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연히 가셨습니다

지난 주일 아침, 라이드로 섬기시는 권사님께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전도사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시고 아파트까지 올라가서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전화를 하신 권사님도 전화를 받는 저도 설마 했습니다. 요즘 쉽게 잠이 들지 않으셨다니 새벽녘에 약을 드시고 주무셨다가 깊은 잠에 빠지신 줄 알았습니다. 서둘러 따님에게 전화를 해서 전도사님 댁에 가보시길 청했습니다.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서 사무실을 나가는 순간 둘째 따님이 전화를 해서 다급한 상황임을 알려주십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주일 예배 시간입니다.

셀폰을 강대상 앞에 갖다 놓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매월 마지막 주는 전도사님께서 대표기도를 하시는 주일입니다.제가 대신 기도하는데 목이 메였습니다. 전도사님의 회복을 위한 기도보다 주님께서 그 영혼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꼭 안아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제가 왜 그런 기도를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내내 전도사님께서 앉아 계시던 자리가 눈에 밟힙니다. 예사롭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성도님들과 인사를 하고 강대상 위에 얹어 놓은 셀폰을 보니 음성 메시지 표시가 있습니다. 따님께서 문자와 음성으로 “어머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앞이 깜깜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엊그제 수요예배 때도 참석하셔서 근래에 없이 큰 소리로 기도하셨습니다. 전도사님의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저도 덩달아 힘이 생겼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제 손을 꼭 잡아 주셨습니다. 저도 전도사님을 살짝 안아드렸습니다. 이렇게 최근 몇 주간 전도사님은 회복의 기미를 보이셨습니다. 얼굴도 좋아지셨고 어지러운 것을 제외하고 생기가 도는 것 같아서 내심 감사하던 차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도사님께서는 하나님께로 가실 것을 아신 듯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전하셨습니다.묵묵히 교회를 섬기는 권사님께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천국에서 뵙자고 말씀하셨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가실 준비가 다 되었고 자식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남기셨고, 마지막 참석하신 노인회에서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시는 찬송가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를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사처럼 부르셨고, 제가 차에 모시고 새벽기도회에 갈 때마다 전도사로서 하나님 영광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길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더니 당신의 소원대로 홀연히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손 한번 더 잡아 보고, 앙상하게 마르신 전도사님을 한번 더 안아드리고, 제가 기도해 드리면 기도 중에도 본인이 아픈 곳에 손을 갖다 대시는 손길을 한번 더 느껴보고 싶었건만 홀연히 가셨습니다. 주일예배에 가시려고 목욕재개 하신다는 말씀을 막내따님에게 남기고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하나님께 가시기 하루 전, 동생처럼 아끼며 의지하던 아래층 권사님을 찾아가서 내일은 꼭 같이 예배에 가자는 말씀을 하시고 본인은 정작 하늘나라 예배에 가셨습니다.

제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아서 전도사님은 큰 수술을 앞두고 입원하셨습니다. 그때 본인은 하늘나라 초청장을 받았기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태연하게 수술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초청장에 날짜가 없었다고 하시면서 거뜬하게 큰 병에서 회복하셨습니다. 평생을 전도사로 사셨습니다. 아무리 몸이 편찮으셔도 기도하실 때의 목소리는 우렁차셨습니다. 주중에 교회를 비울 일이 있어서 말씀을 부탁 드리면 팔십이 넘으신 전도사에게 주는 특권이라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습니다. 어머님께 배우셨다는 옛날 찬송가를 무반주로 부르실 때는 온 교회가 함께 박수를 치면서 전도사님의 찬송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조기순 전도사님 – 저에게는 지난 8년 동안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힘들 때 언제나 제 곁을 지켜주셨고, 힘을 내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저를 보면 시골에서 목회하다가 강단에서 순직한 동생이 생각난다면서 늘 측은히 여겨 주셨습니다.아직도 전도사님의 기도가 필요하고, 전도사님의 손길이 그리운데 홀연히 가셨습니다. 하나님 품이 얼마나 좋으셨으면 사랑하는 자식들과 교우들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셨는지요! 전도사님의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 주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본인이 섬기던 교회와 목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것을 믿고 편안히 보내드립니다. 고통 없는 주님 품에 영원히 거하십시오. 조전도사님,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 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2014년 2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예수님의 손길 (4) :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성경에서 손은 힘과 능력의 상징입니다.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원천입니다. 오른손으로 구원해 주신다고 시편기자가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시면 안전합니다. 주님의 오른손이 높이 올라가면 그것은 승리의 표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하늘을 펼치고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사48:13).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리듯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펼치시고 그곳에 달과 별을 그려 놓으셨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은 하늘의 능력이 세상에 임하는 통로입니다.

