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개탁

Happy New Year!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한국의 한 신문에서는
대학교수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를 발표했습니다.:
거세개탁(擧世皆濁).

꽤 어렵게 들립니다.
“온 세상이 모두 탁해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바르지 않아
홀로 깨어있기 힘들다.”는 뜻이랍니다.
그런데
2013년도 그리 쉽게 지나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새해벽두부터
섭씨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강추위가 닥쳐서 한강이 얼었답니다.
마음까지 얼어 붙으면 안되는데요.

미국은 재정절벽(fiscal cliff)를 간신히 모면했지만
미국의 국가 부채가 어마어마합니다
(10조 달러, 1경원을 웃도는 말 그대로 천문학적 숫자).

경제야 2008년 이후 계속 불경기를 맴돌고 있어서
그러느니 한다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바르게 살려는 마음도

진리를 추구하려는 생각도

더불어 살려는 시도도

물질만능주의와 극도의 개인주의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홀로 깨어있기 힘든 세상임에 틀림없습니다.

2.
주일설교에서 함께 살펴본 이사야 53장은
온 세상의 죄 짐을 홀로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분은 고난 받는 종(suffering servant)으로 오셨습니다.
무시 받으셨고, 거절당하셨고, 버림받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But he was wound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crushed for our iniquities; upon him was the chastisement that brought us peace, and with his stripes we are healed.(Isa 53:5 ESV)

이사야 53장 속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혼탁한 세상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을발견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치료자요, 힘이요, 구원이심을 고백합니다.

설교시간에 다루지 못했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으면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도 걸어가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불사하는 신앙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물결이 강하게 흘러도
살아있는 송사리처럼
세상 물결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처럼 이사야 53장은
우리가 단지 바라보고 믿어야 할메시야 예수님을 넘어서
우리들 역시
고난 받는 종으로 살아야 한다는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3.
힘이 들어도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기 원합니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되기 원합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깨어있기 원합니다.

나 혼자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
세상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고난 받는 종으로 나가기 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에가능할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진다해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바라보며
꿋꿋하게 걸어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래도 올 한 해가 여러모로 힘이 들고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십자가의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그 길을 걷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3 이-메일 목회서신)

근심상자

독일의 문호 괴테는 38년에 걸쳐서 파우스트를 집필했습니다. 21세에 시작해서 59세에 끝을 맺었으니 그의 인생 전체를 한 작품에 바친 셈입니다. 젊었을 때 집필한 부분은 자신감과 열정이 넘칩니다. 반면에 노년으로 갈 수록 인생을 관조하는 대작가의 신중함이 발견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한 밤중에 잿빛을 한 여인 네 명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여인은 결핍이고, 둘째는 죄악, 셋째는 근심 그리고 마지막 여인은 가난입니다. 네 여인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이 닫혀있습니다. 그 집은 남부러울 것이 없는 파우스트가 사는 집입니다. 가난은 서둘러 발길을 돌렸습니다. 죄악도 일찌감치 집안으로 들어가길 포기합니다. 결핍은 혹시 주인이 가난해 지면 그때 들어가겠다고 말하면서 그림자처럼 홀연히 사라집니다. 네 명의 여인가운데 남은 사람은 근심뿐입니다. 근심이 친구들에게 말한 대목이 눈에 보이듯이 실감나게 읽혀집니다.:”당신네들은 들어갈 수도, 발을 들여놓지도 않는군요. 나 근심은 열쇠 구멍으로 숨어 들어갑니다.”

열쇠구멍을 통해서 집안으로 들어간 근심이 그 집의 주인인 파우스트에게 말을 겁니다. 파우스트는 세상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근심은 집요하게 파우스트에게 엉겨 붙습니다. 물러가라는 파우스트의 명령에 자신은 와야 할 곳에 왔을 뿐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급기야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제 목소리는 귀에는 안 들려도 가슴 속엔 틀림없이 울릴 거예요. 저는 모습을 바꾸어가며 무서운 힘을 휘두릅니다. 육로에서건 바다에서건 영원히 불안을 자아내는 길동무로서 요청하지 않아도 언제든지 나타납니다.” 어쩌면 이렇게 근심을 잘 표현해 놓았는지요!

