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들의 그림자

좋은 아침입니다

 

1.
1년 6개월 이상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괴롭혔던
코비드19의 어두움이 조금씩 걷히는 느낌입니다.

 

우리 지역은 내일(15일)부터 실내 마스크 착용도 완화되어서
사무실을 비롯한 일터에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됩니다.
물론, 많은 군중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마스크 착용은 의무입니다.

 

백신 접종률과 3차 접종을 고려하면
올해 겨울만 잘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
예전의 일상을 거의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제 상황, 팬데믹으로 인한 마음의 답답함 등을 고려하면
더 이상 코로나바이러스에 붙잡혀 살 수 없습니다.

 

하여튼
코로나바이러스는 지나갈 것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속담도 생각납니다.

 

2.
지난주일 AP통신 뉴스는
코로나로 인해서 부모님, 할머니/할아버지, 후견인을 잃은 아이들이
미국에만 14만 명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를 보도했습니다.
지난 7월에는 4만 명 정도라고 했는데, 다른 방법으로 조사하니
10만 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유색인종 출신 아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보호자를 잃은 아이들의 67%가 히스패닉 가정입니다.
미시시피의 경우, 57%가 흑인 가정 출신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코비드로 부모와 후견인을 잃은 아이들은
백만 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코비드19이 만들어 놓은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조지아에 사는 케이트 켈리(Kate Kelly)는 54세 된 아버지를 코로나바이러스로 잃고
두 명의 자매와 어머니와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역 사회는 물론 이웃들의 도움이 이어졌지만
한 달이 지나면서 발길이 뜸해지고 국가가 주는 지원금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칩니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주목하니 위로와 큰 힘이 됩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면, 관심은 식고 섬처럼 외롭게 남겨지게 마련입니다.

 

20년 전에 일어난 9.11 에서 남겨진 가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코비드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총체적으로 돕고 지원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AP 통신은 보도했습니다.

 

3.
세상은 크고 넓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삽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고,
식량이 없어서 죽어가고, 부모와 가족을 잃고
삶이 완전히 망가진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간다면
어둠의 그림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종종 멈춰서서
우리가 모르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세상의 뒷면도 살피기 원합니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앞만 보고 나가는 발길을 잠시 멈춰서
뒤에 드리운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삶을 돌아보고 반추하기 원합니다.

 

코비드가 지났다고 모든 사람이 기뻐할 때,
기뻐하지 못하고 여전히 슬픈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이웃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68:5)

 

하나님,
외롭고 슬픔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의
보호자와 아버지가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 14 이-메일 목회 서신)

 

하박국 (2)

– 주께서 어찌하여

 

구약성경 하박국서를 살펴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하박국서의 특징은 하나님과 선지자 하박국의 대화와 고백으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세상에 나가서 선포한 것과 구별됩니다. 그런 점에서 하박국서는 선지자의 내적 고뇌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특징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죄악, 패역, 겁탈과 강포, 변론과 분쟁”이 세상에 판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무너졌습니다. 의롭게 살려고 해도 악인들이 둘러싸서 의인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때 하박국은 왜 지켜만 보시는지 하나님께 질문하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종의 항의였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계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고 벌을 주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에 보여주시길 하바국 자신의 입장에서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대답하십니다. 하박국 개인이 하나님께 질문했는데, 하나님은 “너희들”이라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답변하십니다. 자기중심에 머물고 있는 하박국의 신앙을 확장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북쪽의 강국 바빌론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사납고 성급한 백성”입니다. 표범보다 빠른 강한 군대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빌론은 당시 최강의 제국이었습니다. 앗시리아를 정복해서 바빌론 제국을 세웠고, 남쪽의 이집트와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멸망할 것이랍니다. 그것은 수치입니다. 바빌론이 던지는 그물에 이스라엘이 걸려들고 이방 민족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아니라 그물에 경배하는 민족입니다. 자기 힘을 믿고 그것을 신처럼 위하는 민족에게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안 됩니다. 하박국이 두 번째로 질문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에 멸망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하박국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하신 이” “만세 전부터 계신 분” “반석”이라고 고백합니다. 절대로 사망에 이를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지만, 다시 하나님께 질문하는 하박국의 모습이 대단해 보입니다. 그 여정에서 하박국의 신앙이 자라고 있습니다. 끈질기게 하나님을 찾는 구도자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河-

그리스도인의 탄식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
구약성경의 하박국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3장으로 이뤄진 하박국서는
1장과 2장에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시는 방식으로,
마지막 3장은 질문과 응답을 통해서 만난 하나님을
하박국이 악기에 맞춰서 노래하고 고백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절박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온몸과 삶으로 외쳤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외면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지적했듯이 세상에는
“죄악, 패역, 겁탈과 강포, 변론과 분쟁”이 판을 쳤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아무 일도 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언제까지 하나님의 간섭과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지” 탄식하며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2.
“언제까지입니까? How long?”
하나님을 향한 한탄과 호소는
하박국뿐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응답, 구원을 기다리던
하나님 백성들의 탄식이었습니다.

