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한달 동안 주일설교에서
여리고 소경 바디메오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번 주까지 한번 더 바디메오와 지내고 싶었는데
사순절을 맞아서 전하려는
또 다른 주제의 말씀이 있었기에
지난 주에 마무리했습니다.

여섯 구절밖에 되지 않는
말씀을 차근차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시간에는 길가에서 구걸을 하는 소경 바디메오의 실존,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릴 만큼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소경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동전 소리에 인생을 걸고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처절할 정도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둘째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바디메오의 간절함을 나눴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기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 그는 강력하고 가장 훌륭한 외마디 기도문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셋째 시간에는 관점을 조금 바꿔서
소경 바디메오가 아니라 그의 외침을 듣고 발길을 멈추신
예수님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던
소경 바디메오의 간절한 외침을 들으셨고,
발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를 부르라” – 소경을 부르셨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불려 나온
소경 바디메오와 예수님의 만남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는 질문을 통해서
바디메오와 대화를 시도하십니다.
단순히 눈을 뜨게 해주는 사건을 넘어서
바디메오와 교제하시고,
그를 사람들 앞에서 귀한 존재로 높여주셨습니다.

“다시 보기를 원하나이다 (let me recover my sight).
– 소경 바디메오에게는
오직 한 가지 구체적인 소원이 있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의 선포에
바디메오는 다시 보게 됩니다.

믿음
– 우리들 인생길에서 꼭 붙잡아야 할 끈입니다.

2.
바디메오에 대한 말씀은
마지막 해설(narration)까지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막10:52)
 And immediately he recovered his sight and followed him on the way. (Mar 10:52 ESV)

한번 더 말씀을 전했다면
“길에서(on the road) 예수님을 좇는 바디메오”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함께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첫째는 즉각성입니다.
바디메오는 눈이 뜬 그 순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자신의 길을 가지도 않았고, 미루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매 순간 순간 즉각적인 결단임을 바디메오를 통해서 배웁니다.

둘째는 현장성입니다.
눈이 뜨인 바디메오는 자신의 삶의 처소였던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셋째는 역동성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디메오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앉은뱅이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디메오는 움직입니다.
길 가에서 길 위로 올라왔습니다.
자신의 발로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역동적인 삶을 시작합니다.

우리들도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좇는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세상의 염려와 바쁨 속에서,
자신의 문제에 얽매여서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을 따라 나서는 하루가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디메오의 기도
바디메오의 믿음
바디메오의 헌신을 배우게 하옵소서.
힘차게 주님 따라 나서는 우리의 인생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7 이-메일 목회서신)

소경 바디매오 4

여리고 성 길가에서 구걸을 하던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칩니다. 주변사람들이 그를 윽박지르고 핀잔을 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외쳐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의 불쌍한 인생에 빛이 비추고, 예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메오 앞에서 발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멈추심과 부르심은 소경 바디메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순간순간 필요한 은혜입니다. 우리들 삶의 여정에서 발길을 멈춰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저절로 감사의 고백이 나옵니다.“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간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소경 바디메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겉옷을 두고 뛰어나갔습니다. 겉옷은 일교차가 심한 중동 지역에서 밤마다 이불역할을 합니다. 앞에 펼쳐놓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귀에 동전을 던져줍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을 버려두고 예수님께 나간 것입니다. 또한 겉옷을 둔 것은 자신을 두르고 있던 것을 버린 것입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갔음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메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바디메오는 소경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불려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눈이 뜨는 것을 원했을 텐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질문하십니다. 바디메오는 “(다시)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얼른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이나 바디메오의 대답이나 당연한 것을 묻고 답한 셈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보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본문이 속한 마가복음 10장 앞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이혼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느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혜롭게 대답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와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왕이 되면 자신들을 좌우에 앉혀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되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소경 바디메오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소경에게 먼저 질문하십니다.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당시의 기득권자들인 유대지도자들이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부탁했지만, 불쌍한 소경을 앞에 두고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질문하십니다. 시험하는 질문도 아니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질문도 아닙니다. 소경의 입장에서 가장 답하기 쉬운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여리고 소경의 입에서 다시 보기를 원한다는 고백을 듣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상황을 구체화하시면서 소경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시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바디메오의 눈이 밝아 졌습니다. 다시 보게 되었으니 하고 싶은 일들이나 가고 싶은 곳도 많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밝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그 길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부르짖는 행동부터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결심까지 우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바디메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신 예수님, 그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시고 다시 보게 해 주신 예수님, 우리들도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간절히 구하고 은혜의 손길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河-

