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품앗이

작년 시카고에서 열린 청년 집회에 참석했다가 몇몇 청년들과 요즘 대세인 페이스북(facebook)으로 서로 소통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때부터 젊은이들 용어를 빌리면 “페이스북질”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지경이 생각보다 넓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잊었던 친구들을 마구 찾아 줍니다.

페이스북을 시작하면서 10년 만에 찾은 친구가 있습니다. 동부에 있을 때 성당에 다니는 오누이와 함께 매주 월요일 성경읽기 모임을 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성실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오빠는 뉴욕으로 직장을 다녔고 동생은 의대를 준비 중이었는데 월요일이 되면 꼬박꼬박 제가 다니던 신학교 기도실로 찾아와서 성경을 읽고 서로 느낀 점과 기도제목을 나누는 시간을 한 시간여 가졌습니다. 인디애나로 옮기면서 이들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늘 궁금했었는데 페이스북이 이들을 찾아 주었습니다. 동생은 맨하튼에서 의사로 일하고, 오빠는 연방은행의 높은 자리에 올라서 어머니를 모시고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세 식구가 모이면 제 얘기를 자주 했었고 어디 있든지 좋은 목사가 되길 기도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서로 연락할 수는 없었지만 기도 가운데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페이스 북은 개인의 속사정이 모두 드러나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롭게 조절하면 서로의 마음을 여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 친구들이 올리는 글을 보면서 “좋아요”라고 공감할 수 있고 격려의 글을 달아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기도제목을 올려놓습니다. 그러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수십 년 만에 온라인에서 만난 친구들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거울 보듯이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대하고 사용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날 뿐 세상의 모든 일들이 유익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성경 말씀이 매사에 진리임을 또 한번 깨답습니다.

우리는 홀로서기가 불가능합니다. 그 만큼 연약하고 쉽게 부숴지는 질그릇들입니다. 서로 지켜주고 세워주고 북돋아 주면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일은 기도로 돕는 것입니다. 기도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온라인상에서 서로 연락하고 대화할 수 있듯이, 하나님과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수 없지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마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시편기자의 고백대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귓전에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것으로 응답해 주심을 믿습니다.

기도 가운데 가장 귀한 기도는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지는 금향로로 비유했습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예전에 만났던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앞으로 만나게 될 신앙의 동역자를 놓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피붙이 가족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저 멀리 지구 끝에 있는 이름 모를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곧바로 응답되는 것을 보고 기뻐할 수 있지만 이웃을 위한 기도는 금방 열매를 볼 수 없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이처럼 이웃을 위한 기도는 사랑과 소망으로 심는 기도의 씨앗들입니다.

세상에 눈물겹게 감사한 말이 있습니다.:“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그 어떤 입에 바른 칭찬이나 격려보다 뒤에서 묵묵히 기도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힘차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것도 누군가 뒤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의 기도, 가족들의 기도, 교회 식구들의 기도, 잊혀진 줄 알았는데 기도의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던 친지들의 기도가 오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줍니다. 이제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기도의 품앗이에 참여하기 원합니다. 기도 가운데 서로 연결된 세상은 참 아름다운 하늘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2012년 12월 26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스윙 스테이트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 대통령 선거가
10여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대통령 후보 토론도 끝이 나고
이제는 두 대통령 후보가
막판 선거유세에 한창입니다.

여론 조사에 의하면
누가 대통령에 선출될 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박빙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올 때마다
주목을 받는 곳이
바로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라고 불리는
오하이오입니다.

오하이오에서 누가 이기는가에
따라서 선거의 당락이 결정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역대 공화당 후보 가운데 오하이오에서 지고
대통령이 된 경우가 한번도 없답니다.
민주당도 지난 70년 동안
오하이오에서 패한 후보가 대통령이 된 경우는
케네디 한 명뿐이라니 오하이오가 주목을 받을 만 합니다.

이것은 오하이오가
미국의 축소판처럼 미국인들의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내는
인구 분포를 갖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과연 이번 선거에서도
오하이오가 스윙 스테이트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낼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겠습니다.

2.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 경합주)

– 대통령 선거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 가운데도 경합을 이루는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있어서
신앙의 승패를 가늠하는
어떤 영역, 생각, 행동 등등입니다.
(예; 큐티, 골방기도, 예배참석, 새벽기도, 전도, 사랑 베풀기 등)

여기서 무너지면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구약성경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서
이름도 바뀌고, 바벨론 문화도 습득하면서 지냈지만
한 가지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왕의 산해진미를 먹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방 신전에 제물로 드려진 부정한 음식들이
자신의 몸을 더럽힌다고 믿었습니다.

