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나는 새를 보라 3 : 보호하심

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날개는 말 그대로 새들이 하늘을 날 때 필요한 신체기관입니다. 그런데 새, 즉 조류에 속하면서도 날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날더라도 멀리 또는 높이 날지 못하고 날개만 퍼덕거리는 수준의 조류들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북극에 살고 있는 펭귄입니다. 펭귄은 마치 신사들이 파티에 갈 때 입는 연미복처럼 멋진 날개를 갖고 있지만 날갯짓만 할 뿐 날지 못합니다. 날기는커녕 걷는 것도 기우뚱거립니다. 솔직히 펭귄을 새라고 부르기도 조금 민망합니다. 하지만 펭귄도 물고기를 사냥하거나 적에게 쫓길 때는 날개와 짧은 발을 사용해서 비상할 정도로 민첩하게 달릴 수 있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생태에 맞게 신체구조를 설계해 주신 셈입니다.

조류에 속하면서 거의 날지 못하는 또 다른 새가 바로 닭입니다. 닭은 푸드덕거릴 뿐 거의 날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닭도 엄연히 조류에 속하고 날개를 갖고 있습니다. 닭의 날개는 어디에 사용될까요? 닭은 날개로 알과 새끼를 품어 보호합니다. 알이 부화되기까지 어미닭은 자신의 체온을 사용합니다. 닭은 몸이 따뜻한 온혈동물이어서 알을 품고 부화하기에 적합하게 창조되었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어미닭은 알에서 부화한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어서 보호합니다. 닭뿐만 아닙니다. 대부분의 어미 새들은 날개를 사용해서 알을 품고 부화시킵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가 어느 정도 자랄 때 까지 어미 새는 날개아래 새끼를 품어서 보호합니다. 새들의 모성본능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것을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는 것으로 비유해서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탄식하실 때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이처럼 새들의 날개는 새끼를 보호해 주는 기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새들이 날개로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듯이 품어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한 척 해도 누군가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함께 어울려 살면서 서로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미 간파한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날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시17:8-9).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숨기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길 원합니다. 험한 세상에서 우리를 홀로 있게 버려두지 않으시고 주의 날개 아래 품어 주시고 다가오는 모든 환난과 시련으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2 : 돌아옴

귀소본능(歸巢本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물들이 자기의 처음 서식지나 알을 낳는 곳으로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귀소본능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연어입니다. 태평양 바다에 있던 연어들이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을 잊지 못하고 마음 한편에 간직해 둡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일종의 귀소본능입니다.

새들에게도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제비가 대표적입니다. 철새인 제비는 추녀 끝에 지푸라기와 진흙으로 지어 놓은 집을 이듬해에 와서 다시 사용하기도 합니다. 비둘기도 귀소본능이 뛰어난 새입니다. 노아가 홍수가 끝났을 때 까마귀를 먼저 내 보냈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비둘기는 두 번씩이나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2차 대전 때 영국 공군은 비둘기 우편제도를 활용할 정도입니다. 어떤 새는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서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니 새를 비롯한 동물들의 귀소본능이 대단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영적인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지만 인간에게는 절대자를 찾고 자신의 창조주에게 돌아가려는 귀소본능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초월적인 신을 찾고 믿으려는 인간의 종교적 본능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믿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 8장 4절 말씀대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불안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뜻대로 살면 좋을 것 같지만 끝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 돌아와서 예배하는 이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예레미야 8장 7절에는 철새들의 이동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전 600여년 경에 철새의 이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대단해 보입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학(황새)는 정한 시기를 안다고 했습니다. 철새들이 정확한 시기에 맞춰서 이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황새뿐만 아니라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도 철새로 언급됩니다. 물론 히브리어 본문의 뜻이 꼭 똑같지는 않지만 세 가지 종류 모두 철새들입니다. 철새들은 계절에 맞게 옮겨 다니면서 서식합니다. 그들이 가야할 곳을 알기에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자신들의 살길을 찾습니다.

