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돋아줌

좋은 아침입니다.

1.
2년이 가까우니
교회 제단 앞 종려나무가
꽤 많이 컸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매주 물을 주면서 가꾼 덕택입니다.

언제부터인지
흙이 파이면서 뿌리가 점점 더 많이 보이길래
집에 있던 흙을 갖다가
북돋아주었습니다.

그 전에는 속살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민망했는데
흙으로 잘 북돋아주니
보기도 좋고, 나무도 흐뭇해 하는 것 같습니다.

2.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시고
이들을 한없이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부터
땅을 다스리고(관리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까지
첫 번째 창조된 인간을 특별히 북돋아주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편이 되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날마다 새롭게 격려해 주시는 분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격려를 통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3.
이제 우리도
서로를 북돋아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외롭습니다.
힘에 겨워서 때때로 손이 축-쳐집니다.
골치가 아플 때도 한 두번이 아닙니다.
마음의 상해서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뜻대로 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때 같은 길을 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서로를 북돋아주고
손을 붙잡고 일으켜주는 것이야말로
우리들 각자가
서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가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 제목이 있듯이
오늘은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부터
만나는 사람들에게 칭찬 릴레이를 해 봅시다.

우리들이 있는 곳에
하늘의 빛, 생명의 빛이 비추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살전 5:14, 새번역)
Encourage the fainthearted, help the weak (1Th 5:14 ESV)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있는 곳에서
칭찬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이웃을 북돋아주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0.17 이-메일 목회서신)

흘러 넘치는 은혜 7 : 임재

“흘러넘치는 은혜”라는 제목의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과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쳤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 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무엇보다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죄와 허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밧세바를 범한 다윗은 하나님께 나와서 통회자복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자신에게 실망한 나머지 예전 생활로 돌아갔지만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초대교회를 세우는 사도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깊은 죄사함을 경험한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옥합을 깼습니다. 죄와 허물로부터 자유로워야 은혜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자리 잡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정결하게 씻음 받았을 때 비로소 거룩한 성령이 활동합니다. 이처럼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죄사함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우리 안에 부어지면 위로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손 마른 자가 예수님을 만나니 그의 오른손이 활짝 펴졌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면서 기름통이 마르지 않는 공급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은혜 가운데 살 때에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 현실이 됩니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지난주에 살펴본 창세기의 요셉이 그랬습니다.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는 내리막길의 삶이 이집트에서 총리가 되는 과정이었고, 결국에는 아버지와 형들을 가뭄에서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쓰임 받았으니 그의 모든 삶의 여정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 셈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할 때 은혜가 더욱 넘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의 모든 것들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기 원합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가 개인적으로 또는 가족이나 공동체 또는 민족이 겪는 고난입니다. 만사가 형통할 정도로 일이 잘 될 때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베풀어주신 은혜를 간증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려움이 닥쳐오면 감사가 사라지고 염려와 근심이 몰려옵니다. 심하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믿음에 대한 회의가 생깁니다. 햇볕이 비출 때 은혜를 경험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먹구름이 인생길을 덮고 있을 때도 한결같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난 가운데서도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해야 진정한 신앙입니다. 고난을 은혜로 감쌀 수 있을 때 비로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23편의 전반부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되는 목가적이고 은혜가 넘치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햇볕이 비추는 밝은 날의 감사요 은혜체험입니다. 하지만 중간에는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가 등장합니다. 캄캄한 어두운 인생길을 걸어가는 다윗입니다. 고난의 내리막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벅차게 고백합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를 그의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한 것입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는 고난을 관통합니다. 고난이 은혜를 이길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야 말로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할렐루야! -河-

최고가 아니어도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오후에는
LA 기독교 서점에 들려서
주보 용지를 구입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주보용지를 고릅니다.
예전에 사용하던 것들보다
새로운 주보용지를 찾았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가 마음에 들어서
일하시는 분께 여쭤보니 재고가 없답니다.
어렵게 골랐는데 꽤- 아쉽습니다.

LA를 자주 내려올 수 없기에

두 번째로 마음에 드는 주보용지와
예전에 사용하던 것을 반반씩 구입했습니다.

2.
주보용지를 자동차에 실으면서
꼭 최고가 아니어도
준비되어 있으면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고의 디자인을 한 용지는
서점에 충분히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용지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기에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최고가 우선시되는 세상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선이라도
쓸모 있게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준비되어 있다면
우리를 선택하셔서 그의 뜻대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
충분한 재고를 갖고 그 손길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함을 일상 속에서 배웠습니다.

3.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내가 여기 있습니다(Here I am)”
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된 삶을 살기 원합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0-21).

