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 1 : 구원

복음을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옛날 로마시대에는 지금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가을 새에 대한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비둘기를 비롯한 동물들이 통신수단에 동원되기도 했고, 산 위에서 연기를 지피거나 소리를 내는 것을 통해서 의사소통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정확한 통신수단은 역시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달리기를 잘하는 병사로 하여금 왕에게 승전보를 알립니다. 전쟁에 나갔던 병사가 전해주는 승전보가 바로 기쁜 소식,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에는 새로운 왕이 등극했다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새로운 왕이 세워지면 백성들은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것을 기대합니다. 백성들에게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메시야가 올 것을 예언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메시야가 세상에 왕으로 오신다는 것이 곧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3년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온전케 해주시고, 굶주린 사람들을 오병이어로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말씀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귀한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은 최고의 복된 소식입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으니 그 어떤 승전보에 비할 것이 없는 위대한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도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복음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되고 기쁜 소식 – 복음의 능력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특별히 이번에는 로마서를 비롯한 사도바울이 기록한 바울서신에 나타난 복음의 능력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전할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듯이 복음은 능력입니다.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미스”는 영어의 다이나마이트를 연상시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을 따라 사는 우리들에게 능력이 임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능력을 힘입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복음이 주는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세상이 주는 능력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복음을 따라 살기 원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힘입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쁜 소식을 받고 그 소식을 누리기 원합니다.

복음이 주는 최고의 능력은(은혜는) 구원(salvation)입니다. 죄를 사함 받은 능력,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는 능력이 구원에 깃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지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를 건져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 모두 위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河-

부활절 아침에

사순절을 보내면서 십자가의 길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세 번에 걸쳐서 나눴습니다. 이삭이 장작더미를 등에 지고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올라간 모리아길, 젖먹이 송아지를 둔 암소 두 마리가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올라갔던 벧세메스의 언덕길, 십자가를 지시고 채찍에 맞고 조롱을 받으시면서 올라가신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길, 그리고 우리들이 지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걷고 있는 인생길을 살펴보면서 부활주일을 준비했습니다.

이삭은 죽음의 순간에 살아났습니다. 벧세메스의 암소들은 희생제사로 드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이 지고 가는 십자가의 길도 결국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길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사도바울의 고백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어야 합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인생은 물론 타락한 세상의 삼라만상이 죽음에서 끝을 맺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은 사라집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이 임했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죄의 세력들을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신앙은 우리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능력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제자들은 한정 없이 불안했습니다. 3년 동안 따랐던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들만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이들에게 엄습했습니다. 외로웠고 절망적인 상황에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십니다. 부활은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죽음의 세력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 속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이 주는 놀라운 평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40일을 함께 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예루살렘부터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이름 앞에 어떤 세력도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온 세상으로 전파된 것입니다.

올 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인생길에서 매년 맞는 부활절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해마다 새로워야 합니다. 2013년 부활절 아침에 우리의 삶과 신앙을 돌아봅니다. 십자가위에서 자신을 못 박았는지,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고 있는지, 부활의 주님께서 허락하신 하늘의 평안과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 넘치는지, 우리 교회와 참빛 식구들 한분 한 분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고 있는지 – 부활절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우리들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가 새롭게 임하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He is risen). 할렐루야! -河-