귀소본능을 가진 동물들과 철새를 보면서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늘에 철새가 목적지를 향해서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절을 좇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제 멋대로 사는 것을 한탄했습니다.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매 순간 철새들이 살길을 찾아서 날아가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살길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성경에서는 회개라고 합니다. 죄악된 세상에 살지만 일주일에 한번 주님께 돌아와서 예배합니다. 매일같이 일정한 시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합니다. 철새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품에 안겨서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들의 발걸음이 매 순간 주님께로 향하길 원합니다. -河-

공중나는 새를 보라 1 : 도우심

지난 달 초에는 야외예배로 모였습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공중 나는 새들을 보면서 제가 평소에 존경하던 존 스토트 목사님의 “새”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스토트 목사님은 영국 성공회 신부님으로 작년에 작고하셨는데 성경과 신학에 대한 저술은 물론 사역을 통해서 복음주의 교회를 이끌었던 훌륭한 지도자셨습니다. 스토트 목사님은 신학과 목회 외에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만물을 관찰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 가운데 새에 대한 관심이 특별하셔서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는 새들을 관찰하기 위해서 비무장지대를 방문하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앞으로 스토트 목사님께서 저술하신 <새: 우리들의 선생님>이라는 책을 참고해서 새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세상에는 9,000여종의 새들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약 10여종이 넘는 새들이 등장합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새는 노아의 홍수때 땅이 말랐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노아가 세상으로 내 보냈던 까마귀입니다(창6:7).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고 물이 마르기까지 공중을 날아다녔습니다. 두 번째로 내보낸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그릿시냇가에 숨었을 때 까마귀가 그에게 음식을 날라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말씀에도 하나님께서 까마귀 새끼를 먹이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까마귀를 길조(吉鳥)로 여기지 않습니다. 까만 색깔과 음산한 울음소리 때문입니다. 실제로 까마귀는 농산물을 해치기도 하고, 무엇보다 썩은 고기를 먹는 등 좋지 않은 행동을 한답니다. 까마귀들은 우두머리 없이 각자 생활하는데 여기서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반면에 까마귀는 암컷이 알을 품고 있는 동안 수컷이 먹이를 공급해 줍니다. 거동하지 못하는 어미 새에게 먹이를 갖다 주는 경우도 있답니다.

그렇다고 까마귀가 결코 아름다운 새는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도 까마귀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레11:15,신14;14).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는 까마귀 새끼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욥기 38장 41절에서는 까마귀 새끼가 먹이를 찾는 모습을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처럼 묘사합니다:“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하나님께서 울부짖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예비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공중 나는 새들을 보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들도 먹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먹잇감을 예비해 놓으셨고 그들에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새들이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새들이야말로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하늘을 날기 위해서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해야 합니다. 먹잇감을 찾기 위해서 작은 눈을 크게 뜨고 움직여야 합니다. 먹잇감을 발견하면 잽싸게 가로채야합니다. 때로는 자기보다 큰 맹수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 주의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신다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함을 공중 나는 새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울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먹을 것을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도우심이 참빛 교회 성도님들 모두에게 매일같이 임하길 간절히 원합니다.-河-

귀감 (龜鑑)

런던에서 열렸던 2012 올림픽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나갑니다. 몸은 미국에 있지만 마음은 조국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듯이 대한민국 선수단의 선전을 응원하면서 보름 남짓을 보냈습니다. 금메달을 13개나 따서 금메달 순위로 전체 5위의 성적을 거뒀으니 조그만 나라에서 대단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한 선수들의 눈물겨운 투혼이 우리 모두에게 큰 힘이 되었기에 오랫동안 우리들 마음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귀감이 되는 일화들이 전파를 탑니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선수단에는 일흔이 넘은 승마대표 선수가 있었습니다. 금메달 후보였던 한 중국 선수는 허들에 걸려서 다리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지만 일어나서 결승점까지 들어오는 투혼을 보였습니다. 남아공 육상팀에는 두 다리 모두 의족을 한 선수가 릴레이에 참가했습니다. 두 다리가 없는 선수가 의족을 한 채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의지와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메달을 따서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시는 부모님께 집을 사드리고 싶었다는 체조선수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xml:namespace prefix = st1 />양학선은 자신의 이름을 건 묘기를 성공해서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선물과 상금이 쏟아져 들어오고 심지어 집까지 기부하겠다는 기업이 생겼습니다. 본인은 물론 그동안 고생하셨던 부모님도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할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에 공중에서 세바퀴를 도는 묘기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겠습니까? 양선수가 흘린 땀에 비하면 그가 받은 보상이 결코 커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선수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세월은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올림픽 3연패를 노리던 장대높이뛰기의 이신바예바는 자신의 신기록에 한참 못 미치는데도 그만 넘지 못하고 중간에 걸려서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최선을 다한 선수의 여유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역도 선수 장미란은 4년 전만 해도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여자 역도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이번에 새로 등장한 러시아와 중국 선수들에게 밀려서 그만 메달획득에 실패했습니다. 마지막 역기를 들다가 실패한 후에 역기를 매만진 후에 기도하던 모습은 금메달을 땄을 때보다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인간사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치고올라오는 새로운 세대에 자리를 물려줘야 할 순간이 있음을 몸소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한 유도선수는 운동선수로서는 환갑이 넘었을 서른 다섯의 나이에 생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번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16강 전에서 경기를 하다가 이마가 찢어 졌습니다.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지만 붕대로 감고 경기에 임해서 승리를 거둡니다. 8강전에서는 손톱이 부러졌습니다.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국3-4위전에 패해서 메달을 얻지 못하고 경기를 마쳤습니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밝게 인터뷰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신이 목표로 했던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한 선수의 여유로운 모습이 메달 리스트 이상으로 귀감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은 값진 일입니다. 그렇다고 꼭 금메달을 따고 일등을 해야만 귀감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낮고 낮은 자리에 오셨고 급기야 죄인들이 달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무릎을 그에게 꿇게 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선포합니다(빌2:10).

