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한 교회

강원도 예수원에 계셨던 토레이 신부님께서 아침마다 “주여, 성령 충만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듯이 우리들도 매 순간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단순히 감정의 표출이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기대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느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이 온전히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느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거룩한 성령께서 임재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정한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부끄러운 죄와 교만을 날마다 씻어내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때에 선물로 주시는 성령의 은사도 받게 되고 무엇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멋진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도들 개인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공동체 속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하나님 나라가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상 속에 세워지길 원하십니다. 성령 충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5장 19-20절에는 공동체적으로 임하는 성령 충만을 잘 설명해 줍니다. 교회 안에 임하는 성령 충만의 표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찬송입니다. 19절에는 찬송과 관련된 표현이 여섯 번 등장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시는 구약성경의 시편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서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간증하는 찬양들입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성도들 간에 거룩한 노래, 하늘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서로 찬양으로 화답하는 성령의 교제가 있습니다. 성도들 간에 찬송으로 화답함은 물론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주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하늘나라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교회는 찬양이 넘칩니다.

성령 충만의 표시 두 번째는 감사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가 넘칩니다. 불평을 하거나 원망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비난하거나 트집을 잡는 것도 성령 충만한 성도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면 서로 격려합니다.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모든 것에 감사가 넘칩니다. 이처럼 찬양과 감사는 성령 충만의 대표적인 외적표시입니다. 교회적으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성령 충만하면 찬양이 나옵니다. 불평과 원망이 그치고 범사에 감사가 시작됩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며 기도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감사와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의 세 번째 표시는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이 좋아서 서로에게 잘해주거나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의 말을 듣는 세상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에서 비롯된 복종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서 기꺼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성도들에게 복종할 마음이 생깁니다. 여기서 복종은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께서 성령 충만을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하시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河-

강권하시도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오클라호마를 비롯한
중남부 내륙에 토네이도가 연거푸 몰아 닥쳤습니다.

인디애나에 있을 때 토네이도가 스쳐 지난 곳을 목격했는데
마치 탱크가 밟고 지나간 것처럼
일정하게 길이 나있을 정도였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힘 자랑을 해도
자연을 이길 수 없음을 실감했습니다.

2.
토네이도하면
오즈의 마법사가 생각납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주인공 도로시는
켄사스에 살고 있었는데
토네이도에 휩쓸려 올라가서 오즈에 떨어집니다.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그곳에서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실제로 토네이도는
사람은 물론 자동차까지 끌어올리는 힘이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토네이도 영상을 검색하면
그 위력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30년 가까이
토네이도를 관찰하던 토네이도 추적자(Tornado Chaser) 일행이
지난 2일 토네이도에 휩쓸려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전문가들도 무너뜨리는 대단한 위력입니다.

이번 토네이도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재산을 잃어버린
이재민들이 하루속히 재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오늘 새벽에 고린도후서 5장을 읽으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토네이도처럼 휘몰아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 (고후 5:14)
The love of Christ controls us (2Co 5:14 ESV)

“강권하시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순에코”에는
“통제하다 (to control)”
“강력하게 이끌다(to compel)”
“(군인등을) 흩어지지 않게 꼭 붙잡다(to keep from dispersing)”등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새번역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4.
토네이도는 세상을 망가뜨립니다.
토네이도에 휩쓸리면 목숨을 잃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을 살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휘몰아치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휩쓸려 들어갑니다.

우리를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토네이도처럼 우리를 휘어잡았을 때
우리들의 신앙이 바로 서게 될 것이고
그 어떤 세상의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는
우리들의 삶을 흩으러 지지 않고
밀도 있게 모아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참빛 식구들 신앙과 삶 속에 휘몰아치길 원합니다.

우리를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서
의와 기쁨과 화평의 하나님 나라를 맛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꼭 필요합니다.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게 하옵소서.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6.6 이-메일 목회서신)

성령의 충만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광범위하게 소개됩니다. 창세기 1장속의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했습니다. 사사시대의 유명한 사사였던 삼손은 하나님의 신이 충만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모세에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을 정복했던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신에 감동해서 승리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 속의 성령 하나님은 거대한 창조사역은 물론 하나님께서 부르신 인물들 속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이 비교적 정적인데 비해서 신약성경의 성령은 활동적입니다. 마리아가 성령 충만했을 때 복중의 아기가 뛰어놀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비둘기처럼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교회를 탄생시킬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면 초대교회가 굳게 서지 못했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으로 전파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게“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성령께서 우안에 계시다는 증거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성령의 은사도 성령의 사역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깊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릇에 물을 붓는 것이 연상됩니다. 물을 지속적으로 부으면 그릇에서 넘쳐납니다. 하지만 작은 양의 물을 부으면 그릇 밑바닥에만 깔려 있을 뿐입니다. 때로는 그릇이 깨져서 물이 밖으로 새나갈 수도 있습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소멸을 조심하라는 말씀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활동이 아주 미미한 것을 뜻합니다. 성령의 불이 꺼져가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지만 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성령의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매우 안타까운 신앙입니다.

