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회개 또는 회심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자주 사용합니다. 두 가지 경우가 비슷한 뜻이지만 회개(repent-ance)가 앞에 있고 회개한 이후에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회심(conversion)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회심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인 셈입니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현관문과 같아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회개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회개는 하나님 없이 살았던 자신의 옛 모습을 인정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자신이 주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자신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유아독존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았던 인생을 청산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향해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회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슈브는“돌아서다”라는 뜻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삶,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부정하던 마음, 자기가 최고인 줄 알았던 교만함을 깨닫고, 인정하고, 그런 옛날의 삶에서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해 주시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십니다.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으로 죄 사함을 받았고, 죄의 지배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옮겨졌지만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찌꺼기가 남아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이 우리를 죄 가운데로 유혹합니다. 저는 이것을 두고 죄가 우리에게 달려 붙는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회개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회개는 매일의 과업입니다. 아니 순간순간 죄의 모습이 드러날 때마다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 백성으로 멋지게 자라가야 합니다. 앞에서 회개를“돌아섬”이라고 했습니다. 삶의 방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도 바뀌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비롯한 가치관도 바뀌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가 단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 또는 죄책감을 해결하는데 만 머물러서 안 됨을 발견합니다. 회개는 삶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아오셨고 그는 서둘러 내려와서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개했습니다. 말로만 회개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인생을 완전히 청산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삶의 변화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향해서“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죄를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삶으로 나가게 하는 힘이 회개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생명의 능력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기 원합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우리의 남아있는 죄성과 그릇된 행동을 회개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으로 나가기 원합니다. 회개는 우리 모두를 근사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河-

만나면 좋은 친구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가 인기랍니다.
아내와 함께 꼭 보자고 말은 하건만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 아주 빠져들 것 같습니다.
공감을 많이 할 것 같아요!
다음(Daum)기사에 CG처리된 지하철 역 간판이 나왔는데
제가 매일같이 출퇴근하던 1호선 시청역이
금새 눈 앞에 그려졌습니다.

1994년은 제가 목회를 하기로
결정하고 신학 대학원 준비를 하던 때입니다.

여전히 직장에 다녔고,
우리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이지요.
교회에서는 줄곧 중고등부 교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점심시간이면 직장 건물 지하 교보서적에 가서
청소년 관련 책들도 찾아보고,
드라마에 나온다는 서태지며 HOT 음악도 듣곤 했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 친구들이 급- 그리워집니다.

2.
만나면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활기가 생기고, 기분이 좋아지고
몇 시간을 같이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친지들입니다.

아니 그런 친지들을 찾기 보다
우리들 자신이 먼저
상대방이 만나고 싶은 이웃이 되어야겠지요.

누구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도제목을 나누고
허물없이 인생과 신앙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신앙의 동지들이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를 세웠던
바울에게도 신앙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후계자 디모데를 많이 아꼈고
그를 그리워했습니다.

디모데후서 마지막 장에 보면
겨울이 되기 전에 얼른 오라고 부탁합니다.
올 때는 가죽 종이에 쓴 책과
어떤 성도의 집에 맡겨두었던 겉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합니다(딤후 4:3절).
노년의 바울이 아들 같은 제자 디모데를
무척 보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훗날 돌아보았을 때 흐뭇하고
평생 동안 함께 걸어갈 신앙의 동지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만나면 좋은 신앙의 동지들을 많이 허락하셔서
우리 참빛 교회 식구들의 삶이 부요해지길 기도하겠습니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고후8:23)
As for Titus, he is my partner and fellow worker for your benefit. And as for our brothers, they are messengers of the churches, the glory of Christ. (2Co 8:23 ESV)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우리의 만남을 예비해 주시고
축복해 주옵소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좋은 만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1.15 이-메일 목회서신)

