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들 4

먹고사는 것이 풍족하고 세상에서 염려할 것이 없으면 자연스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하나님만 생각하라는 성경말씀이 부담스럽게 다가옵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인에게 닥치는 어려움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귀한 시간들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간절히 믿은 사람들은 대개 어려움을 겪거나 세상에서 소외된 계층들이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에서 죄인 취급받던 사람들, 질병으로 인해서 몸이 망가진 환자들, 낙심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위로받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았던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활약은 두드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에도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도 물론 여인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데도 여성들의 역할이 꽤 컸습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준 이래 여성들의 활동은 우리 민족의 복음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전도 부인이 되어서 동네마다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보급하는 일도 담당했고, 사경회와 봉사를 통해서 교회가 굳게 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불어 신학문과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여성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김세지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김세지는 1865년 평안남도 여유에서 딸 넷만 있는 집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열두 살 때 부친이 사망했고, 당시의 관습대로 만나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열여섯에 시집을 갔지만 2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때는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보쌈해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김세지는 보쌈의 공포 속에 시달리면서 하루하루를 살다가 시어머니의 주선으로 23세가 되었을 때 김종겸이라는 사람과 재혼합니다. 김세지의 새 남편은 학문과 재산을 겸비한 선비였지만, 나중에는 그만 주색잡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김세지가 교회에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남편이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안 남편은 그녀를 때리고 집에 가두곤 했습니다. 김세지는 자신을 핍박하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결국 남편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김세지의 인생에 또다시 어려움이 닥칩니다. 두 번째 남편도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김세지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때부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매진합니다. 이름도 생겼습니다. 김세지 역시 당시 많은 여성들처럼 이름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녀를“새디(Sadie)”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세지가 되었습니다. 김세지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과 성경을 보급하는 매서인으로 열심을 냅니다. 평양의 남산현 교회에 출석하면서 일 년에 2천 번 넘게 심방했습니다. 그는 남성들도 하지 못하는 거친 일을 하면서 몸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쩌면 청상과부로 불우한 인생을 살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한국 교회사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남겼습니다. 복음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할 때 신앙이 온전해 집니다. 김세지야말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본을 보여준 멋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河-

믿음의 사람들 3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것을 두고 당나라에 전파된 경교(네스토리우스교)가 신라에까지 전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확실치 않을뿐더러 설령 신라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해도 그것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또한 일찌감치 천주교 선교사를 받아들인 일본이 임진왜란과 더불어 군종신부를 한반도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고향인 경남 웅천에 군종신부 세스페데스가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천주교가 먼저 한반도에 전파되었습니다. 중국에 갔던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영정조 시대의 실학파 학자들이 서양문물과 더불어 천주교를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조선시대에 금기시된 종교였기에 절두산이라는 지명이 생길 정도로 수많은 순교자를 냅니다.

한반도에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1627년 네덜란드인이자 개신교인들이었던 벨트브레(박연)이 귀화해서 제주도에 살게 되고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네덜란드로 돌아가면서 부터입니다.1832년에는 독일 선교사 구츨라프가 동인도 회사의 통역관겸 선교사로 한반도에 상륙해서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해주고, 충청도 일대에 감자씨를 보급하기도 했습니다.1882년에는 만주 국경에서 개신교 선교사들과 복음을 받아들인 조선 청년들이 연합해서 한글 누가복음이 번역되었습니다. 나라의 문을 굳게 잠가두고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조선에 복음의 빛이 서서히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1884년에는 알렌 선교사가 왕실의 주치의가 됩니다. 이때부터 서양 선교사에 대한 인상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한 이수광이 미국의 선교본부에 한반도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드디어 아펜셀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부활절 아침 인천항을 통해서 첫발을 내딛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모두 미국 동부에서 학생시절 예수님을 만났고 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친구들이었습니다. 미혼인 언더우드는 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였고, 기혼인 아펜젤러는 감리교 본부에서 파송을 받고 일본을 거쳐서 한반도에 들어온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1887년 14명의 조선인 신자들이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 교회의 전신입니다. 아펜젤러 역시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정동교회의 시작입니다. 아펜젤러가 학생 2명과 더불어 시작한 학교가 배재학교로,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가 자기 집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한 것은 경신학교로 발전했습니다. 새문안 교회는 언더우드가 세운 최초의 장로교회입니다.

