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

요한복음 17장(대제사장의 기도)

 

그동안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각을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생명”과 “사랑”이라는 두 주제를 늘 생각하시면서 3년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밝히 드러내신 <에고 에이미 I am>가 생명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께 나오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서로 사랑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요한복음 17장은 유월절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온 세상의 죄를 없애고,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높은 담을 허무시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연결하십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중재자가 되시기에 요한복음 17장을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3년 공생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속에는 예수님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소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17:1-8).

 

하나님을 찬양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세 가지 주제로 기도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는 것은”이라는 표현이 세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로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하나가 되길 기도하십니다(9-14절). 예수님께서 세상이 아니라 “내게 주신 자들”이라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따로 언급하십니다. 그만큼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애틋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세상 속의 제자들을 지켜주시길 기도하십니다(15-17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시고 세상 속으로 파송하십니다. 대신 제자들이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세상의 핍박도 견딜 수 있기를 기도하십니다. 주의 말씀인 진리로 보존하시길 기도하셨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듣고 믿게 될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고, 이들이 서로 사랑함으로 세상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분임을 믿도록 돕는 촉매가 되길 기도하십니다.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河-

 

감정 다스리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소위 근대(modernism)라고 불리던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reason)이 중요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했고, 실험을 통해서 검증했습니다.

사실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려고 애썼습니다.

 

근대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서는

이성보다 “감정(emotion)”이 앞서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에 앞서서 느낌이 와야 합니다.

감이 잡혀야 합니다. 마음에 다가와야 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차근차근 조목조목 필요한 것을 점검하면서

사람을 사귀지 않습니다.

느낌이 오면, 마음이 통하면 곧바로 사귑니다.

청춘남녀의 연애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팔이”라는 용어도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그 사람의 동의와 도움을 얻어내는 행위를 뜻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거나

관계를 형성하려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용어입니다.

 

2.

기독교 신앙은 어떨까요?

우리나라 기독교는, 거의 초반부터

감성에 호소하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은혜 받았다”는 고백은 대부분 감정에 기초합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던 90년대 중반부터

무작정 감정적으로 믿지 말고, 생각하면서 공부하면서

“질문하는 신앙” “이해하는 신앙”을 갖기를

부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감정에 호소하면서

발전하고 부흥을 경험하다 보니,

냄비 같은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에 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몇 마디 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3.

감정은 좋은 것입니다.

‘느낌’이 없고 ‘생각’만 있는 세상은 무미건조합니다.

 

그런데, 감정은 다스림의 대상입니다.

올바른 감정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실제로 만들어 줍니다. 확신을 줍니다.

 

반면, 그릇된 감정은

“자기애(自己愛)”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그릇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변화가 심합니다.

 

영성가 리처드 로(Richard Rohr)는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전망대에 올라가기를 권합니다.

그가 말하는 전망대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실 정도로 감정이 풍부하신

성령 하나님의 자리(전망대)에 올라가서 우리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필요한 감정인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감정인지,

집착하는 태도에서 나온 감정은 아닌지.

감성팔이처럼 남을 의식한 감정은 아닌지,

성령 하나님의 자리에서,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살피라는 권면입니다.

 

감정이 중요한 시대를 살다 보니

신앙과 삶이 감정에 따라 춤을 춥니다.

감정의 폭풍에 휘말리면,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요동칩니다.

 

하나님 안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올바르게 표현하고, 누리길 원합니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성숙함까지 갖춘다면

정말 근사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3장 15절)

 

 

하나님,

마음속에 평안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9 이-메일 목회 서신)

나는 참 포도나무라

에고 에이미(7)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나는…I am)>를 한 가지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자기 소개문입니다. 그동안 배운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다음과 같습니다:“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마지막 <에고 에이미>는 “나는 참 포도나무라”(요 15;1)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유월절 만찬에서 주신 말씀입니다(요13-16장).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13-1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제자들이 거할 집을 마련한 후에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5장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설교에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장차 받게 될 어려움도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가시면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하며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포도원 또는 포도나무는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포도원을 바르게 관리하지 못하고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최상급 포도를 기대했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소용없게 된 포도나무가 불에 탈 것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시편80편).

 

이처럼 구약의 포도원과 포도나무는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포도원을 직접 농부 되시는 하나님께서 관리하십니다. 많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 한 그루만 존재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백성들이 포도나무가 되어서 열매를 맺을 필요가 없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되면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포도나무 가지들을 정리하십니다. 겨울철을 보내면서 쓸모없게 변한 가지는 잘라 버리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예수님을 팔아먹을 가룟 유다 등을 가리킬 것입니다. 포도가 잘 열리도록 성한 나무들도 정리해 주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할 어려움을 뜻할 것입니다. 나머지 가지들이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열매를 ‘전도’ 또는 ‘선교’라고 하셨습니다. 개인 차원을 넘어서는 공동체 사역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서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로써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河-

불꽃 야구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유튜브를 통해서

<불꽃야구>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합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대한민국 최고였던 프로야구 선수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그 선수들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모습을 보았기에

친숙하고 반갑게 경기를 시청하고 있습니다.

 

팀에는 유망주 젊은 선수들도 있습니다.

프로 야구팀에 들어가지 못한

대학교 또는 사회인 야구팀 출신들입니다.

 

은퇴한 선수들이나 젊은 선수들이나

열정이 넘칩니다.

특히 젊은 선수들은

레전드와 같은 선배들과 한 팀에서 운동하고 경기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고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한 선수가 프로팀에 입단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불꽃 야구> 선수단의 감독은

야구의 신이라고 불렸던 김성근 감독입니다.

