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의 기도 : 탄식

지난주에는 시편을 통해서 배우는 감사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두고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심을 감사했고, 근심 중에 기도했을 때 응답해 주시고 바른 자리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매일같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적으로 알고 만족케 하심에 감사했습니다. 시편기자의 감사는 개인의 감사를 넘어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시편의 유형 가운데 두 번째가 탄식(lament)입니다. 시편의 탄식 역시 개인이 겪는 어려움을 놓고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개인의 탄식과 나라와 민족이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드리는 공동체의 탄식이 있습니다. 시편의 탄식은 “언제까지 니이까?(how long)”라는 기도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근심과 고통가운데 두실 것인지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지연되고 있음에 주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호소입니다. 또한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없습니다. 자신 있게 인생길을 걸어갔지만 넘지 못할 벽을 만났습니다. 그때 시편기자는 주님 앞에 나와서 탄식하면서 “주님, 보시옵소서. 나를/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시편의 탄식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닥친 문제를 주님께 갖고 나와서 탄식하면서 기도합니다. 여러 해 동안 기도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인 기도 제목일 수도 있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항의하듯이 드리는 탄식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분명히 선과 악, 옳고 그름이 판가름나야하는데 악한 사람들이 판을 치고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현실에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나와서 탄식합니다. 주님의 긍휼과 구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의 탄식은 분풀이가 아닙니다. 탄식에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상한 마음을 전부 토해낸 후에는 지난 시간에 배운 한나처럼 잠잠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확신할 때까지입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낍니다. 감사가 나옵니다. 하늘의 평안과 주님의 구원하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를 기뻐 받으십니다. 탄식하며 드리는 솔직한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낱낱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길게/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응답과 평강이 있습니다. 눈물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탄식의 끝에 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 솔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결국에는 확신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위로의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하늘의 힘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河-

다람쥐와 솔방울

샬롬

1.
엊그제 아내와 함께 집 근처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다람쥐 한 마리가 커다란 솔방울을
두 발로 잡고는 끙끙 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갖고 있는 것은 흔한 광경이지만
자기 머리보다 훨씬 큰 솔방울을 잡고 있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다람쥐에게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웬만한 다람쥐는
사람이 다가오면 줄행랑을 칩니다.

그런데 이 다람쥐는
30센티(1ft)까지 가도록
솔방울을 꼭 잡고는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있습니다.

제가 마음이 좋은 사람이었기 망정이지
행여나 다람쥐를 잡아먹으려는 짐승이나
다람쥐 사냥꾼이었다면 꼼짝없이 잡혔을 것입니다.

2.
커다란 솔방울을 꼭 잡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다람쥐를 보면서
집착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다람쥐는 솔방울이
커다란 도토리라고 생각해서
꼭 잡고 있었을 테지만
결국에는 실속 없는 솔방울인걸요!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별로 소용이 없는 것에 집착할 때가 있습니다.
위험에 처하는 줄도 모른 채
손에 든 것을 꼭 쥐고 놓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손을 펴고 살 길을 찾으면
훨씬 자유롭고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데
그만 손에 쥐고 있는 것에 집착하다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입니다.

정호승이라는 시인은
그의 수필집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손을 펴면 손바닥이 되고, 쥐면 주먹이 됩니다. 손바닥은 햇살을 받을 수도 있고, 물건을 올려 놓거나 쥘 수도 있고, 그것을 남과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먹은 그렇지 못합니다. 주먹은 홀로 주먹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115>

3.
누구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손을 펴고,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들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손을 꼭 쥐고 집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 손에 얹어주실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습니다.
어깨가 축 쳐진 가족들의 등을 어루만져 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 143:6)
I stretch out my hands to you; my soul thirsts for you like a parched land. (Psa 143:6 ESV)

어울리지도 않는 솔방울을 움켜쥐고 있다면
얼른 내려놓기 원합니다.