근심에 대한 국어사전의 뜻은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 함”입니다. 일이 해결되면 근심도 사라집니다. 젊었을 때는 해결되지 않았어도 패기와 자신감으로 모든 일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만, 나이가 들수록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많음을 느낍니다. 그때마다 우리들 마음의 열쇠구멍을 통해서 근심이 들어옵니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습을 바꾸어 가면서 무서운 힘을 휘두릅니다. 불안을 자아냅니다. 결코 길동무를 삼고 싶지 않은데도 불쑥불쑥 나타나서 앞길을 막아섭니다. 다루기가 참 까다롭습니다.

2012년 한 해가 아쉬움과 감사가 교차하는 가운데 저물어갑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마지막 한 달을 열심히 살았지만 인간만사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어디 하나를 딱 잘라서 정리할 수 없고 미완(未完)의 상태에서 새해를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은 일이야 마무리가 되지 않았어도 희망차게 새해로 이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길을 가로막는 어려움들은 마음 한 켠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습니다. 그것이 곧 열쇠 구멍 사이로 들어온 근심거리가 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근심 상자를 하나씩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 해가 가기 전에 마음 속에 있는 근심거리, 해결되지 않아서 속을 태우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서 근심 상자에 차곡차곡 담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상자가 꽤 커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근심걱정을 달고 살기 때문입니다. 근심 상자의 뚜껑을 꼭 닫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무척 사랑하셔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근심상자를 얼른 받으실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똑 같은 삶을 사셨기에 우리들이 겪는 염려와 근심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남겨두신 제자들을 향해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말씀하셨습니다. 열쇠구멍으로 들어올 만큼 교활하고 변화무쌍한 근심이라도 예수님 앞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꼭 붙잡는 믿음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우리들 각자의 근심 상자를 예수님께 넘겨드리고 힘차게 새해를 맞이합시다. (2012년 12월 28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승리의 종

이사야서 53장을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은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여기서 고난 받는 종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어떤 개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어려움 가운데서 끝까지 하나님을 믿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백성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처절한 역사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서 희생물로 쓰였다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사야서 53장을 700여년 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받고 믿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는 종은 풍채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는 연약한 모습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질고와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죄를 지어서 형벌을 받는다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찔리셨고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렸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고난 받는 종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본문에 나타난 고난 받는 종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들이 모두 양같아서 그릇행하고 하나님을 버렸는데 예수님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는 어떤 폭력이나 거짓된 일을 꾸미지 않으셨는데 죽으셔야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홀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유월절 어린양처럼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고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상하게 하셨고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악을 이기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마지막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송구영신의 계절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깊이 묵상하고 그 사랑과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원합니다. 이사야서 53장을 반복해서 정독함으로 그 안에 깃든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눈으로 보일 듯이 그려지고 그가 이루신 사역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지기 원합니다.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새 힘과 소망을 줄 것입니다. 할렐루야!-河-

죽음으로 가는 종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이틀 앞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이 주님의 종의 죽으심이라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맡겼습니다. 추수할 때가 되어서 주인의 몫을 가져오려고 종을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다른 종들을 보냈지만 매한가지였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냅니다. 아들은 대우를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소작인들은 아들을 죽입니다. 상속인을 없애면 땅이 자신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과 행함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한 기적들을 보면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발걸음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사야서 53장 7-9절 말씀은 주님의 종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주님의 종은 그의 비천하고 볼품없는 모습 때문에 무시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마치 자신이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처럼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마저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찔렸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고난과 질고를 지고 가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말없이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6절에서 우리가 양 같아서 각기 제 갈 길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와 똑같은 양이 되셔서 말없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주님의 종이 죄를 지어서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분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기까지 복종하셨고 결국 무덤에 묻히시는 죽음의 끝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속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은 영락없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셨고, 유월절 어린양이 죽어서 그 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듯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양이 우리를 대신해서 제물로 드려지듯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일 년에 한 번씩 성전에 가서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려야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한 번에 그리고 영원히(once and for all)사해졌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강절 마지막 네 번째 주일을 보내고 성탄을 맞으면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부터 급기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말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마음 속 깊이 모시기 원합니다.-河-

연말연시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을 읽다 보면

“두려워 말라(do not fear)”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일 겁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놓고 느끼는
삶에 대한 두려움,
모든 인생이 향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
우리들은 사나 죽으나 두려움을 등에 엎고 갑니다.

두려움에서 파생된 자잘한 일들 가운데
염려와 근심이 있습니다.

