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이 주는 교훈 3 : 입술의 말

생명나무가 잠언에 등장하는 것이 뜻 깊습니다. 잠언을 두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잠언에 나오는 말씀들을 지킬 때 이 세상에서도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생명나무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생명의 삶을 사는 방법을 잠언을 통해서 배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지혜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마음에 소원을 이루어갈 때 잠언의 생명나무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잠언에 나오는 마지막 네 번째 생명나무는 온순한 혀였습니다.:”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4). 여기서는 온순한 말과 패역한 말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온순한 말의 의미 속에는 부드러운 말이라는 뜻과 동시에 치유의 말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이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고 그때 우리의 말이 생명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패역한 말은 속이는 말입니다. 한 군데로 치우친 고집스러운 말입니다. 이런 말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상황을 구부러뜨려서 오해를 사고 혼란을 야기합니다. 온순한 혀 즉 부드러운 말이 생명나무라는 말씀을 통해서 언어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웁니다. 말이 생명나무가 되기도 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치명적인 공격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잠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고스란히 받고 지켜 행할 것을 부탁합니다. 지혜의 말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마땅히 따라야 할 지침입니다.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는 구원의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리석은 말을 삼가라고 교훈합니다. 어리석은 말은 분별력이 없는 말입니다. 경우에 맞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관계를 끊어놓습니다. 무엇보다 어리석은 말은 진실 되지 않고 행함이 뒷받침되지 않은 헛된 말입니다.

잠언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언어를 통해서 형성되고 말을 통해서 우리들의 존재와 삶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에는 창조력이 있고, 구속력이 있고 일을 이루게 하는 에너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어떤 말을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인생길이 갈립니다. 언어사용이 삶을 새롭게 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줍니다. 언어에는 구속력이 있어서 일단 밖으로 나온 말을 뒤돌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 인생을 이루는 힘이 말을 통해서 생겨나고, 사회의 경우도 말을 통해서 힘이 응집되고 공동체의 대의(大義)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언어생활은 신앙은 물론 사회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잠언 18장 12절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죽고 사는 문제가 판가름 난다니 언어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습니다. 언어는 훈련이고 습관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살리는 말을 하기 원합니다. 매일 쓰는 일상적인 말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살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 원합니다.-河-

근사한 인생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새벽기도회에서는
창세기 가운데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21장에는
세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면서 웃음이 가득해 집니다.

둘째는,
웃음도 잠시,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나머지
자기들 마음대로
하갈이라는 이집트 종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과의 갈등입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집에서 쫓겨납니다.
하갈이 이스마엘과 더불어 목숨을 끊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임하셔서 구해주시지요.
하나님의 마음이 참으로 깊고 넓음을 느낍니다.

셋째는
아브라함이 블레셋 땅에 가서
그곳의 왕과 군대장관과 평화 협상을 체결하고
그곳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는 말씀입니다.

2.
세 가지 사건이 각각 의미가 있지만
마지막 세 번째 말씀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 동안 아브라함은 이집트와 그랄이라는 곳에 가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창 12, 20장).
아내를 배려한 것이 아니라
어여쁜 아내로 인해서 자기 목숨을 잃을까봐
비겁하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1장 속의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비굴하게 행동하거나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세상의 왕들과 거래하고
협상을 맺으면서 함께 거주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보고
세상의 왕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장관 비골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21:22)
“God is with you in all that you do. (Gen 21:22 ESV)

하나님의 말씀도, 아브라함 자신의 간증도,
하나님을 믿는 가족들의 칭찬도 아닙니다.
세상의 왕이 아브라함을 보고 한 말입니다.
이 정도면 아브라함의 인생이 멋지고 근사한 것입니다.

이런 평판을 들은 구약의 인물들이 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요셉입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매사에 성실했던 그의 생활 영성 덕분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은 기도의 인물이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기에
세상의 지혜를 뛰어넘는 탁월성을 발휘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울려서
저런 평판을 얻었습니다.

3.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는 송구영신의 계절에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을[나를] 보고 뭐라고 말할까요?


세상의 척도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처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세상 속에서
“저 분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근사한 인생을 사시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의 지혜로, 기도로, 믿음으로, 성실함으로
세상 속에서 근사한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2.19 이-메일 목회서신)

잠언이 주는 교훈 2 : 생명나무

성경에서 눈에 띠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생명”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누리는 최상의 축복은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사는 영생(eternal life)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생명을 동일시합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무척 사랑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선포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하신 목적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얻었고, 생명을 누릴 특권이 있습니다.

