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문어

브라질 월드컵이 한창 열기를 더하고 있습니다. 각국을 대표하는 젊은 선수들이 조국을 위해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숨이 차오르면서 월드컵 승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갑니다. 모든 운동경기가 그렇듯이 월드컵 축구 역시 이기느냐 지느냐의 갈림길에 섭니다. 물론 무승부도 있지만 조별 예선이 지나면서 승리한 팀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들의 이목은 누가 이기느냐에 집중되게 마련입니다.

4년 전 남아공 월드컵이 열릴 때 독일의 한 수족관에 사는 문어 한 마리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월드컵 문어 폴(Paul)이라는 이름까지 갖게 된 이 문어는 독일 국가대표팀 경기를 비롯해서 월드컵 결승전까지 여덟 경기의 승부를 모두 맞췄습니다. 독일 국기에 익숙해진 문어의 행동이거나 수족관의 조작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세계의 언론은 물론 도박사들까지 월드컵 문어 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2010년 문어 폴이 죽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질 정도였습니다. 미래의 결과를 알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문어 폴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브라질에서 벌어지는 월드컵에서 중계를 맡은 한 해설위원이 경기결과를 연거푸 맞춰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분의 예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언이 맞아떨어지는지 관심을 가지면서 중계를 봅니다. “족집게 예언” “인간 문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문어처럼 경기 결과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각국 대표팀의 경기 결과를 분석해서 최대한 예측(豫測)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언론이나 사람들은 과정보다 그분이 주장한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자칫 본인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미래는 안개와 같은 미지수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불안을 마음 한 켠에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미래를 알려주는 사람이 있거나 종교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주르륵 그곳으로 몰려갑니다. 소위 역술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40만에 이르고 4조원 정도의 매출을 올린다는 기사를 오래 전에 보고 깜짝 놀랐는데, 이런 수치만 보아도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이고, 현대인들이 불안지수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도 예언이 있습니다. 성경에 예언서라는 말씀이 있을 정도입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입니다. 그들의 직업은 농부, 목동, 귀족, 몰락한 제사장 가문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넣어주신 말씀만 전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자를 한자로 예언자(預言者)라고 씁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마음 속에 넣어주신 말씀만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사소한 개인의 예언이나 소소한 일상적인 일을 두고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커다란 역사의 흐름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의 앞길을 예언합니다. 예언의 목적도 다릅니다. 단지 미래에 펼쳐질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늦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와서 올바른 삶을 살라는 교훈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 것을 믿고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한걸음 더 나가면 하나님의 예언을 사사로운 것에 적용하기 보다 이 세상의 불의와 모순, 차별과 압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예언자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미래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앞길을 예측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지만 그들의 예언이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월드컵 문어든지 아니면 승부를 정확히 예측하는 전문가들의 말과 행동에 집착할 이유도 없습니다.인생이라는 전차는 미리 정해놓은 운명의 궤도를 따라 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월드컵 축구는 물론 우리들 인생도 얼마든지 역전승이 가능하고 예측불허의 결과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앞 날을 알고 싶은 호기심은 삶에 대한 기대로 승화시키고, 불안한 마음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값진 땀을 흘리면서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기 원합니다. (2014년 6월 26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속사람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말에는
우리 교회에서 처음으로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의 진솔하시고
목사님만이 걸어오신 30여년의 삶의 여정에
말씀이 더욱 깊이 다가오고
온 교회가 잔잔하면서 강력한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받은 은혜가
우리의 신앙과 삶에 스며들고
앞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같고 있는 질문들이
기도와 말씀 그리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풀어지길 간절히 원합니다.

2.
신앙은
우리들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속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신앙은
속이 채워진 다음에
그것이 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속은 비어있으면서
겉만 번드르한 신앙은 쉽게 무너지고
금방 바닥이 드러납니다.

속사람이 강건한 그리스도인은
혼자 있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합니다.
기도가 깊어 지고, 말씀의 은혜 속에 빠져들어갑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범하기 쉬운 행동들을 자제할 줄 압니다.
하나님을 솔직하게 대면합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기 위해서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 앞에
진실된 그리스도인(authentic Christian)으로 서야 합니다.