두려움을 업고 있다면
염려와 근심은 옆구리에 달고 삽니다.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염려와 근심 때문에 휘청거립니다.

열등감 또는 자신 없음이라는 짐을
가슴에 달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앞으로 나가기가 힘겹습니다.

인생길이 전후 좌우로 흔들리고
갈팡질팡 방황합니다.
넘어지기도 합니다.

2.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즘
지나온 350여 일을 생각하면
아쉬움과 더불어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염려와 근심
그리고 무너지는 자신감을 감내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금 더”라는 아쉬움은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단골손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지나온 삶의 구비구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삶의 구석 구석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내기 원합니다.
거기서 범사에 감사가 나옵니다.

두려움, 염려와 근심
자신 없음까지
은혜로 녹여버립시다.

3.
한 해를 이렇게 보내지만
우리 가슴에 여전히
남겨진 일들이 있습니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제목,
오랫동안 또는 한 해 동안 씨름했지만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입니다.

내년으로 넘겨야 할 것들입니다.
기다림의 훈련이 무엇인지
실제로 깨닫게 해주는 일들입니다.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끄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듯이
우리들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견뎌내야 할 소명입니다.

앞으로 견뎌야 할 인생길,
신앙의 길,
올 한해 풀지 못한 숙제들도
기쁘게 지고 새해를 맞기 원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1:21)
Keep yourselves in the love of God, waiting for the mercy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leads to eternal life.

하나님 아버지
한 해를 떠나 보내면서
신실하신 아버지를 꼭 붙잡고
그 안에서 위로 받고 힘을 얻게 하옵소서.
참빛 교회 식구들을 한 분 한 분의 인생길을 친히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2.12.20 이-메일 목회서신)

고난 받는 종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 무감각에 빠진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보내는 종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볼품도 없고 힘도 없어서 사람들은 주님의 종을 무시했습니다. 철저하게 버림받았습니다. 누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우리 주님, 나사렛이라는 하찮은 동네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세상의 주목을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빌립보서 2장에서는 종의 형체를 갖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귀히 여기지 않고 무시할 수밖에요.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죽기까지 버림받으셨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무시 받고 버림받은 주님의 종에 대한 연민이 생깁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면 왠지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사야 53장 4-6절은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버림받은 종과 우리들을 연결시켜 줍니다. 그분이 무시 받고 버림받은 것이 우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똑같이 갖고 계셨습니다.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이 욥이 겪는 고난을 보고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결과라고 단정했듯이, 주님의 종이 겪는 질고와 슬픔 역시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가시와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서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벌(징계)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화롭게 잘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화평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회복되었고 치유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종은 철저하게 우리를 위해서 보내지셨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겪을 고난과 질고 그리고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까지 모두 자신이 담당하셨습니다.

본문 속에 나타난 고난 받는 종은 우리를 위해서 가진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로부터 수없는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치료하고 회복하는 일이었다니 이 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죄의 짐이 없어졌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이사야 53장 속의 고난 받는 종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모습과 거의 흡사합니다.

6절은 앞 두 구절의 마무리입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해서 제 갈 길로 갔습니다. 시력이 약한 양은 대열에서 이탈하면 금방 길을 잃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길을 고집부리면서 갑니다. 우리의 모습이 양에게서 발견됩니다. 영적 감각이 무뎌지면 양처럼 가야 할 길에서 이탈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심지어 버리는 본능이 아담과 하와 이래 우리들 속에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양이 자기 힘으로 대열로 돌아오기 힘들듯이 우리들도 우리 힘으로 바른 길로 돌아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깃든 대속의 은혜입니다.

대강절 세 번째 주를 맞아서 우리 안에 임하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 속 깊이 떠올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 조아리며 감사하기 원합니다.-河-

헵시바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이들과 전화를 하면꼭

아빠 엄마는 잘 있느냐고묻습니다.

그러면 괜히 기분이좋습니다.

아이들과 얘기하다보면

자신들이 직장을 가지면

편안하게 지낼 수있도록 해 주겠답니다.

조금만 기다리고 합니다.

경쟁이 심한 세상에서

자신들만 잘 살아주어도 감사하지

부모가 되어서 자식들에게신세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가는지

내심 마음이 든든하고기분이 좋아집니다.

늘 제가 무엇인가해 주어야 할 아이들 같았는데

어느덧 커서 저희부부를 생각해 주는 것에

부모로서 감사한 마음도듭니다.

