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함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

청년부 성경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

목요서신을 쓰려는데

큰 아이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둘째가 친구 집 계단에서 넘어졌는데

그만 어깨가 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왼쪽 어깨입니다.

오른 쪽 어깨는 이미 세 번이나 빠져서

의사가 수술을 권할 정도였는데

왼쪽 어깨마저 처음으로 빠졌으니

큰 아이가 데리고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어깨 탈골(dislocation)

아주 심각한 일은 아닙니다.

흔히 있는 일이고

운동경기를 하다가도

자기 스스로 어깨를 맞추는 선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탈골이 되면 통증이 보통이 아닙니다.

두 어깨 모두 탈골이 되었으니

앞으로 운동은 물론 무거운 것을 드는 것까지

실생활에서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부모로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말씀이

고린도후서 12 9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하신지라. 그러므로 내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But he said to me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Therefore I will boast all the more gladly about my weakness, so that Christ’s power may rest on me.

우리들은 매우 연약합니다.

넘어졌을 뿐인데 어깨가 탈골될 만큼 육신도 연약하고,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상하고

힘겨워하는 우리의 마음도 질그릇처럼 연약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도 예외가 아니어서

염려하고 의심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의 연약함에 임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하나님 편에서 읽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연약한 곳마다 찾아오셔서 그 곳에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느끼도록 도와주시려는 배려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오는 입구(entrance)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연약함을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아들일 입구가 여럿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모두의 연약함 위에 임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9 메일 목회서신)

축복하는 교회 (4) : 시편 118편 3

지난주에는 시편기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를 에워싸고 있던 모든 세력을 끊어버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이름에는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것들을 끊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거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까지 합쳐지면 죽음의 세력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큰 능력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또 한 가지 표현이 지속적으로 반복됩니다. 그것은“여호와의 오른손”입니다. 성전에 모인 백성들 앞에 나와서 자신과 민족위에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는 왕은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그들을 구원했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의 권능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대표하는 말이라면,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베푸시는 능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여호와의 손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그 손의 능력으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왼편이 아니라 오른 편이라는 표현도 특이합니다. 오른편은 권세와 위엄의 표시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외울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는 고백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을 가진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무엇보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오른손은 능력의 상징입니다.:“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사 62:8). 하나님의 오른손은 능력의 팔입니다. 하나님 능력이 행사되는 수단입니다. 또한 이사야 41장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른 손을 붙잡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오른손에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물론 오른 손에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오른 손을 붙잡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오늘 말씀 16절에도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 세상에 높이 선포된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의 능력이 임함으로 적군들이 가시나무 타듯이 금세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만방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능력의 주이심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풀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의 왕과 민족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는데, 여호와의 오른손의 능력이 이들을 살렸습니다. 놀라운 능력, 권세 있는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이름의 능력으로 죽지 않고 살아서 찬양하고 간증할 수 있음이 무척이나 감사했습니다. 의인의 장막에서 기쁨과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이 모든 것이 기적같이 신비한 사건이었기에 하나님께 나와서 감사의 고백과 간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오른손의 능력을 힘입고 살기 원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우리의 이웃과 세상을 축복하기 원합니다.-河-

에벳멜렉

좋은 아침입니다.

1.

군중 심리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대다수의 의견을 따라서 행동합니다.

심지어 잘못된 일이라도

대중의 뜻이면 그것이 올바른 일로 둔갑할 때도 있습니다.

애꾸눈만 사는 원숭이 마을에 가면

두 눈을 가진 원숭이가 바보취급을 받고

특이한 원숭이로 왕따를 당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예레미야서를 한 장씩 살펴보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레미야가 마치

바보 또는 죄인취급을 받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잡혀서

진흙 구덩이에 던져지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릅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평화와 형통을 위치는

가짜 예언자들의 말에 매료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듣고 싶은 말,

잠시라도 위안이 되는 말을 취사선택해서 들은 것입니다.

2.

