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터잡기 (2) : 말씀과 기도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4-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신앙이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모든 것을 조율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선해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지만 말씀과 기도가 빠지면 헛것이 됩니다. 그 만큼 신앙에서 말씀과 기도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을 두고 영감(inspiration)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경 속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어서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적합합니다(딤후 3:16).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과 삶을 다스릴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충분히 인정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손색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생명의 양식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먹지 않으면 우리들 신앙은 영양실조에 걸릴 것입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주보에 있는 <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에 있는 본문을 따라서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아야 합니다. 마음에 와 닿는 하나님 말씀을 적어놓고 틈틈이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에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말씀은 신앙은 물론 인생길을 걸어가는 지도(map)와 같습니다.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금방 질식하듯이 우리도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에 커다란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간순간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고, 힘들 때는 도움을 청하고, 슬플 때는 애통하면서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기도에는 특별한 형식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면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올려드릴 뿐입니다. 물론 우리 생각만 속사포처럼 하나님께 쏘아 올리기보다 중간에 또는 기도 끝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때 깊은 기도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처음 믿으셔서 기도할 줄 모르신다면 그저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 됩니다. 이것이 최고의 기도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갖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형식은 없지만 대표기도하시는 분들이나 절차를 갖춘 기도를 위해서 기도의 네 가지 요소를 기억해 두시면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배함 – 죄의 고백 – 간구 – 이웃을 위한 기도. 이 가운데 이웃을 위한 기도는 우리들 기도의 지경을 한없이 넓혀줍니다. 나를 위한 기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도와 이웃을 위한 기도로 나간다면 우리의 기도가 온전해 진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우리의 신앙과 삶이 풍성해 지길 원합니다.-河-

소망의 하나님

샬롬

1.
지난 주일에
<신앙 터잡기> 복음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육신(incarnation)
세상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구속(redemption)
악과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부활(resurrection)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V-day).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가 가르쳐주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목이 빠지도록 우리를 항상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행복한 둘째 아들입니다.
돌아갈 곳, 기다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마음과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맞춰지고
예수님 처럼 살려는 결심을 하게 만듭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세계관)이 복음을 통해서 바뀝니다.
예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이요, 능력입니다.

2.
엊그제 수요일에는
로마서 15장을 공부했습니다.

로마서 15장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세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끝까지 참으셨으니 우리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신앙의 길을 가고, 공동체 안에서 이웃을 섬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로가 되시고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마음 깊은 곳에 임하는 진짜 평화입니다.

중간에 소망의 하나님이 있습니다.

수요예배에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삶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의를 위해서 핍박받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라 사는 우리들의 삶도 만만치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나서 그렇습니다.

그때 우리는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5:13)
May the God of hope fill you with all joy and peace in believing, so that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you may abound in hope. (Rom 15:13 ESV)

소망의 하나님께서 모든 기쁨과 평강을 우리에게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믿음 안에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믿음은 축(axis)입니다.

기쁨과 평강이 넘치니 소망도 넘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어느덧 8월이 가고
9월이 코 앞에 있습니다.
우리들 삶이 언제나 분주하고, 힘겹고, 늘 무엇엔가 쫓기는 듯하지만
잠깐 잠깐 멈춰서
소망의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그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기 원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5:13)
May the God of hope fill you with all joy and peace in believing,
so that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you may abound in hope. (Rom 15:13 ESV)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8.28 메일 목회서신)

열심에 대하여

작년부터 한 달에 한번씩 몇 분 목사님들과 함께 은퇴하시고 베이지역으로 오신 신학교 은사님을 모시고 요한 웨슬리의 설교를 읽고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영국 사회가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빈부격차가 생기는 등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로 인해서 신음하고 있을 때 ‘성화’라는 모토를 갖고 교회는 물론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완전에 이를 정도의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개인적 성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화를 촉구하면서 당시 영국 사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신앙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웨슬리가 후대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큽니다. 그의 신앙운동은 영국은 물론 미국에서 일어난 19세기 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한 신앙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성과 개인적인 체험에 이르기까지 균형 잡힌 신앙을 강조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사회운동에 초석을 놓기도 했습니다. 속회라고 불리는 소그룹 역시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회가 가장 강조한 사역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체계적인 신학서적을 저술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행했던 설교와 일기 속에 그의 사상이 깃들어있는데, 평생을 웨슬리를 연구하시고 가르치신 은사님의 해설을 곁들인 웨슬리 설교 읽기는 저를 비롯해서 참석하시는 목사님들의 개인 영성과 목회에 커다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열심에 대하여>라는 설교를 읽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열심이라고 하면 말씀과 기도와 소위 영적인 일에 힘을 쏟는 것을 뜻합니다. 예배나 교회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을 가리키곤 합니다. 이처럼 열심은 신앙생활이나 교회활동에 국한된 말로 쓰입니다. 심한 경우, 가정이나 세상 일을 소홀히 하면서 교회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을 두고 열심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반쪽 짜리 또는 기형적인 그리스도인이 많아졌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색해졌습니다.