주님을 향해서 손을 펴고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살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손에 채워주시는
은혜와 사랑 그리고 지혜와 용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주님을 향해서 손을 활짝 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5.15 메일 목회서신)

시편의 기도 : 감사

저는 매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준비해서 전합니다. 교회는 물론 우리의 인생도 기도로 세워짐을 믿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하듯이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을 올바로 유지하기 힘이 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에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잘 살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셨기에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두고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부릅니다. 기도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아바(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기도의 방법과 유형은 다양합니다. 소리 내서 기도할 수 있고 묵상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고 글로 써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골방에서 하나님과 단둘이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고, 속회나 소그룹에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온 교회가 통성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 기도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회중기도 하듯이 격식을 차려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삶 속에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대화하듯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법에 제한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4주 동안 구약의 시편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해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은 구약 성경의 처음 다섯 두루마리인 모세오경을 본떠서 다섯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함께 불렀던 찬양이자 기도가 시편입니다. 시편 안에는 다윗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삶과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기도이자 찬양입니다.

특별히 구약의 시편에는 몇 가지 특별한 유형들이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오늘 살펴볼 감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편들입니다. 둘째는 탄식입니다. 개인이나 민족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나와 탄식하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셋째는 찬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며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넷째로 시편에는 하나님 백성이 갖춰야 할 지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시편의 네 가지 유형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시편이야말로 하나님 백성들에게 살아있는 신앙의 교과서이자 기도문들입니다. 이번 기회에 시편이 주는 기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익혀서 참빛 교회 식구들의 기도가 깊어지고 높아지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님들께 기도의 불꽃이 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河-

기도의 사람

샬롬

1.
저는 매년 한달 정도는
기도에 대한 말씀을 준비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신앙 터잡기>에서 배웠듯이
말씀과 기도는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는데
꼭 필요한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주일설교는 물론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 속회모임,
그리고 종종 개설되는 세미나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배워나갑니다.

기도 역시 늘 강조하지만
매년 시간을 떼어서 말씀을 전하므로
기도생활을 점검하고
다시금 기도의 자리로 나가길 원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한달 동안
참빛 식구들의 기도가 넓어지고 길어지고
높아지고 깊어지길 바랍니다.

2.
다음은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에서 요약/발췌한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기도가 지금까지 부족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기도가 아예 없었을지라도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갈망, 그 자체가 기도이다. 메리 클레어 빈센트(Mary Clare Vincent)는 말하기를 기도에의 욕구가 기도이며 그것은 갈망의 기도이다라고 했다. 때가 되면 그 욕구는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 행동은 기도에 대한 열망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다.

기도가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라. 또한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해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기도로 마음이 풀어지기 때문이다. 기도가 부족한 것까지도 하나님께 내어 놓으라.

만일 당신이 기도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면 하루에 열두시간씩 기도하기를 시작하는 대신 단지 몇 분만이라도 할애해서 모든 정력을 거기에 쏟아 넣으라.

또 하나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는 제언을 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악한 일을 행하고 있을 때조차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 분노와 욕망, 교만과 탐욕, 야심 따위와 싸우고 있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하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들까지도 말해야 한다.

우리의 불순종까지도 아버지의 품에 안겨 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게를 지탱할 만큼 강하신 분이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킨다. 하지만 죄를 숨기는 것은 우리를 더욱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에밀리 그리핀(Emilie Griffin)이 말하기를 주님은 우리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날 때 우리를 가장 사랑하십니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별로 중요한 사건이 없는 일상적인 기도에 먼저 힘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기자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시편 131:1-3)

O LORD, my heart is not lifted up; my eyes are not raised too high; I do not occupy myself with things too great and too marvelous for me.  But I have calmed and quieted my soul, like a weaned child with its mother; like a weaned child is my soul within me.  O Israel, hope in the LORD from this time forth and forevermore. (Psa 131:1-3 ESV)

처음에는 우리 자신이 당연히 기도의 중심이요 주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 마음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혁이 일어난다. 천천히 그리고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게 무게중심이 옮겨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다가 우리가 그의 생활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놀랍고 신비하게도 하나님이 우리 기도의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바뀐다. 마음의 변화와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역사이다.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 29-31)

3.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 삶 자체가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됩니다.
구체적인 기도 응답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기도의 축이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께로 옮겨지기 원합니다.
기도의 사람(man of prayer)으로 자라가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 순간 주님 앞에 무릎 꿇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5.8 메일 목회서신)

욕심, 교만, 자랑

1.

