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능력 (4) : 박해를 받아도

히브리서 11장을’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장이라는 별칭에 맞게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믿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불확실해 보이는 것을 실현된 것과 보이는 것으로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은 미래를 향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합니다. 이어지는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믿음이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보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헛되지 않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믿음의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던 아담의 아들 아벨로 시작해서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삼손과 다윗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쓰신 인물들이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입증해 보입니다. 믿음의 인물들이 살았던 삶도 다양합니다. 믿음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음 가운데 이루었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사람은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믿음으로 불과 칼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믿음으로 전쟁에 나가서 적군을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믿음의 행적들 가운데 주목할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겪는 박해입니다. 조롱을 받고 채찍에 맞고 결박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돌에 맞고 톱으로 켜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소개합니다. 박해를 피해서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쓰고 광야를 유리하면서 믿음을 지킨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난과 어려움과 학대를 받는 것은 예사였고,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순교자의 피에 교회를 세우셨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영혼들을 마지막 때에 위로하시고 이들의 아픔을 그대로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박해(persecution)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입니다. 초대교회는 물론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던 구한말에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을 믿다가 감옥에 갇혔고 목숨을 잃은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휴전선 너머 북녘 땅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거나 외딴 수용소에 갇혀서 힘겨운 삶을 사는 신앙의 동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박해를 받을수록 복음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고,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은 더욱더 맑아지고 주님만을 향하는 믿음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악한 세력의 박해가 그리스도인들 안에 깃든 보화, 예수 그리스도를 몰아낼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온실 속에서 자란 신앙이나 편하게 예수님을 믿을 때가 신앙의 위기였지, 박해를 받을 때는 신앙이 살아서 역사하는 은혜의 기간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편하게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드는 유혹과 고난을 순간순간 경험합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박해를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아니하며.” 믿음을 빼앗아가려는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박해를 받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는 주님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할 기회입니다.-河-

그리스도인의 능력 (3) :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질그릇과 같은 우리들 안에 보배가 담김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무엇보다 가치상승입니다. 질그릇에 보배가 담기면서 보배를 품은 그릇이 되었습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깨지고 쉽게 사라질 질그릇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치가 급상승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이요, 불의한 종으로 의로우신 하나님께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의롭게 되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권속(family)이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보배를 품은 질그릇에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 네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살 길을 열어주시고, 종종 하나님께서 직접 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번역을 통해서 싸이지 않는다는 말씀 속에는 1) 부서지지 않는다, 2) 찌부러들지 않는다,3) 움츠러들지 않는다, 그리고 4) 꺾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두루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보배를 품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능력을 살펴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답답한 일은 어떤 일이 갑자기 닥쳐서 당황스러운 경우입니다. 세상만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예측불허의 돌발 상황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때는 마음이 내려앉고 심히 당황됩니다. 밀 그대로 낙심(落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 갑작스레 닥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당황하지 않고 차근차근 일을 풀어나갑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혜와 용기를 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매우 황당한 일을 겪으셨습니다. 3년 동안 동거동락하던 제자인 가룟유다가 자신을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음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팔아서 십자가에 달게 할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던 제자라는 사실 앞에서 예수님도 적지 않게 당황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동요하지 않으시고 차분하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세상에 영원한 생명이 임하고, 무엇보다 죽음 너머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답답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당황스러운 일 한복판에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합니다. -河-

빌립보서 4장 13절

좋은 아침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즐겨 암송하는 구절가운데 하나가
빌립보서 4장 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Phi 4:13 NIV)

그런데
지난 주 설교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11-12절을 한꺼번에 읽어야
그 본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I am not saying this because I am in need, for I have learned to be content whatever the circumstances. I know what it is to be in need, and I know what it is to have plenty.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being content in any and every situation, whether well fed or hungry, whether living in plenty or in want. (Phi 4:11-12 NIV)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천이든, 궁핍이든, 풍부이든,
배부름이든, 배고픔이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등산가들이 힘겹게 산 정상에 오른 다음에
“야~ 호”를 외치듯이,
사도 바울 역시
이 모든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후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선포합니다.

2.
빌립보서 4장13절이
그리스도인의 성공의 열쇠로 인용되곤 합니다.