모든 백성들이 치우쳐서

예레미야를 죽리려고 달려들 때,

에벳멜렉이라는 사람이 왕 앞에서 나가서 바른말을 합니다.: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예례미야 38:9)

에벳멜렉은 구스, 즉 이디오피아 출신이었으니

피부색깔이 검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왕 앞에 나갔고

혼자서 예레미야 편을 들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을 행한 것입니다.

덕분에 예레미야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에벳 멜렉은 39장에서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그때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한 이후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하나님께서 에벳멜렉을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예레미야 39:18)

For I will surely save you, and you shall not fall by the sword, but you shall have your life as a prize of war, because you have put your trust in me, declares the LORD.

하나님께서 에벳멜렉이

신앙양심을 지키고,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를 변호한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멸망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3.

모든 사람들이 한 곳으로 치우칠 때도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운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에벳멜렉과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진실되고 바른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아무리 위험한 순간이 닥쳐도

하나님의 구원을 보장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이 에벳멜렉처럼

바른 길에 서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2.2 이-메일 목회서신)

토끼와 거북이 두번째 이야기

지난 달에 제가 쓴 칼럼의 제목이 “토끼와 거북이”였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그만 중간에 잠이 들어버린 토끼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달려온(?) 거북이에게 경주에서 지고 만다는 이솝 우화였습니다. 우화 속의 토끼는 자만심은 물론 게으른 잠꾸러기로 좋지 않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새로 각색한 글을 발견했습니다.

“옛날에 거북이를 사랑하는 토끼가 있었답니다. 토끼는 속으로만 거북이를 사랑했기에 아무도 토끼가 거북이를 사랑하는 줄 몰랐고 거북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토끼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북이가 자기의 느린 걸음을 너무 자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토끼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토끼는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 ‘거북아! 나랑 달리기 해 보지 않을래?’ 그날 따라 거북이는 투지가 생겼습니다. 질 때 지더라도 토끼와 같이 달려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드디어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토끼는 저만치 앞서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따라오는 거북이만 생각했습니다. ‘포기하면 어떡하지! 중간쯤 가서 기다려주자!” 그런데 그냥 눈을 뜨고 거북이를 쳐다보면서 기다리면 거북이가 자존심이 상할까봐 토끼는 길에 누워서 자는 척을 했습니다. 거북이가 가까이 와서 자기를 깨워주고 같이 나란히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말입니다. 거북이는 자기 옆을 지나면서도 자기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결국 거북이가 경주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경주 후에 동네 동물 식구들과 후세 사람들로부터 거북이는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토끼는 ‘교만하고 경솔하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그 모든 비난을 감수했습니다. 왜냐하면 거북이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각색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솝 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보다 더 감동적입니다. 사람들은 경주에서 이기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승자에게 관심을 가질 뿐, 패자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습니다. 스스로 양보하거나 은밀히 선행을 행한 경우라도 세상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고,경쟁에서 이기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위에 소개한 이야기 속의 토끼는 자기가 짝사랑하는 거북이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경주에서 일부러 저 주었습니다. 그래도 거북이가 자는 척하고 있는 자기를 깨워서 함께 경주에 임할 줄 알았는데, 거북이는 자신을 지나쳤습니다.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스러웠지만 사랑하는 거북이를 위해서 참을 수 있었습니다. 경주에서 이긴 거북이는 친구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토끼에게는 교만하고 게으르다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지만 사랑하는 거북이를 위해서 이 모든 일을 기쁨으로 감수했습니다.

