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기쁨

살아가면서 누리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배움의 기쁨입니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논어의 학이(學而)편 첫 구절에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 즉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여기서 때때로라고 번역한 한자어 시(時)는 가끔 또는 시간이 날 때만 배우는 것이 아니랍니다. 이어지는 습(習)과 더불어 ‘반복하여 학습하며 익힌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따금씩 생각날 때마다 배우고 익힌다면 배움에 결실을 맺기 어렵습니다. 꾸준하게 배우고, 배운 것을 삶에 적용해 나갈 때 배움의 기쁨과 열매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기쁘고 보람된 것은 목사는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는데 있습니다. 저는 배우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 가운데서 책을 통해서 배우는 것을 즐깁니다. 또한 목회를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면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어떤 때는 말 그대로 멘토로 삼고 싶을 정도의 배움이 있고, 때로는 반면교사로 삼으면서 제 삶을 돌아보게 하는 배움도 있습니다. 배운 것을 성도들이나 젊은이들과 나누면서 목회의 보람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목사이니 하나님 말씀을 한 구절씩 풀어서 설명해 나가고 말씀의 깊은 뜻을 함께 나누는 가르침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처럼 제가 생각하는 목사의 모습은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던 중에 지난 두 달 동안 매우 흥미로운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컴퓨터 강좌를 열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컴퓨터 강사라는 직함을 갖고 열명 남짓 되는 어르신들께 컴퓨터 교육을 시켜 들였습니다. 60세는 기본이고 70이 넘으신 어르신들입니다. 강좌가 있다는 광고를 보시고 자원하셨습니다. 거금을(?) 들여서 노트북을 구입하셨습니다. 교회 친교실에 앉아서 컴퓨터 강좌를 기다리시던 어르신들의 첫날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처음 하는 컴퓨터 강좌였기에 책임감이 막중했습니다. 컴퓨터를 켜고 끄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판설명, 인터넷 사용법과 폴더를 만들어서 디지털 카메라의 사진을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까지 차근차근 소개하면서 가르쳐드렸습니다. 수요일 오후에는 제가 강의하고, 주일 오후에는 교회 청년들이 일대일로 과외하는 식의 공부가 두 달 남짓 진행되었습니다. 어르신들의 배움의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반복해서 익히시고 집에서 복습하시고 주일날에는 청년들에게 일일이 질문하시면서 배움의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성경말씀을 컴퓨터에 타이핑해오는 숙제를 드렸는데 저장을 잘못하셔 숙제 해놓으신 것들이 없어졌을 때의 한숨은 땅이 꺼질 것만 같았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이-메일을 주고 받으시면서 기뻐하시던 모습도 잊을 수 없습니다.

배움에는 기쁨이 동반됩니다. 새로운 것을 깨닫고,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는 희열입니다. 또한 배움은 우리 몸과 마음에 엔도르핀이 돌게 합니다. 물론 배운 것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 스트레스가 될 수 있지만 반복해서 익히면 됩니다. 배우려는 열심은 백발이 된 노년의 나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배움을 통해서 빠르게 변하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배움의 길을 걷는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열린 마음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기에 여유와 넉넉함을 잃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새로운 것을 접하고 익히는 가운데 배움의 기쁨을 누리기 원합니다. (2012년 6월  29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하나님 사랑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가 무엇으로 살까를 생각해 봅니다.
내 힘으로 살 수 있을까?
지혜로 살 수 있을까?
세상의 물질로 살 수 있을까?
아니 가족들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을 의지해서 살 수 있을까?”

우리들이 의지해서 살고 있는 것들을
나열해 보니 끝이 없이 많습니다.
우리들 혼자서 홀로서기가 불가능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모두 없어질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의지하는 것들은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거나
우리 곁을 떠나게 될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물위에 떠다니는
부초(浮草)를 붙잡고 사는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2.
그때마다 하나님 믿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믿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밀하고 치밀한 계획으로 믿게 된 것임을
요즘 주일설교에서 살펴보는
요한복음 4장 말씀을 통해서 배웁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오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생수의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없어질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의지하며 살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났기에 더욱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호세아서 10 8절 뒷부분에 가면
하나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My heart is turned over within Me, All My compassions are kindled.