삼일절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3월 1일
94주기 삼일절입니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학창시절 운동장에 모여서 부르던
삼일절 노래가 생각납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삼천만이 분연이 일어났던
삼일 운동은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고
그 불씨가 꺼지지 않고 살아 있었기에
해방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삼일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이었습니다.
(천도교 대표도 15명, 불교 대표가 2명이었구요)

그때는 기독교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요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꽤 많은 비난을 받고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멋진 신앙의 선배들이 있기에
그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3.1절을 맞아서
우리의 뿌리인 민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민족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내게는 내 동족을 위한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롬9:2-4, 새번역)

2.
벌써 3년이 지났군요.
칼리지 코스타 오전 강해 때
“민족”이란 주제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원고에서 한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지금은 초대한국교회의 좋은 모습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역사를 뒤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환경이 변해서 다시 돌아가도 같은 효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선배들의 좋은 모습을 거울삼아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신앙을 재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민족을 생각합니다. 민족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끊어진다고 해도 감수하겠답니다. 마음이 아파서 번민하고 고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갖고 자신의 민족, 공동체를 위해서 고민하고 자신이 죽어도 민족이 복음화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바울에게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대한민국, 우리 민족을 위해서 번민합니까? 안타까워서 근심합니까? 우리 가운데 한국으로 돌아가셔서 일하실 분들도 계십니다. 이곳에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 가면 말할 것도 없지만 미국에 남아 있는다고 해도 우리 앞에는 “Korean”이 따라 다닙니다. 미국시민이 되어도 “Korean American”입니다. 우리의 뿌리를 뽑아낼 수는 없습니다. 얼굴에 써있고, 김치와 된장찌개를 그리워하는 우리들의 본성이 우리가 한국사람인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뿌리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을 생각하면서 근심하고 고뇌하였듯이 우리들도 한민족, 또 우리 나라를 놓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신앙의 선배들이 좋은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피를 흘리면서 신앙을 지켰고 또 교회와 나라를 지켰습니다. 세상 속에서 말 그대로 소금이 되었고 빛이 되었습니다. 그런 선배들의 뜻도 우리 안에 되살리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침에 두고 온 조국과
온 세계에 흩어진 한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합니다.
우리 민족이 온 세상에
복음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옵소서.
겸비하여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만을 높이는 한국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1 이-메일 목회서신)

소경 바디매오 3

연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여리고 소경 거지 바디메오는 자신이 스스로 표현했듯이 불쌍한 인생입니다. 길가에 주저앉아서 남의 손끝만 바라보는 절망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중간에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서 시력을 잃었기에 바디메오가 느끼는 좌절감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입니다.

그가 사는 길은 은혜를 힘입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저주받은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를 죄로부터 풀어주어야 합니다. 앞을 못 보게 된 것이 죄를 지은 결과라는 사람들의 판단과 따가운 눈초리로부터 자유케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죄의 권세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용서가 꼭 필요합니다.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해서 새로운 삶을 살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도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경 바디메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왔을 때 사생결단을 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절박한 외침입니다.

복음서 속에 나타난 예수님은 밝은 눈과 귀를 갖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 웬만한 외침을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으십니다. 뒤로 슬며시 다가와서 옷깃을 만진 여인의 손놀림도 예수님은 감지해 내십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베데스다 연못의 중풍병자도 외면치 않고 포착해 내십니다. 나인성에 들어갈 때 장례행렬과 마주칩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가득 차 있는 나인성 과부의 모습과 마음도 알아차리십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만 보고 싶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무릅쓰고 나무에 올라가서 앉아 있었는데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다가오셔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찾고 부르는 사람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셨고, 자신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사람들을 친히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타게 부르짖던 여리고 소경의 외침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소경이 예수님을 부른다고 윽박질렀지만 예수님은 여리고 소경의 외침에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을 것입니다. 이제 현장에는 예수님과 여리고 소경만 남겨져 있는 듯 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입을 여십니다.:“그를 부르라”

소경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불쌍한 인생 소경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신 목소리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조용히 하라고 소경을 야단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소경을 향해서 부드럽게 말합니다.:“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이처럼 군중들의 심리는 조변석개처럼 변덕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말을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여리고 소경처럼 예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드리고,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는 영적 집중력이 매 순간 요청됩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의 인생길에 머물러 서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소통을 하지만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멈추시는 발걸음과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河-

