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에고 에이미 (5)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나는…I am)>를 한 가지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자기 소개문입니다. 그동안 배운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다음과 같습니다:“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몸을 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고, 그 빛은 생명의 능력이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에고 에이미>는 예수님을 양을 돌보는 선한 목자, 양들이 오가는 문으로 소개하셨습니다. 목자인 예수님과 양인 우리의 관계를 강조하셨습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으로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목자와 양이 서로 연결됩니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오늘부터 다음 주까지 배울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에고 에이미>는 서로 짝입니다. 역시 “생명”이 강조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품고 줄곧 생각하신 것은 “생명”입니다. 죽은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와 함께 일곱 가지 표적(signs)이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로 변한 표적으로 시작해서,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앞을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2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베다니라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남동생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나사로의 집에서 머물곤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 오누이를 가족처럼 그리고 친구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사로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사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다가 나사로에게 가셨지만,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끝낸 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물론 온 동네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시면서 하신 말씀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였습니다. 나사로를 살려 내십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河-

나는 양의 문이라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주일 예배에서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 I am>를

하나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소개문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시작하신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지난 주일에 “나는 선한 목자라”까지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남은 세 가지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를 미리 말씀드리면

“나는 부활과 생명이라” “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

“나는 포도나무라”입니다.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의도(목적)를

파악하고 배울 기회입니다.

 

동시에, 우리도 “내가 누구인지”

우리 자신의 <에고 에이미 I am>를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닮고, 예수님의 삶을 닮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2.

요즘 세상이 파편처럼 갈라지고 있습니다.

‘파편’은 전쟁 용어입니다.

특히, 수류탄이 폭발하면서 표피가 파편이 되어서

매우 위험한 살상무기가 됩니다.

그러니 “세상이 파편처럼 갈라져 있다”는 소름 끼치는 표현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서로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모습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배경과 환경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것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을 인정하고

서로 소통하고, 경청하고, 때로는 도전하면서

배워가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다름’이 ‘적’이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파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SNS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유튜브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서는

사적인 생각을 가감 없이 표현합니다.

공공의 선(common good)을 추구하면서

생각이나 행동을 모아가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들,

생각이나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하는 사람들,

교묘하게 사실 관계를 왜곡하는 사람들,

거기에 우리가 믿는 신앙이 개입하면 더 복잡해집니다.

 

3.

저는 요즘 세상을 보면서

예수님의 세번 째 <에고 에이미>,

“나는 양의 문이라”가 자꾸 생각납니다.

 

문을 만들지 않고

각자의 벽을 쌓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대문 정도는 아니어도, 작은 창문이라도 만들면

서로에게 숨통이 트일 것 같은데 안타깝습니다.

 

양의 문인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고 나간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공감대를 만들어 갈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을 닮은 우리가

세상에서 서로를 연결해 주는 “문”이 되길 바랍니다.

위험천만 파편처럼 갈라진 세상이

하나로 이어지는 “의와 기쁨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에베소서 2:14)

For he himself is our peace, who has made us both one

and has broken down in his flesh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 (Eph 2:14)

 

하나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9. 18 이-메일 목회 서신)

나는 선한 목자라

에고 에이미 (4)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나는…I am)>를 한 가지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자기소개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를 배웠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에고 에이미>인 “나는 선한 목자라”를 공부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양의 문과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0장은 양을 돌보는 참된 목자와 양을 해치기 위해서 담을 넘어오는 도둑과 강도를 비교했습니다. 참된 목자는 우리의 문을 통해서 양의 출입을 돕습니다.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도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하지만, 도둑과 강도는 양의 이름을 모릅니다. 양들도 그들을 모릅니다. 양들이 따라나서지 않으니 도둑질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으로 소개하십니다. 양의 우리를 지키는 문입니다. 예수님을 통과할 때 생명과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은 예수님의 문으로 출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고, 들어가고 나가면서 먹을 양식(“꼴”)을 얻습니다. 도둑과 강도들은 양을 죽이려는 것만 생각하지만, 양의 문이신 예수님은 풍성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나는 선한 목자라”고 소개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정성껏 돌봅니다.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로 양을 사랑합니다. 반면, 봉급만 받고 형식적으로 양을 돌보는 삯꾼 목자는 물질에만 관심을 둡니다. 이리가 오면 양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먼저 챙깁니다. 양을 들에 두고 도망갑니다. 이리가 양을 물어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삯꾼 목자들이 많았습니다.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신앙을 갖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 잇속만 챙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질타하십니다. 그래도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지 않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들은 뇌물을 받고 성직을 매매하던 헬라 시대의 제사장들과 비슷했습니다. 더 멀리는 에스겔 선지자가 말하던 삯꾼 목자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내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겔34:8). 하나님께서는 직접 자신의 양을 찾고 돌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다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으리라(겔34:15-16).

