿음”을 마음에 품고 한 가지 의도에 집중합시다.
“의도(intention)”라는 말을 기억합시다.

 

웨슬리가 부탁하듯이
한 가지 의도(a single intention)로부터
신앙은 물론 삶을 정돈하고 그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분산된 우리 생각을(의도를)
하나님께 모으고 그 힘으로 살아갈 때입니다.

 

여러분의 눈을 하나의 의도에 고정시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온 몸은 빛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더 그분의 도우심의 빛을 여러분 위에 비치실 것입니다 (웨슬리 설교 본문에서)

 

 

하나님,
우리에게 당신을 향한
한 가지 마음, 생각, 의도를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4.7 이-메일 목회 서신)

 

사도행전 (7)

더베에서 안디옥으로

 

 

우리 모두 길을 가는 나그네들이기에 인생이나 신앙이나 길로 표현되는 여정(journey)입니다. 그길을 가면서 예수님을 푯대(목표)삼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뤄갑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는 길이 늘 안정되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거친 길, 자갈길, 구부러진 길, 오솔길, 내리막과 오르막길을 번갈아 만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를 구하면서 신앙 안에서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떠났던 바울의 첫 번째 전도 여행은 특별한 여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순간은 온 몸에 전율이 생길 정도로 신비롭고 기뻤을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생기고 그들이 모여서 교회가 세워지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까지 일어서게 하는 기적까지 경험했으니 바울과 바나바는 신명 나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가는 길목마다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구약의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믿어야 할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서 돌팔매질을 하면서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복음 전파가 영적인 싸움이고 복음을 훼방하는 악한 세력이 확실히 존재함을 알았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바울은 기적처럼 다시 일어났고, 그 밤에 루스드라로 다시 들어가는 당당함도 보였습니다. 이튿날은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60여 마일 떨어진 더베로 향했습니다.

 
더베는 루스드라보다 헬라화 된 농촌 지역인데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첫 번째 전도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 더베에서는 훼방이나 핍박이 없습니다. 순탄한 길이었습니다. 그동안 험한 일을 겪으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과 바나바에게 더베에서의 선교는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다시 방문합니다. 예수님을 새로 믿은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부탁하면서, 교회를 이끌 장로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복음 전파 이후 후속 사역까지 깔끔히 마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파송한 안디옥에 돌아옴으로 첫 번째 전도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河-

뚜벅뚜벅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까지 수요예배에서는
구약성경 사사기부터 사무엘상하를 거쳐서
다윗의 마지막과 솔로몬의 등극을 전하는
열왕기상 1-2장을 모두 읽었습니다.
팬데믹 기간에 맞먹는 1년 반 이상 걸린 여정이었습니다.

 

수요예배에 빠지지 않고 오시는
권사님들께 감사드리고
나중에 영상으로 함께 하는 참빛 식구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어제 수요일부터는
신약성경으로 넘어와서 누가복음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탄생부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까지 역사가로 불릴 정도의 누가가
조목조목 차례로 자세히 기록한 말씀입니다.
앞으로 반년 정도 수요예배에서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더욱 깊이 만나기 원합니다.

 

2.
누가복음을 ‘소’에 비유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소에 걸맞게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여정을
누가복음 전체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길게 기록했습니다(9-19장)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장차 자신이 겪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도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허투루 들었습니다.

 

길을 가시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고치시니
제자들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소처럼 뚜벅뚜벅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셨습니다.
그 자체가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골고다 언덕길이었습니다.

 
3.
우리도 뚜벅뚜벅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고 싶지만,
대부분 인생길은 소처럼 묵묵히 걸어갑니다.
아니 그렇게 걸어가야 합니다.

 

지나 온 길을 가슴에 품고
기대를 갖고 앞을 향해서 걸어가지만,
꼭 좋은 일만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길에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끝에 부활이 있음을 믿기에
우리는 부활의 능력, 생명을 생각하면서

주어진 인생길을 소처럼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인생길을 차근차근, 힘을 다해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힘내십시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를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눅 9:57)

 

하나님,
오늘도 주의 길을 걷고 계시는
참빛 식구들과 함께 하시고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3. 31 이-메일 목회 서신)

 

사도행전 (6)

루스드라 (2)

 

바울과 바나바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면서 루스드라 사람들은 예전에 그곳을 찾았다고 전해지는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다시 루스드라를 방문했다고 믿었습니다.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이 소를 몰고 바울과 바나바를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구약의 하나님을 모르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그들이 헛된 것을 신봉하고 있음을 깨우치고 천지를 지으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농경 지대였던 루스드라에 비를 주시고 추수하게 하셔서 기쁨과 보람으로 감사하게 한 모든 선한 일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깨우쳤고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이 자기들의 상황에 맞게 전하는 복음을 받아드렸을 것입니다.