키리에 엘레이손

신약성경 마가복음에는 여리고라는 동네에 살던 한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소경은 “바디메오”입니다. 성경본문은 친절하게도 이것이 그의 이름이 아니라 “디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줍니다.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소경 바디메오 – 그는 이름도 없이 아버지의 성함으로 불렸습니다. 여리고는 상업이 발달해서 세무서가 있을 정도의 도시였기에 길목을 잘 지키면 수입이 꽤 괜찮을 수도 있었겠지만 소경 바디메오의 실존은 말 그대로 불쌍한 인생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시에는 소경으로 태어나면 부모의 죄로 또는 태아인 자신의 죄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먼지가 많은 중동 지역에는 눈병이 깊어지면서 중간에 시력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경우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저주받은 인생으로 취급 당했습니다. 바디메오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했다고 성경본문이 전합니다. 길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입니다. 이처럼 바디메오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상관없이 그들이 던져주는 동전소리에 일희일비하는 타인의존적인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여리고에 들어오시면서 소경 두 명을 고치셨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를 찾아가셨습니다. 눈은 볼 수 없지만 귀는 밝았을 바디메오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저절로 들려왔을 것입니다. 길가에 앉아 있으니 적선뿐만 아니라 자연스레 귀동냥도 즐겼을 테니까요. 그런 예수님이 많은 무리들과 함께 자기 앞을 지나간다는 소식입니다. 운수 대통한 날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조금씩만 적선을 해줘도 며칠은 거뜬히 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소경 바디메오는 그 이상을 보았습니다. 물질적인 행운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열망이 생겼습니다. 지긋지긋한 죄의 고리와 외로움 그리고 깜깜한 절망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망입니다.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빛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은 바디메오가 크게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절한 외침입니다. 헬라어 본문은 바디메오의 외침이 폭탄이 터질 듯한 탄성이었다고 소개합니다.울부짖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지시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크게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 소경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멈춰서 그를 불러내십니다. 바디메오의 외침이 예수님의 귓전에 아니 마음에 전달된 것입니다. 소경은 겉옷을 두고 뛰어 나갑니다. 무엇을 해주기 원하냐는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보기를 원한다고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선포하시면서 소경의 눈을 밝혀 주십니다. 바디메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그 길에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마가복음에서 소경 바디메오가 눈을 뜨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는 예루살렘 입성 바로 직전에 행한 기적입니다. 바디메오가 외친 “다윗의 자손 예수여”는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로 오셨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안에서 소경 바디메오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디메오의 외침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에서 그 유명한 외마디 기도 “키리에 엘레이손(주여 불쌍히 여기소서”가 나왔습니다.

바디메오,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외마디 기도는 교회사 2천년 내내 가장 훌륭한 그리고 애절하고 진솔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존재감 없이 깜깜한 인생을 살던 바디메오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생명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2013년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소경 바디메오처럼 각자의 인생길에 앉아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이 필요한 인생들입니다. 어두움을 몰아낼 생명의 빛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향해 외쳐 부르짖기 원합니다. 짧지만 간절하고 예수님의 심금을 울리는 기도를 올려 드리기 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2013년 2월 21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암스트롱 유감

랜스 암스트롱 – “손이 강하다(arm-strong)”는 그의 이름 뜻에 걸맞게 프랑스 싸이클 대회에서 7년 연속 우승한 세계적인 스포츠 영웅이었습니다. 강인한 체력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귀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1996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고환암이 발병해서 폐와 뇌까지 전이되었습니다. 50%의 생존률을 정신력으로 극복합니다.암을 이기고 다시 참가한 대회에서 세운 신기록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랜스 암스트롱은 포기하지 않는 인간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005년 은퇴한 후에는 자기 이름을 건 <암스트롱 파운데이션>이라는 재단을 세워서 암 예방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3년 전부터 암스트롱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팀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암스트롱이 금지약물을 복용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암스트롱은 법정 공방까지 가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작년 8월 그가 세운 모든 기록을 박탈당합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암스트롱의 인생역정을 존경했기에 그 정도에서 끝나길 바랬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윈프리쇼에 나와서 자신의 입으로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가 사상 최초로 프랑스 싸이클 대회에서 7년 연속 우승한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금지 약물을 복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몸 안에 혈액수치를 높이기 위해서 경기 전 피를 뺐다가 다시 주입하기도 했답니다.사회자가 그런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을 때 스케줄만 조절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합니다.

그 쇼를 시청하던 많은 사람들은 랜스 암스트롱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고 어머니의 희생으로20대 중반에 찾아온 암을 이겨냈고 그 이후로 훌륭한 가정을 이루면서 세상에 귀감이 되었던 인물이었기에 그가 세간에 안겨준 실망감은 더욱 컸습니다. 그에게는 진실된 후회나 회개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약물중독 사건이 보도되면서 늘 그랬듯이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교묘한 말솜씨로 얼버무리고, 또 다른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진실을 희석시키려는 약삭빠른 처세술을 보는 듯했습니다.