반면에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은혜가 넘칩니다. 감사가 나옵니다. 기쁨이 샘솟습니다.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믿음에 확신이 있습니다. 조용하게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임합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은 거룩한 영이어서 정결한 신앙과 삶 속에 임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집이 세고 자아가 강하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셋째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하듯이, 성령 충만도 간절히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을 사모합시다. 성령에 취할 만큼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 집중합시다.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기대합시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세상 속에서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빛과 소금으로 예수님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河-

좋으신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고린도후서를 새벽에 읽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와 후서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개척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항구도시였기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우상숭배는 물론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했던 도시였습니다.
오죽하면 방탕한 삶을 사는 것을 두고
“고린도사람스럽다(live like Corinthians)”라고 했을까요!

그러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고린도 교회도 꽤 많은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뭐든지 지나치면 안 되는데
성령의 은사를 갖고 서로 경쟁하고
성만찬에 참여하면서도 문제를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당시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는 것 조차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한 마음으로 서로 격려하면서 신앙을 지켜야 했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도
차별과 시기, 다툼, 파벌과 분쟁을 일삼고 있으니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고린도전/후서를 읽다 보면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간곡하게 부탁하고
때로는 아주 호되게 야단을 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바르고 참된 그리스도인들로 자라가길
진심으로 원했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신앙은 자신의 힘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세워가는 신앙은
언젠가 여지없이 무너지거나
공동체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의 기초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늘 고백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 하나님을 끝까지 의뢰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
요즘 주일예배에서 배우고 있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3.
고린도후서 1장에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소개하는 네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 (3)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9)

이 아침에
네 가지 하나님의 속성을 꼭 붙들고 기도합시다.
천천히 읽고 마음 깊이 묵상하면서
참 좋으신 하나님을 느낍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날마다 깊고 넓어지기 원합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고
실제로 삶 속에서 체험하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5.30 이-메일 목회서신)

성령의 바람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계절에 맞지 않게
꽤 쌀쌀합니다.
새벽에 교회를 가려고 나서면
다시 내복을 꺼내 입어야 할 것 같은 추위(?)가 몸에 스밉니다.
(샌프란에 와서 몇 십 년 만에 겨울철 새벽기도회에 갈 때 내복을 입기 시작했음 ㅠㅠ)

날씨만 쌀쌀한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세차게 붑니다.

엊그제는 나뭇잎이 길가에 다 떨어지고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종종 가는 산책로에는
큰 나무가 뿌리 채 뽑혀서 길을 막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바람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2,
지난 주부터 주일예배에서
성령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성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하흐”와 헬라어 “퓨뉴마”는
모두 바람(wind)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숨결” 또는 “영”이라는 뜻도 갖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바람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8)
The wind blows where it wishes, and you hear its sound, but you do not know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goes. So it is with everyone who is born of the Spirit.”  (Joh 3:8 ESV)

바람이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지만
그 위력으로 바람의 존재를 감지합니다.

성령으로 났다는 확증이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위력이 마치 바람과 같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3.
성령의 바람이
우리 성도님들과 교회 안에
세차게 불어치길 원합니다.

위로의 바람,
평강의 바람,
기쁨의 바람,
소망의 바람
새로운 생명의 바람이

우리들 마음과 삶 그리고 신앙에 휘몰아치길 간절히 원합니다.

어디 우리들 마음과 교회뿐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생명을 주는 성령의 바람이 휘몰아치길 기도합니다.

성령의 바람으로
주님의 영광 가득한 세상 되길 기도하면서
오늘 하루,
각자의 터전에서 부흥을 노래합시다.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이제 불어와
–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
–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바람이
우리들 마음과 삶에
참빛 교회와 온 세상에 불어 닥치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 가득한 세상을 꿈꾸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5.23 이-메일 목회서신)

품격 (品格)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송되는 코미디 프로그램 한 꼭지의 주제가 “거지의 품격”입니다.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를 패러디한 코미디라고 들었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거지와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실랑이를 벌입니다. 넉살 좋은 거지는 순진한 아가씨의 질문을 빌미로 500원 이상을 꼬박꼬박 챙깁니다. 아가씨는 “뭐 이런 거지가 다 있어”라며 거지를 향해서 소위 돌직구를 날리지만 시간이 갈수록 거지에게 마음이 끌리는 듯 합니다. 품격 있는 거지와 도도한 아가씨 사이의 은근한 로맨스도 볼거리입니다. 코미디 속의 거지는 자신을 꽃 거지라고 밝히면서 꽃으로 장식된 겉옷을 입고 춤을 춥니다. 보통 거지와 다른 품격이 있는 거지임을 밝히는 동작입니다.

