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닻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수요예배에서는
히브리서를 읽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핍박으로 인해서
신앙을 저버리기 쉬운 상황에 처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유대교에서 개종하였거나
유대교와 밀접하게 연관된 기독교인들에게
구약의 전통을 갖고 예수님께서 메시야되심을
강력하게 호소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에는
구약성경의 인용과
유대교와 관련된 용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구약의 제사와 연관시키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약의 제사가 폐지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길 부탁하면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을
창세기의 아벨부터 차례로 소개합니다.

믿음 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 이름을 올린
구약의 인물들처럼
히브리서를 읽는 성도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들까지 믿는 이들이 들어가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길 바라고 있습니다.

2.
지난 수요일에 살펴본 히브리서 6장 20절에는
“영혼의 닻(the anchor of the sould)”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We have this as a sure and steadfast anchor of the soul, a hope that enters into the inner place behind the curtain, (Heb 6:19 ESV)

닻(anchor)은 배들이 항구에 도착해 있거나
바다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할 때
배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옛날에는 바위덩어리나
쇠를 바다에 던져서 배를 고정시켰답니다.
항구에 들어오면 밧줄 같은 것으로
기둥(닻)에 묶어서 배를 고정시키기도 했습니다.

배가
풍랑에 흔들리지 않고
바다로 흘러가지 않도록 확실하게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영혼”에는
“목숨” 또는 “삶(life)”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닻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고정시키는 닻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생긴 소망이
영혼의 닻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소망”은
구원의 소망,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되는 소망이기에
세상이 주는 소망과 다릅니다.

소망으로 영혼의 닻을 삼는 것은
우리의 인생과 삶이 예수님께 매여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꼭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망망대해 인생의 바다로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정처 없이 헤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닻을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에 내린 우리들은
삶이 튼튼하고 견고합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고정시켰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들 삶의 닻을 예수님께 내리고
힘차게 시작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 영혼의 닻을
예수님께 내리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2.7 이-메일 목회서신)

참된 예배자 – 온전한 삶으로

올해 주제인 <참된 예배자가 됩시다>에 대한 연속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처음 시간에 이사야 말씀을 갖고 소개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예배하는 존재로 지으셨고 주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43:7). 이사야 43장 21절에서도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찬송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대표적인 행위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신앙 한 가운데 예배가 있음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기에 예배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배웠듯이“영과 진실로”예배해야 합니다. 시편 50편에서는 예배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들을 자세히 소개하였습니다.:감사하는 마음, 서원을 갚는 신실함과 순종,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믿음. 신명기 6장 말씀을 살펴보면서 예배자의 마음 한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고백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배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되시고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시편 51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은 상한심령이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부서진 마음까지 기뻐 받으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상한 심령이 새롭게 재창조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처럼 예배는 우리들 신앙 한 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참된 예배자로서의 마음가짐이 준비되었다면 그것이 삶으로 이어져야합니다. 오늘처럼 주일에 교회에 와서 성도들과 더불어 예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찬양과 기도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배후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를 격려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확인합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교회나 성도님들이 잘 하시는데 그 다음 단계를 깜빡할 때가 많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서 살아가는 엿새 동안의 삶도 예배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이 말하듯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삶의 예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로마서 12장 1절에 있듯이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은 우리의 존재 또는 삶 전체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예배로 드려져야 하고,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가 되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몸으로 드려지는 예배, 즉 우리의 몸이 가는 곳이 예배처소가 되고 우리가 하는 일이 곧 예배가 되는 것이 삶을 통한 예배입니다. 세상 속에서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심한 경우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에서 우리가 일을 하고 부대끼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예배를 기다리십니다. 좋을 때는 감사의 예배를, 힘들 때는 부르짖는 외침의 예배를, 마음이 상했을 때는 부서진 마음을 드리면서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허락하신 생업과 가정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삶 속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 나라로 변할 것입니다. 삶이 주님 앞에 드려지면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깊이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河-

은혜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나라가 드디어

나로호 인공위성을

성공적으로 쏘아 올렸습니다.

