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2): 예수님과 예레미야/ 렘 11:18-23
https://www.youtube.com/watch?v=j9ibQFtItTs
예수님과 예례미야
예레미야서 한가운데 위치한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나누기 앞서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어떤 인물인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머니 태중에서 선지자로 구별되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심판 예언에 이어서 “건설하고 심게”하는 회복에 대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의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 마음을 백성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예레미야의 심정을 잘 표현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이사야가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많은 예언을 했다면, 예레미야는 그의 마음과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 가운데 예레미야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마리아에게 잉태되고 태어나셨듯이 예레미야도 어머니 태중에서 구별되고 부름을 받았습니다(렘1:5).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변방 아나돗 출신이었듯이, 예수님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는 말이 생길 정도의 작은 동네 나사렛 출신이십니다.
아나돗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수치스럽게 한다는 명목으로 예레미야를 죽일 생각까지 했습니다(렘11:19). 나무와 열매를 찍어서 없애자는 말을 할 정도로 예레미야의 흔적을 지우려 했습니다. 예수님도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시면서, 선지자는 고향에서 높임을 당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3:57).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떠올리셨을 것 같은 대목입니다.
예레미야가 당시의 타락한 성전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을 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분노하고 예레미야를 죽일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렘26: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강도의 소굴”이라는 표현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인용하신 것입니다(렘7:11; 마21: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것과 성전이 타락한 것을 맹렬히 지적한 예레미야가 중첩됩니다.
예수님도 예레미야처럼 우셨습니다. 예레미야가 멍에를 지고 예루살렘을 활보했듯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면서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마음속에 두신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아니 예레미야 속에서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 놀랍습니다. 우리의 모습 속에도 예수님이 드러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7월 한 달 동안
주일 예배에서 읽을 말씀은
구약성경 예레미야서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나눴듯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눈물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또 울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렘9:1)
2.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무덤으로 가시면서
나사로의 누이들과 친지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요11:32)
곧 나사로를 살리실 예수님이신데도
형제들의 슬픔에 잠시라도 진심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망가진 것을 보고
두 번째로 우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히5:7).
이처럼 예레미야와 예수님의 눈물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안타까움의 눈물이었습니다.
3.
우리도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예수님처럼
안타까운 세상이나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 자신이 힘들 때도 눈물이 나옵니다.
마음 아픈 과거를 생각해도,
어려움이 예상되면 여지없이 눈물이 나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눈물이 나옵니다.
밤잠을 설치고, 침상을 적셨던
시편 기자의 고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눈물의 또 한가지 기능은
카타르시스(정화)입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눈물이 가져다 주는 선물입니다.
모든 눈물에는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가식적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연기이지요.
예레미야나 예수님은 가슴으로 우셨습니다.
4.
인생길을 걷다 보면
눈물을 흘리면서 울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때는 마음껏 우셔야 합니다.
물론,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더불어
우시기는 것도 꼭 잊지 마십시오.
한 걸음 나가서
누군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더없이 고귀한 순간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마지막 부분을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한 주간, 예레미야의 파토스, 그 마음을 닮아 봅시다.
함께 울고, 함께 공감하고, 정말 같은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세상에 못된 사람들, 미운 사람들을 위해서도 한번 울어봅시다.
특히, 흩어진 참빛 식구들을 눈에 그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마음으로 하나되는 우리 교회이길 원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5)
Jesus wept (John 11:35)
하나님,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참빛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8 이-메일 목회 서신)
선지자 예레미야
기도에 대한 말씀을 마쳤지만, 기도가 삶이 되는 기도의 사람, 참빛 식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에 능력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진정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2021년의 남은 한 해도 기도로 사시고 각자의 기도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7월 한 달 동안은 성경에서 시편 다음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예레미야서 가운데 “위로의 책”으로 불리는 예레미야 30-33장을 함께 읽겠습니다.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한다는 보도가 있지만, 우리 지역 백신 접종이 80%에 육박하고 팬데믹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느낍니다. 식당은 물론 각종 모임에서 거리 두기가 해제되었습니다. 앞으로 바이러스 전파가 예상대로 통제되면 우리 모두 모여서 예배할 날도 가까울 것 같습니다.
지난 1년 3개월을 집에서 포로처럼 갇혀 살았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이 연상될 정도였습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힘을 쓰지 못하고 온 세상 사람들은 백신을 고대했고 백신이 등장하면서 실제로 바이러스 전파가 잡혔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우리의 신앙도 유명무실해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예배로 모이지 못하니 솔직히 각자의 신앙이 식은 것도 사실입니다.