연암 박지원이 쓴 풍자소설가운데 <허생전>이 있습니다. 허생이라는 남산골 선비는 10년을 작정하고 학문을 시작했습니다. 7년쯤 지났을 때 집안일을 책임지던 아내가 푸념을 하기 시작합니다. 집은 다 무너져 내리고, 쌀독에 쌀은 떨어지고, 옷이 헤어지는데도 글만 읽고 있으니 아내가 부화를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길로 허생이 집을 나서서 장안의 부자인 변씨에게 일만 냥을 빌려서 장사를 시작합니다. 손을 대는 사업마다 성공을 해서 상당한 돈을 법니다. 그렇지만 허생은 번 돈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변씨에게 빌린 만 냥을 갚은 후에 남산골 오두막집으로 돌아갑니다. 허생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본 변씨가 허생에게 먹거리를 대주면서 친구처럼 지내게 됩니다. 남산골 선비 허생은 부자 친구 변씨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물건을 대주면 정중히 사양합니다.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싶으면 곧장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어째서 내게 재앙을 물려주려 한단 말인가?”

남산골 선비까지는 아니더라도 품격을 지키며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품격(品格)을 사전에서는 “사람의 품성과 인격” 또는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가치나 위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품격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풍겨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갖고 있고, 높은 위치에 올라갔어도 저절로 품격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성품과 인격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가치와 위엄이 있어야 품격이 살아납니다. 또한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부자 친구 변씨가 자신에게 과하다 싶을 정도의 호의를 베풀어 줄 때는 “어째서 내게 재앙을 물려주려 한단 말인가?”라고 말한 남산골 선비 허생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 사회가 품격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고위 공직자가 남의 나라에 와서 추태를 벌인 것은 국가의 망신입니다. 어디 그 한 사람뿐일까요? 어쩌면 빙산의 일각처럼 사회 곳곳에서 무례하고 저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남의 말을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품격이 요청됩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위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병을 고쳐주시고, 배불리 먹여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한번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품격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가장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온갖 조롱과 비난의 소리를 들으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하지만 메시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품격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대리인으로 살았습니다. 거기에 성령의 능력까지 더해지니 초대 교회가 부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우리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을 갖춘 그리스도인들인지 돌아볼 시점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품성과 신앙 인격을 갖추고 있는지, 하나님 자녀로서의 가치와 위엄을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식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말보다 삶이 앞서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검증 받아야 합니다. 주변에 있는 이웃들로부터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인답습니다. 당신을 보니 나도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라는 평판을 들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갖춘 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장 16절). (2013년 5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성령의 역사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기에 우리의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자라가도록 도와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 하나님(하나님의 영)은 창조시부터 줄곧 존재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요엘서에서는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하였습니다(요엘 2:29). 에스겔서 37장에서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영이 불어넣어졌을 때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구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셨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면서 성자 하나님의 사역이 강조되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면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모두 한 분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간혹,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어도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성령이 임한 한 두가지 사례를 두고 일반화시킨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두루 살폈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마음속에 주님으로 영접하였을 때 성령이 우리 안에 부어집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라고 하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전 12:3). 따라서 성령세례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됨과 동시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을 것을 명령하시고, 복음이 무엇인지 가르치신 후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들 마음속에 부어집니다. 따라서 그동안 하나님 없이 살았던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따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이미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 신앙생활이 단조롭고 때로는 낙심되고 힘이 없습니다. 마음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껏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육체와 세상을 쫓고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기에 성령 하나님께서 일할 틈이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없고, 사모하는 마음이 적어서 성령의 역사가 무뎌진 것입니다.

성령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방언과 예언등과 같은 성령의 은사들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처럼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정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삶 속에서 자연스레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경에서 약속한 성령의 은사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을 드러내는 체험들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거나 마음으로 느끼는 체험이 없어도 성령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연약하기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존재와 일하심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고 체험하면 신앙생활에 활력이 생깁니다. 성령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동행하심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과 능력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의 증거로 사랑, 희락, 화평, 자비, 양선, 오래참음, 충성, 온유와 절제의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시길 바랍니다.-河-

