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는 광복절이었습니다.
6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해방의 날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400년을 종살이했다지만
36년도 짧은 기간은 아닙니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나간 셈이니까요.

태평양 건너에 살고 있지만
광복절을 맞아서
조국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잊지 맙시다.

2.
새벽에 읽은 디모데후서 4장은
사도바울이
자신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주는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탁은
한 평생 복음 전도자로 살아온
노병 사도바울의 애끓는 당부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
For I am already being poured out as a drink offering, and the time of my departure has come. (2Ti 4:6 ESV)

이제 노병이 된 사도 바울 곁에는
‘누가’만 남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세상으로,
어떤 사람들은 바울에게 피해를 주고 떠났습니다.

바울은 아들 같은 디모데를 무척 보고 싶어 합니다.
오는 길에 드로아에 가서 겉옷을 가져오라는 부탁에
바울의 검소함을,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는 부탁에
바울의 학구열을 엿볼 수 있습니다.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바울은
의미심장한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딤후 4:17)
But the Lord stood by me and strengthened me, so that through me the message might be fully proclaimed and all the Gentiles might hear it. So I was rescued from the lion’s mouth. (2Ti 4:17 ESV)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 헬라어 본문 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내게 힘을 주셨습니다.
The Lord stood by me and strengthened me.

세상에서 잘나가던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하면서
온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눈으로 보기도 했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말 그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도자로 산 것입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자신 곁에 서 계심을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힘을 주심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사는 방식이었습니다.

3.
우리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루에도 갖가지 일들이 예측불허로 일어납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것이 감사한 우리네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우리들도 바울처럼 고백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내게 힘을 주셨습니다.

The Lord stood by me and strengthened me.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참빛 교회 식구들 곁에 서계시고
저희들에게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8.15 이-메일 목회서신)

찬양의 은혜 4

성경에는 찬양에 대한 표현이 여럿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중요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 가운데 찬양에 대한 히브리어 네 가지가 눈에 띱니다. 첫째는“테힐라”라는 명사입니다. 하나님을 아주 큰 소리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보통 찬양집회라고 할 때 테힐라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테힐라>했습니다. 둘째는 “할랄”이라는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고 눈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할렐루야”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셋째는“야다”라는 동사입니다. 야다는 찬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드리는 찬양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토다”라는 명사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찬양입니다.

찬양에 대한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면서 참빛 교회 성도님들은 물론 교회 전체에 찬양이 넘치길 간절히 바랍니다. 찬양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넘칩니다. 찬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늘의 평안이 임합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두 번째 전도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원래는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에서만 복음을 전할 계획이었는데 성령의 지시로 마케도니아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첫 번째로 방문한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빌립보에 왔지만 복음의 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기도처가 있는 강가에 가서 옷감장사였던 루디아를 만나면서 빌립보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신나게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실라는 귀신들려서 점을 치던 한 소녀를 만납니다. 이 소녀는 점을 쳐서 번 돈을 주인에게 모두 바쳤습니다. 귀신은 물론 주인에게까지 이용당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냅니다. 수입원이 없어지자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모함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옷이 벗겨지고 채찍에 맞았습니다. 발에는 쇠사슬이 채였습니다. 도망 나올 수 없는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게다가 간수까지 붙여서 그들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한 밤중이 되었을 때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를 했을 겁니다. 자신들이 전도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그 속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와 기쁨의 찬송을 불렀을 것입니다. 이들의 기도와 찬송 소리가 적막한 감옥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이 흔들리고 문이 열립니다. 놀라운 일이 생긴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지키고 있던 간수가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간수를 안심시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간수와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던 절망적인 순간에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생겼습니다. 찬송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선포입니다. 찬송은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기도와 마찬가지로 찬송도 하늘보좌를 움직입니다. 다음 한 주간 삶 속에서 찬양의 능력과 은혜를 마음껏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河-

은혜의 단비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직 비가 올 때가 아닌데
요즘 새벽에는
보슬비가 촉촉히 내려앉습니다.

오늘은 제법 많이 내렸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교회에 들어가는 짧은 시간에
머리가 젖을 정도였습니다.

올 여름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나와서 교회 앞
길가의 정원을 돌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주전자를 이용해서
꽃이며 나무들에게 물을 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꽃들이 금방 시들시들해 집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새벽에 비가 촉촉히 내리니
물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물을 주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나무는 밑동에만,
꽃들도 주변에만 물을 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시니
정원 전체가 촉촉하게 젖습니다.
그것도 아주 골고루 말입니다.

제가 부지런히 물을 준다고 얘기하지만
하나님은 단번에 온 세상에 물을 주시는 겁니다.

