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럴림픽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파리에서는

장애인들이 겨루는 패럴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포털 사이트의 스포츠 란을 즐겨 보는데

얼마 전까지 한국의 모든 매스컴이 올림픽에 집중했습니다.

방송사들은 정규 방송까지 중단하고

올림픽 중계에 열을 올렸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스포츠 포털에서

패럴림픽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딘가 있을 텐데 제 눈에 띄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한 달 전 올림픽 기사로 도배하던 때와 비교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의 경우,

늦은 시간에 올림픽 주관 방송사인 NBC에서

패럴림픽 경기를 하이라이트 형식으로 내보냅니다.

미국 경기는 생중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패럴림픽은 사람들의 관심 밖입니다.

 

2.

패럴림픽에서는

모든 선수가 승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쪽 팔이 없는 선수가 육상 경기에 등장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농구 경기를 합니다.

모든 종목에 참여한 선수들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감동이 밀려옵니다.

 

한국 신문에도 보도가 되었고

유튜브 쇼트 영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열일곱 살 된 데비라는 인도 양궁선수가 눈에 띕니다.

 

선천적으로 팔다리가 짧게 성장하는 병을 앓고 있기에

두 팔이 거의 없습니다.

발가락으로 활을 잡고, 다른 발을 이용해서 화살을 활에 끼웁니다.

손이 없으니 입으로 잡아당겨서 활을 쏩니다.

 

발과 입에 얼마나 큰 힘이 들어갈까요!

그런데 이 선수가 10점을 쏘았습니다.

관중석에서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다고 하지만,

패럴림픽 선수들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입니다.

메달이나 순위에 상관없이

어떤 선수와 인터뷰해도 각자의 이야기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꿈과 소망을 주는 위인들입니다.

 

3.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우 넓습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맨 앞에 서 있거나

눈에 띄는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주목을 받습니다.

 

조금만 부족해도 관심 밖입니다.

올림픽에 비해서 패럴림픽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부족함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진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기 때문입니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패럴림픽에 참여한 모든 선수를 응원합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경기에 참여하지 못한

무명의 선수들도 기억합니다.

 

그분들이 계셔서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깊어집니다.

절망이 밀려오는 곳에서 소망을 발견합니다.

힘을 얻습니다.

고맙습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편 41:1)

 

 

하나님,

뒷전에 밀려 있는 분들을 기억하고

마음으로 몸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9. 5 이-메일 목회 서신)

믿음은 (2)

구약 시대 하박국 선지자는 정의가 무너지고 패역한 세상에 살았습니다. 폭력이 난무합니다.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타락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안타까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는 언제까지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기다려야 하는지 한탄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당시의 제국인 바빌론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표범보다 빠른 말들, 이리보다 사나운 군대가 먹이를 가로채는 독수리처럼 이스라엘을 덮칠 것입니다. 섬찟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어떻게 세상 제국에게 공격을 당하고 심판을 받을 수 있냐고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 하나님을 모르는 훨씬 패역한 세상 제국에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망대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말씀을 멀리서도 읽을 수 있게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빌론을 동원해서 하나님 백성을 심판하시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서 잠시 세상 나라를 동원하실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시 회복되고 살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부터 포학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빌론은 영원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마지막으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게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진정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망대에 올라갔을 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는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망가졌고 세상도 망가졌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의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하박국 말씀을 인용했고, 훗날 마틴 루터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은 의롭게 사는 힘입니다. 세상을 이길 힘이요, 세상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의로운 길을 걷기 원합니다. 믿음이 힘과 능력입니다.-河-

여호야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열왕기하 11-12장에 등장하는

여호야다 제사장과 예루살렘 왕 요아스에 관한 말씀을 배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반역을 일으켜서

왕족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손자들을 죽이고 할머니가 왕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바알 신을 섬기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한 살 된 왕자 요아스를 침실에 숨겨서 구해냅니다.

어린 요아스는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성전에는 여호세바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여호야다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완전히 꺼질 뻔했던 다윗 가문의 등불이

여호세바의 기지와 여호야다 제사장의 돌봄으로 보존된 것입니다.

 

요아스 왕자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여호야다 제사장은 백부장들과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고, 아달랴를 처형합니다.

6년 만에 이방 여인 아달랴는 통치가 끝나고

요아스에 의해서 다윗 왕국이 회복된 뜻깊은 사건입니다.

 

2.

요아스가 겨우 일곱 살에 왕이 되었기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130살까지 살면서 요아스의 멘토가 되었습니다.

 

여호야다의 조언대로

바알 신전으로 변한 성전을 보수하고 회복합니다.

바알 종교의 잔재를 없앱니다.

요아스의 멘토 여호야다 덕분입니다.

 

문제는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으면서 발생했습니다.