성령의 임재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합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어떤 도(道)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특별한 노력을 요청하는 것과 달리,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생이 임한다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갖고 구원을 이루시기에 복음(福音,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또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이래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세상 만물 속에도 하나님의 솜씨가 나타납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담과 이브로 인해서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시고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데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하지만 한번 반역한 인간은 하나님께로 쉽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고 선포하셨습니다. 많은 기사와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죄인들을 찾아가셔서 고쳐주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죄를 홀로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과 악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신 구원사역의 완성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지상사역을 모두 마치신 후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성령의 강림입니다. 성령이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기를 부탁하셨고,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기도에 힘쓰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순절 축제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많은 사람들이 성령 강림을 체험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하니 3천명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공동체 위에 임했습니다. 성령 강림에 이은 복음 전파로 교회 공동체가 세워졌고,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과 기도,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몇 가지로 요약해서 알려줍니다. 첫째로 성령은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는 위로자,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의 길을 인도하고 위로해 주십니다. 둘째로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신앙과 삶이 비뚤어지지 않고 진리 가운데서 행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대신에 성령은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변호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능력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을 때 우리 안에 임합니다.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십니다. 우리를 선하고 거룩한 길로 인도하시는 매우 친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임재와 역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펼쳐주시는 새로운 삶을 삽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나는 것도 성령의 은혜입니다.-河-

위로의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이사야서 40장은
영어 번역에서 알 수 있듯이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Comfort, comfort my people)” 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라도 잃고, 집도 잃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그들에게 남겨진 전부였지만
힘겨운 상황 속에서 신앙마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제일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셨고
광야 40년을 먹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선포합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40:26)

Lift up your eyes on high and see: who created these? He who brings out their host by number, calling them all by name, by the greatness of his might, and because he is strong in power not one is missing. (Isa 40:26 ESV)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사는 백성들이기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릴지언정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But now thus says the LORD, he who created you, O Jacob, he who formed you, O Israel: “Fear not, for I have redeemed you; I have called you by name, you are mine. (Isa 43:1 ESV)

2.
어디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만 그렇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에게도
날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우리를 구속(redemption)해 주실 줄 믿습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새 힘도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소속된 주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위로의 하나님께서 참빛 교회 식구들 각자를 어루만져주시고,
치유와 회복의 영을 부어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위로가 필요한 주님의 백성들 위에
위로의 손길을 내려주옵소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5.16 이-메일 목회서신)

나의 어머니 나의 하나님

세상에 가장 강한 것은 어머니의 손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손은 못하는 것이 업을 정도로 만능입니다. 음식을 만드는 것부터 아이를 키우는 것, 밖에서 일을 하실 때도 어머니의 손놀림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빠르고 정확합니다. 어머니의 손은 배가 아픈 것도 낫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에 가장 넓은 것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못된 자식이라도 어머니 마음에 들어가면 착한 자식으로 변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능해도 어머님 품속에서는 가장 유능하고 뛰어난 자식입니다. 자식이 범한 그 어떤 잘못도 어머니 마음은 용광로처럼 녹여 버립니다. 어머니 – 언제 불러도 정겹고 그립고 때로는 말없이 희생하시는 모습에 안쓰러움이 밀려오는 단어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사랑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네 아버지는 말없이 자신의 길을 가시면서 가족을 책임지십니다. 어머니가 속상한 것을 표현하실 때, 아버지는 큰 기침 한번 하시고 밖으로 나가십니다. 거인같이 보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보니 자기보다 작아지셨습니다.:“아버지 키가 이렇게 작았던가? 아버지 팔 다리가 이렇게 얇아 지셨나?” 흰머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정수리까지 훤하게 비어갑니다. 불도저처럼 강한 줄 알았던 아버지께서 언제부터인지 몸져누우시는 횟수가 늘어갑니다. 그래도 건강하신 척, 뭔가 있으신 척 하시는 것이 더 안쓰럽습니다.

부모님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님은 우리들의 뿌리요 근원입니다. 십계명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라”가 하나님에 대한 계명들 다음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내리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님께 잘해드려도 받은 사랑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네 부모님들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해내지만 이미 부모님은 우리 곁을 떠나신 경우도 많습니다. 살아생전에 잘해 드리라는 옛 성현들의 말씀을 빨리 깨닫는 것이 그나마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입니다.

육신의 부모님 말고 우리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면 멀게 느껴집니다. 하나님 다음에“아버지”라는 수식어가 있기에 하나님 앞으로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에 하나님을 “아바(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롬8:15).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음이 자녀된 그리스도인의 한없는 특권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어머니의 마음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가죽옷을 만들어서 입혀주십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십니다. 젖을 먹여서 키웠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라함”에는 긍휼하심외에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우리를 감싸주시는 어머니같은 분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십니다.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죄를 짓고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시는 세심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이 세상에서 부모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큰 사랑을 누리면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어버이날에 낳아주신 부모님께 마음을 전해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기 원합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