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1)

은혜와 평강 (1)

 

매년 하반기에는 신약성경 가운데 한 책(冊)이나 장(章)을 선택해서 공부했습니다. 올해는 지난 8월에 아침마다 함께 읽었던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차근차근 공부할 예정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 바울이 당시 마케도니아 지방의 수도에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서와 함께 신약성경 가운데 초기(주전 50년 무렵)에 쓰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선교를 마치고 로마 제국이 만든 하이웨이를 따라서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 국제 무역이 성행했습니다. 그곳에는 유대인들의 회당도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3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17:1-10).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메시아)가 바울이 전하는 나사렛 예수임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비롯한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고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온 세상의 구주가 되셨다고 전파했습니다. 바울의 전도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력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시기가 시작되었고, 바울과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폭력배들을 사주해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바울 일행(데살로니가 전서 서두에 등장하는 실라와 디모데)은 몸을 피했지만, 예수님을 믿게 된 야손과 형제들을 잡아서 데살로니가를 다스리는 총독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로마 제국에서 일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치 도시였습니다. 세상을 뒤흔드는(upside down)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로마 황제 대신에 예수님을 주(主)로 믿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지만, 바울은 밤중에 피신해서 남쪽의 베뢰아로 떠나야 했습니다. 나중에 베뢰아에 바울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내려와서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바울은 남쪽 아가야 지방 아테네로 몸을 피합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어려움 속에서 세운 교회였습니다. 1년 반 동안 머물렀던 고린도나 3년을 머물던 에베소에 비하면 짧은 기간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 복음의 씨앗이 확고하게 심어졌고, 그것이 매우 멋진 교회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극찬합니다. 손색이 없는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함께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깊이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든든하게 서게 하소서”라는 올해 우리 교회 표어에 맞춰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자랑스러운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배우고 우리도 멋진 교회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河-

 

감사

좋은 아침입니다.

 

1.

1998년에 미국에 왔고

그동안 한국을 방문했지만,

가을에 한국을 찾은 것은 26년 만에 처음입니다.

 

올여름 한국이 무척 더웠다고 하는데

추석이 지나고 10월이 가까워지니 많이 선선해졌답니다.

그래도 한낮에는 무척 덥고 습합니다.

 

이번 한국 방문은

저희를 지원한 재단의 안식년 취지에 맞게

친지를 만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보다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을 여행하면서 쉼을 가질 계획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재정이 부족하고,

재정이 충분하면 시간이 부족하다는데

올해 우리 부부에게는 시간과 재정이 동시에 주어진 셈입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2.

9월 한 달 동안

<햇볕 같은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시편의 감사시 네 편을 공부했습니다.

 

봄에 공부한 탄식시에서는 탄식이 기도로 표출되었다면

감사시에서는 감사가 찬양으로 이어졌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지만,

어려움이 닥쳐야 무릎을 꿇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지만,

좋은 일이 생길 때 감사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렇게라도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음이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3.

성경 공부에서는

세상의 감사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감사를 비교했습니다.

 

세상의 감사는 잘될 때 감사합니다. 행복할 때 감사합니다.

감사가 ‘자기중심’입니다.

나 혼자 좋은 것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합니다.

감사 한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찾습니다.

형제자매와 더불어 감사합니다.

 

감사를 말로 표현하고, 잔치를 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감사의 끝에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있음을

시편 감사시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세상의 감사에는 자랑이 섞여 있습니다.

우리 감사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내가 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이기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4.

올 한 해도 4분의 1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시다.

그 답이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이길 원합니다.

 

우리 삶 이곳저곳에 흩뿌려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합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시편100편 2절)

Serve the Lord with gladness!

Come into his presence with singing (Ps 110:2)

 

 

하나님,

모든 일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26 이-메일 목회 서신)

믿음은 (5)

지난 다섯 주에 걸쳐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 돌아봤습니다. “든든히 서게 하소서”라는 올해 표어에 맞춰서 나눈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믿음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을지를 놓고 공부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매주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따라서 삼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확실하기를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우리 신앙의 뿌리요 터전입니다.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믿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믿음은 은혜이고 선물임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믿음이 좋으면 교만해질 수 있고 행여나 믿음이 부족하면 자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 같아도 결국 돌아보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둘째 시간에는 믿음은 신비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믿을 수 없습니다. 신비로움이라는 여백(room)을 남기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갖는 겸손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여백에서 일하실 가능성이 큽니다. 믿음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신비로움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또한, 믿음은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말 그대로 능력과 힘, 장애물을 뛰어넘는 위력, 일을 끝까지 해내는 끈기와 성취력을 경험합니다. 이처럼 믿음이 실제로 우리 삶에 효력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세 번째 시간에는 믿음은 다림줄이라고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파편처럼 흩어진 신앙과 삶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다림줄 아래로 모으기로 결심했습니다.

 

네 번째 시간에는 믿음을 흘려보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독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는 말씀도 기억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도 세상에 복이 되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고인 물이 아니라 365일 흐르는 생수와 같은 믿음을 갖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동행입니다. 창세기의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에녹과 함께 하셨고, 에녹도 하나님 편에 서서 걸었습니다. 하나님과 에녹의 마음과 생각이 같았습니다. 좋은 일만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힘들고 외롭고 절망 가운데 있었을 때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때도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에녹의 목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십니다.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복을 누린 것입니다. 에녹은 그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했습니다.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믿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신앙과 인생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갑시다.-河-

함께하심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노년에 지은

감사와 고백의 찬양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삶 구비구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기억하고 경험했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2.