말씀이 매우 시각적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마음이 소용돌이칩니다.
그러더니
하나님의 사랑에 불이 붙었습니다.
아주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쏟아지겠지요!

3.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사랑!
때로는 잠잠하게
때로는 호세아 말씀처럼 불꽃처럼
때로는 빛으로 밝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삽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친
사랑의 불꽃이 우리들에게 임하길 원합니다.
그 사랑의 열기를 이웃에게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불꽃처럼 생겨난 사랑을
체험하고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6.28 메일 목회서신)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3

신령과 진정으로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 점점 더 진지한 대화로 발전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유대 청년이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는 것으로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예수님의 깊은 뜻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생수의 복음을 소개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낮에 물을 길러 나왔던 여인의 깊은 곳을 건드리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모든 삶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요, 꼭꼭 숨겨놓고 싶은 사연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으셔서 생수의 복음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서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예배로 넘어갑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마실 물을 달라고 했고, 여인은 한 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는 기적의 물을 달라고 했는데 지금은 예수님이나 사마리아 여인이나 물에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에 여인이 제기한 예배의 문제를 놓고 예수님께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조목조목 가르쳐주십니다.

당시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림신 산에서 따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인이 살고 있던 수가성은 구약의 전통적인 성지인 세겜 근처에 있었는데 그곳에 그림신산이 있었고 주전 400년경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산에서 예배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면서 예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전부터 조상들이 세겜에서 예배했다면서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가장 먼저 바뀌는 것이 예배에 대한 자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당연히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라면 예배가 감격스럽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자신이 갖고 있던 예배에 대한 궁금증을 예수님 앞에 풀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림신 산이나 예루살렘과 같은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어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서 예배하든지 하나님께 예배하면 됩니다. 아무리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말해도 예배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올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자의 마음가짐도 강조하십니다.“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령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 가운데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영(spirit)이시기에 신령으로 예배해야합니다. 진정은 거짓 없는 진실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직한 마음을 기뻐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여인이 메시야가 오시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을 보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여인에게 드러내십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내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자랑하고 전도합니다.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만난 여인은 이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모든 상처와 아픔은 회복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과 삶을 만져주신 예수님께서 오늘 예배 가운데 우리 모두에게 같은 은혜를 내려주실 믿습니다. -河-

젊은 사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새벽예배에서는
호세아서를 한 장씩 살펴보고 있습니다.

호세아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선지자 자신의 삶을 통해서
전해지는 매우 독특한 말씀입니다.

또한 호세아서에는
비유적인 표현도 많이 나옵니다.

오늘 살펴본 호세아 7장에는
이스라엘의 죄를
달궈진 화덕” “뒤집지 않은 전병
어리석은 비둘기” “속이는 활에 비유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음란의 죄로 설명하면서
달궈진 화덕(oven)에 빗대서 말합니다.
전병(flat cake)은 부침개와 같은 것을 뜻할 텐데
뒤집지 않고 내쳐 두었으니 한쪽만 익거나 탔을 것입니다.
균형을 잃었습니다. 교만이 그렇답니다.

어리석은 비둘기는  
이집트와 앗시리아같은 세상 나라로 날아갑니다.
하나님께 가야할텐데 말입니다.

속이는 활 (faulty bow)은 과녁에서 빗나가게 마련입니다.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을 라고 합니다.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와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모두 과녁에서 빗나간 화살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과녁입니다.
다른 곳을 겨냥하고 있으면 죄의 길로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도 죄를 많이 지으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한없이 아프셨습니다.
자신의 백성들에게 심하게 실망하셨습니다.

