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노시스

좋은 아침입니다.

 

1.
기독교는 말 그대로 “기독(基督)”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성탄절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처럼
세 가지 예물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처럼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육신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매력입니다.

 

2.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셨는데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 즉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자기를 비워(emptied himself)”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명사형이 “케노시스(kenosis)”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은 본성,
하나님과 같은 지위를 모두 비우시고
사람이 되셨다는 케노시스의 정신은 기독교의 독특함입니다.

 

흉내만 내시거나, 겉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공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또한, 케노시스
–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가장 낮은 종의 모습,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연약한 자와 함께 하고
고난받는 자를 같은 심정으로 위로하고
사랑받고 대우받기보다, 사랑하고 섬기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3.
2021년 성탄절이 내일 모레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휴일 기분에 도취되거나
욕심과 탐욕,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느라
진정 중요한 케노시스(비움)의 예수님 마음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고
흘려보낼 것을 흘려보내고
지나치게 높은 곳에 눈길을 주다가
진정 지금 여기서 돌보고 사랑해야 할 것을 놓치고
훗날 아쉬워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 작은 마을, 마구간에 오신
우리 예수님을 경배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갖기 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하나님,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꼭 갖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 23이-메일 목회 서신)

평화의 왕

2004년에는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남아시아에 쓰나미가 덮쳐서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날은 성탄절 다음 날이었습니다. 성탄절 휴가로 태국을 비롯한 휴양지에 모였던 사람들이 대부분 희생되었기에 더욱더 안타까웠습니다.

 
올해도 성탄절을 보름 정도 앞두고 미국 중서부에 토네이도가 밀어닥쳤습니다. 토네이도 경보에 미리 몸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100여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집을 비롯한 재산을 잃은 사람들은 매우 많습니다. 이재민들에게 2021년 성탄절은 기쁜 날이 아니라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슬픈 날이 될 것 같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도 세상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예루살렘에는 이두메(에돔) 출신 헤롯 일가가 로마의 섭정 아래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 이권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었고,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인정받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위 암 하렛츠(땅의 백성)라고 불리는 일반 백성들은 굶주리고 지쳐 있었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도 비슷한 처지의 백성들이었습니다. 밤에 양을 칠 정도면 목자들 가운데서도 그들의 순번이 꽤 아래에 속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들에 있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리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7).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온 세상을 구할 그리스도께서 나셨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서 경배하고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구주가 태어났다고 천사들이 알려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천군 천사가 하늘에서 찬양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께서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평화를 찾기 어렵습니다. 자연재해와 전염병 그리고 사람들 마음속에 깃든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분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먹물처럼 흐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평화를 구합니다. 우리 마음에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세상에 전하기 원합니다. 천군 천사처럼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찬양하면서 성탄절을 맞기 원합니다. -河-

토네이도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말에
미국 중서부 여덟 개 주에 30회 이상의 토네이도가 덮쳐서
100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와 상당한 재산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언론과 유튜브 등에서 보도되는
토네이도가 훑고 지나간 참상을 보고 있으면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되었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켄터키의 경우
아주 오래된 교회 건물이 거의 사라졌고
시청 건물도 반 이상이 무너졌습니다.

 

일리노이의 아마존 창고도 토네이도로 인해서
절반이 무너지고 사상자가 났으니
아무리 견고하게 짓고 오랫동안 견뎌왔던 건물이라도
이번에 몰아닥친 토네이도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2.
예전에 인디애나에 살 때
토네이도가 지나간 자리를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10m 정도 되는 넓이로 토네이도가 지나간 흔적이었는데
마치 트랙터로 집이며 나무를 밟고 지나간 것처럼
명확히 길이 날 정도로 부서져 있었습니다.

 

그 옆을 지나면서 저도 모르게
“와—” 하는 안타까움과 놀라움의 탄성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종종 중서부를 강타하는 토네이도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지붕이 날아가고, 토네이도 한 중심은 자동차도 날려 보낼 기세입니다.

 

그 위력을 알기에
중서부에서는 정기적으로 토네이도 대비 훈련을 합니다.
토네이도 경보가 울리면, 우선 건물 밖으로 대피하는 식입니다.
혹시 집 안에 있다면, 건물이 파괴될 것을 예상해서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으로 피신해야 합니다.

 

100여 명에 가까운 숫자가 적지 않지만
이번에도 미리 대피했기에 사상자 숫자를 줄였을 것입니다.