이제 대한민국도

우주강국이 되었다고

신문에서 앞다투어 보도합니다.

과학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위성의 움직이는 속도가

1초에 7.9km라는 것과

하루에 지구를 14바퀴를 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와- 굉장한것이구나’라고 감탄할 뿐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비상시에 산소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승무원의 설명을 듣습니다.

고도가 높으면 산소가 모자라기 때문이겠지요.

비행기가 대개 10km높이로 난다고 하는데도 산소가 모자란다면

나로호는 300km-1500km위를 돌고 있으니

도대체 그곳은 어떤 곳일지 막연히 궁금해졌습니다.

대기권 밖 우주공간이니

당연히 공기는 없겠지요.

나로호를 생각하다가

엉뚱하게도 공기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숨을 한번 크게 쉬어봅니다.

우리 동네 공기가 참 상쾌합니다.

몸 속 깊이 공기가 들어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심호흡을 연거푸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공기(산소)가 중요한데

그 귀중함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공짜로 숨을 쉬듯이

은혜도 거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라는말 자체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은혜로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값을 지불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니

값싼 은혜는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 만큼 자라있는 것도 생각해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공기처럼 늘 우리 곁에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귀한 것이어서

미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공기가 없어진다면

우리의 목숨이 거기서 끝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우리들의 생명도 그 순간 끝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이것을 감지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애원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편51:11)

Cast me not away from your presence, and take not your Holy Spirit from me. (Psa 51:11 ESV)


나를 주 앞에서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우리들 사방에 공기처럼 임해 있는

주님의 은혜를 감지하고 감사하기 원합니다.

아무런 공로 없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안에 넘치기 원합니다.

나로호가 우주공간을 향해서 쏘아올려져듯이

오늘 하루는 시간을 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찬양을

높이 높이 올려 보냅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무 귀하고 커서 때로는 감지할 수 없지만

주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느끼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31 이-메일 목회서신)

참된 예배자 – 상한 심령으로

창세기 4장에는 가슴 아픈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두 아들을 낳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하루는 둘이 똑같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형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동생의 제사만 받으신 것이 불편했습니다. 일종의 시기와 질투로 그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의 상한 마음이 분함으로 발전했고 안색이 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마음을 가라앉힐 것을 부탁하십니다.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분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이 죄로 연결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결국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입니다. 그이후로 가인은 유리방황하는 사람이 됩니다.

제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훨씬 중요함을 가인을 통해서 또 한 번 깨닫습니다. 창세기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왜 받지 않으셨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제사 자체보다 그 이후에 벌어진 사건, 특히 가인의 심리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벨에 대한 관심도 크지 않습니다. 형 가인의 분노에 희생된 인물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에 대해서 신약성경 히브리서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히11:4). 가인은 제물에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제사와 마음이 따로 놀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린 제사가 아니라 건성으로 제사를 드렸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그의 제사는 열납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나올 때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참된 예배자는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함을 꼭 기억합시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좋은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상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올 수도 있습니다. 제물의 내장과 기름기를 즐겨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상한 마음을 기다리십니다. 시편 51편 속의 다윗은 죄인입니다. 왕의 권력을 사용해서 부하의 아내와 간음죄를, 부하를 죽게 만든 살인 교사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해서 세운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인생 가운데 가장 심하게 무너진 순간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지적에 자신이 죄인임을 솔직히 시인합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드린 회개와 결단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큰 죄를 지은 자신을 버리지 마시길 애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영을 거두어가시면 자신의 인생이 끝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길 간절히 부탁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서진 마음을 기뻐 받으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다윗처럼 죄로 인해서 부서집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들로 부서지기도 합니다. 가인처럼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서 분노와 혈기로 인생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 존재 자체가 질그릇과 같아서 부서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들의 마음도 이런 저런 일들로 부서져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도 상한 마음(부서진 심령)을 갖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마음,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기 원합니다. -河-

나다니엘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에서는

요한복음 1장을 읽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부르시고

빌립을 부르십니다.