그래도 가만히 계실 우리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호세아 5 14-15절에는
하나님을 젊은 사자로 비유합니다.

젊은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듯이
죄 속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움켜지고
본래의 자리로 옮겨 놓으십니다.

움켜쥔다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의 뜻은 사자가 먹이를
조각 내듯이 찢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산산조각 내십니다.
그들의 죄악된 삶을 부숴버리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고통이 따릅니다.

자신의 백성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는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절대로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을 차려서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를 기다리실 뿐입니다.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같고 유다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쥐고 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5:14-15)
For I will be like a lion to Ephraim, and like a young lion to the house of Judah. I, even I, will tear and go away; I will carry off, and no one shall rescue. I will return again to my place, until they acknowledge their guilt and seek my face, and in their distress earnestly seek me.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젊은 사자처럼 임하실 때가 있습니다.
자꾸만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때
참다 못한 하나님께서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듯이 우리를 낚아채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 앞에 닥치는 고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행여나 우리들이 그릇된 길로 간다면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듯이 우리를 움켜쥐고
바른 길로 옮겨 주옵소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귀한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고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6.21 메일 목회서신)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2

네 말이 참되도다

유대인이라면 상종하지도 않았던 사마리아땅을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당시에는 천대받던 여인에 먼저 말문을 여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오시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 들렸을 때 생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천년 가까이 이어져온 편견을 깨기 위함이었고,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사마리아에도 펼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낮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물을 달라는 화두로 사마리아 여인과 말문을 트신 것입니다. 먹는 물로 시작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여인도 한번 먹으면 다시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신다는 말씀에 바싹 다가서면서 관심을 보입니다. 인적이 드문 한 낮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한 낮에 왔을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버거우니 물을 길러 오는 것도 신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모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여인의 마음을 읽으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는 순간 그녀의 심정을 알아차리셨기에 물을 달라고 먼저 말을 거셨을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어쩌면 생뚱맞은 그러나 하기 힘든 말을 하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예수님께서 여인의 개인사를 건드신 것입니다. 물을 달라고 했을 때 퉁명스럽게 대답할 정도의 여인이라면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에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여인이 솔직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그녀의 남편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세 번까지 결혼할 수 있는데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여인이 살아온 인생이 어떠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부담스러워서 인적이 드문 한 낮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온 것입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을 걸었을 때 퉁명스럽게 대답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여인의 아픔을 이미 아시고 차근차근 그녀에게 생수와 같은 영생의 복음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이 열린 사마리아 여인도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향해서“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선지자임에 틀림없다고 고백합니다. 우물가에 마실 물을 길러 온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복음이 그녀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가장 깊은 곳을 만져주셨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었던 마음의 아픔과 상처를 예수님께서 건드리셔서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을 선지자라고백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신앙은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때 임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손길입니다 -河-

절제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유럽에서는
4년마다 열리는 Euro 2012라는
축구시합이 한창입니다.

미국 시간으로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중계방송이 있는데
유럽의 축구강국들이 펼치는 시합들이어서
월드컵 못지 않은 인기와 흥미가 있습니다.

축구경기를 좋아하는 저에게도
Euro 2012는 큰 기쁨이자 유혹입니다.
멋진 경기와 세계적인 선수들의 묘기를 보면서
축구 경기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한가하게 축구경기를 즐길 수는 없습니다.
경기 하이라이트를 유튜브로 보거나
컴퓨터로 점수만 확인합니다.
물론
경기를 보고 싶은 충동을 꾹꾹 참으면서 말입니다.

2.
누구나 좋아하는 일이 있습니다.
운동경기일 수도 있고,
먹거리일 수도 있고,
사람들과 만나는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요즘 세대에는 컴퓨터나 게임일 수도 있습니다.

꼭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적당히 즐기면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기분이 좋아지는 일종의 취미생활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에 빠져들면
시간이나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게 되기에
절제(self-control)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절제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보다
음식을 적당히 먹는 절식이 힘든 것을
생활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지 않습니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외에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고 고장이 나게 마련입니다.