이들은 20대에 조선에 와서 자신들의 젊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조선을 위해서 불태웠습니다.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정동교회안에 웹잇 청년회를 만들면서 그것이 YMCA로 발전하는 토대를 세웠습니다. 기독교 신문을 발행하였고 성경 번역에도 앞장섰습니다. 이처럼 지칠 줄 모르는 선교활동으로 인해서 40세임에도 불구하고 아펜젤러 선교사의 모습은 꽤 나이가 들어보였다고 합니다. 1902년 아펜젤러 선교사는 성경 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내려갑니다. 서해 어청도 앞을 지날 때 아펜젤러가 타고 있던 배가 짙은 안개로 시야를 잃고 다른 배와 충돌하면서 그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아펜젤러의 나이는 44세였습니다.

오늘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도착한 지 127년 째 되는 부활절입니다.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에 휩싸여 있던 조선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 태어나게 한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한국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이 없는 미지의 국가들과 종족들을 찾아갑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은 늘 아름답습니다.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써 나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할렐루야! -河-

부활로 가는 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사순절이 지나고

고난 주간의 한 가운데 와 있습니다.

내일이 성 금요일이니

오늘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날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군병들에게 잡히신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 앞에

끌려 다니시면서 재판을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

며칠 전에 죽은 나사로까지 살리신 예수님이시건만

전능하신 능력은 온데간데 없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2.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와 부활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초라할 정도로 무력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겉만 번드르할 뿐 속빈 강정입니다.

부활의 뒷면에는 십자가가 깃들어 있고

십자가는 부활로 나아가는 길목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나서 부활로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짐을 알고

꿋꿋하게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가 겪는 고난과 고통이라면

부활은 고난의 끝일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지나면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기 원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고통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올려 놓기 원합니다.

그리고

곧 다가올 부활의 아침을 소망하기 원합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지는 길목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난 주간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우리 모두 위에

부활의 소망과 능력을 부어주옵소서.

나는 죽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신다는 귀한 고백이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와 부활의 여정을 걷는 우리들 안에 넘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4.5 메일 목회서신)

믿음의 사람들 2

한국의 무디 김익두 목사님

지난 시간에는 전도자 무디 선생님을 소개하였습니다. 무디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어려운 가정환경과 절망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부흥사가 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분은 한국의 무디라고 불릴 정도로 일제 시대에 부흥사로 명성을 날리신 김익두 목사님 (1874-1950)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구한말(고종 11년) 황해도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다가 16세에 과거에 응시하지만 낙방하고 맙니다. 과거를 포기하고 사업에 전념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즈음 친구에게 빚보증을 선 것이 문제가 되면서 가산을 모두 탕진합니다. 그때부터 청년 김익두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듭니다. 결국에는 술주정과 망나니 노릇을 하면서 20대를 보냈습니다. 김익두의 별명이 “개망나니”일만큼 못된 짓을 골라서 했습니다. 시장터에서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난폭함에 슬슬 피해 다녔고 시장에 있는 사람들이 김익두를 만나는 날에는 재수 없다고 저주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26세 때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갔다가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이 전하는 영생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성격이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청년 김익두가 세상에 홀딱 빠져서 생활하였듯이 이번에는 복음에 빠져들어 갑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신약성경을 일 년 동안 100번을 읽습니다. 1년 후, 어머니와 함께 스왈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하지만 김익두의 신앙이 아주 깊지는 않았습니다.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옛날 습관대로 친구와 함께 술을 먹다가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잠시 정신을 잃더니 갑자기 뛰쳐나가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때 김익두는 온 몸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합니다. 훗날 그는 가슴에 불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후에 청년 김익두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스왈렌 선교사의 요청으로 전도하는 일을 돕습니다. 개망나니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청년 김익두가 전도를 하니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설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확인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던 청년 김익두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화끈한 성격과 뜨겁게 성령을 체험한 것에 걸맞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28세에 황해도 신천에 전도사로 파송을 받으면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가정에서 하루 3번씩 예배를 드렸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손에는 항상 성경이 들려 있었고, 길을 걸을 때도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일제시대에 신유의 기적과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도 북한에 머물러 계시다가 6.25전쟁 때 공산군의 총을 맞고 순교하셨습니다.

