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샬롬

1.
교회 우체통을 확인해 보니
우리가 돕는 초록우산(소년소녀돕기)에서
두툼한 우편물이 도착했습니다.

두 달에 한번 소식지를 보내주는데
이번에 온 우편물은 유달리 두꺼웠습니다.

봉투를 뜯어보니
전도사님의 뒤를 이어서
초록우산에 연락을 맡고 계신 권사님께
코미디언 이홍렬씨의 <60>라는 책이 배달되었습니다.

무심코 두 세 장 넘기자마자
왠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나옵니다.

코미디언들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전에 들어서 익숙한 원로 코미디언으로부터
요즘 한창 활동하는 사람들까지
세 페이지 이상 총망라되었습니다.
코미디언 회원록에서 가져온 이름 같습니다.

생소한 이름도 꽤 있습니다.
방송에 이름만 한번 제대로 올리지 못한 채
회원으로만 가입한 분들인 것 같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속으로 불러가면서
세어보니 708명입니다.
아마 제가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 준
코미디언들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홍렬씨는 이렇게 첫 번째 장(chapter)를 마무리합니다.

“하하, 이름만 봤는데도 즐거워지지 않는가?
나는 정말 간절히 내 이름 딱 석자 ,,!”만 들어도 행복해지는 그런 이름이고 싶다.
당신은 어떤 느낌을 주는 이름이었으면 하는가?
What’s your name?”

2.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전에 설교했던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이 생각났습니다.

처형대에 선 순교자는
“I am a Christian”이라고 답합니다.

이름이 뭐냐고 재차 물어도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답합니다.
이름이 그리스도인(Christian)”입니다.

마지막 순교의 순간에
그리스도인(Christian)으로 불리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습니다.

참 멋진 장면입니다.

우리들이야 순교자들의 먼 발치에도 갈 수 없고
세상에서도 남달리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인이라 자부심을 갖고 살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온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하고, 책임을 느끼는 인생이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참되고 멋진 그리스도인들속에
묻어가는 인생이고 싶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 책에 기록되어 있기에
더욱 자랑스럽고 감사한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3:5)
The one who conquers will be clothed thus in white garments, and I will never blo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I will confess his name before my Father and before his angels.  (Rev 3:5 ESV)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떠하든지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7.31 메일 목회서신)

시몬 베드로 (6) :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를 마무리하십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려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 일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해도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고 돌아가시는 것이 쉬울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꿋꿋하게 그 길을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의 배반으로 인해서 로마 군병들에게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하시고, 웃옷을 벗으시고 대야에 물을 떠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이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알려주십니다. 베드로에게는 그날 밤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베드로는 펄쩍 뜁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맹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이 없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고, 예수님의 능력에 몸소 참여했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의 실체를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능력이 크신 예수님께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그곳에 새로운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쉽게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심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로마 군병에게 잡히셔서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면서 심문을 받으십니다. 베드로나 제자들이 기대하던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지만 현재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면 자신도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까봐 겁이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하길 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조심하길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마지막 세 번째로 부인할 때는 예수님께서 돌이켜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 마음에 예수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베드로의 믿음과 그동안의 행보가 모두 무너져 내린 것 같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밤에 믿음을 모두 털어 버린 듯 합니다. 가장 훌륭한 고백을 했던 베드로,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되신 모습을 보았던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베드로의 실체입니다. 아무리 베드로가 위대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늘 넘어지고 무너집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물론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河-

반딧불

샬롬

1.
저희 부부는
큰 아이를 보기 위해서
미시간에 와 있습니다.
예전에 인디애나에 살았었기에
매우 익숙한 환경입니다.

오늘은 저녁을 먹고
캠퍼스 구경을 나섰습니다.

이곳 저곳을 다니다 보니
어두워졌습니다.

그래도 시차가 있어서
정신은 말짱하고
학교 근처에서 큰애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주고
주차장으로 가는데
잔디밭에 반딧불이 있습니다.

인디애나에 있을 때
밤늦게 공부를 하고
집으로 걸어오다 보면
잔디밭에 반딧불이 반짝반짝 수를 놓고 있었는데
이곳 미시간 캠퍼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반딧불은
공기가 깨끗한 청정지역에 산다고 하지요.
반짝 반짝!
잠시 잠깐 빛을 내는
반딧불의 향연이 잔디밭에서 펼쳐집니다.

2.
요즘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마음이 답답합니다.