겸손

2013년 한 해도 이제 한 달 반 정도 남았습니다.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에 맞설 방법은 없습니다. 만약에 시간을 막아보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것을 푸념하기보다 올 해 초 송구영신 예배에서 말씀드린 대로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흘러가는 시간 “크로노스”가 아니라 가치와 추억이 가득 담긴 시간“카이로스”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시간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봅니다. 시간의 끝이 죽음이기에 더욱 절망스럽습니다. 그러다보니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 발버둥을 칩니다.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럽습니다. 어떤 경우는 끝이 있음을 망각한 채 천년만년 살 것처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합니다. 이 모든 것이 구약 전도서 기자의 고백처럼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크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4주 동안“우리의 가난함, 주님의 부요하심”이라는 주제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연속 설교의 제목을“가난한 마음을 주옵소서”라고 정했었는데 연말에 너무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기에 우리들은 미천하고 가난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부요하시다는 제목으로 바꿨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백성들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실제로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거할 집이 없는 가난한 백성들을 친히 입히시겠다고 성경 곳곳에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여 다니면서 양을 치던 유목민들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 같은 가난한 민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도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늘나라를 약속하신 축복으로 시작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셔서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주시고 부요하심을 더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겸손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능력을 자신 안에 가득 채우려는 마음이자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인 역대하 7장 14절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한 길에서 떠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낮추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의 백성들이 스스로 낮출 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려고 작정을 하신 것을 거두셨습니다(왕상 21:29).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옷을 찢으며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왕하22:19). 사자 굴에서 살아났던 다니엘은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겸손하게 살기로 결심한 첫 날부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그의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단10:12). 오늘 본문에서도 주의 백성이 스스로 낮추고 주님이 계신 성전에 나와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땅을 고쳐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낮추는 겸손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경험하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지나치게 교만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아가 살아나고 경험을 앞세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스스로 낮추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그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셔서 주님의 이름이 드높여지길 원하십니다. 주님 앞에 겸손히 나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길 원합니다. -河-

범사에 감사

좋은 아침입니다.

1.
벌써 11월이 되었습니다.
11월은 감사의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이 있음은 물론
주님 앞에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차분하게
감사의 제목들을 세어보기에 가장 좋은 달(月)입니다.

“감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토다”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감사를 넘어서
“감사의 찬송(song of thanksgiving)”
“감사의 고백(confession of thanksgiving)”
“감사의 제사(sacrifice of thanksgiving)”라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11월을 감사의 달로 삼겠다는 것은
감사의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범사에 감사의 고백을 하고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삶의 예배를 드리겠다는 결심입니다.

2.
언젠가 설교시간에 말씀 드렸던
18세기 영국의 영적 거장 윌리엄 로우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찾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지 그 사건에 대해서 무조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대답하겠다. 왜냐하면 얼른 보기에는 불행한 재화(災禍)같이 보이는 일이라도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찬양하는 가운데서 그것이 도리어 축복으로 끝맺음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성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기도를 특별히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고, 금식을 자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구제품을 많이 내어주는 사람도 아니고, 절제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의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 항상 감사할 줄 알고 무엇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자기도 하려는 사람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그 안에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사람이다.”(예화집에서)

물론 기도도 금식도 구제도 모두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감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감사절이 있는 11월 한달 동안
일상의 삶 속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훈련을 하기 원합니다.

감사의 찬송과 고백,
감사의 예배가 우리 안에 날마다 있기 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  And the peace of God, which surpasse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Phi 4:6-7 ESV)

하나님 아버지,
무슨 일이 닥치든지
우선 감사하게 하옵소서.
감사의 찬양과 고백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1.7 이-메일 목회서신)

Trick or Treat(?)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핼로윈 데이였습니다.
중세시대 교회는
성인들을 많이 세웠습니다.
그리고 일년 365일을 성인들에게 할당했지만
배정을 받지 못하는 성인들이 있어서
11월1일을 “만성절(all saints day)”로 제정해서
모든 성인들을 기념했습니다.

성인들을 기념하는 전통이
켈트족의 이교 문화와 만나면서
혤로윈 데이가 생겼습니다.

죽은 자의 영령을 달래기 위해서
괴상한 행사를 하는 것이지요.

2.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핼로윈 데이를 앞두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코스튬”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이웃분들께 물어서
아이들의 핼로윈 복장을 사주었습니다.
비교적 점잖은 것으로 입혀서 학교에 보냈었습니다.

우리가 살던 기숙사 건너편이
위험한 지역인데
그곳에 살던 아이들이 길을 건너와서
마구 문을 두드립니다.
우리 네 식구는 깜짝 놀라서
불을 끄고 몇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2.
핼로윈 데이에
아이들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Trick or treat”을 말하면서 사탕을 달라고 합니다.