옛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바빌론은 자신들이 정복한 야훼 하나님을 무시했고, 바빌론이 섬기는 마르둑이라는 강력한 신을 숭배했습니다. 포로 시대가 끝나고 언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막막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았고, 하나님 말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편집했습니다. 바빌론이 숭배하는 제국의 신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회복했고 신앙의 힘으로 바빌론 포로를 견뎠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말씀 가운데 하나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예레미야 속의 “위로의 책”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언했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레미야서 한 가운데 위치한 위로의 책(30-33장)에서 소망을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의 백성을 찾아오셔서, 새롭게 언약을 맺으시고, 고향으로 돌아올 날을 약속하십니다.
앞으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회복의 은혜를 체험하는 우리 교회와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몇 주 동안 한국과 미국에서
건물이 갑자기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광주에서는 철거 중이던 5층 건물이
그곳을 지나던 버스를 덮치는 바람에
버스 승객들이 목숨을 잃고 다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지난주에는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12층 콘도 건물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구조작업이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백여 명의 실종자가 있어서
사망자 숫자가 더 늘어 날것 같습니다.
광주에서 생긴 사고는
건물 철거 작업 중에 도로를 폐쇄하는 등
안전관리 소홀이 애꿎은 시민들의 희생으로 이어졌습니다.
버스에 탔던 승객들의 사연을 대하면서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플로리다 건물은 40년 전 습지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수년 전부터 건물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내렸지만,
세밀한 검사 없이 무시하다가 어이없는 참사를 당했습니다.
플로리다 건물의 잔해를 보면서
1995년 6월 퇴근 시간 무렵에 무너져 내린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가 생각날 정도였습니다.
2.
예수님 당시에도
예루살렘에 있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명이 죽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눅13:1-5)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 몇을 죽여서 그 피를 제물에 섞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빌라도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은 것임을 은근히 밝히면서
자신들은 죄가 없는 의인임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남이 당한 사고를 죄와 연결하고
자신은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으니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어리석고 초보적인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죽은 사람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결코 죄가 많은 것이 아니라고 일갈하십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에서 18명의 사상자를 낸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것을 언급하십니다.
망대의 붕괴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대신, 누구도 그런 사고를 당할 수 있으니
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회개를 당부하십니다.
3.
지금은 많이 수그러들었는데
예전에는 자연재해나 큰 사고를 죄와 연결하는 기독교인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자칫 그런 재난을 겪지 않은 자신이 의인이라는 오만함의 표출일 수 있고
재난당한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그릇된 심보입니다.
광주나 플로리다 참사와 같은 사건 사고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함께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를 잃은 유족들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사회에 적용하면,
무고한 생명을 빼앗아가는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 안전망을 철저히 구축하고 관리 감독하는 일입니다.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말아야겠습니다.
2021년 하반기의 시작인
7월 새달의 첫날을 맞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안전하고 평화롭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1-2)
하나님,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각종 사건과 사고로부터
안전하게 지키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1 이-메일 목회 서신)
2021 기도 (5): 성도의 기업/ 골로새서 1장 9-14절
성도의 기업
2021년 기도에 관한 말씀 마지막 시간입니다. 올해는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기도 생활은 물론 기도의 내용을 점검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요청하는 간구가 대부분입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요청하니 자칫 하나님 중심의 기도가 아니라 자기(나) 중심의 기도가 되기 쉽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만남)에 집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각, 행함, 성품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에 비하면, 바울의 기도는 신앙에 초점을 맞춥니다. 골로새 교회의 먹고 사는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일 정도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 마지막(12절)은 감사의 기도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성도에게 주어진 기업을 얻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선한 열매를 맺으면서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고, 모든 견딤과 인내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의 끝은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업에서 “기업”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얻고 각 지파 별로 분배 받은 기업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기업이 할당되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성도가 기업을 얻게 되었으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었기에 현재도 성도의 기업을 누리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벽한 주의 기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3-14절은 기도에 이어서 성도의 기업을 부연해서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세력이 통치하는 어둠 속에서 우리를 건져서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빛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모든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모든 죄가 사라지고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성도의 기업을 얻게 되었습니다.
2021년 한 해 동안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기억하고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길 바랍니다. 삶에 지치고 당장 급한 일에 쫓기는 우리이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간청이 앞서지만,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기도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삶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성도의 기업을 마음껏 누리기 원합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옛날, 옛적에”
어릴 적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시작되던 도입부입니다.
누구든지 옛날 이야기를 전할 때는
빼놓지 않고 “옛날 옛적에”로 시작했습니다.
옛날 옛적에 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별것 아닌 데도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야기를 듣는 순간만큼은 한없이 행복했습니다.
전해 들은 이야기를
자기 나름대로 각색해서 마음속에 간직하거나,
누군가에게 전했습니다.