뭔가 확실하게 설명해 주면 좋으련만
투명하고 솔직한 것이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건만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점점 의혹이 커집니다.

태평양 너머에 있는 우리들도 답답한데
한국에 계신 분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할 것 같습니다.

투명하고, 솔직하고, 충분한 설명이 되는 세상이 되어야
반딧불이 돌아와서 빛을 발할 텐데 말입니다.

3.
마태복음 5장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복이 자꾸만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 ( 5: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Mat 5:8 ESV)

여기서 마음이 청결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카타로스인데
마음이나 삶이 깨끗하고(clean), 당당하고(open),
순수하고(pure), 흠이 없는(spotless)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당당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순수하고, 솔직하고, 청결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라고 가르쳐주는데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도 마음이 청결한 자를 향하여
그 얼굴 빛을 비춰주실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거짓말 하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고
잘못한 것을 두고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
투명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5: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Mat 5:8 ESV)

하나님 아버지
청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그만 반딧불까지 빛을 발할 정도로 깨끗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7.24 메일 목회서신)

시몬 베드로 (5) : 여기가 좋사오니

베드로가 걸어간 신앙 여정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고기를 많이 잡고 심지어 바다 위를 걷는 기적까지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서 그의 이름 뜻에 걸맞게 천국의 열쇠까지 예수님으로부터 약속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사탄아”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차근차근 훈련시키십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그의 갈릴리 친구들이자 동업자였던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세 사람에게 주목하셨습니다. 훗날 베드로는 수제자로 교회의 터전을 세우는 반석이 되고, 요한은 90넘게 살면서 요한복음은 물론 요한 계시록까지 기록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야고보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고 예루살렘에 박해가 닥쳤을 때 일찍 순교하면서 한 알의 밀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 명이 담당해야 할 사역을 미리 아시고 특별히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십니다. 얼굴에 광채가 나고 옷까지 희게 빛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말씀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면, 이번에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세 명의 제자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예수님의 양 옆에는 엘리야와 모세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한 인물입니다. 고통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모세는 죄의 지배를 받던 우리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유케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주신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신 구약의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 선지자입니다.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해서 승리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렸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큰 능력을 행사했던 특별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좌우에 모세와 엘리야를 두고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실체를 본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또 나섭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 성급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머무실 의도가 없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보여주시고 싶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베드로를 신비로운 체험으로 부르십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경험하게 하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은 영광스러운 장면을 베드로가 목격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체험이 중요합니다. 신앙이 머리에 머물러 있으면 힘이 없고 딱딱합니다. 가슴에 머문 신앙은 감정의 기복에 따라서 변화무쌍합니다. 체험은 신앙을 하나님께로 연결시킵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에 확신을 더해 줍니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찾아오십니다. 하지만 체험만 추구하는 것도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세상으로 내려가셨듯이 우리도 빛으로 소금으로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신앙입니다.-河-

세상을 위한 기도

좋은 아침입니다.

1.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는 했지만
솔직히 마음이 무거운 요즘입니다.

어제는 말레이시아 민간 항공기가
미사일 공격을 받아서 300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습니다.
물론 어린 아이들도 있지요.

서로 범인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지만
누군가 해서는 안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민간인들이 탄 항공기를 공격하다니요..

지난 번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던 항공기도
말레이시아 항공기였기에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2.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전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휴전이 될 것 같더니
협상이 깨지면서
무차별 공격에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역시 어린아이들이 가장 안타까운 희생자들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피해야 합니다.

이 밖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사건과 사고, 테러의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3.
한국에서도
세월호 구조에 나갔던
소방 헬기가 시내에 추락했습니다.

조종사가
목숨을 걸고 끝까지 조종간을 잡은 덕분에
큰 피해를 면했다고 합니다.

하루가 멀다 않고
여기저기서
전쟁의 소문, 재난과 사고 소식이 이어집니다.

지구촌이 늘 시끄러웠다지만
요즘처럼 마음이 멍멍할 정도의 일들이
연거푸 터진 적도 별로 없는 듯 합니다.

4.
마음이 뒤숭숭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같은 범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안타깝습니다.

태평양 너머에 사는 우리들이기에
조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도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바라볼 뿐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뒤숭숭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확실한 한 가지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피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진실된 기도입니다.

예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세상을 마음에 품고 기도했습니다.
기도원에서 밤을 새면서 기도했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뿌리가 뽑힐 정도로 간절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기 원합니다.