요즘은
수요예배에서 로마서를,
청년부 성경공부에서도 로마서,
그리고 새벽기도회에서는 레위기를 읽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물론
로마서 전반부에서 다루는 주제가
(sin)”입니다.

기독교에서 죄는 매우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는 필연적으로 침투해 있고
어쩌면 성경 전체는 죄의 굴레로부터
자유케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전반부에서는
죄가 못된 바이러스처럼
사람들의 마음은 물론
하나님의 창조세계 속속들이 침투해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레위기 역시
하나님의 계명을 한 가지라도 어기면 죄로 간주되기 때문에
얼른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못된 세력(power)입니다.
타락한 세상 깊숙이 침투해서
사람을 비롯한 만물을 죽음으로 이끕니다.

죄의 문제가 매우 근본적이고
죄로 인해서 일어난 결과가 엄청나기에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깃든
대속(代贖)의 은혜입니다.

2.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의 속성이 남아 있어서
옛 성품의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저는 우리들 안에 남겨있는 옛 성품을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빗대서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욕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루 분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같이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분에 만족하지 못하고

심껏 거두었다가 그만 만나가 썩는 경험을 했습니다.

욕심은 우리의 삶을 부패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빼앗아 갑니다.

둘째는 교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여간 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망아지처럼 제 갈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 가려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앞에 두는 것이 교만이요
이것이 우상숭배로 이어집니다.

셋째는 자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것만을 두고 자랑했습니다.

다른 민족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면서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하고 자신만이 우월하다고
안하무인처럼 뽐내면서 자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심을 잊어 버린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니
욕심이 하늘까지 치닫고
교만으로 목이 곧아 지고
남에게 자랑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욕심과 교만과 자랑의 반대말은
스스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비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지요.

3.
성경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욕심, 교만, 자랑
즉 죄에서 시작된다고 진단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 안에도
옛 성품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인데
이것들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감사와, 순종, 겸손으로
그리고 우리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회개를 통해서
새로운 성품으로 차근차근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삶의 변화를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주님의 백성으로 중심을 잡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참빛 교회 식구들 되시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욕심과 교만과 자랑하는 모습, 죄의 속성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없애주시고
날마다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5.1 메일 목회서신)

반석위에 지은 집

한국에서 들려온 세월호 침몰소식은 미국에 사는 우리들까지 슬픔에 잠기게 만들었습니다. 사고가 났던 지난 주 화요일 에는 밤늦게까지 인터넷으로 한국 뉴스를 시청했습니다. 화면에 비친 세월호의 모습이 참담했지만 모두 구조되었다는 뉴스 자막이 나오길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으니 실종자의 숫자가 200명이 넘는다는 정정보도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는데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대참사로 이어졌습니다.

어수선한 언론 보도는 물론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발표를 보면서 조국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재난에 대처하고 국민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이 상당히 부실함을 느꼈습니다. 그 결과 꽃다운 청춘들이 자신의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금지옥엽 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과 졸지에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제 자매를 잃은 가족들의 애끓는 심정은 슬픔을 넘어서 분노에 이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번 일을 보면서 신앙을 집 짓기에 비유하신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비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두 가지 집이 평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쩌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훨씬 화려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이 더 훌륭한 지 결판나는 것은 바람이 불어오고 홍수가 날 때입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쉽게 무너집니다.흔적도 없이 쓸려 내려갑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을 두고 새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비가 내리고, 홍수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닥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일갈하십니다. 여기서 말씀은 신앙생활의 기준 또는 삶의 원칙입니다. 그러니까 원칙에 충실하고 기본부터 차근차근 다지라는 것입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에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나 말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이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교훈입니다.