어떤 큰 일을 앞두고
할 수 있다는 자기 암시식으로
빌립보서 4장13절을 암송합니다.

앞에 커다란 장애물이 있을 때,
예수님의 능력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읽습니다.

틀린 적용은 아닙니다.

하지만 11-12절의 문맥을 따라 읽을 때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처지와 삶이 어떠하든지
그 속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어느 곳에나 예수님의 능력이 임한다고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지난 주일 설교문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일체의 비결을 익혔다면 말 그대로 거침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감사합니다. 스스로 만족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으니 어떤 상황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비결 – 인생의 매스터 키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닥쳐오는 세상이
의외로 강하고 만만치 않지만,
질그릇인 우리 안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기 원합니다.

사도바울처럼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기 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Phi 4:13 NIV)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삶에 자족하게 하옵시고
주님 안에서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4.3 이-메일 목회서신)

그리스도인의 능력 (2) : 우겨쌈을 당하여도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 지난주에 함께 나눈 말씀입니다. 저는 한 주간 살면서 이 말씀을 마음에 두려고 애썼습니다. 설교시간에 제안한대로 말씀을 외웠습니다.“보배”“질그릇”“심히 큰 능력”“하나님께 있고”“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과 같은 주요 표현들을 곱씹으면서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들이지만 보배가 담김으로 가치가 급상승했습니다. 보배가 담기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주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까지는 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들 능력의 근원이 되심에 감사했습니다.

지난 주 초반에는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집안에 있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하늘은 맑고 공기는 신선하고 여기저기 봄꽃이 만발했습니다. 화창한 날씨를 보면서 그 속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임했음을 느꼈습니다. 주 중반부터는 구름이 끼고 수요일에는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작년 말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그렇게 애를 태웠는데 하나님께서는 느지막이 단비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친 직후 폭포수와 같은 빗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성도님들과 교회위에 폭포수처럼 임하길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비가 오는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품은 사람(예품사)으로 살다보니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저절로 감사가 넘칩니다.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심히 큰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임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고후4:8-9절이 알려줍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능력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능력입니다.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는 진퇴양난의 순간을 종종 경험합니다.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어떤 세력인지 알지 못하지만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을 직감합니다. 불안합니다. 두렵습니다. 당황이 되니 판단력이 상실하고 나중에는 허둥지둥 거리게 마련입니다. 우겨쌈을 당하는 것을 알지만 달리 피할 길이 없고 힘이 없기에 발만 동동 구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배를 품은 질그릇은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는다고 알려줍니다. 벗어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옥죄어오는 것들을 물리치거나, 위기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방에서 우리를 향해 공격해 와서 독안에 든 쥐처럼 포로가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우겨쌈을 당하지 않습니다. 질그릇처럼 연약한 우리 안에 보화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복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겨쌈을 당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꼭 붙잡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분명히 보호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河-

귀 뚫은 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새벽기도회에서 읽은
출애굽기 21장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십계명으로 시작된 출애굽기 20-23장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해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21장은 종에 대한 규정으로 시작합니다.
6년 동안은 종으로 살지만
7년째가 되면 종에서 해방시켜서 자유인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한번 종인 사람이 영원히 종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종들은 자유인이 될 7년째를 고대하면서
여섯 해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인이 되는 일곱 번째 해가 되어도
영원히 주인을 섬기려는 종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으로부터 처자식을 얻게 된 경우입니다.
그러면 처자식을 놓고 홀몸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런 경우,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되기로
마음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인은 종을 데리고 하나님의 재판장에게 갑니다.
그리고 문설주에서 송곳으로 귀를 뚫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되겠다는 표시입니다.

2.
본문을 읽으면서
두 가지 구절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종이 주인 집에 남아있기로 한 이유입니다.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출21:5).
‘I love my master, my wife, and my children; I will not go out free,’ (Exo 21:5 ESV)

종이 주인의 집에 억지로 남는 것이 아닙니다.
종은 자신의 가족은 물론 주인까지 사랑합니다.
스스로 자원해서 자유인을 포기하고
주인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과 가족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한가지는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되겠다는 표시로
문설주에 귀를 뚫는 의식입니다.
문은 주인집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귀를 뚫는 것은
영원히 주인의 집에 속해 있을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비록 귀가 뚫렸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기에 행복했을 것입니다.