2.
탁월한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옛날 옛적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쏙- 빼앗아 갑니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는
처음은 호기심 가득하지만
뒤로 가면서 시들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때, 재미가 없다고 딴청을 피우거나
이야기를 마다하면,
다시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듣기 힘듭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도 자신감을 잃게 될 것입니다.
조금 지루해도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등등의 추임새를 넣어주면,
자기 생각과 지식, 상상력까지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3.
<다시 성경으로>라는 책을 쓴
레이철 에반스라는 작가는 마지막 결론에서
“세상에! 그래서?”라는 추임새를 매우 적절하게 사용했던
마키라는 자기 올케를 소개합니다.
저자의 올케는 이 두 마디 추임새로 동네는 물론
그녀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흥을 돋워 주었고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독차지했습니다.
“세상에! 그래서?”라는 추임새 두 마디로 이룬 행복입니다.
레이철 에반스가 말하듯이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그리고 and”입니다.
“그리고”는 이야기와 사건을 계속해서 이어줍니다.
어느 순간에 끝날 것 같은 이야기도 “그리고”를 만나면
새로운 말씀으로 발전하니,
“그리고”는 성경의 추임새인 셈입니다.
4.
지난주일 설교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을 이루길 기도했습니다.
견딤과 오래 참음은 지루한 여정입니다.
단숨에 정답을 찾기 어렵고, 결론에 도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침묵이 이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추임새”일 것입니다.
자신에게 “추임새”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잘하고 있어” “그리고…” “아하…” “조금만 참자” 등등
그리고 바울의 기도대로 기쁨으로 견디고 오래 참는 것입니다.
누군가 곁에서 추임새를 갖고 격려해주면
그 자체가 힘이 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는 동지가 있다면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집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의 “그리고”를 통해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견딤과 오래 참음이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의 힘으로” 북돋아 주시고
그 힘이 우리 안에 능력이 되어서
모든 견딤과 어려움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끝까지 견디고 오래 참으실 참빛 식구들을
“멋지십니다”는 추임새로 응원하겠습니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골로새서 1장 11절)
Being strengthened with all power, according to his glorious might,
for all endurance and patience with joy. (Colossians 1:11)
하나님,
주의 길을 걷는 참빛 식구들 곁에서
추임새와 함께 힘을 더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24 이-메일 목회 서신)
좋은 아침입니다.
1.
팬데믹이 언제 끝날까 막막했는데
엊그제부터 세상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그 답답하고 어려운 시간을 잘 견뎠습니다.
꽤 오래 걸릴 것 같다는 백신의 개발도
온 세상이 연대하고 협력하니 예상외로 일찍 개발되어서
샌프란의 경우 집단 면역에 가까운 숫자가 백신 접종을 끝냈습니다.
물론, 아직도 서로서로 조심해야 합니다.
행여나 2-3주 후에 코로나 케이스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어렵게 문을 연 경제와 세상이 다시 닫히면 안 됩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학교에 가고
우리 교회도 얼굴을 보면서 예배할 수 있고
팬데믹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었던 소상공인들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어야 합니다.
팬데믹의 충격이 하도 컸기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선뜻 집 밖을 나서는 것이 망설여지지만
감사한 일입니다.
2.
힘든 일을 견디면서
얻는 교훈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끝이 있습니다.
끝나기까지 조바심과 불안, 염려에 휩싸이곤 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에도 끝이 있습니다.
견뎌냈다는 자긍심도 갖게 됩니다.
물론, 코비드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분들,
사업이 힘겹거나 직장을 잃은 분들,
정신적으로 힘겨웠던 분들이 있지만,
그래도 함께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예행연습>이라고 했듯이
어려움에 미리 준비하는 자세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팬데믹 초기에 휴지와 물, 마스크와
손 소독제를 사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던가요.
사재기는 안 되지만,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야 함도 배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모든 여정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납니다.
4.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멉니다.
변이 바이러스도 조심해야 하고
모든 것이 풀리면서 사람들의 긴장까지 풀어져서
무분별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아시안 혐오에 대한 소식도 종종 들려옵니다.
팬데믹 이후에 생길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개인적 격차도 큰일입니다.
요즘 시장에 가면 물가가 깜짝 놀랄 정도로 올랐답니다.
코비드보다 더 무서운 지구온난화도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한 가지 밀려온 파도를 넘고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바른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를 해냈으니
그 다음 문제도 풀어낼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갖고 말입니다.
이제부터
좋은 소식만 들려오길 기대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롬12:12)
Rejoice in hope, be patient in tribulation,
be constant in prayer (Rom 12:12)
하나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비추시는 빛(끝)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6. 17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