교회가 돕고
서로 서로 격려하지만
결국에는 우리들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차근차근 이뤄내야 할 신앙의 과업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3.
우리 교회는 행사가 많지 않습니다.
교회행사에 에너지를 뺏기지 않는 대신
우리의 삶이 주님께 드려지고
각자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서는 것에 주력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예배로 모여서
서로 격려하고
힘을 얻고 경축하기 원합니다.

신앙 터잡기와 같은
성경공부를 통해서 신앙을 점검하고
꼭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고 배워나가기 원합니다.

여러분의 속사람이 채워지는 데
매주 보내드리는 목요서신과
한번 더 듣는 주일설교가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4.
오늘 하루도
속사람이 강건한 주님의 제자들로 자라기 위해서
각자 삶의 자리에서
기도하고 말씀 읽고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3;16)
According to the riches of his glory he may grant you to be strengthened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your inner being, (Eph 3:16 ESV)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6.19 메일 목회서신)

시몬 베드로 (1) : 장차 게바라 하리라

앞으로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인 베드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면,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서 예루살렘 이외의 소아시아와 로마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지냈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초대교회의 핵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도로서 베드로의 권위를 따를 자가 없을 정도였기에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에 와서 그에게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는 완벽하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었고 몸이 허약해서 병상에 있는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 안드레와 어부 일을 했고 같은 마을의 요한과 야고보 형제와 동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난에 시달릴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지도 않았던 보통사람입니다.

대부분의 뱃사람들이 그렇듯이 베드로 역시 다혈질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30여년 고기를 잡으면서 생긴 팔의 단단한 근육만큼이나 그의 성품도 꽤나 단단해서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얘기하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말하고는 몇 시간도 채 안되어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결국에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우뚝 섰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죄송함과 감사의 마음을 갚기 위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시몬”입니다. 시몬은 당시에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난 자리에서 장차 “게바”로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게바는 예수님 당시에 사용되던 아람어이고, 베드로는 헬라어로서 모두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예수님과 비슷한 연배의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그의 이름만큼이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눈에 보아도 그에게 반석과 같은 믿음이나 견고함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동생 안드레 때문에 예수님께 나왔건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온 베드로의 모습에서 세심함이나 침착함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반석(rock)이라기보다는 갈릴리 지방에 흔한 자갈(stones)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장차 게바(반석)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뜻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별명을 지어주셨다고 생각했을 뿐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베드로 속에서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선뜻 따라나섭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열심이고 헌신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이름대로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처음 보셨을 때 그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고 계셨기에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새로운 인물,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갖고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귀한 사역을 감당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구원자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베드로에게 임한 축복입니다. 평범한 갈릴리 어부 시몬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 게바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성령의 임재와 역사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성령이 오시길 기다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각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들이 되어 있어서 예수님 말씀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이 임하길 기다렸습니다.

생각같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이 임할지는 알려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단지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뿐이니 그 약속을 붙잡고 마냥 성령을 기다린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제자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고 그 때는 유대인들의 3대 명절중의 하나인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에는 많은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각기 다른 나라 말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제자들은 여전히 성령을 기다리며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처음 성령이 임했던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을 사도행전 2장 1절 이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서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이 권능으로 임했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은 예루살렘 시내로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음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 각 사람의 언어로 복음을 전합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 이후에 민족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쓰게 되었는데,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각기 다른 언어가 복음 안에서 통일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생명의 복음입니다. 그동안 자기 마음대로 살았고 하나님을 무시했던 죄를 모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을 회개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베드로가 전한 말씀의 핵심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권면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며 교제하면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날마다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했고 주님께서 구원받는 자들의 숫자를 날마다 더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강림 주간에 부흥회를 갖습니다. 부흥회를 통해서 온 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기를 사모하고 기도로 준비합시다. 성령을 기다리면서 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河-

그리스도인의 능력 (6) : 예수님의 생명

우리는 지난 5주 동안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란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기독교가 세상 속에서 신용을 잃어가는 요즘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인식하고 그 능력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하루아침에 슈퍼맨이 되어서 온 세상을 정복하거나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초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지만 어쩌면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무너지셨습니다. 부활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무력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실 정도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동안 배운 대로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답답한 일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로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길을 가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해도 그대로 싸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황당한 일을 겪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아서 목숨을 잃을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꼭 붙잡고 계심을 믿기에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한 능력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려움을 당하지만 결국에는 그 속에서 소망을 발견하고, 주님의 임재와 도우심 그리고 구원해 주심을 경험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합니다. 세상의 어려움과 신앙의 여정 속에서 체험하는 어려움 즉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죽으심이 부활로 이어졌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다.