복음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합니다.-河-

침착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뉴욕을 떠나서 라스베가스로 향하던

제트 블루 항공기에 어이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비행기 기장이 갑자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조종실을 뛰쳐나와서 승객들 사이를 오가며

알케이다 때문에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승객들이 기장을 제압하고

비행기는 3시간 만에 텍사스 공항에 비상 착륙해서

사태가 해결되었지만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에는

항공사 조종사(pilots)에 대한 기사가 심심치 않게 보도됩니다.

음주상태에서 조종간을 잡은 경우,

조종사들이 자동 조종에 익숙해서

비상사태가 생기면 수동으로 비행기를 이착륙시키는 기술이 부족하다는 우려,

조종석에 앉아서 농담을 하거나 비행기 운항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까지

아찔한 얘기들이 흘러 나옵니다.

그 어떤 운송수단보다 비행기는

조종사들이 중요합니다.

이륙하는 순간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비행기에 탄 승객들은 조종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이 어수선하다지만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모든 면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2.

제트 블루 비행기 조종사가

정신이상을 일으켰을 때

옆에 있던 부조종사의 침착한 대응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부조종사는 조종사가 종교를 얘기를 하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자

조종사의 정신이상 증세가 있음을 감지했답니다.

그를 조종석에서 밀어내고

때마침 비행기를 탑승해 있던

비번 조종사에게 비행기 조종간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승객들과 더불어 조종사를 제압하면서

자칫 당황될 수도 있는 비상사태에

침착하게 대처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오하이오 출신의 다우드(Dowd)라는

부종종사를 영웅으로 치켜 세우고 있습니다.

다우드는 어렸을 때부터 침착한 성격이었고

그의 가족들도 매우 사려 깊은 사람들이라고

고향사람들의 말을 인용해서 보도했습니다.

그의 장모는 사위의 행동이 결코 영웅적이 될 수 없고

비행기에 탄 모든 승객들이 영웅이라는 겸손함도 보였습니다.

중고등부 시절 도우드를 가리켰다는 주일학교 선생님은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영웅이 될 충분한 성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일이 닫쳐도 능숙하게 대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라고

다우드를 칭찬했습니다.

맞습니다.

부기장 다우드의 침착한 대처가

큰 사고를 막았습니다.

3.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침착함

특히 위기에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침착함을 훈련하고 그것이 습관처럼 베어 있었을 때

위기상황에서도 허둥대지 않는 침착함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명의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등불과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다섯 명은 등불만 갖고 있을 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채

신랑을 기다립니다.

신랑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등불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침착하게 신랑을 맞이합니다.

반면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불을 키지 못한 처녀들은

그제야 허둥대면서 기름을 구하러 가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침착함은 준비함에서 옵니다.

매사에 지혜롭게 준비하고 미리미리 훈련해 놓으면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항상 해야 합니다.

그때 가서 허둥대지 않고 준비한 기름으로 등을 밝히고

예수님을 침착하게 맞으려는 준비된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지요?
사순절 마지막 주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고

서둘다가 흐트러진 부분이 있다면

다시금 침착함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매사를 지혜롭게 준비해서

침착함이 성품 속에 깃들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하루 하루 의로운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29 메일 목회서신)