부작용도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합니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보상을 바라면서 열심을 낼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교회를 좌지우지 합니다. 웨슬리는 그릇된 열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독재자들이나 세상 권력의 그릇된 열심이 무고한 희생자를 낸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열심의 동기와 방향이 자신을 향할 때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공동체에 도리어 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진정한 열심은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합니다. 불평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판지 않습니다.성급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이를 향해서 분노하지 않습니다. 한 두번 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묵묵히 맡겨진 일을 해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큼 말씀과 기도 등 경건의 행위에 힘씁니다. 무엇보다 열심의 한 가운데 사랑이 위치합니다. 사랑이 빠진 열심은 자신을 드러내는 자랑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열심은 마음이나 생각에 그치지 않고 손과 발로 나타납니다. 열심은 마음을 넘어서는 “사랑의 행위(works of mercy)”가 되어야 합니다. 웨슬리는 열심을 두고 “사랑의 불꽃”이라고 불렀습니다. 열심의 시작과 끝에 불꽃과 같은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해야 진정한 열심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삶과 세상 속에서의 삶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신앙과 생활의 일치,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의 완성이 곧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작은 예수의 삶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열심입니다.

요즘은 기독교가 세상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많이 잃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열심만 강조하다 보니 반 쪽짜리 믿음이 되었고, 세상과의 소통을 상실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믿음의 총체요 완성인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 가장 큰 열심을 내야 합니다”라는 웨슬리의 설교를 귀담아 들을 때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기 원합니다.말과 생각에 그치는 허풍쟁이 열심보다 손과 발로 사랑을 실천하는 알짜배기 열심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2014년 8월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신앙 터잡기 (1) : 복음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배우며 자라가는 교회”입니다. 표어에 맞춰서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속회별로 전교인 신앙 터잡기 교육을 했습니다. <복음-말씀과 기도-예배와 삶-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이어진 이번 성경공부에서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라면 누구나 배우고 함께 공유해야 할 주제를 다뤘습니다. 개인은 물론 교회가 자리 잡아야 할 신앙의 터전입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과 온 교회가 다시 한 번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목적으로 주일 설교시간에 연속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귀한 시간이 되고, 온 교회가 같은 믿음을 갖고 한 길로 나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복음(福音)은 말 그대로‘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전쟁에서 들려오는 승전보 또는 왕이 태어났거나 등극했다는 기쁜 소식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울려 퍼지는 기쁜 소식이 복음입니다. 기독교에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에 태어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동격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과 시험을 당하셨기에 우리를 이해하시고 공감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길과 생명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삶,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장차 오실 재림이 복음의 내용들입니다.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억누르는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죄에서 구출되었으니 구원의 복음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갔으니 영생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은혜 가운데 들어갈 때 옛 모습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선포한 것처럼 이전 것은 지나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으니 회복의 복음입니다.

복음의 지경은 넓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온 세계에 울려 퍼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시작되었기에 복음의 역사는 매우 깁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이 주어졌으니 복음은 높습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높이 오릅니다. 복음은 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들 삶 깊은 곳까지 만져줍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미처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면서 대신 기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복음은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고 악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새하늘과 새땅이 임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다각도로 그리고 역동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복음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답게 온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뿌리를 내리고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가 되기 원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세상 속에서 복음을 들고 빛과 소금을 사시는 근사한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河-

브올에서 생긴 일

샬롬

1.
요즘 새벽기도회에서는
민수기를 읽고 있습니다.

엊그제까지
민수기 말씀 가운데 매우 흥미로운 부분인
발람과 발락에 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 22-25).

발락은 모압왕입니다.
발람은 당시에 유명한 선지자였습니다.
모세가 인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으로 다가오자 위협을 느낀 발락왕이
선지자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나귀가 말을 하고
여호와의 사자가 선지자 발람을 막아서는 사건도 일어납니다.
절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만
그대로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모압 왕 앞에 나간
선지자 발람은
브올이라는 곳에 있는 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임을 선포합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실언하거나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선지자 발람의 축복을 통해서 만납니다.