사순절에 3 : 십자가의 길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루살렘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순례길이 있답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라틴어입니다. “비아”는 길이라는 뜻이고, “돌로로사”는 고난이라는 뜻이니 합치면 “고난의 길”이 됩니다.예수님과3년 동안 함께 지냈던 제자 가룟유다가 은 삼십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 넘깁니다. 군병들에게 잡히신 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재판과 십자가형은 하룻밤 사이에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신 곳에서부터 시작된답니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는 죄목으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갈릴리 청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인한 것은 하나뿐인 하나님을 욕되게 한 신성모독죄라는 것입니다. 당시는 로마의 황제가 세상을 통치했습니다.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에 그 어떤 통치자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소위 로마 황제를 대적하는 쿠데타를 꾀했다는 모함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군중들의 소요가 두려워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언도합니다. 비록 자신의 뜻과 다른 판결임을 표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지만 2천년 교회의 역사에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언도한 인물로 낙인 찍혔습니다.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희롱 받으신 장소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일개 군병들 앞에서 조롱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 다음에는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 도시 한 복판을 지나가십니다. 당시에 십자가형은 극악무도한 죄인들에게 언도하는 실형이었기에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도시를 지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이 지치셨습니다. 더 이상 십자가를 지실 수 없었기에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결국 십자가형이 집행됩니다.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마지막 선포는 세상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구원을 펼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외마디 외침이었습니다 (실제로 헬라어 본문은 “테테레스타이“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과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감람산까지 이어진답니다.

고난 주간을 맞으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것도 신앙에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의 성지를 순례하지 않아도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차례로 읽어가면서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을 마음 속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들 마음과 삶 속에 잔잔하게 스며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 우리의 인생길 자체가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인생의 짐, 우리들 각자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중압감에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 곁에서 도와주면 눈물겹도록 고맙지요. 하지만 대부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각자의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주님도 지고 가셨으니 우리도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믿기에 묵묵히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찬송가 가사 그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이미 그 길을 가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을 가진 이웃들이 우리를 보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 주간을 맞아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들 삶에 깊이 임하고 그 어떤 고난도 예수님과 더불어 극복해 나가는 멋진 신앙으로 거듭나길 간절히 원합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13년 3월 22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1.

오늘은 성금요일(Good Friday)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입니다.

“Good”이라는 단어와 관련해서
대체로 세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good의 고어적 의미에 holy가 들어있기에
우리 말 그대로 성금요일로 읽는 시도입니다.

Good이 God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도 있는데
꽤 임의적입니다.

세 번째 견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만 놓고 보면
슬프고 애석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임했기에 “선한(good) 사역”입니다.

저에게는
세 번째 견해가 마음에 깊이 다가옵니다.

2.
올해 성금요일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있는
바울의 고백을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who lives in me. And the life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 2:20 ESV)

한 단어 한 단어를 쉽게 읽고 넘길 수 없습니다.
한 구절인데 자꾸만 걸립니다.
멈춰서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을 믿는다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겁니다.

바울의 고백을 여러 번 읽고
마음에 새기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 깊이 들어가기 원합니다.

우리의 고백이
삶으로 이어지기 원합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힘이 생깁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Good Friday인가 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날,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오르게 하시고
그 은혜에 참여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28 이-메일 목회서신)

너희는 먼저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free way를 운전하다 보면,
운전하면서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면
159불 이상의 벌금이 부과될 것이라는
전자 표시판을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운전하면서 텍스트를 보내는 운전자는
그렇지 않은 운전자에 비해서
교통사고 위험이 23배 높답니다.

손이 느려서 텍스트는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저 역시 운전 중에
이어폰을 끼고 전화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전화를 받는 것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전화를 걸다가
자동차가 휘청거린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통사고는 자신은 물론
상대방에게 인명사고까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
벌금보다도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운전 중 셀폰 사용을 자제해야겠습니다.

2.
현대인들은 무척 바빠서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운전 중에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같은 이유일 수 있습니다.

바쁘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멀티 태스킹을 즐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고
인터넷을 하면서 설거지를 하는 등…

반면에
동시에 할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는 우리들이기에
지금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구분해야 합니다.
지금 가야 할 곳과 나중에 가야 할 곳도 구분해야 합니다.
그때 우선순위(prioritizing)가 중요합니다.