2.
우리들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매일같이 물을 줘봐야
하나님께서 새벽에 내려주시는 보슬비를 당할 수 없듯이
우리들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익히 간파한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를 다음과 같이 간증합니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땅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 65:8-10)

You make the going out of the morning and the evening to shout for joy.
You visit the earth and water it; you greatly enrich it; the river of God is full of water;

you provide their grain, for so you have prepared it.
You water its furrows abundantly, settling its ridges, softening it with showers,

and blessing its growth.  (Psa 65:8-10 ESV)

다시 한번 시편기자의 고백을
꼼꼼히 읽어보십시오.

시편기자의 고백이 매우 구체적이지요?
그만큼 세세하게 주님의 손길을 체험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쉽지 않지만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과 은혜로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것이 즐겁게 하시고
삶의 터전 곳곳에 넉넉한 은혜가 임하길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온 세상을 적시는 단비처럼
주님의 은혜가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임하게 하시고
풍성하고 넉넉한 주님의 손길을 때마다 체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8.8 이-메일 목회서신)

한 눈 팔지 않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달 24일 스페인에서는
80명의 사상자를 낸 고속열차의 탈선 사고가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올려진 동영상을 보면
열차가 커브길을 질주해서 들어오다가
순식간에 탈선하고 맙니다.

엊그제 신문에 보니
열차를 운전했던 기관사가
본사와 통화를 하면서 한 눈을 판 것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통화를 하면서 지도나
앞에 있는 서류를 보았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어떤 신문에서는 기관사가 텍스트를 하고 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기관사의
순간적인 부주의가 귀한 생명을 앗아가는 큰 사고로 이어진 것입니다.

2.
오늘 새벽에도 교회에 가는데
갑자기 트럭이 제게 달려들었습니다.

한적한 새벽 길이어서 옆으로 피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으면 사고가 날 뻔 했습니다.
보나마나 졸거나 한눈을 팔다가
차선을 혼동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운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종종 인생길을 가면서
한 눈을 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려와 근심,
갖가지 닥쳐오는 문제들과
자신 속에서 생기는 욕심과 교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아닌 것에 한눈을 팔다가 시험에 들곤 합니다.

똑바로 앞을 보고 가야 하는데
여기저기 기웃거리거나
딴 짓을 하다가
그만 궤도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3.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 13-14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

Brothers, I do not consider that I have made it my own.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lies behind and straining forward to what lies ahead,  I press on toward the goal for the prize of the upward call of God in Christ Jesus.  (Phi 3:13-14 ESV)

오늘은 8월의 첫 번째 날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요!
하지만 아직도 네 달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한눈 팔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푯대를 향해서, 부르심의 상을 향해서 달려가는
8월 한 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푯대 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어진 인생길을
한눈 팔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8.1 이-메일 목회서신)

찬양의 은혜 3

우리들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크고 높으신 하나님께서는 다양하게 우리와 연락을 시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도구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 측에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도와 찬양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솔직하게 간구할 수 있습니다. 찬양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양받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을 기다리십니다. 개인의 찬양은 물론 주님의 백성들이 함께 드리는 성도들의 찬양도 주님께 큰 영광이 됩니다. 지난 번 기도에 대한 말씀에 이은 찬양에 대한 연속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 찬양을 통해서 영광 돌리고 무엇보다 찬양하는 습관이 생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의 모세에 이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찬양의 인물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당시에 정혼은 오늘날 약혼관계보다 더 강력해서 이미 결혼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약혼자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세상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았지만 한 가정을 책임질 만 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선남선녀였던 마리아와 요셉은 결혼을 준비하면서 둘 만의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마리아는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말하기를 은혜를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리둥절했던 마리아는 어찌된 일인지 속으로만 생각할 뿐 두려움 가운데 멈춰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엄청난 예언을 합니다.:”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남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사내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천사가 말을 하니 큰 일 났습니다. 천사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합니다.:“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마리아는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했습니다. 그 일이 자신에게 임했다는 사실은 두려운 것입니다. 하늘의 계시를 받고 특별한 일에 쓰임받기 보다 요셉과 결혼해서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천사의 말에 다음과 같이 순종합니다:“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마리아의 고백이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찬양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자신에게 닥쳤지만 마음과 영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힘이 없고 비천한 자신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을 보면서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야는 기존의 질서를 폐하고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품은 마리아의 찬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일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답게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세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河

