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보니게 여인 (3)

가나안 여인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집요한 추적과 괴롭힘, 백성들의 끊임없는 요구까지 겹치면서 예수님께도 쉼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편히 쉴 곳이 없으니 이스라엘과 적대 지역인 두로와 시돈까지 올라 가셔야 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보다 7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선지자 엘리야가 몸을 피했던 곳입니다. 엘리야도 두로와 시돈에 속한 사르밧 지역에 가서 과부와 그의 아들을 보살폈고, 병이 들어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게 되실 것을 예고한 듯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집에 들어가서 조용히 쉬고 싶으셨지만, 숨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적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가서 예수님에 대해서 소문을 내놓은 터였습니다(막3:8).

 

예수님께서 쉬고 계실 때, 딸이 귀신에 들려서 고생하는 한 여인이 찾아옵니다. 마가는 이 여인을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태생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이라면 나사렛 출신 예수님과 신분에서 차이가 납니다. 수로보니게 태생이라면,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남부럽지 않은 넉넉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마태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을 이방 민족이라고 불렀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거주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가나안 여인이라는 말씀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 민족 그것도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했던 가나안 태생임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의 행동을 간단히 기술한 마가복음과 달리 마태복음은 여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 자세히 알려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크게 울부짖으면서 예수님께 왔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주(主)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극존칭입니다. 당시는 로마 황제를 또는 노예들이 자기 주인을 주(퀴리오스, Lord)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을 예고한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키리에 엘레이손)”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마가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고 알려줍니다. 겸손과 믿음, 존경의 마음과 행동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자신의 지위와 가진 것을 자랑하고, 권력과 명예를 좇는 요즘 세상에서 예수님을 찾는 마음과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서 배웁니다.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河-

 

지킴이 두 번째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2주 전 목요 서신에서
40년 전 우리 교회에서 결혼하셨다는
노부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람들은 바뀌었지만,
1972년에 건축된 이래
말없이 자리를 지켰던 우리 교회 건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8월 20일 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F Chronicle)에
건물과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프랑스 이민자 후손인 라란(Lalanne)이라는 30대 여성이
그의 남편과 함께 어빙과 20가 교차로(intersection of 20th Ave and Irving St)에 위치한
100년이 넘은 집을 사서 입주했습니다. 2015년이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구입한 주택은
1904년, 덴마크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민 와서
목수 일을 하던 한슨(Hans Hansen)이란 분이 손수 지은 집입니다.
이분은 샌프란에 살면서 결혼했고 세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2019년, 라란 부부가 지진 대비 공사를 하던 중에
지하실에서 한 묶음의 서류를 발견합니다.
1900년 1월 1일부터 쓰기 시작한 처음 집주인 한슨 씨의 일기였습니다.

 

스토리텔링 작가였던 현재 집주인 라란은
한슨의 일기에 꽂혀서 덴마크어 필기체로 흘겨 쓴 일기를
구글의 도움을 받아서 한 단어씩 판독합니다.

 

당시의 신문, 인구조사 자료, 공문서 등을 샅샅이 조사해서
한슨의 덴마크 고향도 알아내고 그곳을 직접 찾아갑니다.
돕는 손길과 연결되어서 일기도 번역했습니다.

 

2.
그가 사랑하던 애나(Anna)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만 애나가 미국에 오면서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왔습니다.
대서양을 넘나들며 편지로 사랑을 나누었지만,
연락이 끊겼고 한슨은 사랑을 찾아서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미시간에 정착한 애나는 이미 결혼해 있었습니다.
한슨도 아쉬운 발길을 뒤로하고 샌프란에 정착해서 가정을 꾸민 것입니다.

 

라란의 인구 센서스 자료를 통한 끊임없는 추적에 의하면
술주정뱅이 남편과 결혼했던 애나가 무슨 연고인지 샌프란으로 이주했고
한슨이 결혼한 것을 알았는지 재혼해서 샌프란에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홀몸이 됩니다.

 

웬일인지 한슨도 첫째 부인과 이혼하고
한슨과 아나 두 사람은 텐더로인 지역에서 몇 블록 사이를 두고 살게 됩니다.
현재의 집주인 라난은 두 사람이 노년을 함께 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쩌면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극적이지만
조금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3.
샌프란에는 100년 이상 오래된 집이 많아서
종종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물건이나 서류 등이 발견된답니다.
대부분은 그냥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겠지요.
라란이라는 분의 호기심과 추적하는 열심이 특별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죽음은 사람들에게 “기억(memory)”으로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놓고 하나님께 가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100년도 훨씬 넘어서 일기장이 발견된 것을 보면
기억을 넘어서 우리의 발자취, 흔적도 여기저기에 남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남는 것’이 있는 인생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다음 후대가 우리를 생각하면 흐뭇하고 미소지을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많이 남겨야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주일에 살펴보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큰 믿음”을 남겼네요.
부럽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태 15:28)

 

하나님,
오늘 우리의 삶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일들로 채워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26 이-메일 목회 서신)

수로보니게 여인 (2)

두로에 가신 예수님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온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말씀에 갈급한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자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면 병이 나을 정도였습니다. 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세력도 생겼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일 계략까지 세웠습니다. 모든 인력과 수단 그리고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왔습니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을 두고 모세의 율법과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술로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다고 도리어 이들의 형식적 신앙을 꾸짖으셨습니다. 진실한 신앙이 아니라 형식적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파견해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감시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연하게 대처하시지만, 예수님의 마음과 몸은 많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으로 잠시 몸을 피하십니다.