생명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표현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생명나무”입니다. 성경에서 생명나무라는 표현은 창세기와 요한 계시록, 그리고 우리가 읽고 있는 잠언에만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놓으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선과 악을 판단하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피조물인 인간에게 가르쳐주시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들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하나님처럼 영생을 얻을까해서 불꽃이 나오는 검으로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셨습니다(창3:22).

창세기 이후로 생명나무에 대한 말씀이 나오지 않다가 잠언에 와서 네 번 등장합니다. 첫째는 지혜가 그것을 얻는 사람에게 생명나무가 됩니다. 지혜가 곧 생명이라는 것입니다(잠3:18). 신약성경에서 지혜는 예수님과 동일시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확대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의인이 맺는 열매가 생명나무라고 말합니다(잠11:30). 구약 성경에서 의인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게 된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의인의 열매가 생명나무라는 말씀도 성경 전체의 주제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셋째로 오늘 본문입니다. 소원을 이루는 것이 생명나무라고 했고 마지막 네 번째는 온순한 혀가 생명나무라고 했습니다. 입술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쳐줍니다(잠15:4). 이처럼 잠언에 나오는 생명나무는 신약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확장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되었던 생명나무에 대한 말씀은 성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에 네 번 나옵니다. 그것도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고, 새롭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등장합니다. 구원받는 자들, 믿음을 끝까지 지킨 자들에게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하십니다(계2:7). 하늘나라에는 생명나무가 심겨져 있고 그 잎사귀들은 치료의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계22:2).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는 목적이 생명나무의 회복입니다. 창세기에서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나무를 소망하고, 잠언에서 배운 생명나무의 법칙을 일상생활 속에서 적용하면서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河-

열린 마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세대의 키워드는
“소통”입니다.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을 때
관계가 발전하고
갈등도 해소되고
한 마음이 되어서 신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소통의 도구는
역시 언어입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듯이
우리의 언어습관은 무척 중요합니다.

요즘 하루에 한 장씩 읽어가는
잠언에 보면
언어에 대한 교훈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지혜로운 사람,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입술의 말이 중요함을 강조한 말씀들입니다.

말과 더불어 강조되는 것이
“생각”입니다.
생각에서 말이 나오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 12장 5-6절에도
의인과 악인이 대조를 이루고
그들의 말과 생각이 연이어 나타납니다.

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The thoughts of the righteous are just; the counsels of the wicked are deceitful.
The words of the wicked lie in wait for blood, but the mouth of the upright delivers them.
(Pro 12:5-6 ESV)

이처럼 마음과 생각
그것이 표현되는 언어를 다스리고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기본임을 배웁니다.

2.
잠언 12장 15-16절도 실제적인 교훈을 줍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The way of a fool is right in his own eyes, but a wise man listens to advice.
 he vexation of a fool is known at once, but the prudent ignores an insult. (Pro 12:15-16 ESV)

미련한 사람은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깁니다.
더 이상 발전하거나 수정할 생각이 없는 단절된 사고입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조언을 듣습니다.
자신이 틀릴 수 있고, 더 좋은 길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 열린 사고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속단한 미련한 사람은
다른 의견이나 일이 벌어지면 즉석에서 화를 냅니다.
생각은 닫아놓고, 입을 활짝 열어서 소리를 지릅니다.

반면에 슬기로운 사람은
난감한 일이 생기면 입을 닫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열고 신중하게 상황을 파악합니다.

잠언이 주는 교훈이 매우 실제적이지요?

3.
매일같이 잠언을 한 장씩 읽어 가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삶 속에 읽은 말씀을 적용하기 원합니다.

무심코 읽으면 지나갈 말씀이지만
곱씹으면서 읽어나가면
성경이 왜 하나님 말씀인지 깨닫게 되고
마음과 삶에 생명의 양식이 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느라
마음과 몸이 바쁘지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열린 마음을 갖고
우리의 마음, 생각, 삶을
매일같이 (잠깐 동안이라도) 돌아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마음이 열리게 하옵소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리분별을 해 낼 수 있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총명함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2.12 이-메일 목회서신)

잠언이 주는 교훈 1 : 지혜

세상을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지식은 공부나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지만 지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참되고 의미있게 사는 법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지혜가 그의 인생길을 제시해주고, 지혜가 그의 사람 됨됨이를 결정해 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들은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들어 있습니다. 신약성경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 모든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시편 111편 10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며 그의 계명[말씀]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사모하는 이들은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특별히 구약의 잠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의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고 하고 새해를 맞는 올 해의 마지막 달에 하루에 잠언을 한 장씩 읽고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는 비결임에 틀림없습니다.