우리 같은 범인들이 귀감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할 때 누군가에게 귀감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을 닮고 따르면 귀감이 되는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울로 삼아 본받을 만한 모범”이라는 귀감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우리들의 생각과 삶이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는 근사한 인생을 살아내기 원합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2012년 8월 31일)

광야길이 주는 교훈 4 : 신실하심

광야길이 주는 교훈이라는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광야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역설적으로 깃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삭막한 들판입니다. 그곳에 있으면 모든 것이 힘겹고 막막합니다.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은 광야 길을 가고 있으면 때때로 절망감이 밀려옵니다.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그런 점에서 광야는 심판과 시험의 장소입니다.

광야에 대한 또 다른 성경적 의미는 광야가 하나님의 먹이심과 인도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광야의 삭막함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광야의 고독함이 하나님을 찾게 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갖게 합니다. 무엇보다 광야는 세상과 단절된 영적인 장소가 될 수 있기에 초대교회 이래 신앙훈련을 위해서 광야로 나간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엇보다 광야는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을 뜻합니다. 사방이 막혀있는 인생의 광야 길에서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하늘길만 열려 있습니다. 절박함 가운데 찾는 하나님이기에 신앙의 순수함과 간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광야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더 많이 체험했다는 간증을 많이 듣습니다. 광야 길을 신앙 가운데서 견뎌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겸손하게 받아드릴 줄 아는 아량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끝없이 펼쳐질 것 같은 광야길이지만 하나님의 훈련과 인간의 고통에는 끝이 있습니다. 광야 길은 지나가는 길이지 결코 광야 자체가 목적지가 될 수 없습니다. 신명기 8장에서 모세의 설교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40년의 광야생활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때 모세는 광야에서 체험한 하나님을 잊지 말기를 부탁합니다. 광야에서 훈련했던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간직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 신앙을 잃어버리면 약속의 땅이 축복이 아니라 심판과 저주로 변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광야보다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땅은 아름답고 풍부한 곳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리어 해가 될 수 있답니다. 무엇보다 교만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인도해 주셨건만 자신들의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자랑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약속의 땅의 풍요로움에 도취되어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버리고 세상 방식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버거워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면 세상 민족들이 멸망하듯이 똑같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자신이 세운 언약을 분명히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서 광야 40년을 지내야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로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없이 낮추셨고 이를 통해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의 끝에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16절). 아멘! -河-