질그릇에 보화가 담김으로 심히 큰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힘입었기에 십자가의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도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툭-치면 깨지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 들어오셔서 심히 큰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심히 큰 능력으로 힘차게 그리고 멋지게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河-

시편의 기도 : 말씀

시편을 통해서 기도에 대한 교훈을 배우고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시편의 네 가지 유형을 따라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감사시였습니다. 시편의 감사시는 하나님께서 시편기자 개인과 이스라엘 민족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구원의 은혜,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주님의 손길에 감사했습니다.

둘째는 탄식시였습니다. 역시 개인의 탄식과 민족의 탄식 즉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을 토해내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금방 임하지 않을 때 탄식이 나왔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막막하니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더욱 잘되고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삶이 힘겨울 때 하나님 앞에서 탄식했습니다. 하지만 시편에 나오는 탄식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아직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기도하면서 평안을 느꼈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셋째는 지난 시간에 배운 찬양시였습니다. 탄식이 우리들 안에서 생기는 기도라면 찬양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세계와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를 발견하고 밖에서부터 주님께 드리는 경배입니다. 기도 속에 찬양이 있어야 하고, 또한 찬양 자체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 때 찬양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듣는 것도 은혜가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들 안에 있는 감사와 기쁨을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으로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찬양은 염려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높이 올려드립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볼 시편의 기도는 말씀을 통한 기도입니다. 시편에는 지혜시라는 유형이 있습니다. 시편 1편, 37편, 119편이 대표적입니다. 시편의 지혜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입니다. 시편이 말하는 지혜 한 가운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障)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순으로 말씀이 기록되었고, 176절에 이르는 각 절마다 주님의 말씀을 뜻하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하나님 백성의 생명줄이요, 등불이요, 능력이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서 주의 뜻을 분별해 내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위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 말씀이 거하면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참빛 식구들의 기도에 하나님 말씀에서 시작되고, 말씀 가운데 응답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기도가 풍성해 지고 깊어지길 원합니다. 올 한해 남은 날들도 무릎 꿇고 기도 살아갑시다! -河-

함께 걷는 길

샬롬

1.
오늘 저녁에 있었던
미국 스펠링 맞추기 대회(National Spelling Bee)에서
52년 만에 공동 우승자가 나왔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각각 13,14살 먹은 소년들인데
이들은 주최측이 준비한 결승 단어들을
똑같이 맞췄습니다.

한 친구가 스펠링을 잘못 말하면서
우승자가 가려지는 듯 했지만
이어서 다른 친구도 실수를 했고
마지막 단어는 사이 좋게 같이 맞췄답니다.

이들이 맞춘 단어들은
외계어처럼 엄청 어렵습니다
(마지막 단어가 “fuelleton”).
웹스터 사전을 통째로 외워야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동 우승이 확정되자
함께 우승자가 되어서 더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은 사전과 대결을 벌인 것인지
친구와 경쟁하지 않았다고 어른스럽게 대답했답니다.

특이한 점은
최근 8년 동안 스펠링 비의 우승자들이
모두 인도계 미국인들(Indian-Americans)이라는 사실이네요.
하여튼 대단합니다!

2.
공동우승(co-champion)이라는
신문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어떻게든지 최종 우승자 한 명을 가려낼 수 있었을 텐데
두 소년을 공동우승자로 발표했습니다.
둘이 함께 챔피언이 된 것이지요.

요즘은 모두 경쟁합니다.
조금이라도 앞서 가려고 애를 쓰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경쟁을 말하기 보다
개인을 말하기 보다
함께 걷는 신앙의 길과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강조합니다.

이 다음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린양 예수님의 신부로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모두가 챔피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함께 걷습니다.