 

시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탄식시도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으로 시작합니다.

 

탄식(lament)은
찬양과 감사와 함께 주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우리의 삶이 온전하지 않고, 늘 밝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구원도 즉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와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때로는 눈물로
외치면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고난 가운데 드리는 솔직한 기도입니다.

 

3.
우리의 삶도 녹록치 않습니다.
기도 응답이 더뎌지고 삶의 어둠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언제까지입니까? How long”라는 탄식이 나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느냐는 한탄이요 항의입니다.
이것은 고난 가운데 있는 모든 주의 백성의 자연스러운 고백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꼭 붙들려서
그리스도인들은 탄식하거나 불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탄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우리 속을 숨김없이 꺼내서 하나님께 내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4.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가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고민, 힘듦, 아픔, 불안, 염려, 두려움,
행여나 부끄러운 모습들, 안타까운 현실 등등 –
하나님께 갖고 와서 솔직하게 기도하기 원합니다.

 

행여나 하나님에 대해서 섭섭함이나 불신이 생겼다면
자기 선에서 판단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하박국 선지자처럼
끝까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기 원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시편13:3)

 

 

하나님,
참빛 식구들의 탄식에
주님의 귀를 기울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0.7 이-메일 목회 서신)

선지자 하박국 (1)

언제까지 입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연속 설교에서 “구도자”라는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구도자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간절하게 찾는 하나님 백성의 마음과 행위를 뜻합니다.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완곡한 거절, 개를 언급하신 거친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고 구한 수로보니게 여인은 진정한 구도자였습니다.

 
앞으로 한 달여 살펴볼 예언자 하박국 역시 하나님 앞에 선 구도자였습니다. 하박국은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로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무너지는 역사의 비극을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온 몸을 던져서 예언했다면, 하박국은 대중 앞에 나서기보다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구도자였습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은 “품어주다(embrace)”라는 뜻입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품어주심을 그리워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구약의 소예언서에 속하는 하박국서는 전체가 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와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고뇌하고 질문하는 하박국과 그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하박국이 시기오놋이란 음악에 맞춰서 부르는 노래이자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입니다.

 
하박국서는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선지자 하박국이 본 예언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서 질문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박국이 갖고 있던 질문은 세상에 폭력이 넘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 지에 관한 것입니다. 악이 판을 칩니다. 패역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겁탈과 폭력이 앞서는 불의한 세상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서로 고소하고 분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정의가 전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뜻을 따라 살려는 의인들이 악인에게 둘러싸고 있으니 의인의 삶이 힘겹습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어그러지고 패역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how long)”라고 하나님 앞에서 탄식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지 탄식하며 기다립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셔도 끝까지 주님의 뜻을 묻는 구도자가 되길 원합니다. -河-

요즘 세상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동네에는
인앤아웃(In-and-Out) 햄버거 매장이 있습니다.
공항 근처여서 매일 줄이 길게 서는 곳입니다.

 

매장에서 일하는 손길이 부족한지
종업원을 구한다는 표시가 유리창에 붙어 있는데
시간당 19불로 시작해서 22.5불까지 올려 줄 수 있답니다.

 

주 40시간으로 계산해 보니 한 달에 3,000 – 3,600불 정도가 됩니다.
매점 안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 고등학생부터
젊은 청년들인 것을 생각하면 적은 임금이 아닙니다.
풀타임으로 채용되면 복지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우리 동네가 속한 산 마테오 카운티의 최저 임금이
시간당 15.62달러 (샌프란은 $16.32)임을 고려하면
인앤아웃이 20% 정도 많은 임금을 지불하는 셈입니다.

 

동종 업계에서는 경쟁력 있게 대우하는 편이지만,
온종일 서서 쉴틈 없이 일하는 종업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주 높은 임금도 아닙니다.

 

흰옷을 입고, 빨간색 테두리가 둘린 모자를 쓰고,
아주 큰 옷핀으로 앞치마를 묶고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대견하고 또 때로는 안쓰럽습니다.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2.
인앤아웃은 1948년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시작했습니다.
창업자의 손녀인 린시 스나이더(Lynsi Snyder, 1982)가
2010년부터 사장이자 대주주로 있습니다.
2012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어린 나이의 여성 빌리어내어 (billionaire)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개인사는 평탄한 편이 못 됩니다.
부모님이 이혼했고, 자신도 세 번 이혼하고
현재 네 번째 남편과 7년째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와 현재의 남편이 인앤아웃 사원이었다는 점이 눈에 뜨였습니다.

 

인앤아웃 컵 뒤에 성경 구절이 있듯이
스나이더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이랍니다.
자신의 인생, 결혼의 실패, 경영권 다툼 소송 등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했다고 간증한 적도 있답니다.