Now in a great house there are not only vessels of gold and silver but also of wood and clay, some for honorable use, some for dishonorable. Therefore, if anyone cleanses himself from what is dishonorable, he will be a vessel for honorable use, set apart as holy, useful to the master of the house, ready for every good work. (2Ti 2:20-21 ESV)

값어치가 나가는 금그릇이나 은그릇이든지
아니면 나무 그릇과 질 그릇이든지 상관없이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계획하신 선한 일에 쓰임 받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가 아니어도
자신의 뜻에 맞게
두루두루 사용해 주심을 믿고
오늘도 있는 곳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 쓰임 받기 원하면서
겸손히 자신의 그릇을 준비하는 참빛 식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0.11 이-메일 목회서신)

눈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를 하면서
눈물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께서도 우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자매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우셨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이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에게 나오는 병자들, 죄인들, 망가진 세상을 보시고
많이 우셨을 것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히 5:7)
In the days of his flesh, Jesus offered up prayers and supplications,
with loud cries and tears, to him (Heb 5:7 ESV)

2.
제가 좋아하는 정호승 님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3.
세상살이가 쉽지 않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거나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눈을 감으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
바위 위에 앉아서
한없이 울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사랑도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시인의 말이 위로가 됩니다.

아니
우리와 똑같이 육체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성경 말씀이 깊이 다가옵니다.

눈물의 미학 –
눈물을 흘려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손을 꼭 잡고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압니다.

홀로 눈물을 흘릴 때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눈물은
기쁨과 소망의 눈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그늘과 눈물까지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0.3 이-메일 목회서신)

흘러 넘치는 은혜 6 : 섭리

지난주에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1)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해야 하고, 2)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피고, 구체적인 삶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생각하고, 3)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그곳에서 맡겨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해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은혜를 경험하는 토대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맞추는 과정입니다. 남들과 비교하거나 지난날에 대한 추억 또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동안 살펴본 인물 가운데 다윗이나 베드로의 경우처럼 유혹에 넘어가서 지은 죄들이나 특별한 환경 속에서 범한 실수들이 은혜를 경험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죄나 실수 앞에 멈춰있거나 뒷걸음질 쳐서는 안 됩니다. 자칫 그것들이 우리 안에 쓴 뿌리로 남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얼른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부족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찾고 그 품에 안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심은 물론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고 새로운 인생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들어있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들어서 사용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영광받기 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잘 가르쳐주는 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들 삶의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충분히 경험한 후에 우리의 인생까지 손수 빚어 가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멋진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요셉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 평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편안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갑니다. 요셉을 시기한 형들이 그를 팔아넘긴 것입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보디발이라는 고위 관리의 집에서 충성을 다하면서 인정받고 집안의 모든 일을 관할하는 청지기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모함해서 감옥에 갇힙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감옥은 가장 밑바닥 삶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감옥에서도 최선을 다합니다. 결국 바로왕의 꿈을 해몽해 준 덕택에 이집트의 총리에 오릅니다. 이 모든 과정을 두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신 결과라고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과 화해하면서 자신에게 생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고백합니다. 인생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흘러넘치게 체험한 사람의 멋진 고백입니다.

요셉에게 임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모두에게도 그대로 임할 줄 믿는 믿음과 확신으로 주어진 인생길을 꿋꿋하게 걸어갑시다.-河-

흘러 넘치는 은혜 5 : 죄사함

성경에서 은혜와 죄사함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은혜는 죄인됨을 인정하고 고백하였을 때 임한다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죄는 하나님 없이 살거나 하나님보다 위에 올라서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자신이 온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마음대로 사는 것이 곧 죄라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만드신 분임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것이 인간된 도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가장 근본적이고 커다란 죄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을 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죄의 모습은 교만과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교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결국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도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결국 하나님처런 눈이 밝아지겠다는 일종의 교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모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을 모셔놓고 섬기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신이나 이방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이방신들은 금이나 나무 매우 화려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어서, 부와 재물은 물론 쾌락까지 보장했습니다. 어차피 거짓 신이니 사람들 비위만 맞춰서 세를 불리면 그만이었던 셈입니다.