2.
산 위에서
축복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을 때,
브올의 산 아래 동네에서는
이스라엘의 남정네들이 모압 여인과 놀아나고
결국 바알의 축제에 참석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시내산에 있을 때
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거기에 절을 하던
광야생활 초기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그만큼 세상의 유혹이 컸겠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바알신상이 훨씬 매력적이었겠지요.

하나님께서
이방왕 발락과 이방 선지자 발람 사이에서
은밀하게 일을 하고 계셨으니
산 위에서 일어난 일을 백성들이 알아채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그렇지
40년 광야 생활이 끝나고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두었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에 은근히 화가 치밉니다.

3.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과 짝해서 세상을 즐기고
세상을 따라갑니다.

질투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과 사랑놀이를 합니다.
얼른 정신 차리고
산 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산 아래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지만
우리에게 임할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시는
산 위의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산 위의 하나님께 들릴 정도로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거짓말 하지 않으시고, 후회가 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23:19)

God is not man, that he should lie, or a son of man, that he should change his mind.
Has he said, and will he not do it? Or has he spoken, and will he not fulfill it? (Num 23:19 ESV)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살지만
산 위의 하나님,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8.14 메일 목회서신)

말씀먹기

샬롬

1.
지난 주일 친교 후에는
절제회에서 주관한 건강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매우 유익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사 교수님께서는 건강의 비결로
탄수화물을 줄인 두뇌를 건강하게 만드는 식사법을 권장하셨고
규칙적인 수면 습관과
정기적인 운동을 권하셨습니다.

탄수화물을 즐겨 먹는 저희 부부는
일단 탄수화물을 줄이기로 다짐하고
지난 3일 동안 실천한 결과
체중이 3파운드 감소하는 효과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점심 목사님들과 외식을 했더니
3일간의 다이어트가 도루묵이 되었습니다.ㅠ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오늘 목사님들과 함께 읽은 요한 웨슬리의 설교
더 좋은 길에서도 기독교인의 식습관에 대한 교훈이 나왔습니다.

음식의 양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선한 사람들은 과도하게 많이 먹지 않습니다. 적어도 음식 때문에 병이 들거나 술에 취하지 않습니다. 음식을 먹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때 그들은 항상 천진난만하고 소화에 도 도움이 되게 즐겁게 먹습니다…”당신의 음식을 잡고 먼지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조금만 먹어라.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간다고 말하라.”

우리는 여전히 먹거리가 풍성한 곳에 살고 있습니다.
실컷 먹을 수 있고, 게다가 남기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의 음식 습관에도 절제가 꼭 필요함을 느낍니다.

2.
그런데 우리들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먹는 데는 다이어트가 필요 없습니다.
많이 먹으며 먹을수록 좋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읽고 들어도
체하는 법이 없습니다.
많이 먹을수록 좋습니다.

말씀을 우리 안에 깊이 거하게 하는
묵상은 길면 길수록 좋습니다.

깊은 수면이 우리의 건강에 도움이 되듯이
깊은 묵상은 우리의 내면에 쉼과 힘을 동시에 줍니다.
신앙의 내공은 깊은 기도와 묵상에서 오지요.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그대로 사는 것은
신체의 운동과 같습니다.

말씀을 먹고, 묵상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고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때 건강한 신앙을 갖출 수 있습니다.
매끈하고 단정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절식하고, 깊은 수면과 운동을 통해서
우리의 육신이 건강하길 원합니다.

주의 말씀도 충분히 먹고,
깊이 묵상하고
말씀을 꼭 붙잡고 살아감으로
주님 주신 생명을 마음껏 누리기 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12:1, 새번역)
I appeal to you therefore, brothers, by the mercie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holy and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worship. (Rom 12:1 ESV)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물론
삶 전체가 건강하게
주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8.21 메일 목회서신)