3.
귀를 뚫는 종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 영원히 거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모시고
주님 앞에서 종으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귀 뚫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귀가 뚫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가족들과 성도들을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귀 뚫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도 주님 안에서 행복한 종들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할 일이 분명해졌습니다.
– 주인 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해나가면 됩니다.
–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임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임을 믿고
“주님! 사랑해요” 고백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종이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귀 뚫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3.20 이-메일 목회서신)

제단 뿔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광야길을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성막(tabernacle)을 지으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마지막 40장까지는
성막을 짓는 방법(설계도)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알려주시고
모세가 하나님 말씀대로 성막을 짓고, 제사장을 세우는 말씀입니다.

설계도의 도면을 제시하듯이 수치까지 정확하게 지시하셔서
너무 자세하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말씀이 반복되어서 지루할 정도입니다.

출애굽기 27장 1-8절에서는
제단(altar) 만드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가로와 세로가 다섯규빗(약2.5미터)되고
높이가 삼규빗(약1.5미터)되는 정사각형입니다.
제단의 네 모서리에는 뿔이 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제사드릴 때
네 모서리의 뿔에 제물의 피를 묻힙니다 (레 4:7).
피의 제사임을 나타내줍니다.

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우리의 생명을 드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구하는 예식입니다.

이처럼 제단 뿔에 피를 묻히는 것은
무엇보다 구원의 상징입니다.

2.
제단 뿔에는 다른 기능도 있습니다.
훗날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생기고
성전에도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네 모퉁이에 뿔이 있는 제단이었습니다.

그때
제단의 뿔은 용서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성전에 들어와서
제단 뿔을 잡고 있으면 죄를 용서함 받았습니다(왕상2:28)

실제로 반역을 도모했던 아도니야가
제단뿔을 잡고 있으니까
솔로몬이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단 뿔을 잡았다고 모든 죄가 용서함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단뿔을 노리고 일부러 죄를 짓는 경우는
거침없이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출21: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만홀히(경하게 여기는 교만) 여기는 것을
매우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3.
요즘 우리 시대에
제단 뿔이 무엇일까를 묵상하면서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떠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보혈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신앙의 길을 걸어갑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손에
주님의 위로와 힘이 임합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마음에
용서함과 불쌍히 여기심이 임합니다.
십자가 붙잡고 가는 인생길을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제단 뿔을 잡고 살기 원합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할 때도 제단 뿔을 잡기 원합니다.

우리 삶에 십자가 드리우고
그 십자가를 꼭 붙잡고 걷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니라 (히12:2)

Fixing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faith,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despising the shame, and has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Heb 12:2 NAU)

하나님 아버지
제단 뿔을 꼭 붙잡고
주님의 구원과 용서함을 구하는 심정으로
날마다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3.27 이-메일 목회서신)

생각하기 나름

예전에 인디애나에서 목회할 때, 여름이 되면 교인들과 근처에 있는 유적지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었습니다. 미국의 중서부는 한 두 시간만 운전해서 나가면 허허벌판에 옥수수 밭이 펼쳐질 뿐 딱히 기념할 만한 유적지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유적지 탐사를 담당하는 자매가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하고 여기저기 알아본 덕택에 유명한 곳은 물론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들을 방문하는 뜻 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디애나를 비롯한 중서부에는 헛간처럼 지붕을 덮은 다리(covered bridge)가 곳곳에 있습니다. 그 해 여름에는 근처에 있는 오래된 다리 세 군데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도시락을 싸서 교인들과 함께 다리구경을 떠납니다. 첫 번째 다리에 도착했는데 모두들 실망한 눈치입니다. 자동차 하나가 다닐만한 다리에 지붕이 씌어 있는 것이 다입니다.길이도 짧아서 걸어서5분이면 건너갈 수 있습니다. 남은 두 다리는 근사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면서 다같이 모여서 사진을 찍고 다음 번 다리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두 다리들도 허름하니 페인트도 벗겨져 있고 볼품이 없습니다.유적지 탐사를 주선한 자매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결국 근처 공원에 가서 점심을 먹는 시간이 훨씬 즐거웠습니다.