3.
우리는 매사에 절제를 훈련해야 합니다.
절제는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에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있어야 할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절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크라테이아에는
Self-control이라는 뜻 외에
숙달(거장, mastery)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매사에 절제를 훈련함으로
단정하고 균형잡이 삶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믿음의 거장으로 자라가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베드로후서 1 5-7)
For this very reason, make every effort to supplement your faith with virtue, and virtue with knowledge, and knowledge with self-control, and self-control with steadfastness, and steadfastness with godliness, and godliness with brotherly affection, and brotherly affection with love.(2Pet 1:5-7)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에도 지나치지 않게 하옵소서.
절제를 훈련하고
절제를 통해서 믿음의 거장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6.14 메일 목회서신)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1

물을 좀 달라

누구든지 조금씩은“편견(偏見)”을 갖고 사람들이나 세상을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말 그대로 한쪽으로 치우쳐서 판단하고 그것만이 옳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편견이 지나치면 사고나 관계에서 균형을 잃게 됩니다. 만사를 자기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자칫 외톨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빌4:5).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마22:39). 이처럼 신앙생활은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웃사랑까지 나가면 금상첨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공생애기간 동안 편견 없이 모든 사람들을 만나셨고 그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이 앞으로 한 달 동안 살펴볼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는 자신들만의 신앙을 고집했고 그림신산에서 따로 예배하면서 예루살렘 사람들과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들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외국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천한 백성 취급을 했습니다.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조차 부정하다고 생각해서 먼 길을 돌아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들리십니다.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쉬고 계실 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정오에 혼자서 물을 길러 온 것을 보면 이 여인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말을 건네십니다.:“물을 좀 달라.” 외간남자가 여인네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도 당시 관습에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유대출신인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신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가라는 환경에 맞게 물이라는 주제로 여인과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툴툴거리면서 답변을 하다가 한 번에 갈증을 해소하는 기적의 물을 말씀하시자 여인이 바싹 다가섭니다. 예수님께서 한번 먹으면 다시 목마르지 않는 특별한 물(magic water)을 주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먹는 물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셨고, 그 여인에게 특별한 사정이 있음을 감지하신 예수님께서 물이라는 소재를 갖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생수(living water)를 제시하십니다. 먹는 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마시는 물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영생의 물이었습니다. 생수의 샘이 복음 속에 들어있고, 복음을 체험한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이처럼 우물가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먹는 물로 시작해서 기적의 물을 지나서 생수로 발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땅을 밟으시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편견을 깨뜨리셨습니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곳에 가셨고 당시로서는 천한 신분인 여인에게 생수의 복음을 소개하셨습니다. 우물가에 걸맞은 물을 주제로 여인의 관심을 끌어내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편견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우리들 각자의 상황에 맞게 다가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생수의 복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河-

크신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엊그제는
금성이 태양을 가리는
금성일식(Venus Eclips)으로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다음에는 105년 후에야 온다고 하니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금성일식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노래할 때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과학에도 문외한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을 아주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사진이 뜨는데
뭐가 뭔지 잘 몰라서
이것저것 찾아았더니
태양 속에 작은 검은 점이 금성이라는 것입니다.

금성에 가려서
태양의 일부분이
검은 점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솔직히 생각보다 시시했습니다.
일식이라면
금성이 태양을 가리는 것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을 잘 모르는 저로서는
사람들이 조금 심하게 호들갑을(?) 떤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2.
금성이 태양을 가린다는 금성일식
그러나 태양을 가리기에는
금성이 너무 작았습니다.
태양이 너무 크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생각났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 보다 앞서가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려보겠다고
하나님 앞에 배짱 좋게 나설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 스스로는 하나님을 가렸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어림없는 일입니다.
기껏 가려봐야 금성일식 정도도 안 되는 점(point)이나 될까요?