같은 생각을 갖고
같은 마음을 갖고
성삼위 하나님께서 하나이듯이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한 길을 걸어갑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걸어가는
신앙의 순례길입니다.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서로의 손을 꼭 잡아 주고
서로 격려하면서 주님께로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4:12)
And though a man might prevail against one who is alone, two will withstand him–a

threefold cord is not quickly broken. (Ecc 4:12 ESV)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 서로에게
험한 세상을 함께 걷는
신앙의 동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5.29 메일 목회서신)

시편의 기도 : 찬양

시편의 기도 세 번째는 ‘찬양’입니다. 탄식과 감사와 함께 찬양은 시편의 커다란 주제입니다. 150편에 이르는 시편을 두고 요약해서 찬양과 기도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시편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서 다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던 고백이자 선포였습니다.

시편의 마지막 다섯 장은 “할렐루야(주님을 찬양하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 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주셨고 인도해주심을 찬양합니다. 땅에서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찬양합니다. 시편의 찬양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악기를 사용합니다. 이처럼 시편 속에서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시편을 읽다보면 앞에 표제어(타이틀)들을 만납니다.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는 시편의 주제가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는 표시입니다. 시편의 성격을 가리켜주는 표제어도 있습니다. 이때 많이 등장하는 표제어가 “노래(예: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여기서 노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미즈모르’인데 여기서 시편(psalms)이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편은 노래 즉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히브리어에서 찬양과 기도는 한끝차이입니다. 찬양을 다른 말로 “테힐라”라고 하고 기도를 “테필라”라고 합니다. 두 단어 모두 열린 소리입니다. 찬양도 입을 열어서 주님께 드리는 것이고, 기도도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의 찬양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 말씀에 곡을 붙여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지으시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양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04편도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송축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송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영혼’은 우리들의 목숨 또는 우리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것을 드려서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시편기자가 우리를 초청합니다. 말 그대로 온 몸을 다해서 드리는 찬양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심을 조목조목 소개합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바닷물을 주관해서 땅에 이르지 못하도록 경계를 만드시고, 세상 만물을 입히시고 먹이셨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세상 만물을 입히시는 아버지요 공급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세상을 주관하시고 자연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처럼 크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시편기자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주목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대적하는 악인들을 소멸하시고 선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저절로 찬송이 나옵니다.

온 세상을 향한 시편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기 원합니다:”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33절).아멘! -河-

삶의 기도

샬롬

1.
목사의 귀는 늘 교인들을 향해서
쫑긋 서 있습니다.

지나가는 말 속에서도 기도제목을 포착해내고
교회를 위한 아이디어나 성도님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무엇보다 믿음이 자라가길 기대하면서 듣고 얘기합니다.

<신앙 터잡기>에서 배웠듯이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가 되길 기대하면서
우리 성도님들의 삶과 신앙이 통합되길 바라면서 목회합니다.

최근에 직접 또는 전해들은
우리 교회 칠순이 넘으신 어르신들의
흐뭇한 이야기가 있어서 나눕니다.

이야기 하나.
평생을 무뚝뚝하게 사신 어르신께서
아침마다 샐러드와 과일 주스를 손수 만들어서
부인께 선사해 드리신답니다.
대단한 섬김입니다.

이야기 둘
토요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친교를 하는데
참석하지 않으신 권사님이 계셔서
집에 오면서 전화를 드렸더니
아내와 단 둘이 나와서 아침을 먹으려고 일찍 왔습니다.”
멋지십니다.

이야기 셋
권사님께서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가셨습니다.
그 날은 권사님의 생신이셨는데
집에 오셔서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시니
남편 권사님께서 미역국을 끓어 놓으셨답니다.
감동입니다.

2.
요즘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따로 기도시간을 만들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동안 나눈 감사의 기도, 탄식과 눈물의 솔직한 기도도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위에 소개한 권사님들의 아내사랑과 섬김도
삶을 통해서 드리는 진솔하고 애틋한 기도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이 예배가 되고
삶이 기도가 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일전에도 소개했던 리차드 포스터의 기도에 대한 글을 옮겨 왔습니다.
건전한 기도는 이 땅에서의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들을 필요로 한다. 산책이라든가 대화 혹은 건전하고 유익한 웃음거리들 그리고 정원에서 하는 일이나 이웃 사람들과의 한담, 유리창 닦기 등등, 이 모든 일들이 다 소중하다. 부부간의 사랑과 아이들과 놀아 주는 일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기도하는데 모두 필요한 요소들이다. 영적인 히말라야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일상 생활의 작은 산들과 골짜기에서 정기적으로 훈련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도, 11>

3.
저는 일상생활 속의 신앙(everyday Christian)을 강조합니다.
특별한 만남보다
매일같이 부딪치며 살아가는 가족/동료와의 만남이 최고의 만남이고,
특별한 기적을 바라는 것보다
하루 하루의 삶이 기적이요 은혜이고,
특별한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 주신 사명임을 깨닫고
하루하루 소중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진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되기 원합니다.