뜻을 정해서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의 많은 삶 가운데
먹거리만은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무너지면
자신의 신앙이 무너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경합지역!

하나님의 생각과 세상의 생각이 경합을 벌이는 영역입니다.
여기서 신앙을 양보하거나/무너지면
큰 일입니다.

대통령 후보들이 오하이오에서 지는 것은 양보할 수 없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이 무너지는 것이라면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저의 경우는
아침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큐티시간(경건의 시간)입니다.

큐티 시간이 무너지면
제 삶 전체가 흩으러 짐을 여러 번 경험했기에
큐티 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 애를 씁니다.

여러분 각자에게도
신앙과 세상이 경합을 벌이는 영역,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위해서라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영적 경합지역에서 승리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루 하루 주어진 신앙과 삶의 경주를

근사하게 마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홧팅!!!

하나님 아버지
신앙의 경합 지역,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갈등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선택하고,
신앙의 경합지역에서
멋지게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0.25 이-메일 목회서신)

공중나는 새를 보라 7 : 순결함

성경에 등장하는 새들 가운데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을 들라면 제일 먼저 비둘기가 떠오를 것입니다. 비둘기는 성령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창문에도 비둘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현장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성화에 나오는 비둘기들은 대개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비둘기가 순결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령이 순결한 비둘기처럼 내려왔음을 뜻합니다.

비둘기는 성경에 나오는 두 번째 새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새는 연속설교 처음에 살펴보았던 까마귀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후 비가 그치자 노아는 제일 먼저 까마귀를 내보내서 육지가 충분히 말랐는지 확인했습니다.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것을 확인한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7일이 지났을 때 다시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이번에는 감람나무 새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다시 7일을 기다렸다가 내보냈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비둘기는 육지가 드러났고 식물이 자라고 있음을 충성스럽게 노아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실제로 비둘기는 2차 대전 당시 영국군의 우편배달부로 활용되었습니다. 자기가 있는 자리로 돌아오는 귀소본능이 뛰어난 새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서민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바쳐지는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양이나 소를 드릴 수 없는 사람들이 비둘기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에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이 많을 정도였습니다. 비둘기의 순결함은 물론 비교적 온순한 성격 때문에 제물로 드려졌던 것 같습니다.

아가서에서는 솔로몬의 연인이었던 술람미 여인을 비둘기에 비유합니다. 특별히 술람미 여인의 눈이 비둘기 눈처럼 예쁘다고 묘사합니다. 공원에 가서 비둘기 눈을 관찰해 보았습니다. 작은 눈인데 무척 예뻤습니다. 순해 보였습니다. 또한 비둘기는 바위틈 절벽에 집을 짓고 살곤 합니다. 아가서에서 자신의 여인이 숨은 것을 두고 바위틈에 집을 짓고 사는 비둘기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비둘기는 성경에서 연인을 묘사할 정도로 매력 있는 새입니다.

오늘날에도 비둘기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공원에 가면 비둘기가 떼를 지어서 다닙니다. 번식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가가도 쉽게 도망가지 않을 정도로 인간과 친숙한 새입니다. 세계 어느 곳에든지 비둘기는 서식합니다. 그러다보니 비둘기가 귀찮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비둘기들의 오물이 거리를 더럽히기도 하고 비둘기가 울어대는 소리가 소음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는 우대받는 새가 비둘기입니다. 순결함과 충성스러움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노아의 방주에서 나뭇가지를 물고 올 정도로 충성스러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렸습니다. 구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와 신약성경의 첫 번째 마태복음에 비둘기가 등장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세대에 비둘기처럼 순결한 기독교인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비둘기처럼 내리는 성령의 임재와 역사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비둘기처럼 온유한 성령이 포근히 내려앉기를 기도합니다.-河-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놓고 많이 고민하고 또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Ecclesia)”고 하는데
이것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첫 번째로 편지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사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전1;2)
To the church of God that is in Corinth, to those sanctified in Christ Jesus, called to be saints together with all those who in every place call upo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both their Lord and ours;

성도들을 영어 그대로 직역하면 “성자들(saints)”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성도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는 불완전합니다.

티와 주름(spots and wrinkles)이 있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되었지만
죄성(sinful nature)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유리그릇처럼 불안할 때도 꽤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애지중지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겸손히 자신을 먼저 살피고
다른 성도들을 배려하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거룩하게 세워가야 합니다.