물론 말씀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보다 비용도 훨씬 많이 들어갑니다. 평소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도리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머릿속이 복잡할 정도로 여러 가지 상념들이 떠오릅니다. 약삭빠르게 편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리저리 쏠려 다닙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어놓고는 반석 위에 세운 것처럼 속임수를 씁니다. 평소에는 알 수 없지만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금방 드러날 것을 모른 채 눈 앞의 이익을 쫓습니다. 원칙을 무시하고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태평양 너머 조국에서 들려온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생각났습니다. 해운회사는 편법을 사용해서 배를 개조했고, 배에 실린 화물의 무게는 물론 승객의 숫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배를 운항하던 선장은 자기 혼자 빠져 나오는 몰염치한 행각으로 국제적으로 비난을 샀습니다. 당국이 조금만 일찍 그리고 현명하게 대처했으면 대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정부는 물론 구조에 나선 경찰과 군도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국민들에게 알릴 책임을 진 언론들도 특종만 따라다니다가 상황을 더욱 헷갈리게 만들었습니다. 신앙으로 말하면 말씀에 충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켜야 할 기본 법규와 원칙을 무시한 채 미봉책으로 일관한 결과 큰 재앙을 부른 것입니다.어른들의 어리석고 무분별한 행동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이 밀려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지 폭풍우는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불어 닥칩니다. 그때 집을 모래 위에 세웠다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무너짐이 엄청날 겁니다. 하지만 반석 위에 세운 집은 폭풍우를 이기고도 남습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들 각자는 물론 조국 대한민국이 드러난 문제점들을 낱낱이 파악하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4년 4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출애굽기 40장

1.

새벽기도회에서는
출애굽기 읽기를 마쳤습니다.
보슬비에 옷이 젖는다고
새벽에 한 장씩 읽어가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촉촉히 적셔줍니다.

출애굽기 마지막 장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성막(tabernacle)을 짓고 그것을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성막이 하나님의 임재 상징이었으니
광야길을 걷고 있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벅찬 감동과 은혜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2.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성막과 그 안에 있는 성물들에 기름을
바르게 해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금은보화로 정성껏 만들었지만
여전히 사람이 만든 물건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기름을 바르니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안에 계시는 거룩한 영 곧 성령이 생각났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질그릇 같은 우리들도 거룩한 주님의 백성으로 기름부음 받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일이나, 우리가 거하는 곳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할 때
거룩한 일이 되고 거룩한 곳이 된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사했습니다.

3.
출애굽기 40장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는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설계도대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모질고
때로는 부숴지고 힘겹지만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성취해 가시는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4.
성막이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꽃으로 성막위에 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과 불이 성막에 있으면
광야길을 걸었습니다.
반면에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임재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과 철저히 동행한 것입니다.
가고 서는 것을 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40:37-38)
But if the cloud was not taken up, then they did not set out till the day that it was taken up.  For the cloud of the LORD was on the tabernacle by day, and fire was in it by night, in the sight of all the house of Israel throughout all their journeys. (Exo 40:37-38 ESV)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해 지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루어주시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주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보기 원합니다.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나라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무엇보다 조국 대한민국 위에
주님의 긍휼하심과 공의가 강처럼 흐르길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백성으로
온전한 길을 걷게 하옵소서.
주님의 인도함을 눈으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4.24 메일 목회서신)

그리스도인의 능력 (5) :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시작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하면서 목숨걸고 복음을 전하는 담대한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력에 따라 부활절을 지나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향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면서 성령을 기다리고 부탁하셨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우리들도 성령강림절을 향해 나가면서 예배로 모이면 한 마음으로, 세상으로 흩어지면 각자의 자리에서 성령충만을 사모하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제자들은 심히 낙심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다녔는데 극악무도한 죄수들이나 달리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허탈함에 쌓이는 것도 당연합니다.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진 고문과 조롱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렸으니 더 이상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낙심과 절망가운데 쌓여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평안으로 인사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절망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어두움에 빛이 비췄습니다. 절망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질그릇에 보화가 들어오니 심히 큰 능력이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말씀대로 십자가의 예수님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아서 넘어지셨습니다. 해골이라고 불리는 골고다 언덕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부활로 이어지는 길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완전히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속에 오늘 본문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에서 거꾸러뜨림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던져버린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입니다. 처량합니다. 화가 납니다. 힘이 없으니 뭐라고 한 마디 대꾸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질그릇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망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납니다. 힘이 들수록 심히 큰 능력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도 인생의 폭풍우가 밀려옵니다. 심한 경우 오늘 본문처럼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그 아무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심히 큰 능력은 어떤 어려움도 뚫고 나가는 힘입니다. 할렐루야! -河-