현대인들도 교만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합니다. 점점 더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고, 자신이 삶을 통제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현대판 우상숭배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 그리고 쾌락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너무 많이 섬기고 도리어 하나님 섬기기를 불편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죄들이 아주 많음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죄된 본성을 인정하고,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말 그대로 기쁜소식 복음입니다. 쉬워보이지만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하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의 여인도 죄를 많이 지으며 살았습니다. 여인은 도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듣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자신을 예수님께서 받아주시고, 그 여인에게 죄사함의 복음을 들려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의 은혜는 물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 은혜가 하도 커서 예수님께 옥합을 갖고 왔습니다. 꽤 비싼 옥합인데 그것을 깨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결로 딱습니다. 발에 붓는 것과 머릿결로 닦아주는 것은 자신을 가장 낮춘 겸손이자 예수님을 최고로 높인 경외심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가 용서함받았음을 확신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죄인취급받던 자기를 예수님께서 받아 주심이 너무 감사해서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아끼고 아끼던 옥합을 깼습니다. 옥합을 깬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옛 모습, 자신의 삶을 깨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예수님 앞에서 결심한 것입니다. 여인의 삶 속에 은혜가 흘러넘쳤기 때문입니다.-河-

부르심과 택하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졌습니다.
요즘 새벽기도회에 가려고
차에 타면 냉기가 돌아서
히터를 틀고 가야 할 정도입니다.

어르신들께서는
독감예방주사를 맞으실 때입니다.
환절기에 모두 건강 챙기시기 바랍니다.

2.
베드로후서 1장 10절에
“부르심과 택하심”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Therefore, brothers, be all the more diligent to make your calling and election sure,
for if you practice these qualities you will never fall. (2Pe 1:10 ESV)

여기서 부르심(your calling)은
우리들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택하심(your election)”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의 택하심입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이 나란히 쓰인 것은
이 두 가지 덕목이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불러주시고
선택해 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입니다.
대단한 부르심과 택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면
그리고 이 안에서 행하면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걸림돌에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3.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택하시면서
주님의 백성인 우리들을
각자의 삶으로 불러주셨음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우리가 하는 일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의 처한 상황들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다 보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깜빡 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상실입니다.
얼른 정신차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세상살이가 힘겨울 때도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 불평불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here and now)로 불러주셨고
지금 여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꿋꿋하게 오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모여서 내일이 되고
결국에는
부르심의 뜻이 확실하게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힘써 행할 때
무엇에든지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고
베드로 사도가 가르쳐줍니다.
넘어져도 곧바로 일어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각자의 자리에서
택하심과 부르심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벧후 1:10, 새번역)
Therefore, brothers, be all the more diligent to make your calling and election sure,
for if you practice these qualities you will never fall. (2Pe 1:10 ESV)

샬롬!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 속에서
꿋꿋하게 주어진 인생길을 걷게 하옵소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9.26 이-메일 목회서신)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제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큰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준비 중이고 둘째도 어느덧 대학교 4학년이 되었습니다. 15년 전 유학 길에 오르면서 김포공항(그때는 인천공항이 없었음)을 떠날 때 작은 아이가 자기 몸집보다 큰 가방을 메고 출국심사를 받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아이들이 저를 내려다볼 정도로 성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엄하게 키웠습니다. 잠언 말씀 (잠언 13:24)을 핑계삼아(?) 아이들이 잘못할 때마다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아내는 가슴 아파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회초리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에 장단점이 있습니다. 장점은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듯이 어렸을 때 받은 엄한 교육이 아이들의 심성을 바르게 합니다. 매사에 조심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꽤 있습니다. 아이들이 쉽게 주눅이 들곤 합니다. 지금도 제 목소리가 커지면 사뭇 긴장합니다. 잘못했을 때 자신들도 모르게 아빠에게 야단맞을 것을 먼저 걱정합니다. 어릴 때부터 생긴 습관이 몸에 베어서 그렇습니다.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들면서 신혼시절부터 저희 부부가 세운 원칙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매를 들면 아내가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입니다. 함께 야단을 치지 않고 한 사람은 아이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저 역시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어서 잠이 들락날락할 때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속삭이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회초리를 든 것이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로 남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아이들이 열 살이 되면 더 이상 회초리를 들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열 살쯤 되면 아이들과 진지한 대화가 가능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았습니다. 열 살이 되면서 아이들이 게임에 빠져듭니다. 학교 공부가 늘어나는데 텔레비전 앞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비교적 마음 고생을 하지 않고 사춘기를 보냈지만 그래도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열살 이후로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대신에 부모인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어릴 때는 회초리를 들었지만 아이들이 커가고 그들의 자아가 자리잡으면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가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사춘기의 아이들과 대화로 풀어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몸집은 커졌지만 부모의 눈에 자식은 늘 어리게 보였습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아이들의 어깨가 축 쳐져 있을 때에 아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었습니다. 아이들도 엄마와 아빠가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해준다는 것을 알고 힘들 때마다 기도제목을 알려줍니다. 기도는 부모와 자식이 하나님 안에서 소통하는 최고의 방법임을 배웠습니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 기도의 힘은 회초리보다 강합니다. 회초리를 갖고 아이들의 그릇된 습성을 고칠 수 있어도 그들의 인생길을 열어줄 수는 없습니다. 사랑의 매라고 해도 신체에 가해지는 회초리는 아이들의 마음에도 상처를 입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기도는 아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북돋아 줍니다. 기도하는 부모를 둔 자식은 비뚤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기도로 뿌린 씨앗은 결국 싹이 나게 마련입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만 기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젊은이들을 만나면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고 고민을 토로합니다. 경쟁이 치열하고 앞 길이 불투명해서 늘 염려와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목사님 기도해주세요”라고 서슴없이 부탁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갑니다. 어르신들도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몸이 약해지면서 마음도 약해지십니다. 자식들은 물론 친지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마음 속에 돌덩이가 점점 커집니다.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하소연 할 곳도 없습니다. 역시 기도가 필요하신 분들입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우리 모두는 기도가 필요한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누군가 기도해 준다는 말만 들어도 위로가 되고 힘이 생기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인 저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는 것을 가장 큰 특권이요 사명으로 삼게 됩니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 지금 이순간도 누군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없을 만큼 삶이 평안하시다면 자녀들과 친지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행여나 어려운 인생길을 걷고 계시다면 힘내십시오.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나가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2013년9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흘러 넘치는 은혜 4 : 사랑