 
두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시면,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백성들은 물론 예수님을 감시하는 지도자들도 없을 것입니다. 잠깐이라도 편히 쉴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두로에 가셨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구약의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도 두로와 시돈 중간에 위치한 사르밧(신약에서는 살렙다)이라는 지역에서 몸을 피한 적이 있습니다(왕상17장). 이스라엘에 가뭄이 심해지니 두로와 시돈 지방에 속한 사르밧으로 몸을 피한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사르밧에 사는 과부가 엘리야를 먹일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는데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에 가신 것을 보면서 사르밧에 갔던 엘리야가 생각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에게 쫓겼던 다윗도 블레셋 지방 가드로 두 번이나 몸을 피했습니다(삼상 21, 27장). 더 이상 이스라엘에 몸을 숨길 곳이 없었기에 위험을 무릎 쓰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블레셋으로 피한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죽하셨으면 갈릴리를 떠나서 두로 지방에 올라가셨을까요! -河-

 

고르반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일 설교에서
<고르반>이라는 표현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더 세세한 조항을 만들어서
부정한 것을 피하고 정결한 길을 가도록 도운 것이 장로의 유전인데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이것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종교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한 가지 행위를 갖고
완전히 나쁜 사람 취급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향해서
<고르반>이라는 당시의 관행으로 대응하십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갖고
고르반의 그릇된 사용을 지적하십니다.

 

노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릴 적에는 부모가 보호자가 되고 그늘이 되지만,
부모님께서 연세가 드실수록 상황이 역전되어서
부모가 자식들의 짐이 되기에 십상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긴 사람들
또는 부모를 공경할 생각이 없는 자식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팔았는데 그것이 바로 <고르반>이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면죄부를 사서 동전을 헌금통에 넣는 순간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죽은 부모와 친지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백성들을 현혹했듯이,
성전에 일정액의 헌금을 바치고
<고르반>하면 부모를 공경할 책임이 면제된다는 식이었습니다.

 

3.
면죄부나 고르반의 관행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것을 사람들이 만들어서
그것이 신앙인 것처럼 믿고 따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천로역정과 같은 신앙을 가르치기보다
편하고 값싼 은혜를 설파합니다.

 

루터의 말이 마음을 울립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 안에 슬며시 자리 잡은 그릇된 신앙의 관행이 없는지요?
추하고 얌체 같은 편이주의(便易主義)는 없는지요?
<고르반>하고 면피(面皮)하려는 얄팍한 속셈은 없는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되고 바른 신앙을 갖추기 원합니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언 12:22)

 

 

하나님,

우리의 중심, 온 마음이

주님을 향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19  이-메일 목회 서신)

 

 

 

수로보니게 여인 (1)

– 두로와 시돈

 

오늘부터 마가복음 7장(마태복음 15장)에 있는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을 살펴보겠습니다. 수로보니게는 시리아-페니키아라는 지명으로 갈릴리 북쪽에 위치한 해안 지역입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두로와 시돈이 속한 곳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서로 22마일 떨어진 지중해 연안의 해안 도시로 현재는 레바논에 속해 있습니다. 시돈은 창세기에서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 가운데 가나안의 아들로 등장합니다(창10:15). 마태복음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마15:21-28). 예수님 당시에도 두로와 시돈은 가나안 즉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구약시대부터 해상 무역에 능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을 때 두로에서 백향목을 비롯한 목재와 기술자를 수입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선지자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핍박하고 바알 종교를 전파했던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은 시돈왕의 딸이었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두로와 시돈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예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막3:8),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두로와 시돈에서 복음을 전하셨다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것이라고 탄식하셨습니다(눅10:13). 수로보니게 여인이 바로 이곳 출신입니다.