2.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the church of God, which he obtained with his own blood ).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
곧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라는 말씀대로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핏값을 지불하시고 사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교회 앞에서 잠잠해야 하고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 뜻에 맞도록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교회의 가치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본질과 본뜻도 와전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핏값으로 사신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를 애지중지 귀하게 여기고
교회를 예수님처럼 사랑하기 원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1:23)
the church which is his body, the fullness of him who fills all in all.

하나님 아버지
각처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들이
거룩하고 온전히 세워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0.18 이-메일 목회서신)

공중나는 새를 보라 6 : 신중함

성경에 나오는 새들은 당연히 팔레스타인 지역에 서식하는 새들입니다. 그 가운데 특이한 새가 오늘 함께 살펴볼 올빼미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올빼미 또는 부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부엉이라는 우리말에는 올빼미 과에 속하는 모든 새들을 포함하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올빼미보다는 부엉이가 어감이 더 좋은 듯 합니다. 레위기 11장 17절에 먹지 말아야 할 새들의 명단에 올빼미와 부엉이가 함께 나오는데 여기서 올빼미는 작은 부엉이, 뒤의 부엉이는 큰 올빼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올빼미는 모습이 특이합니다. 눈이 매섭고 서 있는 자세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눈꺼풀을 이용해서 눈을 껌뻑이는 능력도 갖추었습니다. 올빼미는 황폐한 곳에 살아서 까마귀처럼 섬뜩한 느낌을 줍니다. 야행성이라서 쉽게 눈에 띠지 않는 것이 다행이지요. 반면에 올빼미 또는 부엉이는 학자와 같은 느낌도 갖고 있습니다. 큰 눈에 안경을 맞춰 쓴 만화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올빼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탁월한 시력과 청력입니다. 올빼미는 낙엽 속에서 움직이는 쥐와 같은 동물을 감지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올빼미의 경우 머리 부분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감시 카메라가 360도를 회전하면서 사방을 살펴보듯이 올빼미의 머리도 180도는 물론 칡부엉이의 경우 270도까지 회전할 수 있답니다. 따라서 올빼미는 앞을 보고 있으면서도 뒤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올빼미의 감지능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에게도 영적 민감성이 요청됩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우는 사자처럼 사방에서 달려들어서 우리의 신앙을 방해합니다. 자칫 서 있다고 생각한 채 잠시잠깐 방심하면 금방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촉수를 세우고 사방에서 밀려오는 시험과 유혹에 대비해야 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올빼미가 사방을 두루 감찰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신앙 안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만 집착하면 우울해 지거나 필요 없는 영웅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현재만 생각하고 있으면 앞길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미래만 생각하면 자칫 현실과 동떨어진 몽상가가 될 수 있습니다. 올빼미가 사방을 관찰하듯이 우리들 인생길을 두루 살펴보고 신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가지에만 몰두해서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일에만 몰두하다가 가족을 소홀히 하는 것, 취미생활에 집중하다가 정작 중요한 생업을 소홀히 하는 것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신앙만 중요하다고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는 것도 균형을 잃은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관심사는 사방을 향해야하고 각각의 일들이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함을 올빼미를 통해서 배웁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의 눈이 먼저 하나님을 향할 때 영적인 촉수가 작동하고, 삶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시편기자는 자신의 처지가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았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부르짖고 탄식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익히 알았기에 하나님께서 사방을 두루 살펴주시고 보호해 주시길 구한 것입니다. 사방을 두루 살피는 올빼미처럼 우리들도 매사를 신중하게 살피고 기도하면서 신앙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河-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다음(Daum)을 비롯한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일제히 미국의 기독교 인구가 50% 밑으로 떨어졌다는
퓨 포럼(Pew Forum)의 조사 결과를 보도했습니다.
48%로 집계된 기독교 인구로 보아서
미국이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48%도 많은 편입니다.
설문조사에서 자신의 종교가 기독교라고 응답한
사람들을 모두 포함했을테니까요.

지난 수요예배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그 가운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말씀과 기도, 그리고 정기적인 예배 참석 등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적은 숫자일 것입니다.

젊은 세대로 내려가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현저하게 떨어질 것입니다.
기독교 인구 자체가 10대와 20대로 내려가면
20% 밑으로 내려 갈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독교 인구는 물론
기독교의 영향력이 적어 지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할 것을 부탁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짧은 질문 속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기 힘들 것이라는
뉘앙스가 깔려있습니다.