네 개의 손

신약성경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들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들이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달라서 우리들은 네 개의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다양하고 풍성한 말씀을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별 복음서에만 나오는 말씀이 있는 반면에 모든 복음서에 중복되어서 나타나는 말씀도 있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사건 가운데 웬만한 그리스도인들이면 알고 있는 말씀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산에서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께서 말씀에 주릴 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 배고팠던 당시의 백성들을 보면서 측은지심이 생기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시지만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0 데나리온, 성인 남성의 8개월치 봉급에 해당할 정도의 큰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어린이 한 명이 자신이 가져온 오병이어, 즉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제자들에게 건네 줍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서 축사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시지요. 원하는 대로 모두 나눠줍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읽다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네 개의 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신이 갖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드린 어린 아이의 손입니다. 이 아이가 자신의 것을 – 비록 아주 작은 것이지만 –예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오천 명이 배불리 먹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어린아이의 헌신, 자기 것을 내어드리는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손을 통해서 드려진 오병이어는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케 하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오병이어를 받아 드시고 하늘을 향해서 축사하시는 예수님의 손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 크고 작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축사하시는 예수님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작은 것을 통해서도 임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셋째는, 떡을 나눠주는 제자들의 손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인간적으로/세상적으로 계산했습니다. “안 된다”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나눠주는 일에 참여한 제자들은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신기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세상적이고, 계산적이고, 인간적인 믿음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넷째로, 떡을 받아 먹는 백성들의 손입니다. 이들은 제자들이 나눠주는 떡을 마음껏 먹었습니다 원 없이 먹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사실 본문에서 “축사하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유카리스테오”라는 동사인데 여기서 성만찬을 뜻하는 “유카리스트”가 나왔습니다. 떡을 받아 먹는 백성들의 손은 떨렸고, 기뻤고, 그 순간만큼은 그곳에서 하늘나라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정말 보잘것없는 하찮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오천 명이 먹고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어떠하든지 예수님의 손에 올려지길 원합니다. 그때 우리들도 기적의 떡을 받아먹은 백성들의 손처럼 예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받는 것에만 익숙하면 안됩니다.떡을 나눠주고 남은 떡을 거두는 제자들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계산적이고 인간적이었던 자신들의 속셈을 회개하고 결국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손입니다. 무엇보다 어린아이의 손이 많아야 세상이 밝아집니다. 작은 것을 드리는 손들입니다. 희생하는 손들입니다. 자기보다 먼저 교회와 이웃을 생각하는 손들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출발점이 되는 귀한 손들입니다. 그때 우리들이 있는 곳이 기쁨이 넘치고 풍성한 나눔이 있는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2012년 3월 2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믿음의 사람들 1

D. L. 무디

우리는 지난 다섯 주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지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왜 기쁜 소식(복음)이 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지금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서 진리와 능력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 앞에서 우리 모두가 복 받은 사람들임을 절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복음이 얼마나 풍성하고 부요한 것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은 물론 2천년 교회사를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5주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은 믿음의 인물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19세기 최고의 부흥사로 이름을 남긴 무디 선생님 (D.L. Moody, 1837-1899)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무디 선생님은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차분하게 책을 읽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농부였던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어떤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해내는 끈기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10대 후반이 되면 자신의 인생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습니다. 무디는 열일곱 살 때 보스턴으로 가서 삼촌이 경영하는 양화점(구둣가게)에서 일을 합니다. 그때 그를 고용한 삼촌과 몇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열심히 일할 것, 삼촌이 없을 때는 직원들에게 물어가면서 일을 배울 것, 밤에 거리에 나가지 않을 것, 주일에는 교회에 갈 것.

만남이 중요합니다. 무디는 교회에서 킴벨이라는 선생님을 만납니다. 킴벨믄 무디가 신앙심이 깊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다면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무디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일하는 구둣가게를 찾아와서 어깨에 손을 얹고 눈물로 기도해 주는 캠벨 선생님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서 마음을 엽니다. 결국 구둣가게 뒷방에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신앙의 길에 접어듭니다. 그날의 사건을 무디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나는 1837년에 육체를 입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856년에 성령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나의 몸은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내 영은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무디가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임과 동시에 새로운 인생길이 펼쳐집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불우한 아이들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시카고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지만 평신도로 미국은 물론 영국까지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고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하려는 무디의 열정은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남북 전쟁으로 인해서 분열되고 혼란스러웠던 미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회복시키고 영적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보스턴 구둣가게에서 일하던 무디에게 복음의 빛이 비추니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부흥사가 된 것입니다.

무디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그를 통해서 놀라운 부흥을 이루신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에게나 임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펼쳐 보입니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河-

별처럼 빛나는 인생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바울 서신을 한 장씩 읽고/공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부터 시작했는데

어느덧 빌립보서까지 왔습니다.

빌립보서는 제가 청년시절부터 무척 좋아하던 성경 말씀입니다.