 
두로와 시돈이 본문의 지리적 배경이라면, 수로보니게 여인이 등장하는 마가복음의 전후 문맥도 특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무시하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막7:5).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의 전통을 지키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다고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사람의 몸, 즉 겉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7:19-20).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께 나온 수로보니게 여인이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오셨을 때,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에바다(열려라)” 외치시며 고치십니다(막7:31-37).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종교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그에 비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보는 안목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로 표현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참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가기 원합니다. -河-

 

지킴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제가 샌프란에 온 지 16년이 지났습니다.
16년이면 짧은 기간이 아닌데,
샌프란은 도심의 높은 빌딩 외에 변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도심에서 바닷가를 연결하는
Geary Blvd를 운전하다 보면16년전과 같습니다.
저보다 훨씬 오래 사신 권사님들도 옛날 그대로라고 하실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샌프란은 100여 년이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싹- 갈아엎고 현대식으로 다시 짓는 것보다
과거와 현재, 첨단 건축과 기술이 공존하는 방식이 마음에 듭니다.

 

2.
지난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을 배웅하고 있는데
60대 정도로 보이는 미국 아주머니가 교회 계단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종종 예배를 위해서 오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예배가 끝났다고 친절히 말씀드렸더니 들어가도 되냐고 물으십니다.

 

갑자기 밖에 계신 남편을 부릅니다.
설레발을 치신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매우 감격해 하시면서
“40년 전에 저희가 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교인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주 활발하신 아주머니셨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인 것을 보시고
약간 흥분한 듯 환호성을 치셨습니다.

 

강단 앞에서 사진을 찍어 드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겠냐고 물었더니
결혼식 후에 축하연을 지하에서 했답니다.

 

3.
우리 교회는 1972년 그리스 사도교회(Greek Apostolic Church)
(그리스 정교회가 주류이고 사도교회는 소수 개신교회)
목사님과 교인들이 교회 부지를 구입해서 건축했습니다.

 

건축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사님이 하나님께 가시고
교세도 축소되어서 여러 교회가 렌트를 얻어 사용했습니다.

 

주일에 오셨던 분에 의하면 1980년대 초반,
성령 충만한 은사 중심의 교회가 우리 건물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130여 명이 임시 의자를 갖고 앉을 정도였고
교회에 들어오면 예배실은 물론 아래 친교실까지 성령의 임재가 충만했답니다.
엄청난 능력의 교회였다고 자랑하셨습니다.
저도 처음 듣는 우리 교회 건물에 깃든 역사였습니다.

 

4.
교회 건축 후 50여 년 동안
우리 교회 모습은 거의 변한 것이 없습니다.

 

강단은 우리가 설치한 커다란 TV 두 개 외에는
스테인리스 아름다운 십자가와 하얀 벽면까지 그대로입니다.
오죽하면, 엊그제 오신 부부께서 “그대로야, 그대로야”를 외치셨을까요!

 

그렇게 우리 교회 건물은 지난 50여 년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교회와 교인들이 렌트를 얻어서 예배했으니
그 모든 다양함을 말없이 품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건물 자체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지킴이였습니다.

 

우리가 처음 건축한 교회에 이어 두 번째 건물주가 되었는데
우리 건물은 우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니 우리는 건물에 어떤 추억을 남겨놓아야 할까요?
40년 후에 우리 건물에서 누가 예배하고 있을까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교인(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이라고 늘 말씀드렸는데
엊그제 주일의 만남을 통해서
건물의 귀함과 교회 건물에 깃든 영성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우리 교회 건물이 우리 모두에게 추억이 되고,
우리의 신앙은 물론
교회 건물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지킴이가 되기 바랍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편63:2)

 

 

 

하나님,

우리 교회의 신앙이

우리 건물 속까지 스며들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12  이-메일 목회 서신)

 

 

 

 

회복 (6)

크고 은밀한 일

 

예레미야서(렘30-33장)를 통한 “위로와 회복의 말씀” 마지막 시간입니다. 처음 연속 설교를 시작할 때는 대부분 백신 접종을 마친 우리 지역에 팬데믹의 끝이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지역의 감염자 숫자가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다시 실내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습니다.

 

처음에 예레미야 말씀을 준비할 때와 비교하면 상황이 어려워졌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은 우리 모두에게 항상 필요합니다. 설령, 팬데믹이 연장되더라도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세상이 깜깜해질수록 우리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함도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위로의 말씀은 30-31장에서 약속의 말씀을, 32-33장에서는 왕궁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가 그의 삶을 통해서 회복과 소망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힌 것은 바빌론에 포로가 된 예루살렘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 잡혀갈 것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모든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의 삶이 곧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32장에서 예레미야가 고향 아나돗에 있는 밭을 샀습니다. 친척의 밭을 사야 하는 기업 무를 자(친척의 가장 가까운 후견인)였지만,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 밭을 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예레미야가 고향에 밭을 사서 계약서까지 남긴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작은 증표였습니다.

 

비록 나라가 망하지만,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결국에는 회복시킬 것이라는 약속이 오늘 본문인 33장까지 이어집니다. 예레미야가 왕궁 시위대의 뜰에 갇혀 있을 때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32장의 작은 증표에 이어서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리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라가 망하지만, 다시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믿고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윗의 가지에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올 것까지 준비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우리 역시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일을 기대하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