다른 지도자들이 요아스에게 접근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아스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버리고

가나안 토착신인 아세라 목상을 섬깁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나서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 제국까지 의지하더니

결국 신하들에 의해서 살해됩니다.

 

안타깝게도 요아스는 왕들의 묘지에 묻히지 못합니다.

왕족이 아니면서도 왕들의 묘지에 묻힌

여호야다 제사장과 대조를 이룹니다.

 

요아스의 말년과 죽음이 안타깝습니다.

끝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4.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을 때,

요아스는 하나님 안에서 행하고 통치했습니다.

나라가 평안했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으면서

요아스가 새롭게 의지한 멘토 그룹은

그를 타락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요아스 역시 어려서부터

제사장 여호야다를 의지했기에

혼자서 판단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데 서툴렀을 것입니다.

 

신앙은 물론 인생의 멘토를 잘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따르는 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남의 복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참빛 식구들이 가는 길에

훌륭한 멘토를 만나고

더불어 참되고 선한 길을 걷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한가지,

우리에게 최고의 멘토가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대하 24:2)

 

 

 

하나님,

참빛 식구들께 훌륭한 멘토를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29 이-메일 목회 서신)

믿음은…(1)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든든히 서게 하소서>입니다. 제가 참빛교회에서 목회한 지 19년 만에 90일 안식일을 갖게 되었기에 제가 없는 동안에도 교회가 든든히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에 앞서서 올해는 우리 모두 신앙의 기초를 든든히 다지고 싶었습니다. 나무에 비유하면, 터를 넓게 잡고 뿌리를 깊이 내리기 원해서 “든든히 서게 하소서”라는 표어를 정했습니다.

 

든든히 서기 위해서 앞으로 4주 동안 믿음에 관해서 공부할 예정입니다. 믿음에 관한 이론적인 설명보다는 믿음이 우리 삶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실제적인 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변화, 예수님을 믿기에 드러나는 특징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까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일 마틴 루터가 작사하고 작곡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루터가 시편 46편을 묵상하다가 찬송가를 만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시편 46편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근원부터 과정 그리고 마지막 종착점을 설명합니다.

 

시편 46편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1-3절은 하나님의 창조가 무너진 상태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가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립니다. 산이 바닷물에 빠졌습니다. 자연스레 바닷물이 솟아서 다시 산이 흔들리는 혼동이 발생했습니다. 세상이 근본적으로 망가진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때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견딥니다. 특별히 어려울 때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믿음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두 번째 4-7절은 회복의 과정입니다. 한 시내가 흘러서 하나님의 성을 회복합니다. 성소에 기쁨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성 중에 계시니 성이 흔들릴 수 없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라는 루터의 찬송이 생각납니다. 새벽부터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뭇 나라들이 소리치면서 활동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세상이 잠잠합니다. 이처럼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피난처가 되십니다.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만군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 번째 8-11절은 마지막 심판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앞장 서십니다. 계속되던 전쟁이 그칩니다. 활을 꺾고 창을 끊어 내시고 수레를 불사르십니다. 전쟁 무기를 전부 없애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앞에 서서 직접 말씀하십니다:“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로다.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10절). 마지막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최후 승리를 바라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河-

애틋함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의 마음을 두 글자로 요약하라면,

“긍휼(compassion)”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자기 백성을 긍휼이 여기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춥고 배고픈 백성들을 긍휼이 여기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긍휼의 절정입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긍휼함이

우리를 살렸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 긍휼을

“애틋함”이라고 달리 표현하고 싶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애틋함을 두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1)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듯하다

2) 정답고 알뜰한 맛이 있다.

 

여기서 “섭섭하다”는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보다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대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애틋함”은

이웃의 어려움이나 사정에 마음 아파하고

어떻게든지 함께 하며 도움이 되려는 태도입니다.

 

3.

팬데믹을 지내고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해졌습니다.

개인은 물론 국가도 이기적으로 변하고

파당을 짓고 자기편만 챙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물론

우선 내가 잘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려운 일을 겪는 이웃과 감정 이입을 하고

같은 심정으로 기도해 주고

아픔을 서로 나누려는 애틋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잘 대해주지만,

실제로 동지의식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진실한 공감이 그립습니다.

 

4.

애틋함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이웃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고

기쁨에 함께 기뻐하기 원합니다.

감정이입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느낄 정도로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서로 대하고, 기도해 주고, 얘기합시다.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정(情)을,

하나님의 사랑을 힘껏 나눠봅시다.

 

참빛 가족!!!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하나님,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22 이-메일 목회 서신)

찬송가 해설 (10)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가 585장)

 

연속 설교 중간에 나누는 찬송가 해설 열한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 찬송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작사하고 작곡한 찬송가로 유명합니다.

