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함으로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수요예배에서는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세가지 덕목으로 설명했습니다.:
헌신, 믿음(신뢰), 순결.

우리는 말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교회를 사랑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근저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자리잡아야 합니다.

장차 신랑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순결한 신부의 모습으로 설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거룩한 성도, 거룩한 교회를 눈에 그리며
교회를 사랑합니다.

이것은 부부관계에서 가져온
유비(analogy,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빗대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부라면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서로를 향한 확고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순결해야 합니다.

어디 부부관계만 그렇겠습니까?
모든 인간관계는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삶 자체에
헌신, 믿음, 순결함(거룩함)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2.
이 가운데 순결함은
교회는 물론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난 다윗은
하나님께서 정한 영을 창조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
Create in me a clean heart, O God, and renew a right spirit within me. (Psa 51:10 ESV)

시편 24편의 다윗은 순결한 마음을 갖고
주님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공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시 24:3-6)

Who shall ascend the hill of the LORD? And who shall stand in his holy place?
He who has clean hands and a pure heart, who does not lift up his soul to what is false and does not swear deceitfully.  He will receive blessing from the LORD and righteousness from the God of his salvation. Such is the generation of those who seek him, who seek the face of the God of Jacob.  (Psa 24:3-6 ESV)

여러 가지 이론과 사건들이 뒤섞인 혼탁한 세상에 살아가지만
하나님 백성의 본분에 걸맞게
순결함을 잃지 않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 앞에서 순결한 믿음, 순결한 마음을 갖고
밝고 맑게 살아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회개의 자리로 나가게 하옵소서.
정결한 영을 창조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순결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9.12 이-메일 목회서신)

흘러 넘치는 위로 3 : 위로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인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라는 주제로 말씀을 듣는 세 번째인 오늘은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위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 가운데‘위로의 하나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아니 타락한 세상에 사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나함”입니다. 나함이라는 히브리어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려고 마음을 고쳐먹는 것, 어떤 사람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지만 결국 관계를 회복한다는 의미가 두루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모두 공감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 놓으십니다. 자신의 백성을 끔찍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들에게 위로로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다짐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넘어지고 죄를 짓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죄를 내려놓으면 붉은 죄가 흰 눈처럼 깨끗하게 사해집니다.

죄의 용서를 받으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고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죄로 인해서 막혀 있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 불의한 모습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죄를 없애시고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지나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덮어주시고 막혔던 담을 헐어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커다란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고, 신하마저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십니다. 다윗이 범한 죄값을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다윗은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죄의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다윗과 밧세바사이에 또 다른 아기를 주셨는데 그가 바로 다윗에 이어서 왕이 된 솔로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을 “여디디야”라고 부릅니다. 여디디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죄를 짓고, 죄의 값을 치루면서 매우 힘들어했을 다윗에게 임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다윗은 여디디야를 안고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 실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가 범하는 죄보다 훨씬 크고 깊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했을 때 우리의 삶이 회복되고 그 은혜가 흘러넘칩니다. 할렐루야. -河

이야기가 있는 인생

하나님은 이야기를 좋아하신다(God loves stories)”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어떤 사건의 줄거리를 단순하게 전달하는 식이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 속에 의미를 담아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속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을 들여다봅니다.때때로 성경 속의 인물이 되어서 함께 고뇌하고, 함께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도 합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이야기들이 하나님 말씀에 포함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두 번씩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부전자전이라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같은 잘못을 범합니다. 야곱은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서 어머니와 짜고 아버지 이삭을 속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잘난척하는 동생 요셉을 시기한 나머지 외국 상인들에게 팔아 버립니다. 때때로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경의 이야기들은 솔직합니다.