예수님의 손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인간들과 똑같이 말을 하셨고, 손으로 만지셨고, 발로 걸어서 여행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목수는 손재주가 좋아야 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손길은 실제로 어렸을 때부터 예민하게 발달되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도 예수님의 손길이 닿으면 무엇인가 만들어졌고 고쳐졌을 것을 상상하니 더욱 흥미롭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능력의 손길로 병자들을 고치셨고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손수 음식을 만들어서 갈릴리 호숫가의 제자들을 먹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길이 닿는 곳에 치유와 회복 그리고 깨끗해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의 손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로마의 지배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그릇된 통치에 지친 백성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생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겨주셨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면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해산시키자고 제안합니다. 각자 먹거리를 해결하도록 집으로 돌려보내자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풀밭에 앉게 하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 기도를 하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제자들에게 주었을 것이고, 제자들은 그것을 예수님께 건네 드렸을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즉 오병이어(오병이어)를 손에 든 예수님은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다시 건네주십니다. 그리고 무리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위엄과 능력에 눌려서 예수님께 받은 오병이어를 말씀대로 무리들에게 나눠주었을 것입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나눠줄수록 떡과 생선이 자꾸 생깁니다. 나중에 세어보니 남자만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져온 오병이어가 예수님의 손에 들리니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길은 작은 것을 갖고도 모든 사람을 만족케 하는 능력입니다. 어린아이가 내어놓음으로 기적이 가능했습니다. 제자들이 중간에서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길은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작은 삶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손길을 통해서 임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기 원합니다.-河-

예수님의 손길 (3) : 둘러 엎으시며

예수님의 손길이라고 생각하면 늘 따스하고 좋은 것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손길은 위로와 능력의 손길입니다. 3년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예수님은 힘들고 지친 자들의 손을 잡아 주셨고, 병든 자들을 만져주셨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손길은 분노의 손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온 세상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성전이 말할 수 없이 타락해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성전이“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사람들이 성전에서 장사를 합니다. 성전세를 바칠 사람들과 헌금을 바칠 사람들에게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도 있었습니다. 제사드릴 제물을 파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성전이 장사꾼들 즉 이권이 판을 치는 곳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책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십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분노로 임한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전의 본질을 회복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손길은 그릇된 것에 대해서 분노하시고 바로 잡으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잘못된 길로 빠졌다면 이것은 큰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임재하시고 성전을 통해서 일하기 원하실텐데 하나님의 사역지에 세상 물결이 들어온 셈입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책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시면서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 뿐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를 함께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이 어떤 잘못을 하고 죄를 지어도 끝없이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세상에 오셨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랑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갖고 계십니다. 공의는 바른 것을 추구하고 옳지 않은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으로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공평하게 행하지 않거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어그러지고 망가진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세상 마지막에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임해서 부정하고 악한 세력을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쫓아내시고 의자와 상을 들러 엎으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 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행하는 것들이 있다면 얼른 바로잡고 고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세상의 물결이 성전에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몸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고전3:16).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된 것들이 있다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둘러엎으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임하기 전에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입니다. 우리 참빛 교회가 하나님 보시게 바른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책망 받는 것이 아니라 칭찬받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河-

감동 그리고 또 감동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와 오늘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눈길이
거의 모두 김연아 선수에게 맞춰졌던 것 같습니다.
합쳐서 5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경기를 기다렸고, 동작 동작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은메달을 땄습니다.
부당한 경기결과에 온 국민이 속이 상해하지만
말 그대로 가장 훌륭한 경기였습니다.

어제는 노랑 나비처럼 아름답게
오늘은 <아디오스 노니노/안녕 할아버지>라는 곡에 맞춰서
우아한 스케이팅을 보여주었습니다.

메달 색깔에 상관없이
김연아 선수의 경기에 모든 국민이 박수를 보냈지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2.
어쩌면 김연아 선수에 가려서
관심을 덜 받았지만
또 하나의 감동이 금강산에서 있었습니다.