잠언(Proverbs)은 말 그대로 삶의 지혜를 주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다윗의 아들이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늘의 지혜를 얻은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1절에서 가르쳐줍니다. 잠언이 어떤 말씀인지 가르쳐주는 1장의 초반부에서는 지혜, 훈계, 명철이 말씀과 더불어 등장합니다.“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이라는 1장 3절 말씀을 통해서 잠언 말씀이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을 배웁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의 잠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를 배우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줍니다.

잠언의 주제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여호와를 경외하라”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관련된 구절이 잠언에만 18 번 이상 나옵니다. 잠언의 주제절이라고 할 수 있는 1장 7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 목숨까지 바쳐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말 그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잘못행한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올 해의 마지막 달에 잠언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묵상함으로 우리 안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굳게 자리잡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고 그것을 통해서 험하고 복잡한 세상을 멋지게 살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 우리의 신앙이 세워져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함을 얻기 원합니다.-河-

복 있는 사람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오늘 플로리다에서는
깊은 바다에 살던 40여 마리의 고래 떼가
해변가 얕은 물가로 올라와서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는 구조작업이 벌어졌습니다.

크기가 3-5미터에 이르고
무게만 3톤에 가까운 육중한 고래들이
어떻게 늪지대가 있는 해변가로 올라왔는지 궁금합니다.

밀물 때 올라왔다가 썰물이 되면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했거나,
깊은 바다를 헤엄칠 능력이 소진되면서
육지로 올라와서 집단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현상(stranding)등으로 추측할 뿐이랍니다.

이번에 해변가로 올라온 고래는
20-30마리씩 떼를 지어서 움직인답니다.

웬만해서는 무리를 이탈하지 않는 군집성이어서
함께 해변가로 올라온 것 같다는 전문가의 분석입니다.
동지애가 참 강한 동물이네요.

그렇지만
아무리 한 마음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자신들의 서식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중요하지
이번 경우처럼 궤도를 이탈해서
엉뚱한 곳으로 떼를 지어 이동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2.
시편 1장에는
의인과 악인이 대조를 이루어 나타납니다.

의인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야하고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는
의인을 두고 시편 1장 1절에서는
복있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2-3)

But 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RD, and on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  He is like a tree planted by streams of water that yields its fruit in its season, and its leaf does not wither. In all that he does, he prospers.  (Psa 1:2-3 ESV)

자리를 지키는 것이 꽤 중요합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지요.
의인의 자리, 하나님 백성의 자리에 거하는 것이
복있는 사람이 해야 할 처신임을 배웁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멈추고,
주님 말씀하시면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하나님 백성이 해야 할 일입니다.

연말을 맞아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해 집니다.
여기저기 몰려 다니기 쉬운 때입니다.

무리를 지어서 다니느라
물이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해변가로 올라온 플로리다의 고래들을 반면교사 삼아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겸손히 돌아보기 원합니다.

3.
여기까지 목요서신을 쓰고 [목요일 오후]
마무리하려는데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95세로 타계했다는 속보가 떴습니다.

27년의 옥살이를 견디고
결국에는 흑백갈등을 용서와 화해로 해결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이루려던 그분의 인생이
어둡고 혼란한 세상,
죽음이 닥칠 것도 모른 채 무모하게 달려가는 인생길에
영원한 빛으로 남아 있기를 소원합니다.

4.
12월의 마지막 달입니다.
매일같이 잠언을 한 장씩 읽고 묵상하면서
하늘의 지혜를 구하고
한 마음으로 주님의 길을 걷는 참빛 교회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 보내신 곳에서
주님을 예배하며 나가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의인의 길에 서게 하옵소서.
복 있는 사람의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2.5 이-메일 목회서신)