성경 속의 이야기들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홀로 저 멀리 하늘에 계시지 않고, 세상 안으로 들어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다툼은 물론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못된 인간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성경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연애편지라고 부릅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하고 고화질 텔레비전이 발명되었어도 어렸을 때 어머님이나 주일학교 선생님들께서 들려주신 성경 이야기들의 흥미진진함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어른이 되어서 어릴 적 들었던 성경 이야기들을 읽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있습니다. 다윗이 물 맷돌 다섯 개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친 이야기는 지금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들릴라의 유혹에 머리카락이 잘린 삼손이 힘없이 블레셋에 끌려가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슬퍼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릴 적부터 성경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야기들로 성경을 가득 채워놓으셨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도 이야기가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들려주시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 우리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이야기, 세상에 내놓기 어려운 실패담(失敗談), 때로는 결말을 보지 못한 미완성의 이야기들도 괜찮습니다. 물론 자랑스럽고 감사한 이야기들은 쉽게 풀어낼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보기 좋게 꾸밀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들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속에 담아 놓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직한 이야기를 즐겨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과 매사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걷는 인생길 속에는 간증과 고백, 주옥 같은 신앙 이야기들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 인생의 배경음악처럼 은은하게 삶 속에 울려 퍼집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더불어 써 나가는 우리들의 인생 이야기는 솔직하지만 깊은 맛을 내게 마련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인생길은 쉽게 잊혀지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지나치는 인연과 하찮은 만남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면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하루 하루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야기로 엮어내면 됩니다. 그때 작은 일도 큰일로 변하고 우리네 하찮은 인생도 하나님 앞에서 보배롭고 귀한 인생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가 이야기들로 가득 찬 인생길이 되길 원합니다. 그 속에서 인생의 깊이와 신앙의 귀함을 깨닫기 원합니다. (2013 9 12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흘러 넘치는 은혜 2 : 공급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가르쳐주는 표현이 여럿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드릴 때 하나님께서 이삭대신에 양을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는 것을 확인하시고 서둘러 중단시키신 후에 이삭대신 양을 제물로 바치게 하십니다. 거기서 여호와 이레가 나왔습니다. 여호와 이레를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앞서 가셔서 필요한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이레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 땅으로 향할 때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광야는 물과 먹을거리가 없는 곳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위를 쳐서 물이 나게 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서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무한정 먹을거리를 내려주신 것은 아닙니다. 일을 하지 않는 안식일을 제외한 6일 동안 매일같이 하루 분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하루분만 주신 것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일 년치씩 내려주셨다면,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교만해졌을 것입니다. 또한 만나를 하루 분만 주신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자신들을 먹이신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만나를 내려주실 지 의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이틀 분 만나를 거뒀다가 썩어서 버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매일같이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가뭄이 찾아오자 하나님 말씀대로 그릿 시냇가로 피했던 엘리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17:4).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로 갔을 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동원하셔서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엘리야 선지자는 먹을거리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 사는 어떤 과부가 엘리야에게 가뭄이 끝날 때까지 먹을 것을 공급해 줄 것이랍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사르밧에 갔을 때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 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먹으면 끝입니다. 그 정도로 긴급한 상황에 처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는 음식을 만들어서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가뭄이 그칠 때까지 주님께서 먹을거리를 공급해주실 것이랍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합니다. 그때부터 가뭄이 그칠 때까지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먹을거리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믿음대로 행하였을 때 살 길을 열어주십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앞길을 예비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흘러넘치는 은혜입니다. -河-

믿음으로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수요예배와
오늘 새벽예배에서는 연거푸
“믿음”에 대한 말씀은 나눴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5:4)

For everyone who has been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An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our faith.  (1Jo 5:4 ESV)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him, for whoever would draw near to God must believe that he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seek him. (Heb 11:6 ESV)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각 인물들과 그들의 업적을 소개할 때마다
“믿음으로(by faith)”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 특별합니다.

믿음의 열전이 펼쳐지는

히브리서 11장을 쭉- 읽다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서
세상을 이기는(극복하는/뛰어넘는) 승리가 곧
우리의 믿음이라는 말씀도 실제적으로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여기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하나님 현존(現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절대로 헛되지 않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the righteous shall live by his faith)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진리요 힘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하루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주님의 백성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5:4)

For everyone who has been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An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our faith.  (1Jo 5:4 ESV)

하나님 아버지,
우리 참빛 교회 성도님들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믿음을 갖고
세상을 능히 뛰어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9.5 이-메일 목회서신)

흘러 넘치는 은혜 1 : 회복

요한일서 4장 8절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명쾌하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헤세드’를 사용해서 표현합니다. 구약성경 호세아에서 자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무조건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세드로 표현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 ‘아가페’를 갖고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합니다. 아가페는 세상에 속한 사랑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유산을 팔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재산을 팔아서 무슨 일을 할 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아들을 존중하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흥청망청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써버립니다. 결국 농장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면서 연명합니다. 그러던 중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생각난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후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저 멀리 아들의 모습이 보이자 뛰어나가서 아들을 맞이합니다. 아들은 자신을 종으로 받아주길 바라면서 아버지 앞에서 잘못을 뉘우칩니다. 그렇지만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는 종이 아니라 아들로 지위를 회복시켜주고 그를 위해서 잔치까지 베풀어줍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아들을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주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만 기다릴 뿐입니다. 재산을 모두 없애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주고 옛날 그대로 아들로 대우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헤세드’이고 신약에서 말하는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은혜로 임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값을 치루는 것은 거래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에는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아무한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거나,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에게 선물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무엇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선물, 하나님의 은혜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오른손이 마른 병을 갖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회복된 사건이 나옵니다. 오른 손이 말랐으니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몸에 장애가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몸의 일부가 말라 들어간 것 자체가 절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이 사람의 손을 고쳐주십니다. 손이 마른 사람에게 회복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연약함 속에 임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흘러넘치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한량없는 사랑, 충만한 은혜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몇 주간 흘러넘치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 은혜가 흘러넘칠 때 우리 자신은 물론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상이 밝아질 것입니다.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은혜를 누리는 참빛 교회 식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河-