사탕을 주면 잘 대해주고
그렇지 않으면 장난을 치겠다는 뜻입니다.

“Trick or Treat”
– 물론 장난섞인 말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잘 대접해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치고 상대방을 마구 대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대하든지
잘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Trick은 없애고 treat만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So whatever you wish that others would do to you, do also to them, (Mat 7:12 ESV)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the golden rule)입니다.

이제 새달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족과 친지 그리고 이웃들을
너그럽게 사랑으로 대하며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만나는 이웃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0.31 이-메일 목회서신)

감사

오늘은 우리 교회가 새로운 성전으로 이사한 지 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새성전을 구입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하나님의 뜻이면 새성전을 주시길 기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온전하게 세워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소 경험해 왔습니다. 우리들 인생이 그렇듯이 교회에도 파도처럼 크고 작은 어려움이 밀려오곤 합니다. 그 속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손길들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엊그제 새벽기도회에서 읽은 요한계시록 13장과 14장 말씀에는 유사한 표현이 두 번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13장 10절에“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와 14장 12절의“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두 구절 모두 성도의 믿음과 인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진수는 얼마나 끝까지 견디느냐에 있습니다. 인내가 없는 믿음은 거품과 같습니다. 대신에 끝까지 견디는 인내가 있을 때 믿음에 꽃을 피우게 됩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성도들의 믿음과 인내는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난 2년여 우리 교회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책임지실 것이라는 믿음, 거기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없었다면 오늘 이렇게 2주년 감사 예배를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묵묵히 잘도 견뎌냈습니다. 눈에 띨 정도로 화려하거나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자랑거리도 없는 말 그대로 평범한 우리들이지만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습니다. 힘껏 교회를 섬겼습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우리 안에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요즘은 기독교가 사람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도나도 기독교를 얕잡아보고 지나칠 정도로 기독교를 비난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들은 더욱 더 믿음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성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터를 잡고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제 말로 전도하는 시대는 지나갑니다. 우리들 각자가 세상 속에서 작은 예수가 되어서 마음으로 몸으로 진리와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참빛 교회와 성도님들에게 이런 참다운 믿음과 인내가 더욱 넘치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는 김평욱 선교사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 가운데 하나가“구제와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아직은 부족해서 마음껏 돕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쫓아서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김 선교사님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서 나가는 귀한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2주년 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 에벤에셀, 도움의 돌을 하나 놓고 앞으로 나갑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 교회가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가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립시다. -河-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오늘은 개신교회들이 함께 지키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말틴 루터가 당시 교회와 사제들의 잘못된 관행을 고발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부르그 성당 앞에 게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비와 은행 빚을 갚기 위해서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이미 죽어서 연옥(가톨릭에서 죽은 자들이 가서 대기하고 있는 장소라고 보는 곳)에 있던 영혼들이 쨍그랑하고 헌금이 험금통에 떨어짐과 동시에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주장했습니다. 헌금을 걷기 위해서 만들어낸 방법인데, 멋모르던 백성들은 그 말을 믿고 조상들을 위로하기 위한 방편으로 너도나도 면죄부를 샀습니다.

이것을 본 수도사 말틴 루터는 마음에 분노가 일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것을 갖고 교회가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성도들을 속이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학 교수이기도 했던 말틴 루터는 이러한 교회의 그릇된 관행을 고발하고 학교 안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과 토론을 벌이고 싶어서 95개조 반박문을 성당 앞에 게시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는 개신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말틴 루터 역시 자신의 처음 의도와 다르게 종교개혁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가 발표한 3대 논문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바벨론 포로됨”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숭배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니 세상왕의 지배를 받게 되고 세상에 포로가 된 것입니다.

말틴 루터 시절에 교회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기보다 교황과 종교 지도자들의 잇속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성례전까지 순수성을 잃어버린 채 교권을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진정한 믿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교회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혔다고 비유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거나 세상을 쫓았을 때 자신들도 모르게 세상에 포로가 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잡혀가서 포로생활을 했듯이 세상에 끌려가서 세상방식을 강요받습니다.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억압과 억눌림으로 괴롭습니다.