3.
오늘은 날씨가 꿀꿀했지만
요 며칠 아주 맑은 날씨가 계속되더니
교회 앞에 있는 나무들이 새봄을 맞아서 꽃을 피웠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어떤 나무는 잎이 먼저 나오고 나중에 꽃이 핍니다.
어떤 나무는 반대로 꽃이 먼저 핀 다음에
잎이 파랗게 돋아 나옵니다.
각각의 나무마다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물론 우리들 삶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
나중에 해도 되는 일,
만사를 제치고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천천히 해도 되는 일, 등등.

새 봄을 맞아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삶의 우선순위를 정돈해 봅시다.

두 가지 일을 욕심껏 한꺼번에 하다가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이 있다면
얼른 내려놓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주신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하고
귀한 열매를 맺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3-34)
But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added to you. Therefore do not be anxious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be anxious for itself. Sufficient for the day is its own trouble. (Mat 6:34 ESV)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고
범사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4.4 이-메일 목회서신)

십자가의 길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루살렘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순례길이 있답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라틴어입니다. “비아”는 길이라는 뜻이고, “돌로로사”는 고난이라는 뜻이니 합치면 “고난의 길”이 됩니다.예수님과3년 동안 함께 지냈던 제자 가룟유다가 은 삼십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 넘깁니다. 군병들에게 잡히신 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재판과 십자가형은 하룻밤 사이에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신 곳에서부터 시작된답니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는 죄목으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갈릴리 청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인한 것은 하나뿐인 하나님을 욕되게 한 신성모독죄라는 것입니다. 당시는 로마의 황제가 세상을 통치했습니다.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에 그 어떤 통치자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소위 로마 황제를 대적하는 쿠데타를 꾀했다는 모함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군중들의 소요가 두려워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언도합니다. 비록 자신의 뜻과 다른 판결임을 표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지만 2천년 교회의 역사에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언도한 인물로 낙인 찍혔습니다.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희롱 받으신 장소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일개 군병들 앞에서 조롱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 다음에는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 도시 한 복판을 지나가십니다. 당시에 십자가형은 극악무도한 죄인들에게 언도하는 실형이었기에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도시를 지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이 지치셨습니다. 더 이상 십자가를 지실 수 없었기에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결국 십자가형이 집행됩니다.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마지막 선포는 세상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구원을 펼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외마디 외침이었습니다 (실제로 헬라어 본문은 “테테레스타이“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과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감람산까지 이어진답니다.

고난 주간을 맞으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것도 신앙에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의 성지를 순례하지 않아도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차례로 읽어가면서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을 마음 속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들 마음과 삶 속에 잔잔하게 스며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 우리의 인생길 자체가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인생의 짐, 우리들 각자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중압감에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 곁에서 도와주면 눈물겹도록 고맙지요. 하지만 대부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각자의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주님도 지고 가셨으니 우리도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믿기에 묵묵히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찬송가 가사 그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이미 그 길을 가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을 가진 이웃들이 우리를 보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 주간을 맞아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들 삶에 깊이 임하고 그 어떤 고난도 예수님과 더불어 극복해 나가는 멋진 신앙으로 거듭나길 간절히 원합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13년 3월 22일)

주의 평안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에는
김연아 선수가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2년의 공백 후에 출전한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김연아 선수는 멋진 스케이팅으로
우승컵을 품에 안았습니다.

어느덧 예전의 앳된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대학을 졸업한 20대중반의 성숙한
모습으로 링크에 등장했습니다.

김선수는 매우 침착했습니다.
행동이나 표정이 흩으러 지지 않았습니다.
심판들의 편파판정이 있었다는 말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습니다.
거칠 것 없이 스케이트를 지쳤고
아주 높게 점프를 하면서 날아올랐습니다.
어디서 저런 침착함과 자신감이 나올까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김연아 선수의 스케이팅을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그의 표정과 손끝에 이르는 동작까지
매우 섬세하고 우아합니다.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2.
김연아 선수의 스케이팅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고백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삶이 흔들릴 수 없습니다.