금성일식을 보면서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 마음 한 켠에
점처럼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합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입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표현을 써서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 (시편 18:2)
The LORD is my rock and my fortress and my deliverer, My God, my rock, in whom I take refuge;
My shield and the horn of my salvation, my stronghold. (Psalms 18:2)

오늘 하루
시편기자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조목조목 생각해서 찬양하기 원합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고
하나님을 피난처 삼아 그 안에 거하기 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태양과 비교할 수 없는
태양을 만드신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심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6.7 메일 목회서신)

일상의 기도

2012년 기도에 대한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구약의 인물 네 사람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생활을 점검하고 다시금 기도의 자리로 나오길 결심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댕기는 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올려지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십니다.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습니다. 기도 시간은 우리들 삶의 오아시스입니다. 기도는 온 세상을 마음에 품을 수 있을 만큼 지경이 넓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구약의 인물은 창세기의 에녹입니다. 그동안 살펴본 히스기야나 한나 그리고 지난주의 다니엘과 달리 에녹은 기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에녹에 대한 창세기의 말씀은 단지 4절밖에 되지 않고 그것도 아담의 족보 속에 등장할 뿐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그렇다면 에녹이 어떻게 해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 갈 수 있었을까요? 창세기 5장 24절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여기서 동행의 의미는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합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인생길을 하나님과 더불어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 말씀대로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7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드신 아담이 살아있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인간의 수명이 꽤 길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족보를 살펴보면 에녹은 아담과 더불어 308년을 함께 살았으니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이 누구신지, 에덴동산은 어떤 곳이었는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경위까지 많은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에녹은 비록 타락한 세상에 살지만 에덴동산처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기쁘게 여기셔서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데려가신 것 같습니다.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평생을 동행했을까요? 그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대화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온 마음을 쏟았을 것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매순간 경험했을 것입니다.

지난주일 다니엘에게서 배운 대로 우리는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입니다. 또한 히스기야나 한나처럼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어려운 상황을 솔직히 아뢰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 자체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면서 일상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연초에 나눠드린 <하나님의 임재연습>에 나오는 로렌스 형제처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되기 원합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깊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참빛 교회 성도님들께서 일상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시길 바랍니다.-河

한 걸음씩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기도회에서의 다니엘서 읽기
수요예배에서의 골로새서 읽기
청년부들과 에베소서 읽기
아침마다 큐티 본문읽기
속회공부에서 성경본문 읽기
주일 설교에서 말씀 읽기
1년 성경읽기

일주일 동안 제가 참여하거나 인도하는
성경읽기와 관련된 일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상당한 분량의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읽기 진도가 쭉나갑니다.

물론 모든 분들께서
저처럼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절반만 참여하셔도
꽤 많은 양의 성경을 읽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한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으면
모래성이 바닷물에 밀려 가듯이
쌓아놓은 것들마저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야금야금
그리고 꾸준히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묘미이고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어제 수요예배에서는
골로새서 마지막 장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4 2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Devote yourself to prayer, being watchful and thankful.

여기서 기도에 항상 힘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레오에는 위에 있는 NIV 성경번역처럼

1) 자신을 헌신해서 드리다라는 뜻과
2) 참석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에 항상 힘쓰는 것은
몸과 마음을 기도에 헌신하는 것이고,
기도생활에 결석하지 않고 참석하는 것을 뜻합니다.
기도를 쉬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서
우리는 결석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큐티도 그렇고
출석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꾸준히 참석하는 것이
곧 항상 힘쓰는 신앙입니다.

신앙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신앙의 달인이 되는 비약도 없습니다.
신앙은 항상 힘쓰면서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루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듯이 느껴질 수 있지만
그래도 그 길이 복된 길이요 살길이기에
매일같이 밥을 먹고 숨을 쉬듯이 신앙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한 걸음씩
주님을 향해서 나가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항상 힘쓰는 신앙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앞으로 나가는 끈기와 성실함을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5.31 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