지난주에 살펴본 다윗은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죄를 범했습니다. 신하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 신하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이 치명적인 죄를 범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범한 죗값을 톡톡히 치렀습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아들을 낳고 이름을“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면서(샬롬)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름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인 “여디디야”로 바꿔주십니다. 다윗을 위로하시고 새로운 힘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다윗 정도는 아니지만 신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베드로입니다. 반석과 같은 믿음을 갖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라고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합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예고하셨건만 베드로는 그만 두려움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다짐을 저버렸으니 자신과 예수님께 큰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향 갈릴리에 가서 어부의 생활을 다시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가 범한 실수로 인해서 더 이상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일했지만 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처음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와 매우 비슷한 상황입니다(눅 5장). 숯불에 아침식사를 차려주시고, 베드로에게“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연거푸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며칠 전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어놓으신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지 세 번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무조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폐로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한 터라 면목도 없고 자신도 없었을 베드로는 아가페로 대답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사랑한다고 동료간의 사랑(필레오)로 대답합니다. 결국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으로 내려오셔서 아가페가 아닌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거기서 베드로가 무너집니다.:“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의 음성이 베드로의 삶에 깊이 새겨집니다.:“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여디디야라고 불러주셨던 하나님과 베드로를 직접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 물으시고 그에게 주님의 양을 맡기신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합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는 부서진 마음이 용서받고, 회복되었을 때 임합니다. 그 일을 우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 오셔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말끔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베드로에게 양을 치는 사명을 주셨듯이 용서와 회복 후에는 주님의 일을 맡겨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행하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할렐루야!-河-

복을 빌라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 우리 교회 표어가
“축복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축복받는 것을 꽤 좋아합니다.
한국인의 기복적인 성향까지 합쳐서
축복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씁니다.

한 해만이라도
축복받기를 구하기 보다
이미 받은 복이 많으니
그 복을 나누고, 입술로 이웃을 축복하기 원해서 교회 표어를
축복하는 교회라고 했었습니다.

기억하시지요?
– 예바레하 야웨! God Bless You!

2.
내일 새벽기도회에서 읽을 본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9)
Do not repay evil for evil or reviling for reviling, but on the contrary, bless, for to this you were called, that you may obtain a blessing. (1Pe 3:9 ESV)

9절에서는 형제들을 향해서
동정하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기를 부탁했고
9절에서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이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복을 빌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을 빌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음을,
우리가 복을 빌 때 그 복이 다시 우리들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복의 순환도 깨우쳐 줍니다.

3.
세상을 살다 보면
어려운 경우가 꽤 많습니다.
억울해서 화가 나고,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마음이 힘들고
심한 경우 비난과 험담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도
“복을 빌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현실 속에서는
상황이 복잡하게 펼쳐집니다.

상대방 앞에서 복을 빌면
빈정대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고
우리의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 않아서 봉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들 때는 상대방을 위해서
복을 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각각의 상황에 맞춰
지혜롭게 적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 앞에서 상대방을 위해서 복을 빌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아름답고 귀한 사역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형제들,
이웃들과 동료들을 위해서도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동료들, 이웃과 마주치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입술로 축복해 줍시다.:

예 바레하 야웨, God bless you!

저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샬롬!

하나님 아버지,
생각해 보면 받은 복이 참 많습니다.
이웃을 축복하고
받은 복을 나누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9.19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