진작에 약물복용을 시인하고 깨끗하게 물러섰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훌륭한 운동선수였고, 암을 극복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인간승리입니다. 경쟁이 치열한 프로 스포츠계에서 약물파동은 늘 있어왔기에 사람들은 그의 솔직한 고백에 박수를 쳐 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마치 거짓말쟁이 늑대소년처럼 자신을 변호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솔직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우승기록은 물론 사람들의 마음까지 잃어버린 듯 해서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욕심과 집착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야망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릇된 생각을 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면서 실수를 저지릅니다. 견물생심이라고 눈 앞에 보이는 이익과 성공 앞에서 잠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바른 길로 돌아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입니다.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가는 솔직함입니다.

컬럼을 준비하고 있는데 또 하나의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대학 미식축구 선수가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경기 전날 암으로 죽은 자신의 애인만을 생각하면서 경기를 했다는 감동적인 인터뷰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선수가 말한 애인은 가상의 인물입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 꾸며낸 거짓말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참 난감한 일입니다.

미국은 정직(honesty)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나라입니다. 신용을 중요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일찍 이민오신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정직하지 않고는 미국에서 살아남기 힘드셨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담벼락 무너지듯이 정직함이 무너져 내리는 듯 해서 매우 아쉽습니다. 오늘 성경에 손을 언고 취임선서를 하는 미국의 대통령과 위정자들부터 정직함을 회복하길 기도해야겠습니다. 아니, 남을 탓할 것 없이 새해에는 우리들 만이라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고 솔직하기 원합니다. (2013년 1월 25일자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다윗의 영적 상상력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학기 목요성경공부에서는
유진 피터슨의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을 읽고 있습니다.

다윗에 대한 말씀을
우리들 삶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다시 쓴 매우 탁월한 책입니다.

오늘은 골리앗을 이긴
다윗에 대해서 읽었습니다.
(요약본은 청년부 Face Book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마음,
하나님이라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피터슨 목사님은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대로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거인 골리앗에 사로잡혀 있어서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2.
다윗은
시냇가에서 다섯 개의 돌을 고를 때
물맷돌을 가지고 이리며 사자를 물리쳐서 양들을 보호했던 경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골리앗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이 있었기에
다윗을 무시하는 골리앗도
다윗을 두고 안절부절못하는
형님들과 사울왕의 생각도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위대하고 강하신 만군의 주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골리앗을 대면하러 뛰어나가는 다윗은
하나님의 팔로 무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이
가져다 준 힘이었습니다.

3.
골리앗이 조소하는 가운데
시냇가에서 돌 다섯 개를 무릎 꿇고 줍는 다윗의 모습에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지만 초라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골리앗을 이길 것 같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조소와 비난이 매우 거셌습니다.

다윗은 그때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의 영적 상상력은 하나님께 도달해 있었습니다.

아주 멋지게 골리앗을 무너뜨립니다.
우리들도 다윗처럼
참으로 신중하고
참으로 대범하기 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삼상17:45-46)

You come to me with a sword, a spear, and a javelin, but I come to you in the name of the LORD of hosts, the God of the armies of Israel, whom you have taunted. This day the LORD will deliver you up into my hands, and I will strike you down and remove your head from you. And I will give the dead bodies of the army of the Philistines this day to the birds of the sky and the wild beasts of the earth, that all the earth may know that there is a God in Israel, (1Sa 17:45-46 NAU)

하나님께 사로잡힌 영적 상상력과 관련해서
피터슨 목사님께서 던지신 질문을 우리들 각자에게 적용해 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믿음을 점검하기 원합니다.

그 순간 시냇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다윗의 모습은 [돌 다섯 개를 줍기 위해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무언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스스로 우리의 무릎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저 관습적으로 남들을 따라 살 것인가?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성령님이 기름 부으시고 예수님이 구원하신 존재로서 살 것인가? 아니면 사실은 별 볼일 없는 전문가들에게나 기대고 의지하며 살 것인가? 골리앗 공포증과 하나님, 둘 중의 무엇이 우리 삶의 행로를 결정짓게 할 것인가? 사울을 올려다보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 것인가?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60쪽-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에 이를 수 있는
영적 상상력을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2.21 이-메일 목회서신)

소경 바디매오 2

여리고 소경 거지,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 –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가복음 본문 속의 주인공입니다. 자신의 이름도 잃어버린 채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길가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기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 없습니다. 일어서서 마음대로 걸어갈 수 없는 주저앉아 있는 인생입니다.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타인 의존적 인생이기에 더욱 불쌍합니다.