찬양의 은혜 2

찬양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찬양 속에는 말씀과 기도가 모두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갖고 찬양을 드립니다. 찬양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무엇보다 찬양은 감사와 기쁨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면 저절로 찬양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해도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대표적인 모세의 찬양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세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지만 어머니의 지혜로 목숨을 부지합니다. 강물에 떠내려가다가 바로의 공주에게 구출된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청년시절을 보냅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혈기왕성한 성품을 관리하지 못해서 결국 살인죄를 범하고 나이 40에 광야로 도주합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광야 40년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훈련 기간이었습니다. 모세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낮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서 부르셨을 때 모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항복선언을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킵니다. 바로왕 앞에서 행한 열 가지 기적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심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장자들이 모두 죽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끝으로 바로왕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그때 모세의 나이 80세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서 출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서 얼마 가지 않았을 때 홍해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모세를 떠나보낸 바로왕은 분에 차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했습니다.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서 원망을 퍼붓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홍해를 향해서 손을 앞으로 쭉 뻗습니다. 그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이 양 옆으로 벽을 이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을 건너는 것처럼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건넜을 때 이집트 군사들이 홍해에 들어왔지만 물이 다시 합쳐지면서 이집트 군사들은 전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과 이집트 군사들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후 모세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오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출15:2).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의 목전에서 이집트 군사들이 물에 빠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자신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때 모세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찬양은 내가 또는 공동체가 경험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크고 작은 도움을 받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향해서 모세처럼 찬양하는 일임을 꼭 기억합시다.-河-

사과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교회 앞 정원에 익어가는 사과가
우리 교인들의 인기를 독차지 합니다.

주일날 일찍 오신 권사님들이
한 주간 동안 자란 사과를 보시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십니다.

올 해 유독
사과가 많이 열렸습니다.
다닥다닥 붙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엊그제 누군가
손이 닿는 높이의 사과를 모두 따갔습니다.
발길이 잦은 길가에 있다지만 조금 심했습니다
얼마나 허전하고 마음이 아프던지요!

2.
정원 앞 사과가 없어진 것을 보면서
어거스틴이 자신의 청년 시절
친구들과 함께
배 도둑질했던 것을 고백하는 대목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도둑질을 하게 된 것은 배가 고파서도 아니요, 궁핍해서도 아니요,
다만 착한 일을 무시하고 싶고 또한 죄를 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 어찌 할 수 없어 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아름씩 배를 가지고 와서는 그것을 먹지도 않고
몇 개를 겨우 맛만 본 다음 돼지 떼에게 던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즐거웠으니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재미였습니다. (고백록, 2권 4장)

아담 이후 죄의 속성을 가진 모든 인간들에게는
죄를 즐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착한 일을 무시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재미를 느끼려는 충동입니다.

아마 교회 앞 사과를 따간 분도
비슷한 충동에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3.
지난 며칠 사과나무를 볼 때 마다
마음이 언짢고 누가 사과를 따갔을까를 생각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제 안에도 비슷한 속성이 들어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죄짓는 것을 즐기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을까요!

4.
오늘 저녁 청년들과 함께 읽은 유진 피터슨의 책 주제도
다윗의 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죄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희망적으로 마무리합니다.

죄인의 자리는 책망과 정죄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 구원을 받는 자리라는 소식 말이다.
복음의 초점은 고발이 아니라 인정(recognition)과 초대다.
인정: 죄를 깨닫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깨달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초대: 예수님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며-하나님이 이렇게 가깝고 좋고 매혹적인 분이라니!- 사랑과 구원을 주시는 그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해주는 분이다.

다른 어떤 것 – 밧세바를 즐기는 쾌락이나 우리아를 부리는 권력 – 보다도 하나님이 더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바로 나다. 내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필요로 하는 하나님을 내게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유진 피터슨: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221)

우리 교회 정원의 사과를 따가신 분에게도
교회 사과를 통해서 아니 우리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복음의 생명수로
예수님의 은혜가 흘러 넘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성을 바로 깨닫게 하시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그 위에 뜨겁게 임하는 주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7.25 이-메일 목회서신)

참호신앙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미군군목 윌리엄 커밍스는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there are no atheists in foxholes)”는 말을 남겼습니다. 머리 위에서 총탄이 오가고 언제 적군이 공격해 올지 모르는 참호 속에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월적인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2001년 9.11테러 직후에 미국인들의 예배참석률이 실제로 5%이상 급상승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전쟁이나 테러 또는 쓰나미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전쟁터 참호 속은 아니라도 질병이나 실패등 개인적으로 극도의 어려움을 경험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월적인 신을 찾습니다.

