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10

선한 사람들

 

룻기를 읽으면서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같이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을 실천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입니다. 사사 시대는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고 각자 자기 좋은 대로 행하던 때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없던 깜깜한 암흑과 같은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훗날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날 베들레헴에 살았던 룻과 나오미 그리고 보아스는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룻기를 시작하면서, 로마서 8장 28절을 옆에 두고 말씀을 나누길 제안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가뭄을 피해서 모압으로 피난 간 나오미 가정에 상상하기 힘든 재난이 밀어닥쳤습니다. 남편 엘리멜렉과 모압 여인과 결혼한 두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가뭄이 그쳤다는 소식을 듣고 룻과 함께 돌아온 나오미는 완전히 빈손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더 이상 “나오미 (기쁨)”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 (쓰디쓴)”로 부르라고 했을까요!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맨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홀로 된 두 여성이 살아가는 것이 무척 힘들던 시대였기에 두 사람의 삶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보리밭에 가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오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룻은 보리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양식을 조달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룻기 3장 말씀대로 룻이 보아스에게 프러포즈 하면서 룻은 물론 나오미 가문이 보아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설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빛이 비친 것입니다.

 

룻기의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일상을 살았습니다. 큰 그림을 볼 여유도 없었고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일상이 모자이크처럼 맞춰지면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복 받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섭리)이 룻과 나오미 그리고 보아스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셨습니다.

 

룻기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선합니다. 서로 복을 빌어주고,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을 실천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선한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감사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세워갑니다. 예수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우리도 룻기의 주인공들처럼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원합니다. -河-

묻어가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마다 룻기를 읽어가면서
제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것 가운데 하나는
룻기의 주인공들이 만들어가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꼭 붙어서
베들레헴에 돌아오고,
시어머니를 위해서 보리 이삭을 주으러 밭으로 나갑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행여나 자신이 죽은 후에 모압(이방)여인 룻이 홀로 사는 것이 염려되어서
그를 돌봐줄 안식처, 남편을 생각합니다.

 

나오미가 마음에 두고 있는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는
예수님을 닮은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보리밭에서 일하는 일꾼들까지 귀하게 여기고
일꾼들도 주인인 보아스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압 여인 룻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보고
민족이나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
차별없이, 아니 더 세심하게 룻을 챙깁니다.

 

룻에게 베푼 보아스의 사랑을
시어머니 나오미는 “헤세드”라고 표현했습니다.
보아스 역시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본 룻의 사랑을 “헤세드”로 칭찬했습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입니다.
신약의 헬라어 <아가페>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룻기 속의 주인공들은 하나님 안에서
서로 축복하고, 헤세드(하나님 사랑)를 실천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섭리)을 경험했습니다.

 

2.
룻기의 배경이 되는 사사 시대는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행하던 때인데
룻기의 베들레헴 사람들은 매우 인격적이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갑니다.

 

룻기를 읽으면서
저 자신이 당시의 베들레헴에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아스 기업의 종업원이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하고
모압 여인 룻을 도왔을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이 속한 친족이었다면
홀로 된 여성 룻과 나오미를 돌보는데
조그만 힘이라도 보탰을 것입니다.

 

이렇게 룻기 속에 들어가 있으면
선한 사람들의 배려와 격려를 통해서
저 역시 저절로 선한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3.
공동체의 힘입니다.

 

좋은 공동체가 세워지면
그 속에 속한 구성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선한 길을 갑니다.
서로 ‘묻어가는 것’입니다.

 

흩어져서 예배한 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도
힘든 시간을 함께 겪고 있는 참빛 식구들,
신앙의 동지들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서로서로 묻어갈 정도로 힘 있는
주님의 공동체로 세워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그 길을 갑시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 4:12)

 

 

하나님,
서로에게 격려와 도전을 주는
참빛 공동체로 자라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 15 이-메일 목회 서신)

룻기 9

타작 마당에서

 

4장으로 이뤄진 구약성경 룻기는 1장에서 모압으로 피난 간 나오미 가족에 닥친 재난을, 2장은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이 보아스라는 유력한 자를 만나서 살아남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서 룻이 우연히 간 곳이 보아스의 밭이었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나왔습니다. <우연히 – 마침>이라는 공식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 즉 하나님의 섭리를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최대한 배려하면서 추수가 끝날 때까지 자기 밭에서 보리 이삭을 줍도록 허락했습니다.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모압 여인 룻을 배려하고 차별 없이 공평하게 대하는 보아스의 성품과 행동에서 예수님이 생각날 정도로 특별했습니다. 룻은 보리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 밭에서 보리 이삭을 주우면서 시어머니 나오미와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3장은 룻기의 절정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을 불러서 안식할 곳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룻이 홀몸으로 평생을 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있지만, 앞으로 이스라엘 태생도 아닌 모압 여인 룻이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매우 특별한 이야기를 합니다. 보아스가 밭에서 보리타작을 하고 있을 때, 보아스를 찾아가서 먼저 프러포즈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룻이 보리 이삭을 주워 올 때마다 보아스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전했고, 그때마다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확신했기에 위험을 무릎 쓰고 룻을 보아스에게 보내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시킨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밤중에 보아스가 보니 자기 발치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으니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9절)고 또박또박 이야기합니다. 옷자락을 덮는 것은 보아스가 룻을 처음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날개깃으로 룻을 덮어주실 것을 바라면서 축복했는데, 룻이 그 일을 지금 보아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친절하게 룻을 맞이합니다. 행여나 룻에게 피해가 생길까 염려되어서 아침까지 자신과 함께 있고,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줍니다. 보아스도 룻이 마음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계획대로 일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렇게 룻과 보아스가 인연을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두 사람 위에 매우 구체적으로 임했습니다. -河-

염려와 불안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목요 성경 공부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공부할 주제 중에
두려움과 염려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두려움(fear)은 사람, 상황,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느끼는 말 그대로 공포입니다.
적당한 두려움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하지만
지나친 두려움은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듭니다.