사랑하는 거북이를 위해서 일부러 경주에서 져 준 토끼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도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는 토끼의 마음을 갖고 싶어집니다. 요즘 세상은 모두가 일등이 되고 싶어하고, 양보와 손해라는 말은 어리석게 치부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조금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꼭 일등이 되려는 야심과 더 많은 복을 받으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고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토끼와 같은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마음 깊이 품고 있으면 가능하겠지요.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면 훨씬 쉽겠지요.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고, 이웃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넉넉한 마음을 주시길 하나님께 기도 드리면서 한 해를 시작해야겠습니다.  (2012년 1월 27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축복하는 교회 (3) : 시편 118편 2

축복하는 교회라는 올 해 주제에 맞춰서 시편 118편을 차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합쳐서 앞으로 3주간동안 연속해서 설교하게 될 텐데 그 동안 시편 118편을 곁에 두시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시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한해를 살아가시는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확실히 알고 넘어갈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에 대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을 영원한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그만 인간이 죄를 지어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다시금 영원한 존재로 회복시켜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해서 그들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려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손수 해결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으면 은혜가운데 구원을 얻고 영생의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생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금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상급으로 알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입니다. 나머지 세상에서 생각하는 복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라고 주시는 도구에 불과하지 궁극적인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 복을 누릴 때 우리들이 세상을 온전히 축복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도 성전에 모인 백성들 앞에 나온 왕이 하나님께서 자신과 민족을 어떻게 도우셨는지 간증합니다. 전쟁을 겪은 것 같습니다. 적군들이 에워싸서 꼼짝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본문에 “에워싸다”는 말이 3번 나오는데 이에 대한 히브리어의 의미는 말 그대로 적군에 의해서 포위당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마치 왕이 적군에 의해서 포승줄로 묶여있는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왕이 묶여 있으니 왕의 위신이 말이 아닙니다. 그때 왕은 지난 시간에 배웠듯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신을 묶고 있는 줄을 끊었습니다. 왕이 다스리는 국가를 포위한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줄을 끊어 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왕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았습니다. 그 이름의 권세로 적군과 맞섰습니다. 그때 자신을 에워싸고 묶고 있던 세력들을 끊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권세가 새해를 사시는 참빛 교회 식구들께 그대로 임하길 원합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끊어내는 능력이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시편기자처럼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라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河-

아름다운 인생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자 중앙일보 본국지에 공혈견(供血犬)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공혈견 엣지(Edge)는 올해로 11살을 맞이하였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65세 정도이고

견공들의 세계에서는 노견(老犬)이라고 불린답니다.

엣지는 미국 동부에서 태어나서

한 살 때 마약탐지견으로

한국 관세청으로 팔려왔습니다.

뛰어난 후각을 가진 레브라도 레트리버(Labrador Retriever)”가문인

엣지는 인천공항에서 6년 동안

마약 탐지견으로 활약했습니다.

그가 찾아낸 마약사범이 8, 3 5천만원에 해당하는

마약을 적발해내는 공을 세웠답니다.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체력이나 후각이 약해졌습니다.

엣지는 서울대 동물병원에서

혈액이 필요한 동료 견공들에게

자신의 피를 뽑아주는 헌혈견으로 3년여를 보냈습니다.

그의 인생 2막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피를 보태는 귀중한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이제 11살을 맞은 엣지는

나이가 들면서 공혈견의 일도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기력만 있다면 피를 뽑는 주사바늘의 아픔을 뒤로 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고 싶지만,

이제는 공혈견의 사명도 내려놓고 인생 3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를 입양해 가야 한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락사할지도 모른다는 기사였습니다.

그와 함께 일을 한 수의사 한 분은

엣지를 차분한 종교인같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견공이지만

나라를 위해서,

동료 견공들을 살리는데 한 평생을 살았으니

수도사의 경지에 오를 만도 합니다.

누군가 엣지를 입양해가서

그가 수를 다 누리면서

편안한 노후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분명히 새 주인에게도 충성을 다할테니까요.

2.

지난 주에는 한 권사님의 칠순 잔치가 있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전도사님의 생신잔치가 있습니다.

연거푸 생신잔치를 차려주는 자녀들과 교인들!

우리 교회는 가족 같은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요즘 권사님들을 보면

제가 처음 이곳에 왔던 7년 전에 비해서

기운이 없어지셨고, 세월을 피해가실 수 없음을 느낍니다.