 
그때 바울을 핍박했던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100여 마일 떨어진 루스드라까지 내려와서 루스드라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이고니온 사람들은 군중들을 선동하는데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신처럼 받들던 사람들이 바울을 향해서 돌을 던집니다. 이고니온에서 돌로 치면서 바울을 죽이려 했던 계획을 루스드라에서 이뤘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예수님을 믿은 제자들이 쓰러져 있는 바울을 둘러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과 대조됩니다. 바울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기적이 일어났고 그것을 루스드라의 제자들이 목격했습니다. 바울은 그 밤으로 루스드라로 들어갑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루스드라까지 내려온 유대인들을 보면서 악한 세력의 집요함을 발견합니다. 돌을 들고 죽이는 악의 폭력성도 발견합니다. 순식간에 변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외치던 예루살렘 군중들도 떠오릅니다. 예루살렘 밖 골고다에서 죽으신 예수님처럼 바울도 도시 밖으로 버려졌습니다. 바울이 다시 의식을 되찾은 것도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겪은 어려움은 예수님의 고난, 죽으심, 부활과 겹칩니다.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갔습니다.

 
바울에게서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의 모습도 발견합니다. 그때는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고 스데반 죽음의 증인이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참 신비롭습니다. 훗날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고백하는데 루스드라 사건도 바울의 몸에 새겨진 예수님의 흔적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세 가지 믿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말씀에서
루스드라에 간 바울과 바나바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는 장면을 나눴습니다.

 

예배 후에 교회 집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할 경우는 의학상 쉽지 않고
태어나는 과정 또는 어렸을 때 사고나 질병으로 걷지 못한 것을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으로 표현했을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평생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걷는 것도 현대 의학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이 이 사람에게 임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이처럼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자세한 내용을
현대 과학이나 오늘날 상식에 맞춰서 꼼꼼히 살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하나님 말씀”이고
올바르고 건전한 그리고 우리에게 타당한 해석이 되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될 당시와 우리 시대 사이의 간격(gaps)을 잘 메워야 합니다.

 

대충 읽으면 별일이 없지만
세심하게 읽다 보면 성경이 더 어려워질 수 있는데
그래도 그 길을 가야 성경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설교 후에
집사님들과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함께 배워가는 과정이요,
그런 대화 속에서 일하실 성령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2.
바울과 바나바는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보고 그를 걷게 했습니다.

 

구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속에는
구원받다와 더불어 회복되다는 뜻도 있으니
“걸을 수 있겠다는 믿음”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걷는 것을 구원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에서 “믿음”이라고 말할 때도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마커스 보그라는 신학자가 그의 책에서
리처드 니이버가 소개한 세 가지 유형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확신(assurance)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 교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머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신실함(fidelity)입니다.
앞에서 말한 자신감이 지적인 동의라면
신실함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신뢰(trust)입니다.
니이버는 신뢰를 믿음의 가장 깊은 차원이라고 말합니다.
생각이나 마음을 넘어서 우리 삶을, 관계를,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연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니이버는 신뢰로 대표되는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doubt), 회의(skepticism), 불신(unbelief)이 아니라
불안(anxiety), 염려(worry), 두려움(fear)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
불안, 염려,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면,
신뢰로 표현되는 믿음이 부족한 표시입니다.

 

3.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이
니이버가 제시한 세 가지 믿음에 근접하길 바랍니다.

 

불안, 염려,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정말 멋진 믿음을 갖고 싶습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주여, 믿음을 주옵소서.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행14:9)

 

하나님,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3. 24 이-메일 목회 서신)

사도행전 (5)

루스드라(1)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났습니다. 이고니온에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도시의 관리들이 한 패가 되어서 돌로 치려 달려들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남쪽으로 20여 마일 떨어진 루스드라로 몸을 피했습니다.

 
루스드라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고 대부분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헬라 도시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날 때부터 발을 쓰지 못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네 발로 바로 일어나라”고 외치니 이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여기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병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뜻합니다. 고대 시대에는 병이 낫는 것과 구원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켜서 걷게 한 사건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을 일으킨 것과 평행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 걸맞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평생 걷지 못하는 사람이 회복된 것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부르면서 칭송합니다. 루스드라에 있는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을 가져와서 바울과 바나바를 숭배할 참입니다.

 
루스드라와 관련된 전설에 따르면 제우스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루스드라를 찾았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가난한 농부 가정만 사람이 된 제우스를 환대했습니다. 농부의 집은 성전터가 되었지만, 마을 전체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상처를 갖고 있던 루스드라 사람들이 기적을 행한 바울과 바나바를 보고 다시 자기들의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신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옷을 찢고 자기들을 경배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자기들은 루스드라 사람들과 똑 같은 사람이고, 단지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뿐이라고 강력히 말합니다. 헛된 것을 버리고 천지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권했습니다. 간신히 루스드라 사람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경배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사는 두 사도의 모습 속에서 사람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적한 곳을 찾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유대인이 없던 루스드라에도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막을 사람도 세력도 없습니다. 할렐루야!-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