 

서른도 되지 않아서 한 기업의 사장이 된 스나이더,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지각색 다양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박수를 보낼 뿐입니다.
일한 것만큼 보수와 보람을 얻는 세상이 된다면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3.
우리가 아침에 읽는 디모데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재물(돈)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교훈합니다.
돈을 잘못 사용하고 돈에 노예가 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돈이 일만 가지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우리의 소망을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고
여유가 있다면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딤전 6:18).

 

현대를 살면서 재물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돈이 최고인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일확천금을 벌었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그때마다 성실하게 일상을 사는 자신이 초라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우리는
돈에 노예가 되지 않고, 돈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고
돈과 비교할 수 없는 믿음, 소망,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두기 원합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전 6:19)

 

하나님,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물질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30 이-메일 목회 서신)

수로보니게 여인 (7)

에바다: 열려라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연속 설교 첫 시간에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꼬투리 잡아서 시비를 거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막 7:1-23).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보다 속에서 나오는 것이 부정하다는 말씀과 동시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7:6)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다윗의 자손, 메시아임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훼방과 간섭을 피해서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에 올라가셔서 아무도 모르게 쉼을 갖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흉악한 귀신이 들린 딸을 가진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막7:24-30).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과 비교되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불렀는데,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달리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신분이나 겉모습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이방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 앞에 자신을 낮췄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꼬투리를 잡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개라고 불려도 좋다는 겸손과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가복음 7장 마지막 세 번째 본문에 의하면(막7:31-37), 수로와 시돈을 떠난 예수님께서 역시 이방 땅 데가볼리를 거쳐서 갈릴리 호숫가에 가셨습니다. 그때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셔서 양 귀에 손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향해서 탄식하신 후에 “에바다(열려라)”외치시니 그의 귀가 열리고 입술이 풀렸습니다.

 

앞에서 등장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말도 잘하고 듣기도 잘했지만, 신앙적으로 귀가 막히고 올바로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찾아온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이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는 눈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큰 믿음이라 칭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고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고백하는 입을 갖기 원합니다. 에바다 – 열어 주시는 우리 주님의 손길을 구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닮기 원합니다. -河-

상 아래 개들도

좋은 아침입니다

 

1.
그동안 주일 예배에서 살펴보았던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말씀에 “개(dog)”가 등장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개 취급하셔도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도와주시길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개”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자녀”에 반대되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험한 표현입니다.

 

물론, 본문의 개는 거리를 배회하는 들개라기보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작은 개)에 가깝습니다.
주인의 식탁 앞에 앉아서 기다리는 강아지를 떠올리면 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자녀)의 잃은 양을 위해서 오신 것을 인정합니다.
대신, 식탁에서 개에게 던져주는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해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태15:28)고 말씀하시니
그 시각에 험한 귀신에 들려 있던 딸이 회복되었습니다.

 

2.
개는 인류와 아주 오래전부터 친숙한 동물입니다.
사냥은 물론 운송 수단, 양몰이를 비롯한 경비견으로 사용되었고,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의 역사도 제법 깁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개를 신의 형상으로 사용하고
주인이 죽었을 때 함께 무덤에 묻을 정도로 거룩하고 친숙한 동물이었습니다.
오늘날은 가족처럼 대우받는 최고의 애완동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개를 귀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우선, 식습관에 대한 구약의 율법에서 부정한 음식을 개에게 던지라고 하니
개는 부정한 음식을 먹는 동물이고 개 자체가 부정합니다(출 22:31)

 

엘리야 시대의 가장 악랄했던 왕 아합과 그의 왕비 시돈 출신 이세벨이 죽었을 때
개들이 그들의 시체와 피를 핥아먹을 것이라고 했으니
죽은 것을 접촉하는 개 역시 부정합니다(왕상21:23-24).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개”라는 표현을 쓰신 것도
구약과 같은 맥락입니다. 부정한 이방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개를 비교적 좋게 묘사한 것은 경비견인데
그것도 짖지 못하는 경비견이라고 했고(사56:10)
욥기에는 양을 지키는 개라는 표현이 나오는 정도입니다(욥 30:1)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들어와서
복음의 정신을 흐리고 교회를 헤치는 사람들을
거리를 배회하는 들개에 비유했습니다(빌3:2).

 

요한계시록에서도 개들은
점술가, 음행하는 자, 살인하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들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성 밖에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
그러니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개”라는 표현을 쓰신 것은
심하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여인의 신분, 자존심, 가능성을 모두 망가뜨린 말씀입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신을 개에 대입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했으니
예수님도 깜짝 놀라셨을 것입니다.

 

그만큼 다급했고, 그 정도로 예수님을 신뢰했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한길만 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닮고 싶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가짐과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찾고 끝까지 예수님을 쫓기 원합니다.

 

다급한 기도 제목을 갖고
예수님을 찾고 부르는 참빛 식구들에게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하시는
참빛 식구들이길 기도하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태 15:28)

 

하나님,
저희도 큰 믿음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2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