문제는 그날 저녁입니다. 유적지 탐사가 끝나면 교회 홈페이지에 소감문을 게시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다리 세 개를 보고 온 날은 아무것도 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헛간처럼 지붕을 얹어놓은 다리가 유적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다리에서 찍은 성도들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흐뭇해 집니다. 초라한 다리였지만 함께 갔던 성도들은 서로서로 이어져서 한 마음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다리는 끊어진 길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리가 없으면 길은 중간에 끊어집니다. 우리 교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길 기도했습니다. 왜

다리에 지붕이 있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중서부에는 여름에 갑자기 소낙비가 내립니다. 다리에 헛간 같은 지붕을 만들어 놓아서 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길가는 나그네들이 잠시 비를 피하면서 오순도순 얘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리가 건설되던 1800년대에는 말을 타고 여행을 했습니다. 말들이 하천을 만나면 밑을 내려다보면서 겁을 먹곤 했기에 지붕을 만들어서 말들이 안심하고 건너게 했답니다. 다리에는 유리창을 만들어 놓아서 요즘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처럼 뒤에 오는 마차들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리를 건너던 연인들은 지붕으로 덮인 다리에서 잠시 사랑을 나누곤 해서 “입맞춤 다리(kissing bridge)”라고 불렀다니 왠지 가슴이 설렜습니다.

볼품없는 다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와 사연을 찾아내서 돌아보니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종종 거창하고 자랑할만한 것들을 쫓아 다닐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것이 아니면 시시하다면서 지나치곤 합니다. 그런데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면 소중한 것으로 변합니다. 매일 매일의 일상도 그냥 지나치면 지루하고 실망스럽지만 그 속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 하루 하루가 은혜요 축복입니다. 한 집에 사는 가족들이 세상에서 최고로 위대한 분들입니다. 만나면 티격태격 다투고 어디 새로운 인연이 없을까 두리번거리지만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이웃들이 가장 귀한 분들입니다. 인생의 참 뜻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장 평범한 일들 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구약성경의 시편 기자는 매일같이 뜨고 지는 해와 달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는 해가 상하지 않도록 밤에는 달이 해치 않도록 자신을 보호해 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기적이었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 수 있음이 감사였습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편3:5).

하나님 백성인 우리들에게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도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인도해주신 결과이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작은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인생길 여기저기에 축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만사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꼭 맞습니다. 하찮은 것도 쉽게 넘기지 말고, 매일 매일의 삶 속에 주님께서 숨겨놓으신 보물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이 ‘싫증’이 아니라 ‘감탄’이 되는 행복한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2014년 3월27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그리스도인의 능력 (1) :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능력(power)’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이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특징도 능력입니다:“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우리 자체는 말 그대로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능력이시기에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그리스도인의 능력’이라는 주제로 주일 말씀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는 능력이 어떤 것인지,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수 있는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고린도후서 4장 7-10절 말씀을 갖고 살펴보게 됩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참빛 교회 식구들께서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고, 그 능력을 마음에 품고 말 그대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시길 원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 있고 멋진 그리스도인들로 세워지길 기도하면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고린도후서는 사도바울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사람들이 섞여 살아서 교회 안에 파당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고린도 교회를 세운 사도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속이 상한 바울은 고린도에 편지를 써서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사도로 살아가는 자신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간증하듯이 소개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살펴 볼 고린도후서 4장 본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질그릇과 같다고 전제합니다. 질그릇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가장 흔하고 값싼 물건입니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쉽게 깨지는 매우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렇기에 질그릇에는 귀한 물건을 담지 않고 하찮은 것들을 담아 둡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는 질그릇에 보화가 담겼다고 가르쳐줍니다. 질그릇과 보화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보화는 금과 은과 같은 값진 그릇에 담겨야 제격인데 질그릇에 담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릇의 진가는 그 안에 담긴 물건으로 결정됩니다. 아무리 질그릇이라도 보화를 담고 있으면 귀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속의 보화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심으로 보화를 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것 자체가 능력입니다. 질그릇에 보화를 담고 있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신앙은 우리 안에 보화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셨음을 믿고 그 보화를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히 큰 능력을 주셨음을 믿고 그 능력을 누리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할렐루야! -河-

말씀 붙잡기

은 아침입니다.