시몬 베드로 (8) : 샛별이 떠오르기 까지

베드로에 대한 연속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으면서 살아가던 요한의 아들 시몬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1:42)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지난 일곱 번에 걸쳐서 살펴본 것처럼 요한의 아들 시몬은 주님의 교회를 세울 반석, 베드로로 빚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그의 성품대로 사용하시면서 천국열쇠를 맡기셨습니다. 무엇보다 베드로는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의지해서 지친 몸을 이끌고 갈릴리 호수 깊은 곳으로 배를 몰고 갔습니다. 베테랑 어부가 나사렛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체험했고,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한 밤중에 유령처럼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신도 걷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비록 바람을 바라보다가 물에 빠지기는 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바다 위를 걷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에게는 말씀대로 행하는 우직함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실수를 연발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되신 예수님을 위해서 초막을 짓겠다고 설레발을 치다가 야단을 맞습니다.“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고 고백했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이라는 말씀에 빨끈 화를 냈다가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세 번 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베드로는 회개했습니다. 실수하고 실패했지만 결국에는 다시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아니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베드로는 자신을 찾은 예수님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다시금 예수님 품에 안겼습니다. 회개를 통한 변화와 고백이 베드로에게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교회를 맡기셨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이제 요한의 아들 시몬의 모습을 벗고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오순절날 약속하신 성령을 체험하면서 베드로는 능력 있는 사도로 놀랍게 변화됩니다. 그가 설교하니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건이 예루살렘 한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성전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죽은 자를 살리고,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답게 예루살렘과 이방 땅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반석(게바)이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자신의 실수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걸어가면서 제자의 삶을 산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 갈릴리 어부가 죽은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전하는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할렐루야! -河-

듣는 기도

샬롬
1.
7월부터 주일예배 순서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설교 후에 조용한 기도가 들어갔고,
봉헌기도 전에
한 목소리로 기도합니다.

설교후의 조용한 기도는
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입니다.
들은 말씀을 내면화하는 순서입니다.

주신 말씀을 꼭 붙들고
그 말씀을 갖고 한 주간 살기로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교회가 조용한 곳에 위치해 있다면
(종종 앰블런스도 크게 들리지요)
방음이 잘 되어 있다면,
피아노도 치지 않고
침묵가운데 온 교회가 조용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 성도님들과
온 교회가 주님 앞에 고요히 나가기 원합니다.

2.
기도는 모놀로그(monologue)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 다이얼로그(dialogue)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 드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를 쏘아 올립니다.

어떤 때는 일방적으로 속사포처럼 쏘아 올리고
일초도 기다리지 않고 일어섭니다.

내 할말 다했으니
이제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참 무례한 행동입니다.

적어도 기도가 끝난 후 단 일분이라도
조용하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 속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속삭임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듣는 기도입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의 기도를 뒤로 하고
처음부터 조용하게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3.
물론 하나님 앞에서
외쳐 부르짖어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외침의 기도를 통해서 힘을 얻고
마음 속의 갑갑함을 해결합니다.

동시에
듣는 기도, 조용한 기도는
우리의 삶에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회개와 고백이 일어납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막막할 때
조용한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듣는 기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모든 장애물들과 마음의 모든 계획들과 의지의 모든 머뭇거림을 치워놓았다. 사랑과 찬양의 하나님 은혜가 바다의 파도와 같이 우리를 정결케 한다분명 고요함이 있으니 그것은 듣는 고요함이다. -IVP 소책자 시리즈 <묵상기도>에서

무수한 말들이 들려옵니다.
세상이 소란스럽고 시끄럽습니다.
갈팡질팡, 어지럽습니다.

잠시라도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의 스위치를 끄고
오직 주님께 귀를 쫑끗 세운 채
주님의 음성을 듣는 차분함, 고요함, 그렇지만 간절함이
우리 가운데 있기 원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 19:14)
Let the words of my mouth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be acceptable in your sight,
O LORD, my rock and my redeemer. (Psa 19:14 ESV)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옵소서.
조용한 가운데
주님의 손길과 세심한 인도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8.7 메일 목회서신)

내 눈에 들보

언젠가 예화 집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조금 각색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여인이 공항매점에서 과자 한 봉지를 사서 봉투에 넣고 대합실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건장하고 잘 생긴 신사가 옆에 앉더니 과자 봉지를 꺼내서 먹는 것입니다. 곁눈질을 해서 살펴보니 자신이 매점에서 샀던 그 과자와 똑같습니다. 신사는 과자 봉지를 뜯어서 여인과 자신 사이에 놓고는 컴퓨터를 하면서 연실 과자를 먹습니다.

여인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참다 못한 여인이 영역 표시라도 하듯이 과자 한 개를 집어서, 보란 듯이 자기 입으로 가져갑니다. 신사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태연할 뿐입니다. 여인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결국 신사와 번갈아서 과자를 먹다가 결국 마지막 한 개가 남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과자를 신사가 집더니 반을 잘라서 반은 자신이 먹고 나머지 반은 여인에게 양보하려는 듯 봉지에 다시 넣습니다. 그리고는 눈웃음을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비행기를 타러 갑니다.