 

에스겔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이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할렐루야! -河-

 

집짓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제가 사는 동네에

아주 커다란 오피스디포(Office Depot)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물론 교회에 필요한 문구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손님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빈 진열대가 늘어가더니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옛 친구를 잃은 것처럼 허전했습니다.

 

앞뒤에 널찍한 주차장까지 갖춘 커다란 건물이

한동안 버려진 것처럼 덩그러니 서 있더니

어느 날 아파트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동네 게시판에 올라왔습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파트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늘 오가는 길이어서 그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천막으로 가리고 옛 건물을 부수더니

기초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꽤 깊이 파고, 쇠기둥을 박고, 한참 동안 공사가 이어졌습니다.

건물을 짓는데 기초공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지상 위 건물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파트라면 수많은 가구의 상하수도, 전기, 가스,

요즘은 인터넷까지 설치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지상에서의 작업이 본격화되더니,

요즘은 1층 건물이 올라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동원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인부들은 자기가 맡은 일만 하는 듯 보였지만,

아파트는 차근차근 세워지고 있습니다. 신기합니다!

 

2.

성경은 우리의 신앙을 집 짓기에 비유합니다.

예수님을 건물의 모퉁잇돌로 설명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비교하시면서

반석 위에 세운 집은 홍수가 나도 끄떡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손으로 지은 육체의 장막집은 무너지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퉁잇돌 삼아 인생과 신앙의 집을 지어갑니다.

하지만, 단숨에 세워지는 집이 아닙니다.

기초공사에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루는 기둥을 세웁니다. 하루는 송 판때기로 천장과 벽을 만듭니다.

집에 필요한 것들도 하나하나 설치합니다.

 

집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며 차근차근 지어가야 합니다.

지루한 작업의 연속입니다. 이마에 땀이 흐릅니다.

곳곳에 위험도 숨겨져 있어서 조심조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각자의 집을 짓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인생의 집 한 부분에서

묵묵히 지루한 작업을 이어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땅 밑에서 기초를 다지며 땀을 흐릴 수도 있습니다.

 

집이 정말 세워질지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연장을 들고 인내로 집을 짓습니다.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가야 할 인생 여정입니다.

 

한 가지 한 가지에 최선을 다하길 원합니다.

꿋꿋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모퉁잇돌 삼아

묵묵히 집을 짓고 계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지어가는

세상에서 유일하고 가장 멋진 집이 될 것입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잠언 24:3-4)

 

하나님,

꿈을 갖고 신앙과 인생의 집을 짓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9. 11 이-메일 목회 서신)

나는 양의 문이라

에고 에이미 (3)

 