오늘은
사랑하는 조국과
더불어 살고 있는 지구촌을 위해서
특히 자식과 부모, 친지를 잃은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9:17)
You are a God ready to forgive, gracious and merciful, slow to anger
and abounding in steadfast love, and did not forsake them (Neh 9:17 ESV)

하나님 아버지
떠나온 조국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7.17 메일 목회서신)

축복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새벽기도회에서는
민수기 6장을 읽었습니다.
그곳에는
나실인 서약이라는 특별한 말씀이 나옵니다.

삼손이나 사무엘처럼 평생을 나실인으로 살 수도 있지만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일정기간 나실인으로 살면서
자기 몸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기간을 정해서 금욕의 시간을 갖는 것이지요.

포도주는 물론 포도즙도 먹지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죽은 시체를 만지지 않는 것이
나실인 서약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금식으로 기도하거나
평소에 즐기던 것을 금하거나 절제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로 결심하는 것에 해당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매번 좋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신앙이나 삶에 위기가 느껴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구약의 나실인들처럼
구별된 삶을 살면서
각자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필요가 있습니다.

2.
나실인 서약에 이어서
축복의 말씀이 나옵니다 (6:22-27).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아론과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축복하는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신 축복기도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 6:24-26)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to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lift up his countenance upon you and give you peace.  (Num 6:24-26 ESV)

참 아름답고
귀하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축복입니다.

위의 축복이 임하면
우리의 삶은 주님 안에서 매우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
서로를 위해서 마음껏 축복합시다.
가족과 친지들과 동료들,
그리고 우리 참빛 식구들의 얼굴을 눈에 그리면서

저도
여러분들의 얼굴을 눈에 그리면서
축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the LORD make his face to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the LORD lift up his countenance upon you and give you peace.

아멘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는
이웃들을 마음껏 축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7.10 메일 목회서신)

시몬 베드로 (4) : 주는 그리스도시요

요한의 아들 시몬 베드로가 차근차근 예수님을 경험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갑니다. 솔직히 베드로는 천방지축처럼 행동하는데 그를 게바로 부르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두 번에 걸쳐서 경험했던 베드로입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믿고 깊은 데로 가니 배가 잠길 만큼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경험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 다음에, 칠흑같이 어둡고 폭풍이 치던 날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서 헤매고 있던 제자들과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처럼 물위를 걷고 싶었던 베드로는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배에서 뛰어내려서 물 위를 걷습니다.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아닌 바람을 보는 순간 물에 빠집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구해달라고 외칩니다.

 

첫 번째 갈릴리에서의 만남을 철저하게 예수님께서 주도하셨다면, 두 번째 물 위를 걷는 사건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먼저 요청했습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자랐습니다.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에 빠지게 되자 예수님을 불렀고 예수님은 그를 구해주셨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실패와 실수 가운데 예수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폭풍을 잔잔케하시는 등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지 궁금해 합니다. 어떤 이들은 얼마 전에 죽었던 세례요한, 예레미야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예수님이 누구신지 베드로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정답으로 대답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대답이 없습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여기까지 자랐을까요? 예수님과 더불어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극악무도한 강도들이 벌을 받는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라고 만류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지만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급한 성격에 또 한 번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은 셈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야단을 맞습니다. 베드로가 머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곳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십니다. 예수님 옆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고,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이 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세 명의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또 나서서 그곳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뜻과 달리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십니다. 남은 사역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급한 성격대로 말이나 행동에 실수 투성이였던 베드로이지만 차근차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체험해갑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서 그의 삶이 변하고 있습니다. 게바로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빚어 가신 덕분입니다.-河-

속마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캘리포니아에 가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뭄에 시달리는 다섯 개 주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오늘 새벽에는
때에 맞지 않게
보슬비가 내렸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가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교회 정원에 물을 줄 때 마다
교회 앞 건널목에서
신호대기를 하면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게 됩니다.

제 발이 저린 것일 수 있지만
물이 모자란다는데
교회가 물을 낭비하는 듯 보일까 싶어서입니다.

2.
작년에는 여름 내내 정원에 물을 주지 않고 지냈는데,
올해 들어서 일주일에 두 번 정성껏 물을 줍니다.

요즘 편찮으셔서 교회에 오지 못하시는
90을 바라보시는 노 권사님께서
올 초에 손수 정원을 가꾸셨습니다.

함께 정원을 일구면서,
언젠가 당신이 하나님께 가도
꽃나무들은 살아있지 않겠냐고 말씀하시는데
정말로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러니 저로서는
정원을 가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나 우리 교회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리들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지요.