광야길이 주는 교훈 3 : 인도하심

광야와 같은 인생길이지만 우리가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속단하다가 그만 벌을 받아서 광야 40년을 지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광야 40년을 훈련의 기간으로 삼으셨고 도리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체험하는 기회로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먹을 음식을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무도 먹어보지 못한 신비로운 음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셔서 40년 동안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하루 양식만 거두는 훈련을 통해서 매일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것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족하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삭막한 광야에서 자신의 백성이 길을 잃지 않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렇게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먹이심과 인도하심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기에 광야 생활을 견딜 수 있었고 드디어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하셨을 때는 광야생활의 끝도 이미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소개합니다. 그곳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광야 40년의 고생을 보상받고도 남을 멋진 곳입니다. 모세는 이처럼 신명기 8장에서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그곳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껏 기대감을 불어넣어줍니다. 이제 고생 끝이라는 것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듯이 롤러코스터와 같은 인생길에도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게 마련입니다. 무엇보다 인생의 내리막길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리 어려운 순간이 닥쳐도 6절에 있듯이 첫째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며, 셋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루치 만나만 거두라는 말씀을 그대로 따르면서 매일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힘든 순간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더욱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도 하나님의 함께하심 속에서 광야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광야길은 순간순간 닥쳐옵니다. 아니 인생 전체가 어떤 면에서 광야길입니다. 인생의 광야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아름다운 땅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 앞에 있음을 믿고 끝까지 나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河-

광야길이 주는 교훈 2 : 먹이심

“인생길은 광야길이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한 평생 살아가는 인생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광야의 특징 그대로 외롭습니다.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광야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기에 막막함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광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드바르”가 내포하고 있듯이 광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로 나가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습니다.40일 동안 금식을 하신 후였기에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셨을 것입니다. 그때 마귀가 돌을 갖고 떡을 만들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응답하셨습니다(마4:4).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명기 8장 3절 말씀을 갖고 마귀의 시험에 말씀으로 응수하신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단호히 반대하십니다(마4:7). 셋째는 자신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줄 것이라는 권력의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역시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만 섬기라는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이처럼 광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임과 동시에 마귀의 유혹이 있는 시험의 장소입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신명기 8장의 경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음으로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벌이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깃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광야는 낮아짐의 훈련 장소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장소였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 지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광야가 주는 교훈이 또 들어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먹이심과 공급하심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는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날마다 진영에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는 하루 분 양식만 거둬야했습니다. 하루하루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라는 훈련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고 입히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서 먹이신 것을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훈련시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을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신의 백성을 살려주신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걸어가는 인생의 광야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가 지치고 힘든 여정이지만,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우리를 필요를 채워주시는 손길입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든지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먹이시는 손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어려울 때 함께 하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공급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河-

바쁨

좋은 아침입니다.

1.
한국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가운데
시간과 관련된 대표적인 것이
아마 바쁘다빨리빨리일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우리나라는 지난 40여년 동안
세계가 놀랄만한 경제성장을 이뤘습니다.
빨리빨리 정신이 한몫을 톡톡히 했을 겁니다.

미국생활도 바쁘기는 똑같습니다.
아니 미국 시계가 더 빨리간다는 말이 있듯이
한 주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들 역시 바쁘게 살아갑니다.
시간에 쫓기고
늘 급한 일에 허덕거립니다.

2.
2천년 전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바쁘게 사셨습니다.
30년을 목수의 아들, 평범한 나사렛 청년으로 사셨고
나머지 3년동안만 공생애(public life)로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 생애의 약 10%를 사역하신 셈입니다.
그러니 그 3년이 얼마나 바쁘셨겠습니까?
그렇게 사셨기에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는
다 이루었다”(19:30)고 선포하실 수 있으셨겠지요!

이쯤되면 예수님이야말로
시간관리의 달인이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몇가지 힌트(clues)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 아무래도 해이해집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셨습니다.
그러다보니 한 시도 소홀히 허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꼭 성취해야 할 사명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하시려는 사명,
죄인들을 구하시려는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사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3년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갖고 계셨습니다.
3년 동안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오가시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 등
메시야로서의 삶을 사셔야했습니다.
자신의 때를 알고 계셨기에 그 때에 맞춰서 3년의 시간을
최대로 사셨습니다.

3.
매일같이 바쁜 일로 쫓기는 우리들도
예수님의 시간관리 원칙을 배우기 원합니다.

매사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질구레한 일보다 주신 사명을 따라
우선순위를 매겨서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도 제한된 시간을 삽니다.
그렇다면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어느덧 8월도 하순으로 접어듭니다.
올 한해도 3분의 2가 지나가는 셈입니다.
하루 하루
후회없이 살아갑시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삽시다.