설마 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2.
동시에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점검하고
신앙의 허리띠를 졸라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종종 기독교는 종교를 넘어서
생명(生命,life)이라고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우리 안에 능력으로 임하시는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굳건히 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느끼고
고백하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긴밀해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31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앙망하는
– 하나님을 기다리고/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신앙이 깊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눈이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실 때
참빛 교회 성도님들의 신실하심에 멈추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우리를 통해서 믿음이 드러나길 원합니다.

참빛 교회 성도님들의 신앙의 끈이
더욱 견고해지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많이 변하고
하나님을 멀리해도
저희들은 하나님을 붙잡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0.11 이-메일 목회서신)

공중나는 새를 보라 5 : 날아오름

새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독수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독수리는 새들 가운데서 왕으로 불릴 정도로 모습도 멋지고 성격과 행동도 남다릅니다. 독수리의 눈은 매의 눈만큼 날카롭습니다. 1미터 이상이나 되는 커다란 몸을 갖고 있는 독수리가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오르는 모습은 참 근사합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지상에 있는 먹잇감을 낚아채는 능력도 있습니다. 까마귀와 마찬가지로 썩은 고기를 비롯한 육식을 가리지 않고 즐깁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 가운데 독수리야 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미국을 상징하는 새도 흰머리 독수리입니다. 몸통은 갈색인데 머리는 흰색입니다. 흰머리 독수리는 대부분 북아메리카에 서식합니다. 독립을 선언한 지 6년이 지났던1782년에 흰머리 독수리가 미국을 상징하는 국조(國鳥)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환경이 오염되면서 흰머리 독수리의 개체숫자가 줄고 있어서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답니다. 이처럼 독수리는 힘과 권력을 상징하기에 미국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를 상징하는 새가 되었습니다.

성경에도 독수리는 종종 등장합니다. 독수리에 대한 언급은 출애굽기 19장 4절에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께로 인도한 것을 두고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인도했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시체를 먹는 독수리는 까마귀와 마찬가지로 먹어서는 안 될 조류에 속합니다. 독수리의 공격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사용하셨던 이방 민족을 빗대서 말하기도 합니다. 적군이 독수리처럼 밀려 올 것이라는 말씀이 대표적입니다(신28:49).

어떤 상황이나 사람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두고 독수리처럼 날아간다고 표현했습니다(욥9:26).나뭇가지 높은 곳에 집을 짓는 독수리의 특징을 비유한 말씀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49장 16절은 들사람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에 대한 심판예언입니다. 에돔은 용맹스런 민족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독수리처럼 아무리 높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도 하나님께서 끌어 내리신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는 곳이 없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성경 속에서 독수리는 모습, 특징, 습성을 근거로 비유적인 소재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피곤하고 곤비합니다. 대부분의 삶은 기진맥진입니다.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소년이라도 한참을 걷다보면 지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듯이 근사하게 비상(飛上)할 수 있다고 깨우쳐줍니다. 사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있는 자리에서 독수리처럼 멋지게 날갯짓하며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하나님께로 날아오르는 멋진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특권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바라보는 것, 사모하는 것, 신뢰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하나님께 걸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파도가 밀려오고 폭풍우가 닥쳐도 주님과 함께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의 삶이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기 원합니다.-河-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좋은 아침입니다.

1.

날짜를 살펴보니
한달 이상 목요서신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제 숨을 돌리고
다시 일어서서 시작하는 마음으로
목요서신을 보냅니다.^^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요즘 새벽기도회에서는
구약을 모두 끝내고
신약성경의 첫번째인 마태복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했던 마태복음 8장에는
자신의 하인이 중풍으로 쓰러져서 괴로워하는 것을 본
백부장 (백 명의 신하를 둔 로마 군인)이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이 나옵니다.

유대인이 아니었던 백부장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하인이 큰 병이 들어서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곧바로 말씀하시지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마 8:8)
I will go and heal him.