같은 동네 벳세데 출신 사내들입니다.

빌립이

나다니엘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나다니엘이 오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것이 없도다. (요1:47)

Here is truly an Israelite in whom there is nodeceit!” (Joh 1:47 NRS)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나다니엘을 만나기 전에

그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단지 그를 바라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인물 됨됨이와 성품까지 꿰뚫어 보셨습니다.

깜짝 놀란 나다니엘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임금이로소이다 (요1:49)

“Rabbi, you are the Son of God! You arethe King of Israel!” (Joh 1:49 ESV)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랍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나다니엘 –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다” 또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니엘을 보시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속에 “간사함(deceit)”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간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로스”는

“고기를 잡는 미끼”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간사함은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꼼수를 부리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덫을 놓는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 나다니엘에게는

간사함이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신 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쯤 해서 우리는 창세기의 야곱을 떠올리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간사한 인물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면서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피난갈때

돌베개를 베고 길에서 잠을 잡니다 (창28장).

그때 하늘에서 내려온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환상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은 간사함에 빠져있었습니다.

참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참빛 되신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어두운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1:9-11).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에 돌을 세우고 하나님을 예배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신앙을 회복하길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향해서 나다니엘처럼

고백하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임금이로소이다

간사함이 없던 나다니엘은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3.

어느 덧 2013년 새해의 첫 달도

거의 지나갑니다.

시간이 빠르다고 하염없이 말하기에는

꽤 아까운 순간들입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드린대로

흘러가는 시간들(클로노스)이 아니라

의미 있는 시간들(카이로스)로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 안에 참됨/진실됨을 간직하기 원합니다.

행여나 야곱의 간사함이 있다면

환도뼈가 부러지는 처절한 씨름을 통해서

참 이스라엘,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원합니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고백하기 원합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 있던 나다니엘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께서

각자의 삶의 처소에 있는

우리들을 바라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요?

참된 주의 백성으로 주님께 보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루 하루

진실됨으로 주님께 나가게 하옵소서.

나다니엘처럼

참된 주님의 백성으로 주님께 인정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24 이-메일 목회서신)

참된 예배자 –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만물을 지으신 후에 맨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귀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세상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이 우주만물의 창조를 파노라마처럼 웅대하게 기록했다면, 창세기 2장의 창조는 꽤 오밀조밀합니다. 우주만물의 창조 가운데 아담과 이브를 만드신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진흙을 빚어서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1장에서 말씀으로 모든 세상을 만드신 것에 비하면 매우 친근하고 인간적인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진흙을 갖고 형상을 만드신 후에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고독해 보여서 그의 돕는 배필 이브도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이브를 보자마자“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이들과 친밀하게 교제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짓기 전까지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말 그대로 하늘나라였습니다. 에덴동산의 평화를 아담과 이브가 깹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심에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에덴에서 쫓아내실 때에도 가죽옷을 손수 만들어서 입혀주셨습니다. 하지만 죄의 삯은 냉혹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노동을 해야 하고 해산의 고통을 감수하게 되었습니다. 뱀은 물론 세상 만물도 저주를 받아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끊어진 관계를 잇고 싶어 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셨습니다. 노아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구원 계획을 펼치셨습니다. 모세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을 통해서, 다윗과 같은 왕이나 제사장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애를 쓰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십니다. 33년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끊어진 간격을 십자가로 이어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창세기 1장에서 말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회복되면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다시금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다시금 부여된 사명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충 예배해서도 안 됩니다. 신명기 6장 5절 말씀대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참된 예배의 한가운데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사랑고백이 있어야 함을 기억합시다.-河-

앞서 가시는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가을부터 성경읽기 속도가 붙어서
주보에 나오는 진도보다 앞서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지혜를 얻고, 평안을 누리고,
살아있고 운동력있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에
힘들 때 성경에 마음을 쏟은 것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 시간에
저의 성경읽기 본문은
신명기 1-5장이었습니다.