2.

지난 주일 설교에서

자신이 지으시고 택하신인간들에게 무시 받고

상처받았을 하나님의마음을 헤아려 보길 부탁 드렸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이브, 이스라엘 백성들만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했을까요.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을무시하고 버리는 대표일 수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는양처럼 그릇 행해서

제 갈 길로 가려는성향이 있습니다.

당장 올 한해만 돌아봐도

우리는 참 많은 기도를하나님께 쏘아 올렸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지않고

우리들이 갖고 싶은것, 원하는 것을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배워서 이론적으로알지만

결국 우리들의 기도는대부분이 이기적이 간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괜히송구스러워집니다.

수십 년을 믿었으면이제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할수 있으련만

여전히 내가 주인입니다.

“주세요”라는 기도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3.

올 해가 보름 남짓남았습니다.

이제 남은 기간 동안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소원을 간구하기 보다

진실되게 하나님 뜻을먼저 생각하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찬양하듯이

주님의 기쁨이 되는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배려하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것이지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신앙의진수가 있고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헵시바 – 나의 기쁨을 너에게 둔다 (사 62:4)


하나님 아버지

한 해를 돌아보면 많은 은헤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기간동안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하옵소서.

받은 은혜를 하나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베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2.13 이-메일 목회서신)

버림받은 종

구약성경의 이사야서는 메시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기록된 책입니다. 특별히 네 개의 종의 노래들(songs of servant)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과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이사야 7장 14절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는 말씀은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을 예언한 말씀으로 신약성경(마1:23)은 물론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믿어 왔습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메시야 예언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53장입니다. 다른 종의 노래들과 달리 이사야 53장은 전체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매우 실제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기 700여 년 전에 예언된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매우 정확한 기록입니다. 예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53장을 자세히 읽고 깊이 묵상할 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모습까지 자화상처럼 깊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위로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공감하고 힘을 얻습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서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이 새롭게 회복됨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계절인 대강절에 이사야 53장을 함께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올 해의 남은 한 달 동안 우리 교회 전체가 이사야 53장을 함께 읽고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주일 설교를 듣는 것에 그치지 마시고 평소에도 종의 노래인 이사야 53장을 틈틈이 소리 내서 읽으시고, 마음 깊이 새기시고, 각자의 삶에 대입해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손길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사야 53장 1-3절을 살펴봅니다. 본문 속에 이스라엘의 상황은 심각합니다. 국가는 힘이 없습니다. 열강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 팔로 임해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영적 무감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때의 상황과 너무 흡사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종교는 위선적인 지도자들로 인해서 오염되었고 백성들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지만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셨는데 그곳은 메시야가 태어날 동네라고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연한 가지 같았고 뿌리가 드러낸 나무처럼 별로 근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풍채도 그리 훌륭하지 못하셨음은 예수님의 외모를 언급하는 말씀이 없는 것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메시야는 무엇인가 다르고 왕처럼 외모부터 특별해야 한다고 믿었던 백성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하나님의 능력을 기적을 통해서 베풀어도 예수님을 멸시했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질고와 고난을 온 몸으로 느끼시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아름다움이나 존귀함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죄인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이시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무시당하셨고 철저하게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버림받는 우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이 이렇게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 사랑에 한 목소리로 그리고 한 마음으로 감사하기 원합니다.-河-

대강절을 지내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부터
성탄절 전 주일까지
네 주간이 교회력에 따라서 대강절(Advent)입니다.

교회력에 대해서 올 해 1월 달 주보에 실었던 글을 다시 옮겨 옵니다.