지난 주일 예배에서는

익숙했던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부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야훼 하나님은 생소했을 것입니다.

아닌 밤에 홍두깨처럼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 약속을 믿고

말씀대로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갔습니다.

 

누구든지 떠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떠남에는 위험과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대의 서사나 이야기에 나타난 영웅들의 삶은

떠남과 귀환, 다시 떠남으로 이뤄집니다.

서양 문학의 근간이 되었다는

호머의 오딧세이아가 대표적입니다.

 

그래도 익숙한 곳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딧세우스같은 영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갈데아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브라함도 떠남이 무서웠을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매우 강력한 말씀을 주십니다: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12:3).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입니다.

사물은 쳐부수면 되고 상황을 극복하면 되지만,

사람은 예측불허입니다. 통제할 수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명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끝까지 지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100% 아브라함 편에 서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단,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저주하는 사람을 저주하신다는 말씀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실 것을 최상급으로 강조하신 수사(rhetoric)입니다.

 

4.

우리 모두 외롭습니다. 힘이 듭니다.

관계는 불안정합니다.

믿을 사람도, 믿을 것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가 믿고 바라봐야 할 분은

끝까지 함께 하시고, 우리 편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외면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23:4)

 

하나님,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19 이-메일 목회 서신)

믿음은 (4)

지금부터 4천년 전,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라고 불리는 바빌론 땅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가족을 이끌고 북쪽의 하란이라는 곳으로 이주합니다. 가족의 안전과 먹거리를 생각해서 살던 곳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당시는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 아브라함이 갈데라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는 말씀도 있습니다(행7:2).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길을 떠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떠나는 길입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절대 순종과 더불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게 만든 사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 자신이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재차 확인하셨습니다.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시면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한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18:18)고 질문하듯이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해서 아들 이삭을 바친 후에도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창22:18).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풀어갑니다. 아브라함은 말 그대로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그의 행위도 믿음에 걸맞게 훌륭했지만, 고향을 떠난 것과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과 연결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자손”이 단수로 쓰였기에 2천 년 후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세상의 복이 되었듯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도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똑같이 복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을 넘어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통해서 복을 받고, 우리는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딱 한 가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을 잠깐 언급했습니다.

 

당시 바빌론은 이집트와 더불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고 있던 세상 제국이었습니다.

신약성경 계시록에서 바빌론을

악을 대표하는 세상 제국으로 표현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다니엘은 이곳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식민지 국가의 젊은이들 가운데

총명한 사람을 데려다가 특별 교육을 시켜서

국제 외교의 특별한 직무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바빌론에 잡혀간 다니엘은

이름이 벨드사살로 바뀝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으로

그의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벨드사살은 “왕의 명령을 지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당시 왕은 바빌론 신의 대행자로 여겼으니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바빌론 신과 왕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사람에서

바빌론 왕의 사람으로 정체성이 바뀐 것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 언어와 학문을 배웠습니다.

당시 학문은 별을 보고 국가의 미래를 가늠하는 점성술이고,

이것은 모세 율법에서 금하는 일이었습니다(신18:10-14).

 

하나님을 믿던 다니엘이

거의 대부분 제국의 문화에 동화(assimilation)된 것입니다.

 

다니엘의 심적 갈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제국의 권력 안에서 다니엘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2.

그때 다니엘은 한 가지 “뜻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우상에게 드린 음식으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으로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것이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정한 <구별점>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었습니다.

 

다니엘서 6장에 나오지만,

그와 세 친구는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상 제국에서 살아남았고,

어려움도 겪었지만 바빌론 총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제국 한 가운데 드러내는 멋진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함께 하신 덕분입니다.

그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3.

우리 각자도

적어도 한 가지, <구별점>을 세우고

그것을 꼭 지키시길 부탁했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구별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21세기 세상 제국에 살아갑니다.

포로로 잡혀 온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삶에 동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칫,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세상에 완전히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꼭 한 가지 구별점을 만듭시다.

그것을 붙들고 지키면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갑시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을 사시려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단1:8)

 

 

하나님,

뜻을 정한 것을 지켜 나갈 믿음과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12 이-메일 목회 서신)

믿음은 (3)

믿음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믿는 것 같지만,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믿음은 복음의 신비로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믿음이 구체화되고 복음의 신비 속으로 들어갑니다.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 순간 신비에 싸여 있던 복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힘과 능력을, 믿음을 통해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믿음이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임을 공부하겠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남유다 출신이지만 북이스라엘에 올라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부흥했지만, 빈부격차가 컸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백성들을 학대하고 착취했습니다. 정의가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다림줄(plumbline)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다림줄은 끝에 무거운 추를 매단 줄을 가리킵니다. 다림줄 자체가 납이나 주석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나크>인 것과 연결됩니다. 벽을 쌓을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서 벽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합니다.

 

아모스는 다림줄을 드리우고 성벽을 쌓고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손에 들고 서 계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한 가운데 다림줄을 드리워 놓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나 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삶은 하나님의 다림줄에 미치지 못하고 삐뚤삐뚤 일 것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고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불과 20여 년 후에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다림줄을 내린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요즘 시대에 다림줄을 내린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드리우는 다림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맞추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기를 부탁합니다. 사람의 속임수, 간사한 유혹, 온갖 그릇된 풍습에 쉽게 넘어가는 어린 신앙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옳고 그름을 헤아리는 분별력이 요청됩니다. 믿음이 분별력입니다. 믿음이라는 다림줄을 갖고 우리 자신은 물론 세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과 삶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