그런데 위기가운데서만 하나님을 찾는 참호신앙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실제로 9.11 테러 직후에 교회를 찾던 많은 발걸음들이 두 달도 되지 않아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심지어 테러가 일어나기 일년전보다 예배 참석률이 낮아졌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이처럼 참호 신앙은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참호 속에 있을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참호 속에서 목숨을 구해주신다면 있는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겠노라고 서원하면서 기도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밖에 없다고 서슴없이 고백합니다.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커밍스의 말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참호 밖을 나오면 모든 것이 도루묵이 됩니다. 그 이전보다 더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참호신앙 또는 참호기도는 흔하게 발견됩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께 SOS를 칩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서 911을 부르듯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하고, 교회활동에도 앞장서면서 말 그대로 열성분자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이 지나가면 어려움과 더불어 신앙도 쓸려 보내고 소위 건성으로 하나님을 믿곤 합니다. 전형적인 참호 신앙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관계적 언어를 통해서 제한적으로 설명될 뿐입니다. 성부,성자, 성령 하나님의 하나됨은 결국 일체 되신 관계를 통해서 우리 안에 나타납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신 것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안에 거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안에 거하는 것’이 곧 관계입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대표적인 참호신앙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열명의 나병환자가 소리치면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셔서 열명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지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열 명중에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명은 참호신앙이었습니다.

남 얘기가 아니라 우리들 이야기입니다. 우리 안에도 그때뿐인 신앙, 은혜를 망각하는 부끄러운 신앙이 꽤 많이 있습니다. 참호 속에 있을 때만 하나님 안에 있고, 참호 밖을 나오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참호신앙입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나와서 울며불며 기도하지만, 어려움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부끄러운 신앙입니다.

이제는 참호신앙을 지나서 한결 같은 신앙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기분이 좋을 때나 상할 때나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한결같으신 하나님께 상록수와 같은 신앙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질병에서 고침 받고 예수님을 찾아온 그 한 명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도 크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
(2013년 7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안전 불감증

좋은 아침입니다.

1.
겨울에 비해서
여름철에 사고소식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신문을 보니
서울에 내린 집중호우로 배수로 보수작업을 하던 분들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서해안에서 가상 해병대 훈련을 하던 고교생들이
급류에 휩싸여서 다섯 명이 실종되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바닷가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고
인명구조원들도 충분히 배치하지 않았답니다.

조금만 조심하면
목숨을 건지는 것은 물론이고
많은 사고를 줄일 수 있는데
그만 방심하다가 큰 일을 치르곤 합니다.

안전불감증이 문제입니다.

2.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매사에 깨어있고
하나님께 늘 접속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기도인 것을
지난 한달 동안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처럼
홀로 기도의 자리로 나가고 계시는지요?
무릎을 꿇고
힘쓰고 애쓰면서 기도하시는지요?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신 예수님께서 슬픔과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꼭 기억하기 원합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눅 22:46)
Get up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세상의 안전 불감증만 문제가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안전 불감증도 문제인 것을
제자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감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많은 일들을 미리 준비하고
매사에 지혜롭게 대응하시는
참빛 교회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안전해 지길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늘 필요합니다.
깨어서 기도함으로 주님과 연결되고
닥치는 모든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7.18 이-메일 목회서신)

찬양의 은혜 1

지난 상반기동안 올해 표어인 예배에 대한 말씀을 시작으로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 사순절 기간에는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임재와 역사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고, 기도에 대한 말씀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들을 연속해서 살펴본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듯이(롬10:17),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가능하면 주일 설교를 녹음으로 반복해서 들으시고, 바쁘신 분들은 침대머리에 주보를 모아놓고“생명샘”에 요약된 말씀을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억력은 오래가지 못해서 반복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신앙이 뒷걸음질 치거나 제자리걸음을 하기 쉽습니다. 신앙은 꽃나무와 같아서 뿌리가 튼튼하게 내리고 줄기가 나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도록 가꿔야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꽃나무처럼 가꿔가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임을 기억합시다.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찬양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찬양 속에는 기도와 말씀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찬양으로 주신 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꼭 필요한 것이 찬양입니다.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시고 우리의 찬양을 기다리십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셔서 춤을 추시듯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찬양하시며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습니다(마26:30). 이처럼 우리는 찬양 가운데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세로목과 가로목이 있듯이 찬양도 하나님께 드리는 수직적 찬양과 성도들 간에 함께 즐거이 부르는 수평적 찬양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구약성경 시편은 기도문임과 동시에 찬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95편이 대표적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즐거이 외치며 노래하길 청원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들을 모두 찬양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한 성경의 인물들은 기쁨과 감사로 그 은혜와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이처럼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감사와 기쁨의 노래입니다.

동시에 찬양은 성도들 간에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나누는 수단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마음을 주께 노래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끼리“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기를 부탁합니다(엡5:19). 초대교회이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했고, 서로를 향해서 찬송으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찬송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의 교회는 찬양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찬양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참빛 교회 식구들의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길 원합니다. 기도와 마찬가지로 찬송도 습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찬송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고 찬송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귀한 시간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할렐루야!-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