 

3.
최대한 피해를 줄이려 노력할 뿐
자연재해를 인간의 힘으로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여름철 플로리다와 동부에 밀어닥치는 허리케인,
중서부의 토네이도
서부의 지진과 최근의 산불 등
미국에도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자연재해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가뭄, 홍수와 해일, 지진 같은
자연재해를 하나님의 심판 또는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능력으로 여겼는데
수천 년이 지나고 과학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습니다.

 

막을 수 없는 재난과 그에 따른 고난인데
그때마다 피조물인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깨닫습니다.

 

아침에 읽는 욥기에도 토네이도 급의 폭풍이 등장합니다.
욥이 믿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고 주관하심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폭풍 속에 임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욥이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욥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난 에피파니(epiphany)의 순간입니다.

 

4.
토네이도 정도는 아니어도
크고 작은 어려움에서 면제되는 인생은 없기에
철저하고 올바르게 준비할 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 세상보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것도 꼭 필요합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더 없는 축복입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밀어닥친 토네이도로
어려움을 겪을 이재민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힘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욥 38:6-7)

하나님,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 16이-메일 목회 서신)

사랑받는 형제 빌레몬 (6)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빌레몬서는 한 장 밖에 되지 않고, 바울과 오네시모 그리고 빌레몬 세 사람만 등장하는 단출한 말씀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신앙과 사랑이 잔뜩 베어져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빌레몬에게 잘못하고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종이 아닌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 주길 부탁했습니다. 오네시모가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을 만났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서 바울의 심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알리지 않고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을 수 있었고, 알리더라도 명령조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기에게 보내라고 강요할 수 있었지만, 신사적으로 부드러운 마음과 말씨로 빌레몬에게 부탁했습니다. 빌레몬이 “자의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바울의 부탁을 들어주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절차의 중요성과 믿음의 백성들이 서로 배려하는 품격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잘못했거나 행여나 재정적으로 손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자신이 대신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로 받아주라는 부탁입니다. 바울은 믿음과 사랑의 사람 빌레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21절).

 
바울의 부탁이 매우 특별한 것이었지만, 바울과 빌레몬 사이에는 흔들림 없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 역시 옛 주인 빌레몬과 새로 섬기기 시작한 바울의 믿음과 성숙함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더욱더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훗날 오네시모라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배출되는데 바울이 아들이라고 말했던 빌레몬서의 오네시모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빌레몬서를 읽으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해 주신 예수님과 바울이 겹쳐서 떠오릅니다. 오네시모가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면 바울이 대신 청산해 주겠다는 말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우리와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이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등지고 떠날 때가 많이 있으니 오네시모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빌레몬서는 골로새 교회를 넘어서 그 이후에 예수님을 믿게 된 하나님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河-

 

엘리후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마다 읽는 말씀이
내일(금)부터 다시 욥기로 돌아갑니다.
욥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셈입니다.

 

다시 읽을 욥기는
엘리후의 연설(32-37장)과
폭풍속에서 욥을 찾아오신 하나님 말씀(38-42장)이 주요 장면입니다.

 

욥기 전체에서 엘리후의 연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혹자는 엘리후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볼 정도로 엘리후의 연설이 탁월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돔 출신의 이름을 가진 세 친구와 달리
엘리후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는 이스라엘 배경도 갖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욥이나 친구들에 비해서 젊습니다.
당시에는 젊은 사람보다
나이가 든 장로들이 지혜롭다는 생각하였습니다.

 

엘리후는 이러한 관습에 도전합니다.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속에 있는 영에 하나님의 숨결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엘리후가 그렇게 주장할 만합니다.
그는 욥이나 세 친구와 달리
하나님의 창조 사역, 개인과 역사에 임하는 섭리를 강조합니다.
엘리후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넓이가 깊이가 있습니다.

 

2.
엘리후는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욥과
욥에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세 친구를 싸잡아 비판합니다.

 

엘리후는 자기 지식을 과신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고
거침없이 자기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엘리후를 보고 있으면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목회에 나온 젊은 전도사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기초로
세상이나 신앙에 관해서 거침없이 판단하고 자기 주장을 펼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욥이나 욥의 친구 모두 잘못했고
자신만 옳다는 일종의 양비론(兩非論)과
엘리후의 자기 교만이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등장하자마자
욥과 친구들을 향해서 화를 내는 것도
엘리후가 아직 성숙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후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엘리후에게 점수를 후하게 준다면,
이어서 등장하시는 하나님과 욥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 정도입니다.