신명기 말씀은 이번 주일 설교 본문이기도 합니다
신명기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이스라엘의 2세들에게 행한 설교입니다.

모세라는 큰 지도자 없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물론 젊은 세대에
두려움이 밀려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늘 함께 하시고
큰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2.
올 해도 어느덧 20여 일이 지났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엄습할 때도 있습니다.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날 것도 아닌데
갑자기 염려가 생깁니다.

요즘 세상이 불안하다 보니
실제로 어려운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곳의 민족들과 한판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40년을 광야에서 지내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을 그들에게는 두려운 일입니다.

이래저래 불안한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싹텄습니다.

이것을 안타까이 여긴 모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의 하나님 (신1:30)
(The Lord your God who goes before you)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앞서서 행하셨다는 고백입니다.
먼저 가셔서 그들의 길을 예비하셨다는 간증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앞서 가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
새벽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에 은혜가 밀려왔습니다.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의 하나님!”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선발대로 앞서 행하심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신 길이라면

어떤 길이라도 감사와 기쁨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푸근해졌습니다.
앞 길을 미리 알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떤 길이 펼쳐질 지 조급해하지도 않기로 했습니다.

길에 관심을 갖고 신경쓰기 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따라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은혜가 넘쳤고 감사의 고백이 나왔습니다.

2013년의 첫 달도 절반이 지나갑니다.
하지만 아직도 350여 일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올해만 그렇지
우리들 앞에 남아 있는 인생길은 훨씬 많습니다.

미래를 놓고 지나친 염려나 두려움을 버리고
또한 미래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도 옆으로 제쳐놓고
우리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한걸음 한걸음 차근차근 주어진 삶의 여정을 걸어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보다 앞서가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분별하고
믿음으로 그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17 이-메일 목회서신)

참된 예배자 – 감사함으로

참된 예배자가 됩시다”라는 올해 주제에 맞춰서 참된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에 대한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신령(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했습니다. 구경하듯이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깊은 마음(영)과 몸을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또한 영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성령을, 진정(진리)로 드리는 예배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그리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온전하고 참된 예배임을 배웠습니다.

예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샤하”에는 왕이나 신에게 몸을 숙여서 경배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예물을 갖고 오듯이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갖고 와야만 하나님께 예배가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율법조항들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종류와 하나님께 나와서 경배하는 제사 방법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우 복잡한 절차들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예배할 때 구별된 마음과 태도가 중요함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제사를 드리다보니 제사의 본뜻은 사라지고 제사의 형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떤 예물을 어떻게 드리느냐가 관심사입니다. 눈에 보이는 제물들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가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예배가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50편 본문은 잘못된 제사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온 세상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수소를 드리던지 숫염소를 드리던지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종류에 따라서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끊이지 않았지만, 하나님 마음이 편치 않으셨습니다. 제물은 끊이지 않는데 형식적인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된 제사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고,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무엇보다 감사로 드리는 제사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은 감사한 마음을 갖고있어야 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올 때 참된 예배자가 되기 힘듭니다. 둘째는 서원을 갚는 예배입니다. 새해에 하나님 앞에서 많은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성실하게 찾아오듯이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했던 결심들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서원을 갚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환난 가운데 부르짖는 예배입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참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만이 도움이 되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환난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51편 17절에서 있듯이 상한 심령(broken spirit)을 구하십니다. 하나님은 근사한 것, 완전한 것을 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은 모두 양 같아서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서진 마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 받으십니다.

참된 예배는 손에 들고 있는 제물이 아니라 마음에서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부서진 마음까지 드리는 예배자가 되기 원합니다. -河-

믿음이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 목요서신에
“거세개탁”이라는 어려운 제목을 달았다고
아내에게 꽤 면박을 받았습니다.ㅠㅠ
제가 생각해도 조금 그랬습니다.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에서는
누가복음 17장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17장 5-19절을
한 문단으로 읽으면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간청했습니다(5절).:
우리에게 믿음을더하소서 (Increase our faith)

새해를 사는 우리들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더해 달라는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름 뜻도 “더하기”임) 사도들의 요청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것으로 축소시켜서 대답하십니다.