3년 4개월 만에
남북이산가족이 재개된 것입니다.

남측의 12만 이산 가족들 가운데 5만 명이 이미 고인이 되었고
남은 7만 여명의 이산가족들도 80세가 넘으셨답니다.

호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신
이산가족들이 만남을 갖는 것을 보고
그들에 관한 기사를 읽다 보니
왠지 모를 죄송함과 감동이 밀려옵니다.

이산 가족들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길 두손모아 기도합니다.

3.
세상 일들이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고
늘 아쉬움을 갖고 살지만
삶 속에서 느끼는 감동이 일상에 활력을 줍니다.

지금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작은 일에도 의미를 찾아서 감사하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있으면
하루 하루가 그리고
우리들 삶 자체가 감동일 것 같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남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보람된 인생입니다.

오늘 하루 참빛 식구들 모두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감동 감동 그리고 또 감동이 넘치길 기도하겠습니다.

다음 구절을 곱씹어 읽으면서
말씀 가운데 임하는 감동까지 느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시편 62:5-8)

For God alone, O my soul, wait in silence, for my hope is from him.  He only is my rock and my salvation, my fortress; I shall not be shaken. On God rests my salvation and my glory; my mighty rock, my refuge is God.  Trust in him at all times, O people; pour out your heart before him; God is a refuge for us.  (Psa 62:5-8 ESV)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 소망을 두게 하시고
오늘 하루 세상 속에서
이웃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2.20 이-메일 목회서신)

예수님의 손길 (2)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작년 말에는 디즈니사의 “겨울왕국(Frozen)”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얻었습니다. 영화 속의 한 등장인물에게는 신기한 마법이 있어서 모든 것을 얼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훗날 그녀가 여왕이 되면서 모든 나라가 겨울왕국으로 변했습니다. 공주의 동생이 언니도 살리고 잃어버린 여름을 되찾기 위해서 모험을 떠나는 것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마이더스라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인공도 있습니다. 마이더스라는 사람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 무척 많았습니다. 디오니소스라는 신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자 그는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활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만지는 순간 황금으로 변하고 마니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음식을 먹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손길이 닿으면 과일이며 빵이며 전부 황금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초래한 비극이지요.

이에 비하면 우리가 지난주부터 살펴보는 예수님의 손길은 겨울왕국이나 마이더스의 손과 정반대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손길이 닿는 곳에는 얼음으로 변하거나 황금으로 변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따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지시면 생명의 기운이 회복되었습니다. 나병이 깨끗이 사라졌고,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소경이 눈을 뜨고,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던 사람의 귀와 입이 열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길은 치유와 회복의 손길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욕심이나 명예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오셨고, 약한 자들에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셨지만 예수님 자신에게 이익이 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철저한 내어주심, 희생의 삶을 사셨습니다. 급기야 십자가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악한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손길은 희생과 사랑 그리고 승리의 손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만져주시길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손길 역시 매우 이례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하루 전날의 상황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하던 자리에서 갑자기 웃옷을 벗으시고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스승이자 주님(Lord)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난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의 발을 정성껏 씻겨 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감동적입니다.

땅을 밟고 다니고 어쩌면 가장 더러운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의 손길을 생각하니 은혜가 밀려옵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의 더러운 발을 내어드리고 싶어집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손길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들도 날마다 깨끗해져야 할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발까지 깨끗하게 씻겨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우리들도 예수님 말씀대로 이웃을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河-

일곱개의 동사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새벽에 읽은
출애굽기 3장 7-8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6개의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7Then the LORD said, “I have surely seen the affliction of my people who are in Egypt and have heardtheir cry because of their taskmasters. I know their sufferings,  8 and I have come down to deliver them out of the hand of the Egyptians and to bring them up out of that land to a good and broad land,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to the place of the Canaanites, the Hittites, the Amorites, the Perizzites, the Hivites, and the Jebusites.  (Exo 3:7-8 ESV)

우리 말 번역에 “인도하여…데려가려하노라”는 영어 번역에 있듯이
“bring them up”이라는 한 가지 동사가 히브리어 본문에도 쓰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잠시 시간을 내서
위의 말씀을 차근차근 서너 번 꼼꼼히 읽어보십시오.
말씀을 읽는 것을 넘어서 먹는 차원으로 들어가보십시오.
빨강색 즉 하나님의 행동을 묘사하는 동사를 한가지씩 붙잡고 묵상하고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 보십시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상관들이 괴롭힐 때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타향살이,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심과 막막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 하나님의 마음이 세가지 감각적인 동사로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십시다.
애굽에서 건져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은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때때로 근심이 몰려오고, 한없이 외롭습니다.