영혼의 닻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는 마틴루터 킹 목사님이
“I have a dream”이라는 명연설을 하였던
50주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그러진 세상을 마음에 품고 아파하며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소망을 가졌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외침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뤄졌습니다.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뒤숭숭합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문들은
마틴루터 킹 목사님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꾸 나와야 함을 실감합니다.

2.
어디 세상만 뒤숭숭할까요?
우리들 마음도
하루에 몇 번씩 잔물결로 출렁이고
때로는 커다란 폭풍우를 만납니다.

말 그대로
우리의 인생길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오늘 새벽에 읽은
히브리서 6장19절에
“영혼의 닻(the anchor of the soul)”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닻은 고대이래 배와 관련된 용어입니다.
배가 닻을 내려야 고정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처 없이 표류합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무거운 돌을 바다에 던져서 배를 고정시키기도 했답니다.
이처럼 닻(anchor)은 안정감(stability)을 뜻합니다.

3.
히브리서 말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소망”이 영혼의 닻이라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약속가운데 임하는 소망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리스도께 고정되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그 안에서 안식하며
날마다 새로운 항해를 준비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보내신 곳에서)
믿음의 닻을 견고히 내리고
빛과 소금으로 살기 원합니다.

뒤숭숭한 세상,
염려와 불안이 쉼 없이 밀려오는 인생길
믿음 가운데 영혼의 닻을 든든히 내리고
요동치 않는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줍니다. (히 6:19, 새번역)
We have this as a sure and steadfast anchor of the soul, a hope that enters into the inner place behind the curtain, (Heb 6:19 ESV)

믿음을 통해서 갖게 된 소망을
영혼의 닻으로 삼고
하나님께로 담대히 나가는 하루가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혼의 닻을 주님께 내리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8.29 이-메일 목회서신)

찬양의 은혜 6

찬양에 대한 연속 설교를 오늘로 마무리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커다란 축복이라는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되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경배와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도 기도와 찬송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한껏 누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찬양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계속될 신앙의 훈련입니다.“할렐루야(주님을 찬양하라)”라는 히브리어가 하나님을 믿는 모든 백성들 의 공용어가 된 것과 같습니다.

찬양에 대한 말씀을 전하면서, 성경에 있는 찬양의 인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면서 구원을 체험한 모세의 찬양,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품게 된 마리아의 순종의 찬양, 빌립보 감옥에서 손을 잡고 기도하며 찬송했던 바울과 실라,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면서 춤추며 찬양했던 다윗까지 성경의 주요 인물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힘을 다해서 찬양해야 하고, 목소리를 높여서 찬양해야 하고, 순종과 겸손으로 찬양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찬양은 감사와 기쁨의 표현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길 바랐듯이, 찬양도 습관이 되길 원합니다. 감사한 일이 있을 때 찬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때 찬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삶이 추락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날아오를 힘을 얻어야 합니다.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밀려올 때도 찬양을 통해서 기쁜 마음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마음속에 또는 삶 속에 밀려오는 두려움을 내쫓는데 찬양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일하면서 찬양하고, 설거지하고 운전하면서 찬양하고, 누워서 찬양하고 일어서서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찬양의 삶을 살 때 우리 안에 임한 은혜가 배가되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실 것입니다.

찬양에 대한 마지막 시간인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 첫 번째 장에 나오는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을 살펴봅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낼 편지를 쓰면서 “찬송하리로다”로 시작되는 말씀으로 성삼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으니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겨 줍니다. 하늘에 속한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귀한 뜻을 알게 하십니다. 장차 하늘과 땅을 하나로 세우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사실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보증인이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라고 인을 치면서 확증해 주십니다. 우리들 안에서 구원을 이뤄 가십니다.

우리들은 자칫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에만 감사하고, 그것만 갖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생길 때만 찬양하고 상황이 힘들어지면 찬양이 그칠 수 있습니다. 찬양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찬양 가운데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백성으로 사시길 바랍니다.-河-

한 걸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가족들과
동네 학교 운동장의 육상 트랙을 걷다가
갑자기 학창시절 100m 달리기 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생각난 김에
셀폰에 스톱워치를 누르고
100미터를 열심히 달려보았습니다.