누가복음 4장 말씀은 메시야로서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복음은 무엇엔가 포로된 사람들을 자유케합니다. 눈이 멀어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줍니다. 억압받는 사람들도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하면 자유를 회복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은 은혜의 선포입니다.

종교 개혁주일을 맞아서 우리들도 행여나 억압받고 무엇엔가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원합니다. 죄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세상에서 각자 지고 가는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말틴 루터의 말 대로 복음 아닌 다른 것들에 포로가 되어 있다면 거기서 헤어 나와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도 복음이 임하면 진정한 자유가 임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와 세상을 자유케하기 때문입니다. 새장의 문이 열리면서 갇혀 있던 새가 창공을 향해서 날아오르는 것처럼 우리들도 복음 안에서 날아오르기 원합니다.-河-

맛 보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에는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에서 요한계시록을 읽고 있습니다.

수요예배는 일주일에 한 장씩
자세히 살펴보게 되고
새벽기도회에서는
하루에 한 장씩 간단히 묵상합니다.

어제 수요예배에서
성경의 큰 줄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 본문의 얼개(구조)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한계시록이야말로
자세한 것들에 신경을 쓰면
이해하기도 어렵고
천차만별의 해석이 가능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요한 계시록의 큰 축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을 중심으로 읽어나가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2.
오늘 새벽기도회에서 살펴본
요한 계시록 7장은
4장부터 시작된 말씀의 후반부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개의 두루마리를 하나님께로부터 건네 받으시고
차례로 두루마리의 인봉(印封,seal)을 떼십니다.

인봉을 떼면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시작됩니다.
가뭄, 전쟁, 박해, 사망의 환난입니다.

여섯 개의 인봉이 모두 떼어지고
한 개만 남아 있는 중간에
하늘 나라의 모습이 한 폭의 영상(snap shot)처럼 등장합니다.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를 잡고 있습니다.
택함 받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고
거룩한 성도들이 주님께 나와서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하게 된
흰옷 입은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섬깁니다.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이들을 해칠 수 없습니다.
어린양 예수님께서 생명수 샘물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7:17).
For the Lamb in the midst of the throne will be their shepherd, and he will guide them to springs of living water, and God will wipe away every tear from their eyes.” (Rev 7:17 ESV)

이 세상의 고통과 죽음이 사라진
기쁨과 평강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3.
이처럼 요한 계시록 7장은
여섯 번째 인봉이 떼어진 후
마지막 일곱 번째 인봉이 떼어지길 기다리는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환난의 한 가운데 위치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기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염려와 근심,
이해가 되지 않는 고난과 상처를 마주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 한 가운데서
하늘나라를 미리 맛보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생명,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
기쁨과 감사의 하나님 나라를
치열한 현실 한 가운데서 틈틈이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의 멋진 모습입니다.

오늘은
찬송가 438장(통 495장)을 부르면서
있는 곳에서 하늘나라를 경험해 봅시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변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 아버지,
험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삶 중간 중간에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0.24 이-메일 목회서신)

고르반

10월은 개신교인들에게 뜻 깊은 달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자 말틴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당시의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반박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루터는 베드로 성당의 건축비와 은행 빚을 갚기 위해서 무분별하게 면죄부를 발급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관행에 분개했습니다. 면죄부를 팔면서 면죄부를 사고 헌금을 헌금통에 넣는 순간 “쨍그랑”소리와 함께 죽어서 연옥에 있던 부모와 친지들이 구원받게 된다고 백성들을 현혹시켰습니다. 이러한 달콤한 논리에 많은 사람들이 면죄부를 샀고 이것은 결국 교회의 부정축제 수단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그의 반박문에서 헌금통 안에 던져진 돈이 쨍그랑 소리를 냄과 동시에 연옥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학설이라고 못박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면죄부를 팔수록 연보궤 안에서 인간의 탐욕과 잇속만 늘어난다고 당시의 교회를 비판했습니다.