감사

“감사”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 180번 이상 나옵니다. 그 가운데“감사하라”는 명령이 서른다섯 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보면 감사에 대한 말씀은 물론“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서른 번 이상 듣게 됩니다. 말씀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사하라는 명령을 따라 살면 더욱 좋겠지요. 하루에 서른다섯 번씩 감사할 것을 생각하고 말로 감사의 표시를 한다면 우리들의 삶이 부요해지고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살펴본 겸손과 회개와 마찬가지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높은 곳에 있으면 감사하기보다 교만하거나 높은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더 아등바등 살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작은 것만 얻어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작고 사소한 것에 감사를 느끼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의 자리로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은 감사함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오라고 권면합니다. 염려하는 마음에 감사가 사라집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꽁꽁 얼어붙게 만듭니다. 염려를 떨치고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할 때 감사가 살아나고 어려움을 이길 지혜와 힘을 얻습니다. 이처럼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며 엎드릴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한 감사의 고백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인 골로새서 3장에서도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이나 행함에 감사가 넘쳐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시와 찬미가 임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감사야 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뜻입니다. 말씀대로 “감사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올해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경기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우리네 서민들의 경제는 여전히 힘겹습니다. 젊은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순간순간 느꼈을 것입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파도가 밀려오듯이 크고 작은 일들이 쉬임없이 밀어닥쳤습니다. 그래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주일을 맞게 됨이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는 올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어르신들께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주시는 가운데 젊은 성도님들이 새로 오셨습니다. 교회에 어린아이들이 뛰며 노는 소리만큼 우리들의 마음도 기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어려운 중에도 도움의 손길을 사방에서 제 때에 보내주셨고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주님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럴수록 우리는 더욱더 낮은 자의 자리에 내려가서 무릎 꿇고 주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가난한 교회요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회개의 자리로 나가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롭게 되어야 할 부끄러운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쁠 수밖에 없음을 추수감사주일을 지내면서 다시금 깨닫습니다. -河-

갈망

우리는 4주에 걸쳐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요즘세대는 자신을 한껏 높이고 자랑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만큼 인간의 문명이 발달한 적도 없었기에 인간의 교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신앙에 대한 간절함이나 갈급함이 많이 식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물질적으로 부유했지만 미지근한 신앙을 가졌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 우리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솔직한 모습으로 나가야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낮은 자리로 내려갈 때 높으신 하나님이 보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질 때 하나님을 더욱 찾게 되고 자신의 부족함과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회개하게 된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회개는 단순이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감사가 있어야 함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만을 기다리고 구하는 것을 넘어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자신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좋으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일이 닥치든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신앙으로 자라가길 원합니다.

마지막 시간인 오늘은 첫 시간에 읽었던 역대하 7장 1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지난 세 시간에는 앞에서 말했듯이 악한 길에서 떠나는 회개와 스스로 낮추는 겸손, 그때 마음에 임하는 감사에 대해서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갈망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간절하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한 신앙을 갖고 하나님을 믿기보다 애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 있다면 얼른 회개하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적갈증을 하나님으로 채움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죄사함과 치유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보좌 앞에 들어가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합니다. 올해의 남은 한 달 동안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참빛교회 식구들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河-

변치 않는 복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인터넷에서
구글에서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개발 중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여섯 개의 프로펠러와 바퀴가 달려 있어서
지상으로 다닐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하늘을 날 수도 있는 드림카랍니다.

일본에서 열린 모터쇼에서는
눈으로 인식해서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가
소개되었답니다.

무엇보다
손과 발이 불편하신 분들에게는
기쁜 소식입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장차 어떤 세상이 될 지가
자못 궁금하고
또한 공상영화에 나오는 세상이
실제로 현실화되면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 위치에 올라앉아서
하나님을 떠나게 될까 염려도 됩니다.

2.
그렇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사람들의 마음이 변할 뿐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이 발달해도
죽음(인간의 한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정해져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갈급함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속에 들어있는
진리추구의 본능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선택의 폭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우왕좌왕할 것입니다.
길 되신 예수님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3.
무엇보다 2천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입니다.
인류는 지난 2천년 동안
엄청난 변화를 이미 겪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
생명의 씨앗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자체가 능력을 탑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주일 말씀대로
가난한 마음으로, 낮은 곳에서
겸손과 주님께 돌아오는 회개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해서 나가기 원합니다.