힘차게/기도로
하루를 시작합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후 5:16-18)

Rejoice always, pray without ceasing,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n Christ Jesus for you  (1Th 5:16-18 ESV)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5.22 메일 목회서신)

뚜벅이 신앙

뚜벅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자기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 다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가용이 있으면 편리할 텐데 차가 없으니 뚜벅뚜벅 걸어 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 불편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힘이 들고 속도가 중요한 현대사회에서 뒤쳐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놓치기 쉬운 일상들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차근차근 포착할 수 있을 테니 뚜벅이로 사는 묘미가 솔솔해 보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간에 회자되는 종교집단이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기독교 복음 침례회’이고 소위 ‘구원파’로 불리는 기독교 이단입니다. 이단(異端)은 처음은 유사할 수 있지만 끝으로 갈수록 진리에서 멀어지는 특정 교리나 종교집단을 일컫는 말이지요. 세월호 참사의 배후에 구원파의 핵심인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온 국민의 시선이 구원파에 쏠렸습니다.

구원파에서는 회개와 자백을 구분한답니다. 회개를 구원받는 순간 행하는 일회적 사건으로 봅니다. 만약 구원을 받고도 재차 회개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다시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되니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 이후의 회개는 자백으로 대치됩니다. 자백은 자신의 죄를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월호의 선장은 물론 경영진들이 구원파 교리에 깊이 물들어있었다면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도 입술로 자백하고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아찔한 생각도 스쳐 지나갑니다. 이와 같은 구원파의 교리는 성경을 자신들에 맞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성경에서는 회개를 강조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원 받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에서 의롭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다고 칭해진 것이지(稱義), 우리들 존재 자체가 완벽하게 의인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의인인 동시에 죄인” 즉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확신하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회개를 통해서 죄인의 모습을 청산하는 거룩함 즉 성화(聖化)를 이뤄가야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구원을 일회적인 사건으로 결론짓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회개, 삶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훈련과 성령의 인도하심,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 가는 거룩함의 여정이 넓게 보아서 구원의 과정에 속합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일갈했습니다.

한번의 회개로 죄가 모두 용서받고 의인이 된다는 교리는 복잡한 세상살이에 지쳐있는 현대인들에게 꽤 매력적입니다.구원의 확신은 물론 성경의 다양한 교리들을 단순명료하고 편리하게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뚜벅이가 아니라 자동차로 신앙의 길을 여행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여정은 존 번연의 말대로 하늘나라에 이르는 “천로역정”입니다. 신앙의 길을 가다 보면 여러 가지 유혹과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영광을 마음에 품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오르신 갈보리 언덕을 오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수록,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알아갈수록 진실된 신앙을 갖는 것이 쉽지 않음을 절감합니다. 예전에 함부로 주장했던 것들이 크신 하나님을 인간의 말과 생각에 가둬두는 교만이었음도 종종 깨닫습니다. 동시에, 한없이 깊고 모든 것들을 품을 만큼 넓고, 하늘에 닿을 만큼 높고 긴 기독교의 진리, 복음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무수한 이론과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글과 말들이 난무한 이 시대에 뚜벅뚜벅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립습니다. 자동차로 휙- 둘러보는 식의 편리한 신앙이 아니라, 사우나에 가서 땀을 쭉-빼듯이 감정만 충만한 일시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서 고민하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진정한 신앙말입니다.우리가 받은 신앙은 한 순간에 이룰 수 있는 무지개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말 그대로 담담한 것입니다. 일상이 신비가 되고, 하루 하루의 삶이 성령의 역사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임을 고백하면서 묵묵히 걷는 순례길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이 되길 원합니다. (2014년 5월 22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