물론 어렸을 때는 빌립보서 4장 13절 때문에 애독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빌립보서 전체에 흐르는 말씀이 마음을 울립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이 빌립보서 전반에서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언급할 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고백을 할 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명령을 할 때,

위에 있는 4장 13절 배후에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말씀을 할 때,

빌립보서 말씀이 제 마음 속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메아리 쳐옴을 느낍니다.

2.

어제 예배에서는 빌립보서 2장 말씀을 나누었는데.

2장 한 가운데 보석과 같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세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세상에 나갈 때,

그 인생이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빌 2:15)

…that you may be blameless and innocent, children of God without blemish in the midst of a crooked and twisted generation, among whom you shine as lights in the world.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

이보다 더 귀하고 행복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성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보석처럼 돋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흠이 없고 순결한 (blameless and innocent)

모습을/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졌을 때

저절로 생기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흠없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그 길로 나갈 뿐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나갈 뿐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흠없고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속에서

믿음을 굳게 지키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고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시대의 요청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는 기대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별과 같이 빛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빛 교회 식구들께서

흠이 없고 순결한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세상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22 이-메일 목회서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5

지난 한달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한 복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가장 잘 알 것 같고 누구보다 복음의 은혜를 누리고 있을 것 같은데 막상 복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거나 날마다 복음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당황하기 쉽습니다. 복음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데도 말입니다. 2012년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가 믿는 복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연속설교를 준비했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살펴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요약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신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습니다. 사흘 만에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들 역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곧 복음입니다.

셋째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대신에 성령 하나님께서 오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계시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도와주시고, 격려해 주시면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임을 변호해 주십니다. 세상을 살아갈 능력을 주시는 분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알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모든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누구에게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전파해야 합니다.

오늘은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번 연속설교에서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마지막 덕목은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에게 임하는 부요함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죄로 인해서 건널 수 없던 간격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메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임합니다. 영적인 부요함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임했으니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복음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 의하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12절에서는 부끄러움을 넘어서 부요함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매사에 흘러넘치는 은혜를 가리킬 것입니다. 풍성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을 체험했을 때 누리는 부요함입니다. 여기서 감사가 나오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부요함과 이 세상에서의 부요함을 누릴 수 있음이 곧 기쁜 소식입니다.

그동안 함께 살펴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깊이 임하길 원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능력과 부요함의 은혜까지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복음에 웃고 복음에 울고 복음에 감사하면서 복음 붙잡고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꿋꿋하게 견디며 앞으로 나갑시다.

소망을 꼭 붙들고…

좋은 아침입니다.

1.

세상을 보는 바라보는 관점을 안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색깔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리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상은 그대로인데

눈앞에 있는 안경색깔이 바뀌면서

세상의 모습이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부정적인 관점, 어두운 곳을 먼저 보다가

긍정적인 면 또는 밝은 곳을 놓치는 경우입니다.

요즘 세상은 말 그대로 뒤죽박죽입니다.

너무 혼란스럽고 복잡해서

어떤 한 가지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제 각각인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수십가지의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듯 합니다.

어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것이 내가 맞는지 깜짝 놀랄 정도의

또 다른 내가 우리 안에 살고 있어서 당황스러울 때가 꽤 많습니다.

그때도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못난이, 실패자, 낙오자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정직한 사람, 소신있는 사람,

꿋꿋한 사람으로 자신을 치켜세울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관점의 차이입니다.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자신을 바라보는지에 대한 결과들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영향을 받고

여전히 예수님을 믿기 전의 안경이 신앙의 안경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삶이 어려워지면

어둡고 절망적인 면을 먼저 보게 마련입니다.

그때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소망이란 단어입니다.

믿음은 소망으로 이어질 때 힘이 있습니다.

아니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 줍니다.

목사인 저도 힘이 들고

때로는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묵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망 하나님이 모든 기쁨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 ( 15:13)

Charles Swindoll목사님의 예화집에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 있습니다.

Someone has said, “We can live forty days without food, eight days without water, four minute without air, But only a few second without hope.

소망을 꼭 붙들고 오늘 하루를 시작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삶 속에 소망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15 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