물론 저도 어느덧 50줄에 접어들었고

요즘은 어디를 가도 동안이라는 말보다

조금 고생했는지 얼굴이 늙었다(?)는 말을 듣습니다.bb

지난 주에 점심을 먹으면서

저는 그냥 50에 있어도 괜찮으니

권사님들께서 10년씩만 젊어지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인줄 알지만

그만큼 살아오신 인생경륜과

교회를 섬기신 신앙의 궤적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한 견공의 인생이 제 3막을 향해서 가듯이

노권사님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도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곳에 있든지

지금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마음을 잃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조전도사님과 우리 교회 모든 권사님들께서

새로운 교회로 이전하시는 것을 보셨는데

이제는 주님의 부흥까지 목도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잠언 16 31)

하나님

우리 교회 기도의 어머님들이신

전도사님과 권사님들께서 올 한해도

주님 안에서 강건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26 메일 목회서신)

축복하는 교회 (2) : 시편 118편 1

지난 주일에는 코스타 강사로 오셨던 김도현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갚을 수 없는 빚을 하나님께 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이웃들에게 갚아가면서 사시길 원하실 뿐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이처럼 복음전도와 믿음에 합당한 삶이 곧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진 빚을 갚는 길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그 빚을 갚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올 해 우리 교회 주제처럼 “축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웃들을 축복하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초청할 수 있습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받은 복을 더불어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연속 설교 처음 시간에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은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부귀영화, 무병장수, 자녀들의 성공과 출세와 같은 세상의 복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에 비할 바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복이 아침안개처럼 없어질 유한한 복이라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누리게 되는 복은 영원한 복임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급이 되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시편기자는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나눌 복은 예수님을 믿고 누리게 되는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는 그 복을 흠뻑 받았습니다.

오늘 살펴본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고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기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돕는 자들을 붙여주시고 그들과 더불어 주님의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광활한 곳에 세우실 것입니다.

시편 118편의 기자는 고통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고통 가운데서 기도에 응답하시고 광활한 곳에 세우시는 하나님을 만났기에 담대하게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온 백성을 향해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고통이 밀려오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할 것을 초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받은 복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세상을 축복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먹는다고 축복하는 교회가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길에 서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흠뻑 체험해야 합니다.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그것을 간증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그때 우리들의 말은 물론이고 삶까지 받은 축복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우리 집은 미용실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주룩주룩 오는 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비였습니다.

앞으로 비가 충분히 와야 여름을 거뜬히 날 수 있겠지요.

비가 오면서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샌프란의 겨울이 만만치 않게 추운데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오후에 집에 와서

그 동안 미뤄두었던 이발을 했습니다.

달리 미용실을 가는 것은 아니고

아내가 저의 전담 이발사이고  저희 집이 미용실입니다.

미국에 와서부터 아내가 우리 삼부자 이발을 책임졌으니

경력이 14년에 육박합니다.

처음에는 한 시간 넘어 걸리던 이발시간이

이제는 30분 정도면 거뜬히 끝나고

흰머리를 숨기는 염색까지 풀 코스를 책임져줍니다.

물론 무료입니다.

매번 이발을 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은 한번 자르면 다시 붙일 수 없다

처음 이발을 하면 어색할 때도 있지만 일주일만 지나면 익숙해진다.

앉아서 잔소리는 할 수 있어도 스스로 내 머리를 깎을 수 없다.

어디 이발만 그럴까요?

우리 인생도 이발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잘라버린 머리카락을 다시 이을 수 없듯이

한번 지나간 시간을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심 조심 주어진 인생길을 가야 합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면 처음에는 어색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보고,

머리가 조금 자리를 잡으면 금새 편안해 집니다.

우리들 인생길도 어색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 시도하는 일이나, 요즘처럼 새해를 맞을 때

우리 모두 느끼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익숙해 지고 어색함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참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들이 꽤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아도

자기 머리를 근사하게 자르기는 어렵습니다.

누군가의 손에 자신의 헤어 스타일을 맡겨야 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리에 앉아서

거울을 보고 이것 저것 요청하는 일뿐입니다.