팔순이 넘으신 분입니다. 암 수술도 하셨던 분인데,

선수들을 지도하는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불꽃 야구팀이 경기하는 상대 팀들은

고등학교, 대학, 사회인 야구팀들입니다.

고등학교 선수들이 대한민국에서 최고였던 선배들과

한 운동장에서 경기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일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불꽃야구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많아서

경기를 개방하는 날에는 운동장이 외야석까지 가득 찹니다.

응원 소리가 우렁찹니다.

 

은퇴한 선수들은 다시 듣는 관중들의 응원 소리에

가슴이 뛴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나 대학팀 선수들이 그렇게 많은 관중들 앞에서

경기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선수가

진심으로 열심히 합니다.

감동입니다.

 

2.

무엇보다 저에게는 “불꽃”이라는

단어가 참 좋습니다.

 

매사에 불꽃이 꺼지면 안 됩니다.

에너지가 떨어지고, 하는 일에서 매너리즘에 빠지고

열정이 사라지면 인생 자체가 흔들립니다.

 

신앙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야 꾸역꾸역 불씨를 살리고

불꽃을 태우면서 이끌어가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신앙의 열정을 유지하고

불태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십상입니다.

 

행여나 불꽃이 약해지고 있다면

다시 예전의 신앙 열정을 되찾아야 합니다.

가슴이 뛰던 순간을 다시 맞이해야 합니다.

 

한번 사는 인생이고, 이왕 믿는 신앙의 길입니다.

하루하루 신바람 나게, 흥이 넘치게 살고 믿어야지요!

 

관중이 가득 찬 운동장이 아니어도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지켜보시고

응원하시는 그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삶을 사는 것이며,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오스 기니 <소명>-

 

 

하나님,

불꽃 인생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2 이-메일 목회 서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에고 에이미 (6)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나는…I am)>를 한 가지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자기 소개문입니다. 그동안 배운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다음과 같습니다:“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여섯 번째 <에고 에이미>가 등장하는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직전,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가겠다고 다짐하지만,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뒤숭숭했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데 떠나신다니 자기들만 홀로 남게 생겼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예수님은 떠나시지만, 아버지 집에 제자들이 거할 곳을 준비해 놓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가까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종말입니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제자들과 모든 성도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 번 알려주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의심 많은 도마가 나서서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5절)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목적지를 알지 못하니, 어떤 길을 가시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여섯 번째 <에고 에이미>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절).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도마 역시 예수님께서 실제로 가실 길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십자가의 길도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길을 가시고, 실제로 로마 권력을 물리치고 왕이 되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는 말씀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진리와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14장 후반부에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과 성도들 안에 머무시고 도우실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河-

두 예술가

좋은 아침입니다.

 

1.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 Works of Love>에서

진정한 기독교, 진정한 신앙은

사랑의 실천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꽤 두꺼운 책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차근차근  알려줍니다.

 

<사랑의 역사>에 두 예술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모델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그려보고 싶은 얼굴을

한 명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마다

한두 가지 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헛수고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다른 예술가는 외국을 여행해 본 적도 없습니다.

자기를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도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 친지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매일 만나는 가까운 친지들,

“거기에 있는 어떤 얼굴에서도 하찮은 얼굴이나

결함투성이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을 더 많이 찾아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예술 작업에 만족했고 행복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두 번째 사람이 진정한 예술가라고 평가합니다.

예술 작품을 그리려는 사람이

흠을 찾아내고,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다고

까다롭게 따지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사랑할 대상의 결함이나 단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람들 속에서 아름다운 것들, 장점을 찾아내서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2.

키에르케고르가 두 예술가의 이야기를 소개한 대목은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

라는 장(障, chapter)에 나옵니다:

 

“우리의 과업은 사랑할 대상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어졌거나 선택된 대상에서 사랑할 만한 것을 찾고,

비록 상대가 어떻게 변한다 해도

그 상대를 계속 사랑스러운 존재로 생각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진실함을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기준이 무너지고, 너무 쉽게 서로를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갈라섭니다.

 

때로는 너무 근사한 것, 이상적인 것,

세상에서 찾기 어려운 것을 끊임없이 쫓습니다.

어쩌면 저 멀리 있는 무지개와 같은 것인데 말입니다.

 

없는 것을 쫓기보다,

완벽한 것을 기다리며 찾기보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가까이 있는 이웃들의 장점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

참된 예술가로 살아갑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12)

 

하나님,

일상에 감사하고 사랑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9. 25 이-메일 목회 서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에고 에이미 (5)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나는…I am)>를 한 가지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자기 소개문입니다. 그동안 배운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다음과 같습니다:“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몸을 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고, 그 빛은 생명의 능력이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에고 에이미>는 예수님을 양을 돌보는 선한 목자, 양들이 오가는 문으로 소개하셨습니다. 목자인 예수님과 양인 우리의 관계를 강조하셨습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으로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목자와 양이 서로 연결됩니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오늘부터 다음 주까지 배울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에고 에이미>는 서로 짝입니다. 역시 “생명”이 강조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품고 줄곧 생각하신 것은 “생명”입니다. 죽은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와 함께 일곱 가지 표적(signs)이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로 변한 표적으로 시작해서,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앞을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2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베다니라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남동생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나사로의 집에서 머물곤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 오누이를 가족처럼 그리고 친구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사로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사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다가 나사로에게 가셨지만,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끝낸 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물론 온 동네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시면서 하신 말씀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였습니다. 나사로를 살려 내십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