신약성경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일곱 가지 말씀이 나옵니다. 헬라어 <에고 에이미(나는…I am)>로 시작합니다. 처음 시간에 “나는 생명의 떡이라,” 지난주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몸을 주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생명의 빛으로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것을 말씀하실 때는 초막절이라는 이스라엘의 3대 명절 기간이었습니다. 낮에는 성전에 물을 붓고, 밤에는 불을 켜는 초막절 기간이 끝나면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빛은 절대로 꺼지지 않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는 세 번째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나는 양의 문이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유대인의 명절 가운데 하나인 수전절(하누카) 기간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가운데 한 명인 셀류시드 왕조의 안키오커스 4세(주전175-164)의 통치를 받을 때였습니다. 안키오커스는 이스라엘은 물론 정복한 민족들에 헬라 문화를 강요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것은 물론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헬라 제국에 뇌물을 바치고, 대제사장의 직분을 사고파는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을 헬라식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습니다. 예루살렘은 혼란에 빠졌고, 커다란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20여 마일 떨어진 작은 마을 데모인에 살고 있던 제사장 맛다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이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하스몬 왕조(주전143-주후63년)를 세웠습니다. 맛다디아의 셋째 아들 유다 마카비(“망치”)가 혁명을 주도했기에 마카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했을 때, 성전에는 하루 분 기름밖에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여드레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마카비 형제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절기가 “수전절/하누카(봉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실 때가 바로 유대인의 절기 수전절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도 마카비 시대의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에 아부하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양을 돌보는 목자가 없었습니다(겔34장):”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겔34:8).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안전하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河-

도마뱀

좋은 아침입니다.

 

1.

저희 부부가 가끔 산책하는

동네 호숫가 산길에서 마주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사슴 가족이 대표적입니다.

엄마 아빠 아기 사슴들이 사뿐사뿐 가볍게 산을 탑니다.

호숫가에는 오리 떼가 헤엄을 치고 있습니다.

요즘은 터키 또는 타조 비슷한 커다란 새들도 보입니다.

 

산책길 초입부터 우리를 반기는 작은 친구도 있습니다.

바로 도마뱀입니다.

요즘처럼 날씨가 더울 때는 더 많이 눈에 뜁니다.

 

제가 어릴 적 살던

시골 마을에도 도마뱀이 있었습니다.

학교가는 길에도 가끔 출몰했습니다.

 

도마뱀을 잡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똑똑해진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어서,

도마뱀보다 잽싸고 빠른 아이들은

도마뱀을 잡아서 주머니에 넣기도 했습니다.

 

산책길에 도마뱀을 만나면,

어릴 적 좋은 추억 때문인지 반갑습니다.

 

2.

도마뱀은

지구상에 가장 많이 서식하는 파충류라고 합니다.

따라서 종류도 매우 많습니다.

카멜레온이나 이구아나도 도마뱀 종류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도마뱀은 “자절(自切, Autotomy)”이라고 불리는

위험한 상황에서 연골로 이뤄진 꼬리를 자르고

살아남는 생존 기법으로 유명합니다.

신체 구조상 꼬리 자르기가 여러 번 가능하지만,

재생하는데 들어가는 에너지나 시간,

기형적으로 재생되는 확률을 고려하면

그 횟수가 제한적이랍니다.

 

3.

성경에도 도마뱀이 두 번 나옵니다.

사막이 많고 날씨가 더운 팔레스타인 지역에

도마뱀이 많았을 텐데 의외로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첫째는 레위기 11장 29-30절입니다.

고대 히브리어를 현대의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카멜레온까지 서너 가지 종류의 도마뱀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땅에서 기어다니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 닿기만 해도 부정합니다.

성경에 도마뱀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둘째는 잠언 30장 24-28절입니다.

레위기와 달리 잠언에서는

땅에 사는 작지만, 지혜로운 짐승들과 함께 등장합니다.

힘이 없지만 여름에 부지런히 먹을 것을 준비하는 개미,

연약하지만 바위틈에 집을 짓고 사는 사반(바위 토끼),

손에 잡힐 정도로 작지만, 웅장한 왕궁에 사는 도마뱀입니다.

 

도마뱀이

땅에 사는 지혜로운 짐승들의 반열에 당당히 올랐습니다.

게다가 임금님의 거처인 왕궁에 사는 짐승으로 묘사됩니다

도마뱀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똑똑해진다는 전설이 생각납니다.

 

4.

뱀띠해를 맞던 올해 초,

신앙적으로 비둘기처럼 순수해야 하지만,

세상에서는 뱀처럼 지혜로워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도마뱀처럼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도마뱀에게 끈질긴 생명력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도 도우시고 살아남을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지혜와 힘으로 오늘 하루도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상을 삽시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넷이 있나니…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잠언 30:24,28)

 

 

하나님,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9. 4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