그때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말씀이 커다란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행동을 묘사한 단어가 여섯 가지 입니다.

여기에 완전수 일곱을 채우는 것은 우리들 몫입니다.
마지막 일곱은 하나님의 마음과 행동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믿음대로 살아가는 행함/삶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심을 믿고
믿음으로 나가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게 하옵소서.
내려오셔서 구원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2.13 이-메일 목회서신)

예수님의 손길 (1) :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배우며 자라가는 교회”라는 표어대로 우리 모두 올 한 해 동안 많이 배우고 신앙이 자라가길 바랍니다. 기독교인들의 배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代贖)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구원은 우리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3년 동안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계셨고 마지막 3년은 메시야로서 공생애(public life)를 사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지내신 예수님의 사역과 삶은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배움의 본(本)입니다. 배우며 자라가는 교회라는 표어에서 배우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간 동안 예수님에 대한 배움 특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손길이 주는 교훈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산상수훈을 마치고 내려오셨을 때 이미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을 깨끗하게 고쳐주시길 간청합니다. 나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염성이 강합니다. 접촉을 통해서 전염되는 질병입니다. 나병환자는 격리 수용되었고 일단 저주를 받아서 병이 걸렸다고 생각해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서 그를 만지시면서,“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3절)며 고쳐주셨습니다. 말씀만 해도 고치실 수 있었을 텐데 나병환자의 병든 몸을 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외롭고 힘겨운 인생을 살았던 그 사람에게 닿았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의 경우처럼 몸에 손을 대신 사건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소경을 고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기신 다음에 그것을 눈에 발라주시면서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소경의 눈에 닿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는 더 극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손을 얹어 안수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혀를 만지면서 하늘을 보고 탄식하면서“에바다(열려라)”하고 외치셨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앓고 세상에서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대면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으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치유와 회복을 넘어서 새 생명이 임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사모하기 원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어렵고 힘겨운 이웃들의 손을 꼭 잡아 줄 수 있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河-

하늘 바라보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날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보통 겨울에는 비가 많이 와서
제발 주일날은 비가 오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합니다.
어르신들은 물론 교인들이 예배 오기가 불편하시니까요.

하지만 지난 주일 새벽에
빗소리를 듣고는
주일날 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예배에 오시는 성도님들께서도
조금도 불편한 기색 없으셨고
할머니 권사님들은 비를 맞아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예고 없이
갑자기 내린 비여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2.
주일날 잠시 내렸던 비가
어제부터 다시 내립니다.

수요예배 갈 때도 비가 제법 내렸습니다.
오늘 새벽기도회에 갈 때는
빗발이 거셀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3-4일씩 몇 번만 내려주면
급한 대로 만물이 소생할 것 같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실감했습니다.

올 겨울 캘리포니아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가정마다 물을 20% 줄이자는 캠페인이었습니다.
물을 줄여도 말라가는 저수지를 채울 방법이 없었습니다.

전기 자동차를 넘어서
무인으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발명되고
조만간 어디서든지 집의 가전제품과 냉온방을 원격 조정할 수 있게 된다지만
비가 내리지 않으니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3.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다시 바벨탑을 쌓은 인류처럼
우리들도 조금 살만하면 교만해져서 창조주 하나님을 넘봅니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자랑하지만
죽음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나중 일이고
당장 비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자연을 움직일 수도 거슬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는데
이것은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꼭 필요해서
하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면서
하나님을 다시금 생각하고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게 됩니다.

폭풍 속에서 하나님의 폭풍질문을 고스란히 맞은 욥처럼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 원합니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새번역, 욥42:2-3)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새번역, 욥42:5-6)

I know that you can do all things, and that no purpose of yours can be thwarted.  ‘Who is this that hides counsel without knowledge?’ Therefore I have uttered what I did not understand, things too wonderful for me, which I did not know.  (Job 42:2-3 ESV)

I had heard of you by the hearing of the ear, but now my eye sees you; therefore I despise myself, and repent in dust and ashes.”  (Job 42:5-6 ESV)

하나님 아버지
창조주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2.6 이-메일 목회서신)

당황스러움이 놀라움으로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새벽기도회에서는
구약 성경 창세기의
요셉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요셉은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어디에 있든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와 함께 하셨고,
요셉으로 인해서 주위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던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
이집트 총리로 임명됩니다.