겨자씨와 같은 믿음입니다(6절).
그것도 겨우 겨자씨 한 알입니다.

여기까지 들은 사도들은 꽤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 더러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순종하였으리라.

If you had faith like a grain of mustard seed, you could say to thismulberry tree,
‘Be uprooted and planted in the sea,’ and it would obey you.(Luk 17:6 ESV)

뽕나무가 뿌리가 뽑히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이 바다에 심기는 것은
사람들의 지식과 상식을 초월한 사건입니다.

그러고 보니 믿음은 말 그대로 신비입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을 갖고도
우리의 존재, 생각, 마음씀씀이를 뛰어넘는
신비로운 사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가 우리에게 순종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말씀의 주제를 살짝 바꾸십니다(twist).

어떤 종이 일을 하다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7-10절)
그렇다고 주인이 종을 위해서 상을 차려주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서 상을 차리고 수종 들어야 합니다.
종이 그 일을 했다고 주인이 감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종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종은 믿음을 가진 우리를
주인은 하나님을 뜻할 것입니다.

종인 우리가
주인 되신 하나님 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주인 되신 하나님께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종의 신분을 망각한 행동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뽕나무를 뽑아서 바다에 심고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높아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6:33)는 말씀이
여기에 와 닿습니다.

믿음을 갖고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3.
이어서
지난 번에 설교했던 열명의 문둥병자 사건을 소개합니다 (11-19절)
열 명의 문둥병자(한센씨병을 앓는 사람들)가 고침을 받았는데
예수님을 찾아와서 감사한 사람은 한 명,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나와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다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그 한 명의 문둥병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7:19)
Rise and go your way; your faith has made you well.(Luk 17:19 ESV)

믿음의 끝은 결국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헬라어 직역은 “너의 믿음이 이미 너를 구원했다/your faith has saved you”)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겨자씨 만한 믿음부터
순종하고 감사하는 그래서 생명에 이르는 믿음까지
차례로 더하고 계십니다.

새해가 야금야금 지나갑니다.
우리들도 누가복음 속의 사도들처럼
매일같이 기도하며 살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 마음과 삶 속에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을 주옵소서.
살아있는 믿음을 심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10 이-메일 목회서신)

참된 예배자 – 영과 진리로

새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참된 예배자가 됩시다”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덕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예배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예배가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인데 종종 예배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은 뒷전에 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시대의 조류에 맞추다보니 예배의 본질을 상실한 것입니다.

새해를 설계하면서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에게도 예배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발걸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가 회복되면 인간적인 생각이나 세상의 풍습들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명예욕이나 힘을 과시해 보려는 권력욕도 참된 예배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자들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섬기는 교회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자연스레 따라올 것입니다.

예배의 회복은 공동체뿐만 아니라 우리들 각자에게도 필요합니다. 지난 열두 달을 보내고 또 다시 새해를 맞지만 마음 한편에 늘 찜찜한 것들이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와 근심, 앞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받은 상처들, 스스로에게 갖는 실망감 등등 우리들의 마음이 그리 편치 않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우리 안에 슬며시 들어온 죄의 속성들이자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참된 예배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줍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것이 이웃과의 관계 회복으로 연결됩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풍성한 은혜를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in spirit and truth)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신령은 “영”으로 예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영으로 예배하는 자신의 백성을 찾으십니다. 그렇다고 신비로운 것들을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죄를 고백하면서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예배하는 것이 곧 신령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진정 곧 진리는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거짓”“교만”“불의”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위선”입니다. 위선은 겉과 속이 다르고 -척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진실됨입니다. 진실은 하나님 앞에서 겉과 속이 똑같은 것입니다. 솔직함입니다. 거짓이 있으면 곧바로 고백하고 정직한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나오는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올 한 해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갑시다. 2013년에 예배의 회복을 이루는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