(저는 14년여 한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다 보니 별로 요구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홀로서기란 말이 의외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서로 도움을 주고 받습니다.

서로 버팀목이 되어 주면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함께 더불어 인생길을 갑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미용사가 머리를 다듬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길을 다듬어주시고

멋지게 만들어 주시길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덧 2012년의 첫 달도 끝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입니다.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의미 있게 살기 원합니다.

또한 앞으로 펼쳐질 올 한 해의 인생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원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하나님 아버지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는

참빛 교회 식구들의 발걸음을 친히 인도해 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더불어 시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19 메일 목회서신)

주헌절을 지내면서…

교회력은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회가 여러 절차를 걸쳐서 제정한 교회의 달력(church calendar)입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교회력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가톨릭의 성자들을 숭배한다는 이유로 배척되기도 했지만, 현대에 와서 교회력의 중요성이 다시금 강조되고 있습니다. 교회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전반부 6개월은 예수님의 탄생, 사역, 고난,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들이고, 후반기 6개월은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 성령과 더불어 동행하는 성도와 교회의 삶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교회력을 따라서 한 해를 보내면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고 성령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 주일 예배순서 앞에 교회력을 표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Advent)부터 시작됩니다. 성탄절 4주전부터 시작되는 대강절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실 것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대강절 기간 동안 강단에 촛불을 하나씩 켜가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또한 교회력을 상징하는 색깔이 있는데 대강절은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권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지만 온 인류를 구하실 메시야요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성탄절 이후 사순절 전까지의 6주간은 주현절입니다. 주현(Epiphany, “빛으로 나타나심“)이라는 의미대로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public life)를 시작하십니다.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할 메시야이심을 세상에 보이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주현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주현절의 색깔은 흰색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주현절이 끝나고 고난주간 전까지가 사순절(Lent)입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시작되는데, 금식과 선행 등을 실천하면서 1년 365일 가운데 10분의 1이 조금 넘는 40일을 경건하게 보내게 됩니다. 사순절의 색깔도 대강절과 마찬가지로 보라색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 신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사순절이 끝나면 고난주간(Passion week)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들 역시 자기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기로 결단하는 기간입니다. 고난주간의 색깔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빨강입니다. 고난 주간이 끝나면서 곧이어 부활주일을 맞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절기입니다. 부활주일의 색깔은 흰색입니다. 부활주일 새벽에 흰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부활절 후 7주간이 끝나면 오순절 성령강림절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의 약 6개월 기간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강조됩니다. 그러고 보니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순절 이후부터 그다음 대강절까지 긴 6개월 동안의 색깔은 초록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과 신앙의 성숙을 뜻할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력을 따라서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뜻 깊은 일입니다. 매주간 주보에 있는 교회력을 따라서 올 한해를 주님과 동행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하나님과 눈 맞추기

좋은 아침입니다.

저는 올해로 50이 되었습니다.

사실 50은 성경에서 희년에 해당합니다.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고, 돌려 놓으면서

세상을 다시 reset하는 해입니다.

저 역시 앞으로의 인생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봅니다.

새벽에는 강단에 엎드려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묻곤 합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갖게 된 소망은

예수님의 형상이

제 성품과 모습에 조금이라도 드러났으면 하는 것입니다.

저를 보는 이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눈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갖습니다.

온 세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저를 바라봐주시고

저 역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어진 인생을 살아간다면

더 없이 행복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눈을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참된 복임을 인생의 희년을 맞아서 다시금 묵상합니다.

그러면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의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라봐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올 한 해 저를 포함해서

참빛 교회 식구들 모두 하나님과 눈을 맞추면서

하나님의 눈에 드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이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위에

그리고 새해에 이메일 서신을 받으시는 모든 분들 위에

멈추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 16:9)

For the eyes of the Lord range throughout the earth

to strengthen those whose hearts are fully committed to him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눈이 멈출 만큼

우리의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우리의 눈이 마주쳤을 때

임하는 능력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1.12 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