물론 작은 흔들림과 순간적인 폭풍이 올 수 있지만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고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멋지게 지쳐가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기억한다면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자신 있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 119:165).
Great peace have those who love your law; nothing can make them stumble. (Psa 119:165 ESV)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길을 걸어가는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큰 평안(Great peace)”는
많은 평안이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한번만 임하는 평안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많이 임하는 평안(샬롬)입니다.

“장애물”은 말 그대로
걸려 넘어뜨리는 물건/사건/사람 등입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장애물이 없습니다.
영어 번역 그대로 장애물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자신감이 나옵니다.

사순절 끝자락에
우리들의 신앙을 다시금 돌아보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자신감을 누리기 원합니다.

우리들 각자의 삶의 무대에서
김연아 선수보다 더 침착하고
멋지게 주님과 더불어 춤을 추기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결국에는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끔찍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주님과 더불어 걷게 하옵소서.
침착하고 멋진 하루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의 큰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21 이-메일 목회서신)

사순절에 2 : 벧세메스의 암소

성경 속에는 갖가지 동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노아는 홍수가 그치고 땅이 말랐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양이나 염소 그리고 때로는 소와 비둘기가 쓰였습니다. 이 밖에도 독수리와 같은 날짐승, 사자와 같은 들짐승 그리고 고래처럼 큰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수많은 동물들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 사무엘상 6장에 나오는 벧세메스 길을 걸어갔던 두 마리의 암소입니다. 살아가면서 또는 목회를 하면서 힘겨울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깊이 묵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패하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팔레스타인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팔레스타인의 신당에서는 그들의 신 다곤이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고꾸라지고 팔다리가 끊어졌습니다. 법궤가 가는 곳마다 전염병을 일으키고 큰 재앙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능력 있는 신임을 적지 한 가운데서 보여준 셈입니다.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법궤를 벧세메스라는 곳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암소 두 마리를 데려왔습니다. 이들에게는 아직 젖을 떼지 않은 새끼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신출내기입니다. 이 암소 두 마리에게 난생 처음으로 멍에를 메게 하고, 새로 짠 수레를 연결시킵니다. 수레 위에는 법궤를 올려놓습니다. 암소 두 마리가 스스로 법궤를 끌고 벧세메스를 향해서 곧장 나아가면 팔레스타인에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두 마리의 암소가 발을 맞춰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발걸음을 주시하고 있는 수많은 팔레스타인들의 눈길이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멍에를 처음 메었으니 얼마나 불편하였겠습니까? 배가 고파서 엄마를 찾는 송아지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울렸을 테니 어미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멍에를 떨쳐 버리고 새끼들에게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은 두 마리의 암소들이 울부짖으면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꿋꿋하게 벧세메스를 향해서 나아갔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희생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자신의 몸까지 제물로 드려진 벧세메스의 암소를 생각하면 비록 동물이지만 조용히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로 향하는 두 마리의 암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루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또한 벧세메스를 향하는 암소는 삶의 고통과 아쉬움을 가슴에 품고 신앙의 순례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모습, 아니 이 시간 벧세메스의 암소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리는 바로 당신의 모습입니다. 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 속으로 울음을 삭히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꿋꿋하게 벧세메스 길을 향해서 나아가는 당신!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리스도인이십니다. 힘내십시오!(SF한국일보종교칼럼, 2007.4.17) -河-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에는 “반석(바위,rock)”에 대한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지형이
바위가 포함된 산악지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
모세가 반석을 치니 물이 나왔습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인데
“바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홍수가 나면 휩쓸려 무너지지만
반석 위에 세운 집은 견고해서 끝까지 견딜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을 반석 위에 지은 집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반석은 견고함의 상징입니다.

2.
시편 40편 2절은 웅덩이와 반석을 비교합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발을 반석 위에 두사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He drew me up from the pit of destruction, out of the miry bog, and set my feet upon a rock, making my steps secure. (Psa 40:2 ESV)

본문에서 기가 막힐 웅덩이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잡혀서 떨어졌던 물도 없는 함정입니다.
요셉의 형들도 그를 웅덩이에 던졌습니다.