형들이 요셉을 판 이후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기까지 13년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아내를 맞아 결혼하고 아들을 낳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이 므낫세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 버리게하셨다”(51절)
둘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52절)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요셉은 이집트에서 총리가 된 후에
그 동안 겪었던 고통과 자신을 팔아버린 가족들을 잊어버리고
만족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2.
그때 온 세상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도 양식이 떨어지자
요셉이 총리로 있는 이집트에 곡식을 사러 옵니다.

요셉은 형들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은 20에 노예로 팔아먹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고향집 일을 모두 잊어 버리고
이집트 생활을 즐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팔아먹은 형들이
자기 앞에 나타났으니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요셉이나 형들에게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과의 앙금을 해소하고
화해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 나갑니다.
그리고 결국 형들 앞에서 자신이 요셉임을 밝힙니다.

형들에게 했던 요셉의 말은
두고 두고 곱씹을 명연설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45:5)

And now do not be distressed or angry with yourselves because you sold me here, for God sent me before you to preserve life. (Gen 45:5 ESV)

요셉은 하나님의 큰 그림을 읽고 있었고
형들을 성숙한 자세로 맞아 주었습니다.
형들과 요셉의 갈등은
당황스러움에서 놀라움으로
즉 해피앤딩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요!

3.
오늘이 음력 설입니다.

올 한 해에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깜짝 놀랄 일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지혜와 지식이 짧은 우리들로서는
당황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결국 깜짝 놀랄 일들,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을 일들이
설날을 맞이하는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많이 일어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한 해의 여정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남은 2014년의 열한달 동안
주님께서 행하시는 깜짝 놀랄 일들을 눈으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1.30 이-메일 목회서신)

배우며 자라가는 교회 (3) : 말씀먹기

성경을 생명의 양식이라고 부릅니다. 생명의 양식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생명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20장 30-3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또한 그를 믿음으로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공부 시간에 생명에 괄호를 치고 그 안에 들어갈 단어를 맞춰보길 부탁드리면 대개‘구원’또는‘영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미로 보면 틀린 답이 아니지만 요한복음에서는“생명(life)”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생명의 양식에서“양식”은 말 그대로 먹을거리입니다. 목숨을 부지하는데 필요한 음식입니다. 성경을 생명의 양식이라고 했을 때 성경이 영적인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먹는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자세히 읽어야 합니다. 연애편지 읽는 것처럼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상상력을 동원하고 행간에 깃든 의미까지 찾아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메시지를 포착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성경을 먹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신앙과 삶 속에 내면화 시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도 하나님 말씀을“맛”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것을 사모하는 자에게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1) 영혼을 새롭게 살려내고, 2) 우둔함에 지혜를 더하고, 3) 마음을 기쁘게 하고, 4) 눈을 밝게 하고, 5)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시 19:7-10).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한 하나님의 사람이 체험을 토대로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맛보고 그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는데 꼭 필요한 것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렉치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라는 성경읽기와 묵상방법을 만들어서 실천했습니다. 렉치오 디비나는 네 가지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 말씀을 차근차근 꼼꼼히 읽는“읽기(렉치오)”입니다. 두 번째로 읽은 말씀을 마음으로 곱씹는 묵상 (메디타티오)입니다. 묵상은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기는 작업입니다. 세 번째는 읽고 묵상한 말씀을 붙들고 입술로 기도하는 것입니다(오라티오).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갖고 자신은 물론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으니 이제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말씀 안에서 쉼을 얻는 안식입니다 (콘템플라티오). 안식은 말씀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동안 자신이 말씀을 읽었다면 이제부터는 말씀이 자신을 읽도록 말씀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집착이나 이기심을 내려놓고 말씀 앞에서 온전히 평온함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매일같이 위의 네 가지 단계를 모두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말씀을 자세히 읽고, 마음에 깊이 다가온 말씀을 꼭 붙잡고 기도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일입니다. 그때 살았고 힘이 있는 하나님 말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 위에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