교회력은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회가 여러 절차를 걸쳐서 제정한 교회의 달력(church calendar)입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교회력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가톨릭의 성자들을 숭배한다는 이유로 배척되기도 했지만, 현대에 와서 교회력의 중요성이 다시금 강조되고 있습니다. 교회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전반부 6개월은 예수님의 탄생, 사역, 고난,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들이고, 후반기 6개월은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 성령과 더불어 동행하는 성도와 교회의 삶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교회력을 따라서 한 해를 보내면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고 성령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 주일 예배순서 앞에 교회력을 표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Advent)부터 시작됩니다. 성탄절 4주전부터 시작되는 대강절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실 것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대강절 기간 동안 강단에 촛불을 하나씩 켜가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또한 교회력을 상징하는 색깔이 있는데 대강절은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권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지만 온 인류를 구하실 메시야요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성탄절 이후 사순절 전까지의 6주간은 주현절입니다. 주현(Epiphany, “빛으로 나타나심“)이라는 의미대로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public life)를 시작하십니다.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할 메시야이심을 세상에 보이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주현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주현절의 색깔은 흰색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주현절이 끝나고 고난주간 전까지가 사순절(Lent)입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시작되는데, 금식과 선행 등을 실천하면서 1년 365일 가운데 10분의 1이 조금 넘는 40일을 경건하게 보내게 됩니다. 사순절의 색깔도 대강절과 마찬가지로 보라색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 신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사순절이 끝나면 고난주간(Passion week)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들 역시 자기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기로 결단하는 기간입니다. 고난주간의 색깔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빨강입니다. 고난 주간이 끝나면서 곧이어 부활주일을 맞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절기입니다. 부활주일의 색깔은 흰색입니다. 부활주일 새벽에 흰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부활절 후 7주간이 끝나면 오순절 성령강림절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의 약 6개월 기간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강조됩니다. 그러고 보니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순절 이후부터 그다음 대강절까지 긴 6개월 동안의 색깔은 초록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과 신앙의 성숙을 뜻할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력을 따라서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뜻 깊은 일입니다. 매주간 주보에 있는 교회력을 따라서 올 한해를 주님과 동행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2012년 1월 15일 주보 생명의 샘에서)

2.
대강절 기간을 보내면서
매 주일 우리들 마음 속에도 촛불을 하나씩 밝히면서
성탄을 기다리기 원합니다.

촛불이 우리 자신을 밝혀 주기를,
촛불처럼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서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우리가 매 주 하나씩 켜는 촛불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길 원하면서
대강절 촛불을 마음에 키는 것입니다.

대강절은 연말연시와 맞물려 있어서
자칫 우리들 마음도 분주하기 쉽습니다.

잠시 잠깐이라도 멈춰서
한 해를 돌아보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대강절에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차분하게 그렇지만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한 대강절을 맞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심으로,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2.6 이-메일 목회서신)

감사의 예배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쫓아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예배하는 존재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께는 영광이 됨을 이사야서 43장 7절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줍니다.:“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성경에는 예배를 가리키는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히브리어“샤하”가 대표적입니다. 샤하는 하나님은 물론 왕과 같은 지도자들 앞에 허리를 숙여서 경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 18장 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을 때, 아브라함은 몸을 굽혀서(샤하) 그들을 맞았습니다(창18;2).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살려준 후에 땅에 엎드려(샤하) 절했습니다(삼상 24:8). 사울이 여전히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7장 2절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러(샤하)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밖에도 예배에 대한 히브리어로 경외심에 해당하는 “야레,” 섬김에 해당하는“아바드”와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에도 예배에 해당하는 말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히브리어 샤하와 맞물리는“프로스큐네오”로서 몸을 굽혀서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몸을 굽혀서 존경과 경외심을 표시해야 합니다.“세보마이”라는 단어는 존경과 헌신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것입니다.“라트류오”는 실제로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일에 몸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예배는 하나님의 계심, 하나님 이름의 권위, 하나님의 성품과 하시는 일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도 필요합니다. 찬양과 감사도 예배의 필수요소들입니다. 이처럼 예배는 하나님께 모두 드리는 영적 축제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을 드립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늘의 위로와 치유 그리고 은혜를 체험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예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138편은 다윗이 커다란 위험 속에 있다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은 후에 드린 개인 감사시입니다. 어려움은 늘 닥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손의 능력을 구하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함을 배웁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배에는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함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솔직함과 정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길 부탁하셨습니다(요4:24).

우리들도 본문의 다윗처럼 주님의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성품, 기도를 들어주시는 은혜, 환난 날에 구원해 주신 체험을 떠올리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자신 혼자만 감사하지 않고 다윗처럼 온 세상 사람들을 감사의 자리로 초대할 수도 있습니다. 열방이 다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신앙은 물론 삶을 온전케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주님의 보호하심과 구원하심이 임합니다.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한 명의 나병환자처럼 우리들도 감사의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욥처럼 무슨 일이 닥쳐도 입술로 죄짓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감사의 마음을 갖기 원합니다. 우리의 감사가 예배로 이어지길 원합니다. 감사 속에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