수렁은
진흙탕으로 움직일수록 빠져들어가는 곳입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웅덩이,
감옥처럼 자유도 없고 꼼짝달싹 못하는 상태,
게다가 어떤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 움직이면 점점 더 힘들어지는 곳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입니다.

반면에 반석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려져서
견고하게 서 있는 장소입니다.

수렁에서는 움직일수록 빠져들어갔는데
반석에서는 손쉽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3.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웅덩이에서 건져내셔서
반석 위에 세우셨다고 고백합니다.

시편의 다른 말씀과 연결시키면
“반석”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31:3)

그렇다면
반석 위에 세워지고,
반석 위를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을 돌아보면 뒤죽박죽입니다.
혼란스럽고
때로는 어디론가 빠져드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 개인의 삶도 웅덩이처럼 꽤 답답하고
복잡하게 얽힐 때도 있습니다.

그때 잠잠히 반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웅덩이에서 끌어올리셔서 반석 위에 세워주시고
발길을 견고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거기 계신 하나님 (The God who is there)”
우리 하나님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우리들의 마음과 삶이 어떻든지
언제나 거기에 계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반석 되신
하나님을 속으로, 입술로, 몸으로 찬양하면서 하루를 시작합시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행하신 모든 것 완전하시네
나의 생명 되신 하나님/ 내게 행하신 일 찬양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모습과 지경이 어떠하든지
반석되신 하나님,
우리를 건지셔서 반석 위에 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14 이-메일 목회서신)

사순절에 1 : 결박당한 이삭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아버지 아브라함의 얼굴이 많이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종들에게 여행을 준비하랍니다. 어머니 사라와 무슨 얘기를 주고받는데 어머니 얼굴이 갑자기 깜깜해 집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갈 때는 어머니께서 환하게 웃으면서 이것저것 챙겨주셨는데 이번에는 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십니다. 뭔가 이상했지만, 저는 기분 좋게 아버지를 따라 나섰습니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피어올랐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가는 여행이기에 기분도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길입니다. 기쁠 수밖에요.

그런데 아버지 표정이 그리 밟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갈 때와 다릅니다. 중간에 종들을 놓아두고, 아버지와 저만 가는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말없이 걸으십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제물로 드릴 양이 없습니다. 말없이 한참을 걷다가 용기를 내서 물었습니다.“아버지 제물은 어디에 있어요?”“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지.”아버지께서 짤막하게 대답하십니다. 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믿었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드디어 제사를 드릴 산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를 도와서 제단을 만드는데 오늘따라 아버지의 손놀림이 이상하리만큼 느립니다. 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십니다. 제단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양을 올려놓을 차례입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저를 부르십니다.“내 아들 이삭아! 내 나이 100살에 하나님께서 너를 갖게 하셨다. 그리고 나는 너와 더불어 아주 행복한 시간을 가졌어.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네가 필요하신가보다.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너를 나에게 주셨으니 나는 다시 하나님께 너를 돌려 드릴 수밖에 없단다. 아들아! 미안하다.”

저는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습니다.“아버지, 저를 제물로 드리세요. 저도 아버지와 그동안 너무 행복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 영광입니다. 얼른 저를 묶으십시오.” 아버지가 저를 묶는 것을 도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단위에 누웠습니다. 눈을 꼭 감았습니다. 차마 아버지와 눈길을 마주칠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아버지가 들고 있는 칼이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브라함을 급하게 찾으십니다. 멈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눈을 떠보니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아버지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서 저를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가까운 풀숲에서 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창세기 22장 본문을 이삭의 입장에서 각색해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한 이삭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결박당한 채 제단에 제물로 올리어진 이삭의 모습은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인생 속에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나가는 우리들의 모습도 이삭에게 있습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그때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어린양을 예비해 주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좇는 참빛교회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