시간에 쫓기기보다
시간을 통제할 지혜를 구합시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하나님안에서 순간순간 감사와 기쁨을 꼭 맛보기 원합니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전도서 3 12)
I know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for men than to be happy and do good while they live.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시간에 쫓기지 않도록 지혜를 주시고
때때로 하나님 안에서 영적 심호흡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8.16 메일 목회서신)

광야길이 주는 교훈 1 : 낮추심

인생길을 가다보면 굴곡이 있게 마련입니다. 정상에 있는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산등성이를 걸어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때때로 아니 우리 인생의 대부분이 골짜기를 걷는 삶이 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늘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타락한 세상에 살아갑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실낙원, 낙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왜곡됩니다. 땅은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냅니다. 인간은 물론 이 땅에 살아가는 생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합니다. 한번 들어온 죄가 창조질서를 구부러뜨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질서정연한 세상을 만드셨건만, 인간의 죄로 인해서 다시금 세상은 혼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타락한 세상에 살다보니 모든 것이 예측불허입니다. 악이 고난을 가져다줍니다. 잘못된 세상이 우리에게 어려움을 줍니다. 인간관계는 물론 세상의 질서들이 혼란스럽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타락한 세상에 살기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우리들 안에 남아있는 죄성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자초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앞으로 4주간동안 살펴볼 신명기 8장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직선도로로 가면 일주일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인데 40년을 광야에서 지냈으니 그들에게 닥친 고난이 엄청났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되고 인생길도 지름길만 다녀야하건만 4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낸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다가 그만 일종의 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일을 행하시던지 그 안에 선하신 뜻을 품고 계십니다. 설령 자신의 백성들이 그릇행해서 벌로 광야 40년을 거치게 하셨지만 그 안에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배우는 광야 길의 교훈은 첫째로 광야 40년이 낮추심의 훈련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만심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비하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갖는 최고의 힘은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지내면서 교만은 물론 자기비하까지 모두 없애고 진정한 겸손, 낮아짐의 훈련을 하기 원하셨습니다.

둘째로 신뢰의 훈련이었습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광야의 훈련이 길어질수록 하나님께 붙어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은 줄 하나님도 아셨기에 광야 40년 동안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신뢰의 훈련을 시키시면서 훈련과정에 징검다리를 놓아주신 셈입니다.

우리들도 인생의 골짜기를 힘겹게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듯이 인생의 광야 길을 낮아짐과 신뢰를 훈련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인생의 광야길을 겸손하게 주님을 더욱 사모하고 바라보는 시간으로 만들기 원합니다.-河-

신앙의 경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도

올림픽에 대한 단상이네요.

올림픽에 나오는 선수들의
똑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올림픽을 위해서 4년 동안
자신의 분야에서 반복되는 훈련을 했다는 점입니다.

엊그제 체조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묘기를 발굴해서
그것을 완벽하게 연기함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공중에서 서너 바퀴를 도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건 묘기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까를 생각해 보니
마음이 짠합니다.

말 그대로
밥 먹고 그것만 연습했을 것 같습니다.

한 레슬링 선수는
눈두덩이 시퍼렇게 부어 올랐습니다.
그래도 그 선수는 끝까지 선전해서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비결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신보다 연습을 많이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이룬 성과는
훈련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훈련이 매우 지루하고, 포기하고 싶고,
때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할 정도로
회의가 찾아 왔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끝까지 참아가면서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설령 메달을 따지 못해도
이런 훈련의 과정을 거친 모든 선수들은
챔피언들임에 틀림없습니다.

2.
어떤 면에서
신앙 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거듭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올림픽 금메달이 아니라
하늘나라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한 경주이기에
우리들이야 말로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당할 훈련의 과목들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예배입니다.
거기에 이웃사랑이 덧붙여지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을 자신 안에 내면화시켜야 합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고,
삶 속에서 순간순간 기도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훈련을 거듭해야 합니다.

주일예배는 물론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제사가 되도록
예배의 자리로 나오는 훈련도 빠져서는 안됩니다.

솔직히 아주 재미있는 훈련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과 기도 그리고 예배를 통한 훈련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닮아가고
이 다음에 예수님을 맞을 준비이기에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꿋꿋하게 신앙을 훈련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45:18)
The LORD is near to all who call on him, to all who call on him in truth.

하나님 아버지
때로는 지루하고,
대충 넘어가고 싶어져도
핑계 대거나 게을러지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훈련에 힘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8.8 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