그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누리고
자유케 하는 성령의 능력과
생명의 복음을 누리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변치 않는 복음을 통해서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 마음 속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Jesus said to him,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John 14:6 ESV)

하나님 아버지,
길과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굳게 서 있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1.21 이-메일 목회서신)

추수감사절 만찬

미국에 처음 와서 맞았던 추수감사절 만찬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뉴욕에 있는 한 한인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사역하던 때였습니다. 추수감사절 주일을 맞이하자 온 성도들이 음식을 한 가지씩 준비해서 교회로 가져왔습니다. 마치 한국의 추석명절을 맞듯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시고 신이 나서 추수감사절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추수감사절 몇 주전부터 교인들께서 칠면조 고기를 꼭 맛보아야 한다고 특별히 주문하셨습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칠면조 고기를 맛보았지만 푸석푸석하고 솔직히 맛은 별로였습니다. 고기와 곁들어 주시는 양념이 훨씬 맛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네 식구는 한국에서 먹던 양념통닭 얘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어제는 한 청년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10년 인디애나에서 목회하던 시절의 교회 주보를 사진찍어서 올려놓았습니다. 그 청년이 우리 교회를 처음 왔을 때 받았던 주보를 우연히 발견해서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올려놓은 것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그때는 풋풋했던 청년들이 지금은 대부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학부형이 된 청년들, 성경공부를 열심히 시켰더니 말씀대로 생육하고 번성해서 세 명의 자녀를 둔 청년들도 있습니다. 옛날 주보를 보고 있으니 제 마음이 1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인디애나에서의 추수감사절을 떠올리면 매년 우리 가족을 초청해 주시던 권사님 내외분이 생각납니다. 제가 태어난1962년에 결혼하셔서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인디애나로 시집오셨습니다. 미국 시어머니의 호된 시집살이를 다 견디셨습니다. 한국 사람이 없으니 한국말도 잊어 버린 때도 있으십니다. 그래도 변함없는 남편의 사랑을 먹고 그 모진 이민생활을 이겨내신 권사님이십니다. 은퇴하시고 두 분이 아담한 집에서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오순도순 살고 계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권사님 내외분이 우리 가족을 초청해 주셨습니다. 때로는 눈길을 헤치고 한 시간 가까이 운전해서 가야 하는 거리에 사셨지만 우리 네 식구는 추석날 부모님 뵈러 가는 기분으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권사님의 특기는 호박파이와 감자요리셨습니다. 권사님은 칠면조 고기가 맛이 없다고 닭을 가지고 맛있게 요리해 주셨습니다. 한국전쟁 때 죽은 동생을 등에 업고 피난을 가던 사연부터 위성방송으로 시청하셨던 <장금이>와 <여섯 시 내 고향>에 나오는 한국 음식을 놓고 신이나서 얘기하시던 권사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샌프란시스코로 목회지를 옮기고 난 이후에는 추수감사주일에 교인들과 함께 칠면조 고기를 먹습니다. 뉴욕의 교인들처럼 우리 성도님들도 음식을 한가지씩 정성껏 준비해 오시고 칠면조는 여선교회가 전담해서 굽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는 청년들이나 교인들에게 칠면조 고기를 꼭 맛보라고 강력히 권합니다. 그리고 만찬이 끝난 다음에 맛이 어땠는지 약간 짓궂게 물어봅니다. 거의 대부분 잠시 머뭇거린 후에 “맛있어요”라고 대답합니다.  ‘한국에서 먹던 양념통닭만 못한걸요’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저는 금새 알지요. 그래도 온 교인들과 더불어 나누는 추수감사절 만찬은 늘 풍성하고 화기애애합니다.

이처럼 추수감사절의 절정은 온 가족 또는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만찬에 있습니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보냈던 청교도들도 일 년 동안 자신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대해서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102명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왔지만 겨울을 지내면서 절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디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들마저도 신대륙에서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가족과 신앙의 동지를 잃은 슬픔이 마음 한 켠에 있었지만 살아남은 청교도들과 인디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한데 어울러 첫 번째 추수감사절 만찬을 즐겼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습니다. 교회는 물론 각 가정마다 함께 모여서 푸석푸석한 칠면조 고기에 양념을 곁들어 먹으면서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칠면조 고기만큼이나 기대에 못 미친 한 해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추수감사절을 맞을 수 있음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아내와 함께 올해 추수감사절 만찬에는 누구를 초대할까를 의논하다가 작년처럼 가족들 없이 이곳에 남아있을 청년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어김없이 그들에게 칠면조 고기를 적극 권할 것입니다. 맛있는 양념과 화기애애한 덕담까지 얹어지면 올 해도 풍성한 추수감사절을 보낼 것 같습니다. Happy Thanksgiving!
(2013년 11월 21일 SF 한국 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