바디메오가 앉아 있는 곳에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모여든 군중들이 다가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가 커다란 기대를 갖고 예수님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군중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따르는 성공지향적인 발걸음들입니다.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생업을 버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군대처럼 많은 귀신들도 예수님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고 계십니다. 오죽했으면 요한과 야고보 형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을까요.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시는 길목에서 두 명의 소경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

입니다.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도 예수님께서 찾아 주셨고 그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복을 선포하셨다는 소식도 들었을 것입니다. 앞은 볼 수 없지만 귀는 밝습니다. 게다가 귀동냥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나사렛 예수”가 오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다가오고 계신 것입니다. 눈을 뜰 수 있는 행운이 자신에게도 찾아 온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 만큼 절박했을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나사렛 출신 예수가 곧 메시야라는 말이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고백입니다. 바디메오가 일자무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막무가내로 달려 나가는 몰상식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바디메오는 괜찮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가 중간에 시력을 잃은 것 같습니다. 디메오의 아들로 불린 것을 보면 아버지 디메오가 지명도가 있는 인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을 정확히 메시야라고 부르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현재 모습만 보고 저주하고 꾸짖습니다. 거지, 소경 주제에 감히 어디를 나서냐는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재차 부르짖습니다.:”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외침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사모하는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바디메오는 주위의 면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을 향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한 주간 주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키리에 엘레이손)”-河-

2013 사순절

좋은 아침입니다.

엊그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2013년 사순절(Lent)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첨부한
사순절에 대한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매년 같은 자료를 함께 나누는데
우리 모두 하도 바쁘게 살다 보니
사순절에 대한 자료는 물론
일년에 한번 맞는 사순절이 매년 새롭게 다가옵니다.^^

사순절은
기독교 최고의 절기인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부활절은 축제입니다.

따라서 사순절 기간 동안
지나친 금욕이나
율법에 얽매인 또는 억지로 하는
경건의 훈련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일년 365일 가운데
약 10분에 1을 구별해서 하나님 앞에서 지낸다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사순절 기간을 어떻게 보낼 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안성맞춤의 경건의 훈련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면 됩니다.

성경읽기 (신약통독, 복음서 통독, 로마서 통독 등)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기 또는 기도문 쓰기,
일주일에 한끼라도 정기적으로 금식하기,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등
각자에게 꼭 필요한 신앙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각박합니다.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 갑니다.
이런 때에 사순절을 맞는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이웃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고
다른 이들을 섬기고 기쁨이 되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2013년 사순절을 맞아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참빛 교회 성도님들 위에 깊이
그리고 뜨겁게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2013년 사순절을 지내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2.14 이-메일 목회서신)

소경 바디매오 1

앞으로 4주 동안 함께 나눌 말씀은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여섯 구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말씀이지만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시점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때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십니다.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의연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여리고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여서 사막을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이 꼭 지나가는 곳입니다. 종려나무로 유명했던 여리고에 커다란 세관이 있었는데 그곳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것도 성경에 나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5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쫓는 허다한 무리들이 여리고성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기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어떤 기적을 베푸실 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늘 말씀하시던 대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실 줄 알고 예수님을 추종하던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나 무리들은 개선장군처럼 여리고를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아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무거우셨을 겁니다. 그때 여리고 어귀에 한 소경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디메오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유명했든지 아니면 당시의 풍습대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렸을 것입니다. 바디메오의 직업은 거지입니다. 길 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소경으로 태어난 것을 두고 자신이 죄를 지었든지 아니면 부모가 죄를 지어서 그랬다고 믿었습니다. 바디메오의 경우 날 때부터 소경이었는지 아니면 중간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가에 앉아 있지만 외로운 인생입니다. 남의 손을 바라보면서 구걸하면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바디메오는 타인 의존적인 삶을 살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여리고 도시의 한 켠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바디메오의 모습 속에는 우리의 모습이 거울처럼 들어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바디메오에 비할 데 없이 훌륭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들 역시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앉아 있는 소경 바디메오처럼 세상에 털썩 주저앉아서 사람들의 처분을 기다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은 궁극적인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쁘고 흥청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혼자서 외로움을 곱씹기도 합니다.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정작 하늘의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인 눈이 감겨 있을 때도 있습니다.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채 필요 없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헛된 꿈을 꿉니다. 어쩌면 소경 바디메오보다 더 불쌍해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늘 갈증을 느낍니다. 영적 목마름입니다. 예수님께 나가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때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의 도움의 손길이 꼭 필요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