부활의 주님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1년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고 사순절 끝에 부활절을 맞은 것입니다. 이처럼 매년 부활절을 맞으면서 새로운 생명과 힘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부활절은 실제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예배하는 날입니다. 기독교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을 주일(the Lord day)이라고 부르면서 매주 모여서 예배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고 사망권세를 이기신 생명의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스승을 잃고 실의에 빠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평안(be peace with you)”으로 인사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의심 많은 도마가 선생님의 손에 있는 못자국와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예수님을 향해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와 갈릴리 어부 출신의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다시 시작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고향 갈릴리로 내려가서 고기 잡는 어부의 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으로 제자들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맛보고 다시 어부가 되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고 베드로에게 양을 먹일(교회를 세울) 권세를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었지만 설마하면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곁에서 동행하십니다. 그들의 궁금증을 성경을 인용해서 풀어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신비로운 형상을 했기에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고 친절하게 메시야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마을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제자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해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도 기억이 났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의 평화를 전하셨고, 다시금 제자의 길을 가도록 새 힘을 주셨습니다. 친절하게 말씀을 풀어주시면서 마음에 뜨거움을 경험케 하셨습니다. 부활절을 맞아서 우리 각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원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와 생명의 능력이 부활절 예배에 오신 모든 성도님들 마음과 삶에 충만히 임하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He is risen)! -河-

사순절 마지막 주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는 지금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고
부활주일을 앞둔 다음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 주간입니다.

이렇게 일년을 교회력을 따라서
(매 주일 주보 예배 순서 앞에 있는)
사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됩니다.

신앙을 <예수님 닮기>라고 요약할 수 있고
교회력은 예수님의 삶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오늘 새벽에 나눈 출애굽기 34장 6절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가르쳐줍니다.

여호와께서 그의[모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The LORD passed before him and proclaimed,
“The LORD, the LORD, a God merciful and gracious, slow to anger,
and abounding in steadfast love and faithfulness, (Exo 34:6 ESV)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부족함도 없으신 완전한 분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설명해 주시는
성품들이 쭉- 나옵니다.

지금 이 순간 잠시 멈춰서
한 가지씩 깊이 생각해 보길 권합니다.

“자비롭고” – 어머니의 품을 연상케하는 하나님의 마음(compassionate)
“은혜롭고” –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 (graceful)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 부족하고 때로는 무척 못된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patient)
“인자” – 우리를 무조건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steadfast love)
“진실: –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끝까지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

다음 구절에도 하나님의 성품이 이어집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Keeping steadfast love for thousands, forgiving iniquity and transgression and sin,
but who will by no means clear the guilty, visiting the iniquity of the fathers on the children
and the children’s children, to the third and the fourth generation.” (Exo 34:7 ESV)

인자를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악함과 과실과 죄도 용서해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자손 천대까지 용서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죄나 허물을 절대로 기억하지 않으심을 강조한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뒤끝이 없으시네요!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섬뜩합니다.
벌은 면제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대까지 보응하신다니….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가 작동되면
벌까지 면제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죄는 용서하시지만
벌을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은 죽음이니 큰 일 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를 발견합니다.

3.
우리는 사망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벌을 받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는 물론 우리가 받을 벌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깃든 대속(대속, redemption)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지요.

출애굽기 34장 7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이 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죄는 물론
우리가 받을 벌까지 십자가에 묻어버리신
우리 주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를 감싸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4.10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