 

3.
우리는 빌레몬서를 함께 읽으면서
“품격”을 계속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나 연장자라는 나이를 들어서
빌레몬에게 명령하거나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빌레몬이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받아 주기를
신사적으로, 절차를 지키고 배려하면서 부탁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엘리후의 연설은 자기 과시입니다.
아무리 바르고 옳은 말을 해도
말하는 사람의 성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말에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을 살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해 동안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 인격’을 갖췄는지 돌아보고 싶습니다.

 

마음 씀씀이, 언어 습관, 소소한 행위와 삶을 돌아보면서
믿음과 사랑이 함께 가는 주님의 사람, 예수님을 닮은 주의 백성이 되기 원합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빌1:5)

 

하나님,
한해동안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주님의 사람으로 성장했는지 돌아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 9 이-메일 목회 서신)

사랑받는 형제 빌레몬 (5)

사랑받는 형제로

 

빌레몬서의 주인공은 세 사람입니다: 편지를 쓴 사도 바울, 바울의 편지를 갖고 빌레몬을 찾은 오네시모, 바울의 편지를 받는 빌레몬.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 편에 빌레몬에게 보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이 용서하고 받아 주길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세 사람 모두 조심스러운 입장입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도망친 종을 받아 주는 것이 관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자기처럼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 주길 부탁합니다. 종을 넘어서 자유인으로 대우해 달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고, 바울이 그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내 심복”이라고 불렀지만,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는 큰 상처와 손해를 입힌 도망친 종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대우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사도 바울의 증언(편지)뿐입니다.

 

오네시모도 도망친 노예들이 당하는 처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을 다시 살려준 사도 바울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빌레몬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난 오네시모 역시 옛 주인을 만나서 자기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이 자기를 어떻게 대할지 알 수 없으니 큰 모험을 감행한 셈입니다. 두려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지 않고 로마 감옥에서 바울 자신을 섬기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빌레몬을 향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빌레몬의 승낙을 받고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함께  동역하려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기쁨으로 바울의 부탁을 받아 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14절).

 

바울은 오네시모를 단지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자기 곁에 두겠답니다. 그러니 빌레몬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대해 주길 부탁합니다. 행여나 오네시모가 여전히 잘못한 것이 있으면 바울이 보증을 서고 책임지고 갚겠답니다.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 가운데 서서 두 사람을 용서와 화해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주의 형제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세 사람의 신뢰가 전제된 파격적인 부탁입니다.

 

우리에게도 빌레몬서의 세 인물과 같은 신뢰가 형성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경험하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河-

생명의 약속

좋은 아침입니다.

 

1.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지난주 감사절 목요 서신을 보낼 때만 해도
세상이 코로나바이러스에서 벗어날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가볍고
마스크 속의 입가에 환한 미소도 살짝 보였고
거리에 자동차도 예전만큼 늘었습니다.
드디어, 끝이 보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아공에서 들려온
오미크론 바이러스 소식에 세상이 다시 긴장하고 있습니다.
“오미크론”은 헬라어 24개 알파벳 가운데 열다섯 번째이고
영어 “O”(오) 음가를 갖습니다. 정말 “오—“하고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델타 변이 때는 백신이 막아 줄 수 있다고 했는데
오미크론 변이는 기존의 백신으로 장담할 수 없다는 분석에
세계가 더욱 긴장하고 여러 나라가 서둘러 문을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비즈니스, 학교, 여행 등의 길이 열렸는데
며칠 만에 분위기가 급냉각되고 있습니다.

 

감염속도는 빠르지만, 치명적이지 않다고 하는데도
지난 2년 동안 워낙 힘들게 살았기에
지레 겁을 먹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2.
언제까지 마스크를 써야 할지요?
언제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이웃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지요?
과연 우리 교회는 내년 3월에 완전히 열 수 있을지요?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바이러스가 사라지지 않는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무슨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싶으신 것일까?
바이러스가 이처럼 오래 지속될 때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등등.

 

머릿속에서는 질문이 계속되지만,
결국 저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세상을 살려주세요!”

 

인간의 연약함을 절실히 느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3.
엊그제 아침 묵상에서
아들 같은 자기 후계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도 바울이
“생명의 약속(the promise of life)”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는
죽음의 반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온 피조물이 신음하는 타락한 세상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세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지만,
죽음까지는 아니어도 사람들 마음에 두려움이 쌓여가지만,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생명의 약속”을 꼭 붙들고 싶습니다.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세상에
빛과 생명을 선포하고, 생명의 약속이 있음을 보이고 싶습니다.
어려울수록 힘차게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생명의 약속, 소망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7)

 

하나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안에 심어진 “생명의 약속”을 꼭 붙들고
그것을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2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