3.
모든 사람들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외에
속에 깊이 숨겨진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섣불리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속사정을 알기 전까지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요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4.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아서 섭섭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의 앉고 일어섬과
마음 깊은 곳을 아시는 하나님께 나오면 됩니다.

베드로와의 첫만남에서
그가 요한의 아들 시몬임을 아신 예수님께서
우리들도 잘 아실 겁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누리는
하늘의 위로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 식구들 서로 서로
속마음까지 헤아려주고
서로 배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지요.^^

오늘 하루 살면서
가족이든, 친지나 동료이든
상대방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해봅시다.

섭섭하고 외로울 때는
우리의 마음을 속속들이 아실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 139:1)
O LORD, you have searched me and known me! (Psa 139:1 ESV)

하나님 아버지
서로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6.26 메일 목회서신)

시몬 베드로 (3) : 믿음이 작은 자여

동생 안드레를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받은 베드로는 시몬에서 게바로 이름이 바뀔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른 채 여전히 어부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 날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실의에 빠져서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는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깊은 곳으로 배를 몰고 갔고 배가 물에 잠길 만큼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깊은 곳 –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실패의 현장에 들어가길 원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실망과 실패를 고쳐주시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깊은 곳으로 배를 몰고 갈 때, 예수님도 베드로의 마음과 삶 깊은 곳으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게바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체험한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시몬이 아니라 게바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과 동고동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는 모든 현장에 제자들이 동행했습니다. 베드로는 열두 명의 제자 가운데 첫 번째 제자로 여겨졌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이 나옵니다. 엄청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싶어 했습니다. 배고픈 시대에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배를 태워서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자신은 산으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만 충실하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새벽 네 시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난 줄 알고 기겁을 하며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안심시키십니다. 그때 성격이 급한 베드로가 나섭니다. 자신도 물 위를 걷고 싶다는 것입니다. 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물 위로 뛰어내립니다. 대단한 용기요 믿음입니다. 놀랍게도 베드로가 물 위를 걷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걷던 베드로에게 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베드로 안에서도 두려움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순간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져듭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붙잡아 올리시면서 그를 향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을 보고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베드로의 믿음은 꽤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자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믿음이 작아졌고 대신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배와 고기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지만 베드로의 믿음은 아직 온전하지 않습니다.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말씀에 의지해서 배에서 뛰어내렸지만 바람이 불어오자 의심과 두려움이 밀려오면서 물속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열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 믿음으로 뛰어내려서 물 위를 걸은 사람은 베드로뿐입니다. 물속에 빠져들면서도 그는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폭풍우가 치는 밤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깊은 곳에서 다시금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갑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를 주목하시고 그를 게바로 빚어 가십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믿음을 배우기 원합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의심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한 주간 힘차게 살아갑시다 -河-

시몬 베드로 (2)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 성품이나 자격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성급하고 때로는 혈기가 앞섰고 세심하게 준비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고, 무엇보다 초대교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부족은 부족한 대로, 그의 장점은 장점대로 살려주시면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빚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어찌 보면 교만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독재자들이 백성들을 조종하려는 일종의 계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을 요구하시지 않고 각자 갖고 있는 은사와 재능대로 사용하십니다. 성격이 급하면 급한 대로 적합하게 쓰시고, 침착한 사람은 성품 그대로 주님의 일에 쓰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급한 성격으로 쓰임 받았다면, 요한은 침착한 성품으로 90넘게 살면서 요한 계시록까지 기록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성품대로 빚어 가시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누가복음 5장에 다시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동료 어부들과 함께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그날따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해변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었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베드로도 그물을 씻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모두 전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에게 나사렛 목수 출신인 예수님께서 훈수를 두신 격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신 것은 밤새도록 그물을 드리웠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실패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곳으로 배를 몰고 가서 그물을 던집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만큼 고기가 많이 잡힌 것입니다. 베드로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만선이 된 배를 뭍으로 끌고 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좋았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랐더니 고기를 아주 많이 잡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다음 베드로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그는 예수님 무릎 아래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라고 고백합니다. 좋아하고 감사해야 할 베드로인데 난데없이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장점이자 매력입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려서 고기가 많이 잡히는 순간 자신에게 말씀하신 분이 메시야 예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이 작아집니다. 자신은 예수님 앞에서 낮고 낮은 죄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남겨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될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근사한 모습이 베드로에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시몬이 아니라 게바의 모습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