18초 정도를 예상했지만
실제 기록은 아깝게도 20초였습니다.

“아직 살아있다”라는 각오로
한번 더 도전했더니
예상대로 18초 조금 못되게 100미터를 뛰었습니다.
50대에 그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포츠에서는 기록이 중요합니다.
올해 메이저 리그에 입단한
류현진이라는 한국 선수가 예상과 달리
선전을 하면서 12승을 거두고 있습니다.
입단 첫해에 10승 이상을 거둔 것은 대단한 기록입니다.

하지만
137년이나 된 미국 메이저 리그 역사에서 12승은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합니다.

메이저 리그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이영 상의 주인공 사이 영은 통산 511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사이 영의 대기록도
첫 시즌에서 9승을 거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로또가 터지듯이 단숨에 511승을 거둔 것이 아니라
22년 동안 차곡차곡 매 경기에 나가서
1승씩 승수를 쌓은 결과 511이라는 불명의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이왕이면 류현진 선수도
사이 영상에 도전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어디 스포츠만 그렇겠습니까?
모든 일에는 시작점이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걷다 보면 목적한 바를 이루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여서
한 술에 배부를 욕심을 부리기 보다
성실하게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세기의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서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동행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 (Enoch walked with God)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일러줍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By faith Enoch was taken up so that he should not see death, and he was not found, because God had taken him. Now before he was taken he was commended as having pleased God. (Heb 11:5 ESV)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서 창세기를 풀어보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에녹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과 매사에 함께 했습니다.
삶의 걸음 걸음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도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걸음씩 한 걸음씩
하나님과 함께 걸어갔을 때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았고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하나님께 가는 축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3.
한 걸음이 중요합니다.
한 걸음에 100미터를 달릴 수 없고
한 번의 승리로 사이 영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한걸음!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삶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동행!

오늘도 주님과 함께 걸으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녹처럼 주님과 함께 걷는 인생길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참빛 교회 식구들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곁에서 동행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8.22 이-메일 목회서신)

찬양의 은혜 5

구약성경 창세기에 의하면 가인의 후손 가운데 유발이라는 사람이 수금과 퉁소를 발명했습니다(창4:21). 유발은 성경에서 말하는 첫 번째 음악가인 셈입니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악기들은 놀이나 가무에서 흥을 돋우는 역할은 물론 신전의 제사와 공동예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때 목소리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악기를 사용하기를 장려합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하프와 같은 현악기, 나팔과 같은 관악기, 소고와 같은 타악기를 모두 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특히 다윗은 말 그대로 찬양의 사람이었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은 하프를 타면서 양들을 관리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의 수금타는 솜씨는 세상에 널리 알려질 정도로 특출했습니다. 사울왕이 악령에 들어서 번뇌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다윗이 왕궁에 들어와서 수금을 타면 사울왕의 정신이 온전해 지곤 했습니다(삼상 16장).

골리앗을 물리치면서 다윗의 인기가 사울보다 훨씬 높아졌습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다윗을 몹시 시기했습니다. 시기와 질투하는 사울왕에게 악령까지 들어가면 다윗을 죽이려는 충동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왕궁에서 생활하던 다윗은 언제나 수금을 타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졌지만 다윗이 두 번 모두 피합니다.“다윗이 평일과 같이 수금”(삼상 18:10)을 타고 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다윗은 목숨이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도 수금을 타면서 하나님을 찬양했고 평정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평일에도 늘 찬양했습니다.

찬양의 사람 다윗의 진면목은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가장 잘 드러납니다. 다윗은 사울에 이어서 왕이 된 후에 다윗성이라고 불리는 예루살렘을 건축하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왕위가 견고해 질 무렵, 블레셋에 빼앗겼던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첫 번째 계획은 법궤를 손으로 만졌던 웃사라는 사람이 죽는 사고를 겪으면서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 후에 다윗은 요즘 식으로 찬양대를 앞세우고, 제사를 드리면서 조심조심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옵니다. 당시에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상징이었습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자 다윗은 감사와 기쁨으로 춤을 춥니다. 옷이 다 흘러내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것이 한없이 기뻤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옷이 벗겨지면서 춤을 추는 것을 본 그의 부인 미갈이 다윗에게 핀잔을 줍니다. 그때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삼하6:21).

온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다윗의 마음이 구약의 시편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32편은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불렀던 다윗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었다는 다윗의 고백,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그와 후손들이 예배할 것을 결단하는 모습,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축복을 소망하는 다윗의 마음이 잘 드러난 찬양시입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우리들도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도 뿐만 아니라 찬양이 습관이 될 때 험한 세상 속에서도 평안과 힘을 누릴 수 있습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