백부장은 자신의 경우를 예를 들면서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아도
말씀(명령)만 하시면 하인이 나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8:10)
예수님의 극찬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선포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마 8:13)
그 즉시 하인의 병이 나았다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2.
백부장의 믿음,
그는 하인의 병이 꼭 나을 것이라는 마인드콘트롤과 같은 믿음보다
하인의 병을 낫게 하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무엇이 이루어지느냐의 여부보다
그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임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응답하십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이 말씀이 마음 속에 크게 울려 퍼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 삶, 가정, 학교와 일터,
우리가 사는 세상까지 오셔서
고쳐주시길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오르고
백부장처럼 이미 그 능력을 인정하게 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오늘 하루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아프고 고장 난 부분을 고쳐주실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오셔서 고쳐주옵소서.
오셔서 만져주옵소서.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자녀들을 책임져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0.4 이-메일 목회서신)

공중나는 새를 보라 4 : 자존감

세상에서 가장 흔한 새를 들라면 당연히 참새일 것입니다. 가을 아침 전깃줄에 앉아 있는 참새들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익숙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유치원에서 새들의 울음소리를 배울 때 제일 먼저 익히는 것이“참새는 짹짹”입니다. 실제로 참새는 세계 어디나 살고 있답니다. 몸집이 작아서 생존하기 쉽고 부지런히 먹이를 먹는 습성이 있어서 번식력도 뛰어납니다.

참새들의 모습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연고동색 깃털을 갖고 작은 머리에 눈은 초롱초롱합니다. 참새 소리는 약간 시끄러울 정도입니다. 새들에 대한 책을 쓴 팰로돈이라는 영국 분은 참새를 묘사하면서 “다른 새들은 노래하듯 지저귀는데 참새는 이른 아침부터 귀찮을 정도로 짹짹 거린다.”라고 했습니다. 참새의 번식력은 꽤 높아서 가을철 곡식이 익어갈 때 참새들을 쫓느라 허수아비를 세워놓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참새가 얼마에 팔리는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는 참새 두 마리가 동전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하셨고 누가복음 12장 6절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동전 두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습니다. 페니에 해당하는 앗사리온에 두 마리가 팔릴 정도면 참새가 얼마나 하찮은 새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흔하고 작은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신 우리들은 얼마나 더욱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이것을 두고 마태복음 10장 31절에서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참새는 흔한 새였기에“많은 참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6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도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 기억하시고, 참새가 얼마에 팔리는지도 아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자신의 백성을 기억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으시겠냐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인정해주고 귀하게 여겨줄 사람을 찾기도 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열등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실패에 대한 불안함, 혼자라는 외로움 등에서 열등감이 생기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참새까지 기억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새까지 사랑하시는데 하물며 우리들은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열등감에서 헤어 나오는 비결입니다. 열등감을 넘어서 자신의 귀함을 깨닫는 자존감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때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이 생기고 실제로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새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참새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같은 연약한 존재를 사랑하시고 돌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주심으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들의 가치가 높아집니다. 동시에 자존감도 높아질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흔한 새인 참새를 통해서 우리 안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河-

하나님 나라

“내 영혼이 은총 입어”(통495장)는 제가 즐겨 부르는 찬양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변합니다. 주의 얼굴을 뵙기 전에는 하늘나라가 참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가 마음 속에 이뤄졌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든지 거친 들을 걸어가든지 초막이나 궁궐에 살든지 예수님을 모신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로 변화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은 기독교인 누구에게나 익숙한 말이지만 막상 정의를 내리거나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궁색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설명도 종종 발견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내세(來世)라고 단정짓거나, 천국을 저 하늘 어딘 가에 있을 좋은 곳 즉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일전에 젊은이들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데 한 청년이 천국의 인구과밀을 걱정하는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또한 천국을 죽어서 가는 곳으로 오해한 나머지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의미가 없다고 치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천국 또는 하늘 나라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우선 용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천국은 신약성경의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려 하지 않았던 유대교의 전통을 고려해서 주로 사용한 용어입니다. 마태복음 외에 다른 성경말씀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더 많이 쓰입니다. 예전에는 “천당(天堂)”이라는 말도 사용했는데 이것은 기복주의가 가미된 정제불명의 한국식 번역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곳은 찬송가 그대로 그 어디나 하늘나라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눅17:20-21). 우리의 마음, 삶, 학업, 직장, 가정, 인간관계 등등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개와 누룩 서 말에 비유하셨습니다 (눅13:18-21).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지만 그것이 자라면 새들이 깃드는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누룩은 떡 반죽을 부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우리의 마음과 삶에 뿌려집니다. 신앙 성장은 그 씨앗이 점점 자라서 열매도 맺고 다른 이들의 쉼터를 제공하는 과정(process)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갑자기 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마음 속에 주님으로 모신 그 순간부터 우리 안에 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시간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씨앗이 심겨진 곳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롬14;17)는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릴 뿐만 아니라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 중에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믿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비밀” (눅8:1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밀을 깨닫고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권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알고 있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신앙은 앎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세상 속에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해야겠습니다. (2012년 9월 28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