여인은 신사를 바라보면서 “세상에 저런 철면피 같은 남자가 다 있을까? 그러고도 눈웃음을 치고 싶을까? 아휴 남자들은 왜 저렇게 다 뻔뻔하지!” 갑자기 온 세상의 남자를 비난하는 말로 분풀이를 하고 시간이 되어서 비행기를 타러 갔습니다. 좌석에 앉아서도 몰염치한 신사의 모습이 생각나서 혼자 씩씩거리고 있다가 매점에서 산 휴지를 꺼내기 위해 종이봉투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자기가 샀던 과자가 고스란히 봉투에 있었습니다. 분풀이 하듯이 경쟁적으로 집어 먹은 과자는 바로 신사의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무한하던지 그 신사와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물론 예화지만 우리들도 무심코 여인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곤 합니다. 저도 몇 주전 새벽기도회 시간에 비슷한 실수를 범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립니다. 주일 예배 시간마다 휴대폰을 꺼달라는 광고를 자막으로 띠우기에 우리 교인들은 무척 조심을 하는데, 새벽기도회 시간에 전화벨이 울리다니 조금 당황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몇 분 안 계신 새벽기도회 시간이어서 볼륨이 크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쓰였습니다. 속으로 “어떤 분이 휴대폰 소리를 죽이지 않고 오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앞에 계신 성도님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동안 벨소리가 울리는데도 끄지 않으십니다. “아이쿠, 벨 소리를 듣지 못하시는 것을 보니 졸고 계시나” 그 짧은 시간에 별의 병 상상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예배실 옆에 있는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제 휴대폰에 초록색 불이 깜빡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휴대폰을 켜보니 ‘아뿔싸’ 아까 울린 휴대폰은 바로 제 것이었습니다. 수술을 앞두신 한 집사님께서 이미 수술실로 들어가셨으니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고 새벽기도회가 끝나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해서 녹음을 남기셨는데 그만 제가 휴대폰 소리를 꺼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제 휴대폰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얼굴이 뜨겁던지요. 토요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친교하는 자리에서 이실직고하면서 권사님들을 의심했던 것에 용서를 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자기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 눈의 티끌을 보고 비판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위선으로 똘똘 뭉친 당시의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살피는 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전에 가톨릭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벌였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은 물론 여기저기에서 서로 비판하고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데 혈안이 된 경우를 자주 봅니다.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야 자신이 올라서는 경쟁사회에 살기 때문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건설적인 비판까지 금할 수는 없습니다. 내 눈에 들보를 두고 남의 눈에 티끌을 책잡는 것을 금할 뿐입니다.필요한 경우에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잘못된 것은 지적하고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행여나 우리 눈에 들보가 있는지 살피면서 밝고 바른 세상 만들기에 동참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2014년 7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컬럼)

시몬 베드로 (7)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장 힘드실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큰소리치고 난 후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범한 잘못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 고개를 돌려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눈길을 느끼는 순간 닭이 웁니다. 베드로는 그제야 예수님 말씀을 깨닫고 밖으로 나가서 통곡합니다.

3년을 따라다니던 스승을 배신한 죄책감이 무척 컸는지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고향 갈릴리로 내려가서 다시 어부의 삶을 이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무덤에 달려와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예수님에 대한 죄송함과 자신의 믿음에 대한 자책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동료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십니다. 그 날도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허탈한 베드로,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을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또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인간으로 계실 때의 몸과 다른 신비한 부활체(復活體)를 입으셨습니다. 벽을 뚫고 오실 만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함께 식사를 하다가 사라지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서 계셨지만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에게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대로 하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또다시 기적을 체험한 순간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라고 소리칩니다. 주님이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는 서둘러 겉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들어서 예수님께 헤엄쳐서 옵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깊이 드리워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죄책감과 자책하는 마음이 깊어서 갈릴리 어부로 돌아왔지만 그의 마음은 늘 예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해 주신 아침을 먹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이라고 요한이 전하고 있습니다(요21:14). 예수님께서 모닥불을 짚여 놓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두 번째 부인할 때도 차가운 새벽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모닥불을 쬐고 있을 때였는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모닥불을 피우시고 제자들에게 친히 아침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침식사를 마쳤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연거푸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던 것과 대조되는 장면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위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간 베드로에게 사랑을 안고 찾아가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 마음 깊은 곳에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찾아오심과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의 확인은 베드로의 상처와 죄책감을 치료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 게바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날마다 우리들 삶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사랑의 주님과 다음 한 주간 동행하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