면죄부와 비슷한 관행이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음을 신약성경이 소개합니다. 마가복음 7장에는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간의 논쟁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짚어먹는 것을 본 종교지도자들이 당시의 율법을 들이대면서 예수님께서 부정한 사람들을 제자로 데리고 다닌다고 딴지를 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사람의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보다 앞설 수 없다고 반박하십니다.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가셔서 고르반의 예를 갖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명을 변질시켰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고르반은 히브리어 “예물”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히브리어로 고르반이라고 합니다(레1:2). 이것이 후대로 오면서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한가지는 원래의 뜻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고, 다른 것은 하나님께 드린 것은 금할 것이 없다는 금지명령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종교지도자들은 고르반 규정을 그릇되게 가르치고 강요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부모를 모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릴 적에는 부모가 보호자가 되고 그늘이 되지만, 부모님께서 연세가 드실수록 상황이 역전되어서 부모가 자식들의 짐이 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긴 사람들 또는 부모를 공경할 생각이 없는 자식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팔았는데 그것이 바로 고르반이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 대신에 성전에 고르반 예물을 드리면 부모님을 모실 책임이 면제된다는 관행입니다. 고르반을 선언하고 나면 그 어떤 책임과 의무도 고르반 선언을 금지할 수 없습니다. 일종의 책임회피입니다. 십계명을 왜곡시킨 “사람의 전통”입니다. 혹자에 의하면 예물을 드릴 필요도 없이 성전에 와서 고르반 서약을 하고, 보증금을 걸듯이 일부만 예물로 드리면 부모에 대한 책임도 면제받고 남은 재산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고르반이나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면죄부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왜곡시키고 자기 편한 대로 하나님을 믿겠다는 얄팍한 심리를 잘 드러냅니다. 책임을 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쉽게 믿고 편리하게 살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헌금통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죽은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식의 신앙은 매력이 있어서 현혹되기 쉽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잇속과 쉽게 믿고 축복만 받으려는 기복주의가 만나서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그릇된 신앙이 만들어졌습니다.

솔직히 면죄부나 고르반의 관행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것을 사람들이 만들어서 그것이 신앙인 것처럼 믿고 따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천로역정과 같은 신앙을 가르치기보다 편하고 값싼 은혜를 설파합니다. 종교개혁주간을 맞으면서 95개조 반박문에 있는 루터의 말이 마음을 울립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나 산 자나 면죄부 없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에 참여 하는 것이다.””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고르반을 선언하고 부모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슬며시 자리잡은 그릇된 신앙의 관행들, 추하고 얌체 같은 편이주의(便易主義)를 낱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되고 바른 신앙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SF 한국일보 2013년 10월 24일 종교칼럼)

좋으신 하나님

누군가 저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지체 없이“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저의 삶과 목회의 여정 속에서 결국에는 선을 이루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만났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나눈 시편 23편 말씀 그대로 푸른 초장에 눕혀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말 그대로 평탄한 삶을 살았고,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인도해 주시는 길은 말 그대로 푸른초장이었습니다.

도리어 목회를 하면서 어려움이 종종 닥쳤습니다. 그때마다 목회가 영적인 싸움임을 깨닫고 더욱 더 기도의 자리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려움은 늘 상대적이어서 제가 겪은 어려움이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저는 다윗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제게는 힘겨운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막대기로 저를 보호해 주셨고 지팡이로 가야할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푸른 초장에서 만난 하나님께는 저절로 감사가 나옵니다. 인생의 골짜기에서 만난 하나님 앞에서는 말없이 무릎 꿇고 그 크고 깊은 은혜에 감격할 뿐입니다.

어디 저만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모든 주님의 백성들은 푸른초장과 골짜기의 삶을 번갈아 경험하지만 그때마다 좋으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어디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우리들을 인도해 주십니다. 저는 우리 참빛 교회 성도님들께서 삶의 순간 순간에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양희원 형제의 아버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장교로 복무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시고 목회를 시작하신 훌륭하신 목사님이십니다. 한국이나 미국 각지에 계신 부모님들께서 우리 교회를 방문해 주시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말로만 들으시다가 자식들이 섬기는 교회를 직접 와서 보시면 마음도 놓이시고 무엇보다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양 목사님께서 섬기시는 교회와 가정위에도 그대로 임하길 기도합니다.

어느 덧 10월도 중순이 넘어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사계절이 비슷하지만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낙엽이 지는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을은 말 그대로 결실의 계절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계절입니다. 농부들이 들에 나가서 정성껏 곡식을 추수하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정성껏 헤아리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기 원합니다. 자신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이 가을에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하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