1.
연말에 선물했던
헨리 나우웨의 <삶의 영성>을
발췌해서 주보에 계속 싣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 주보에 싣은 내용을
여러분과 미리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30분만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성경의 간단한 단어나 구절을 머리와 가슴 속에 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이 구절을 세 번 반복해서 말해보라. 우리는 이 말씀의 뒷부분이 사실이 아님을 안다. 내게 부족한 것과 원하는 게 많이 때문이다. 우리 마음이 늘 불안하고 초조한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진리 자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계속 되뇌며 그 진리를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면, 점점 그 말씀이 내면에 있는 성소의 벽에 새겨진다. 거기서 생겨나는 여유 덕분에 우리는 직장 동료와 일, 가족과 친구, 하루 중에 만날 사람들을 품을 수 있다. -헨리 나우웬의 <삶의 영성>, 54쪽-

나우웬은 하나님 말씀을 꼭 붙잡고
하루에 30분씩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시간을 갖기를 제안합니다.

30분이 아니라
단 몇 분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성경의 단어나 구절을 붙잡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줍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구체적인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2.
때때로 우리는 자신에게 다짐하면서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을 다잡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자기 자신의 신념을 강화합니다.
일종의 마인드 콘트롤입니다.

자칫하면 위에서 나우웬이 제안한 말씀 붙잡기도
마인드 콘트롤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말씀 붙잡기와 마인드 콘트롤은
완전히 다릅니다.

마인드 콘트롤은 자기안에 있는 것을 갖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 붙잡기는
밖에 있는 하나님 말씀을 자기 안으로 갖고 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생기는 능력은 늘 제자리 걸음입니다.
반면에 밖에서 들어오는 능력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그 능력이 하나님 말씀이기에
말씀 붙잡기가 효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마인드 콘트롤이 아닙니다.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그 능력을 힘입기를 소원하며 확신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맞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단어든지 아니면 한 구절이든지
머리에서 가슴까지 꼭 붙잡고 사시길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꼭 붙잡고
오늘 하루 주님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3.13 이-메일 목회서신)

예수님의 손길 (5) : 못박힌 손

예수님의 손에 대한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첫째 시간에는 예수님의 손길이 닿으면 병이 고쳐지고, 눈이 뜨이고, 귀와 입이 열리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친히 손으로 만져주심으로 고쳐주셨습니다. 둘째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도 깨끗함을 받아야 함을 또한 서로의 손길로 섬겨야 함을 배웠습니다. 셋째 시간에는 색다른 예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판이 된 성전을 둘러엎으시는 분노의 손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분노는 성전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회복의 손길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어린아이가 드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축사하시는 예수님의 손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손에 인생길을 맡기고 주님의 손에 얹어 있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생각할 때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발과 양 손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이 찔리시면서 33년간의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이것을 두고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53:5)고 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예수님의 손에 못이 박힌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신 손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의 죄도 깨끗이 사함 받고 보혈의 공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못 박힌 손은 우리를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손입니다.

엊그제 수요일부터 2014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력에서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고난주간 전까지 주일을 뺀 40일간의 기간을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에는 기도와 금식을 행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을 교회의 전통으로 삼았습니다. 기도와 금식이 하나님 사랑의 실천이라면 선행과 섬김은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사순절을 맞아서 손수 실천할 수 있는 경건의 훈련을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사순절 전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금식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금식해 보십시오. 하루에 한 끼, 또는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금식을 실천하시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시길 바랍니다.

2) 기도와 말씀 훈련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를 통독하는 것도 좋습니다.

3) 영적 절제의 실천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육체의 즐거움이나 쾌락을 위한 일들을 삼가는 것입니다. 좋은 말만 하기로 결심하는 것도 훌륭한 신앙훈련입니다.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사순절을 보내면 우리의 영이 맑아질 것입니다.

4)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아무도 모르게 한 가지 이상씩 선행을 실천해 보십시오. 마음속에서 기쁨이 샘솟고 삶에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못이 박히면서 우리의 허물과 죄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못 박힌 손이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을 만져주시길 바랍니다. 사순절을 맞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못 박힌 손을 깊이 묵상하고 신앙은 물론 삶이 주님께 드려지기 원합니다. 40일은 대략 일 년의 10분의 1에 해당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삶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은혜를 듬뿍 내려주실 것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