 

꼭 필요한 두려움도 있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敬畏 the fear of God)라고 부릅니다.

 

두려움과 달리
염려(worry)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상황을 미리 걱정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안이 없기에 두려움보다 강도가 작을 수 있지만
생각이나 삶을 어수선하게 하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서 또 다른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우리 안에서 생기는 염려의 대부분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들임을 알면서도
연약한 우리 마음이 염려에 휩싸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부탁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두려움과 염려가 우리를 억누르고 신앙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가 “불안(anxiety)”입니다.

 

불안은
마음과 생각이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면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입니다.
불안하면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2.
팬데믹이 길어지고
앞길에 대한 막막함, 맥락 없이 닥치는 어려움 등이 닥칠 때
두려움, 염려, 불안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오면
우리가 진작 두려워할 대상이 하나님임을 다시 기억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해야 합니다.
피난처와 방패 되시는 하나님 품으로 달려들어야 합니다.

 

소리 없이 침투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소리 없이 침묵하면서
깊은 기도에 들어가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염려를 물리치는 길은 기도입니다.
염려가 생기면 그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던지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훈련해서 습관이 되면 어느 정도 염려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불안과 염려는 비슷합니다.
대신 불안이 심해지면
상담을 받거나 의사의 안내를 받는 것도 좋습니다.

 

일상적인 불안이라면
그 순간에 소리 내서 기도하거나 찬양하실 것을 권합니다.
찬양은 어두운 세력을 쫓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마음이 밝아지고 가벼워질 때까지
한자리에 앉아서 찬양하면 불안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한 번에 끝날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염려, 불안이 찾아올 때마다
실천해야 할 신앙 훈련입니다.

 

3.
부활절 이후를 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능력,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 안팎에서 밀려오는 두려움, 염려, 불안을
부활의 능력으로 극복하기 원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부활의 주님을 따라서 주어진 인생길, 신앙의 길,
일상을 살기 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부활을 살게 하소서.
찾아오는 두려움, 염려, 불안을 이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8 이-메일 목회 서신)

2021년 부활절에

올해 부활절도 교회에서 모이지 못하고 흩어져서 맞고 있습니다. 작년에 이어서 특별한 부활절이 한 해 더 연장된 셈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물론, 한 해 동안 흩어져서 예배했기에 영상으로 예배하며 부활절을 맞는 것이 특별하지 않습니다. 일상이 된 느낌입니다. 그래도 함께 모여서 부활절을 맞고, 예배 후에 부활절 만찬을 나누던 때가 그립습니다. 내년을 기약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은 오합지졸이었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고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제자들 역시 흩어지고 기독교는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제일 먼저 보이시고,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연거푸 나타나셨습니다.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를 보낼 당시에 살아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물론 바울 자신의 전도도 헛되다고 말한 것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경험과 당시 살아있던 부활의 증인들의 증언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부활은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과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한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생명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본 제자들과 수백 명의 증인이 있었다는 것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논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은 진공 속에서 벌어지는 이론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일상과 세상 속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고백합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역사이며 삶입니다.

 

셋째로, 부활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에 개입하셔서 생긴 사건입니다. 자연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속에 드러난 유일한 사건입니다. 부활은 능력입니다.

 

올해도 흩어져서 부활절을 맞지만, 부활만이 갖고 있는 생명, 사실, 능력이 참빛 식구들 위에 구체적으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나그네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예배에서 룻기를 읽고 있습니다.
룻기는 베들레헴에 가뭄이 들면서
가족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민간
엘리멜렉의 가족사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이 모압에서 죽고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만 살아남았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 꿈을 갖고 떠난 이민길에
예상치 못한 재난이 닥친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와
10여년을 모압에서 이민자(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오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
당시 홀로된 여성의 삶과 중첩되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모압 출신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옵니다.

 

어머니의 민족이 자기 민족이 되고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끝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하고 떠난 여정입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역이민을 했지만,
모압 출신 룻은 베들레헴의 이민자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온 룻은 언제나
“모압 출신” “모압 여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습니다.
선민의식이 컸던 이스라엘에서 룻이 겪었을 나그네 서러움이 느껴집니다.

 

3.
룻과 나오미만 이민자로 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처음부터 나그네(이민자)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가나안 땅에 온 아브라함,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동네로 피난 갔던 야곱,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과 그의 후손들까지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함께 특별히 나그네를
환대하고 대접하라고 부탁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셨습니다.
3년 공생애 동안 머리 둘 곳 없는 노숙자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사셨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핍박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대신, 당시에 나그네로 살았던 땅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나그네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도
나그네로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4.
요즘처럼 미국에서 나그네로 사는 심정이
복잡한 때도 별로 없었습니다.

 

인종 차별은 미국의 고질적 문제라고 생각했고
1992년 LA 폭동과 소소하게 일어나는 유사한 갈등으로 경각심을 가졌지만
팬데믹 이후 아시안 혐오가 미국의 큰 사회문제가 되고 보니
우리의 이민 생활이 나그네 삶인 것을 실감합니다.

 

스스로 조심해야겠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도 내야 합니다.
타인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오길 기도해야 합니다.

 

룻기의 보아스가
모압 여인 룻을 배려하고 돕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왔다가
본향인 하나님께로 가는 이민자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출23:9)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걸어가는 나그네 길에
주께서 꼭 동행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1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