 

가톨릭 사제였던 마틴 루터는 당시 교황과 사제들이 성경과 달리 자기들의 잇속에 따라서 백성들을 오도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습니다. 결국 그가 대학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크 성당의 정문에 “95개 조 반박문(논조)”을 게시합니다. 1517년 10월 31일이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원래 의도는 자신이 반박한 가톨릭교회의 그릇됨을 놓고 학자들과 토론회를 개최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의도와 달리 당시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루터의 반박문이 독일은 물론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종교 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마틴 루터를 사제에서 파문했습니다. 생명의 위협도 가했습니다. 프레더릭 제후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살면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루터의 독일어 성경 역시 당시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알려준 신앙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1521년 마틴 루터가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회의에 불려 나갑니다. 그곳에서 마틴 루터는 그릇된 교회의 교리에 순응할 수 없기에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로 끝나는 루터의 보름스 연설이 유명합니다.

 

하지만, 종교 개혁자 루터의 길은 험난했습니다. 루터가 힘들었을 때, 시편 46편을 묵상하면서 찬송가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이 찬송은 당시 종교 개혁가들의 군가처럼 불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모든 것이 가능하고, 세상의 그 무엇도 자신들을 이길 수 없음을 찬송을 부르면서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마틴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게시했던 비텐베르크 성당의 탑 꼭대기에 “강력한 성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A mighty fortress is our God)”는 찬송가 첫 구절이 지금도 새겨져 있습니다.

 

<웨슬리의 찬송가 부르는 자세> 1.찬송가를 많이 배우십시오. 2. 곡조대로 부르십시오. 마음대로 고쳐 부르지 마십시오. 3. 회중과 함께 부르십시오. 4. 큰소리로 용기 있게 부르십시오. 죽은 듯이 또는 반쯤 잠을 자듯이 찬송하지 마십시오. 5. 겸손하게 부르십시오.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지 말고 조화를 이루어 찬송하십시오. 6. 박자에 맞춰서 부르십시오. 너무 느리거나 빨리 부르면 안 됩니다. 7. 영으로 노래하십시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음악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河-

 

선구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올림픽에서는

남자 마라톤이 맨 나중에 열립니다.

그런데,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는

여자 마라톤을 마지막에 배치했습니다.

 

지금부터 235년 전인 1789년,

자식들을 굶겨야 할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에

7천여 명의 어머니들이 “빵을 달라”고 외치면서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던 베르사유 궁전을 향해서 행진했습니다.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입니다.

 

“여성의 행진”이라고 불립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자 마라톤이 올림픽 마지막에 배치되었고

마라톤 코스도 파리 시내에서 베르사유 궁전까지였습니다.

 

2.

파리 올림픽 여자 마라톤의 시작을 알린

캐서린 스위처(Kathrine Virginia Switzer)라는 인물도 특별했습니다.

캐서린 스위처는 여성 최초로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당시에는 여성들이 마라톤을 하면 여성성이 망가지고

긴 거리를 뛸 힘과 건강이 없기에

800미터 정도가 최대 거리라고 믿었습니다.

 

1966년 바비 깁스라는 스물네 살의 마라토너가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하기 위해서 길옆에 몰래 숨어 있다가

중간에 합류해서 완주했지만, 정식 기록으로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깁스를 본 캐서린 스위처라는 대학생이

이듬해인 1967년, 정식으로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합니다.

 

여자인 것을 숨기기 위해서

<K V캐서린>이라는 이름으로 신청서를 제출해서

261번이라는 번호를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남자처럼 후드티를 입고 뛰던 스위처가

몇 마일 지나자, 후드티를 벗어버립니다.

여자인 것을 알아낸 대회 본부장이 따라와서

스위처를 길에서 밀쳐내는 등 행패를 부립니다.

이것이 카메라 기자의 셔터에 잡혔고,

세상을 변화시킨 100장의 사진 중 하나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처음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하고

50년이 지난 2017년,

70세의 스위처가 261번을 달고 보스턴 마라톤에서 완주합니다.

이처럼 캐서린 스위처는 여자 마라톤의 길을 만든

선구자로 마라톤은 물론 여성 운동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77세가 된 캐서린 스위처는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흰색 바지, 꽃무늬 셔츠, 화려한 운동화를 신고

맨 앞에 서서 여자 마라톤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또 하나의 여성 행진을 뜻했습니다.

 

4.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선구자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수요예배에서 살펴본

루터, 요한 웨슬리도 그 가운데 속합니다.

 

유리 천장을 뚫어내고

없던 길을 만들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시작하는

용기 있는 선구자들입니다.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

역사를 바꿀 선구자들이 일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모든 선구자들을 응원합니다.

새 날을 맞으시는 참빛 식구들도 응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있느니라 (빌4:13)

 

하나님,

앞서가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8. 15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