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는 길

401 Dewey Blvd. San Francisco, CA 94116
[googlemaps https://www.google.com/maps/embed?pb=!1m18!1m12!1m3!1d3154.8396459463684!2d-122.45922499999998!3d37.746905999999996!2m3!1f0!2f0!3f0!3m2!1i1024!2i768!4f13.1!3m3!1m2!1s0x808f7def6bb30b7b%3A0x8e32e14a88d5f57d!2z7IOM7ZSE656A7Iuc7Iqk7L2UIOywuOu5m-q1kO2ajChTYW4gRnJhbmNpc2NvIFRydWUgTGlnaHQgS29yZWFuIE1ldGhvZGlzdCBDaHVyY2gp!5e0!3m2!1sen!2sus!4v1430200380283&w=600&h=450]

예배 안내

welcome_service

 

주일예배
주일 오전 11:00
새벽기도회
아침 6시(화~토)
주일학교예배
주일 오전 11:00
Youth 토요모임
토요일 오후 7:00
영어부주일예배
주일 오전 11:00
청년부금요모임
금요일 오후 7:00
수요예배
수요일오후 7:30
구역속회
매주 속회별 모임

 

 

 

담임목사 인사말

담임목사 하시용 (Rev. Si Yong Ha)

대학시절에는 선교단체 IVF에서 훈련받았고, 졸업한 후에는 7년여 직장생활을 하면서 평신도로 봉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회의 길로 접어든지 어언 10여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우리 교회가 두 번째 담임목회지인데,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목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음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느낍니다. 하지만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진실되게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지혜와 용기를 주실 줄 믿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렵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되신 교회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는 교회로 세워가고 싶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분들과 더불어 멋지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길 원합니다.

저희 가족은 네 식구입니다. 아내(하정숙)와 두 아들(재흥/재도)이 제 목회에 큰 힘을 주는 동역자들입니다.

저희들이 꿋꿋하게 목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목사님가족

주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경력 및 활동]

  • HSBC 은행/ National Australia Bank 서울지점 (87-95)
  • 뉴욕 퀸즈중앙감리교회(UMC) 중고등부 담당 교육전도사 (98-99)
  • 뉴헤이븐 한인교회(PCUSA) 청년부담당 교육전도사 (99-2000)
  • 기독교대한감리회 미주특별연회 목사안수 (2001.5)
  • 인디애나 예사랑 교회 개척 담임 (2000-2005)
  • 코스타 (KOSTA) 강사 (2004-현재)

 

[학력]

  • 인천 부평고등학교 (81년졸업)
  •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88년졸업)
  •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94년졸업)
  • 감리교신학대학 신학대학원 (M.Div 목회학석사)
  •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 (STM 신학석사)
  • 인디애나대학교 종교학과  (Ph.D 구약학)

은혜로 사는 삶 (1) : 하갈

오늘은 교회력에 따라서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앞으로 6주간 성경강림절까지 부활 절기를 살게 됩니다. 부활절이 지난 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50여일이 부활절의 연속인 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행1:3).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회개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고, 부활하셔서 승천하기 전에도 하늘나라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더불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제자들이 두려움에 모두 흩어졌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이 임하길 기다렸습니다. 그로부터 10여일 후인 오순절에 약속하신 대로 성령이 임하고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거듭났습니다.

이처럼 부활절부터 성령강림절까지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함께 기도했듯이 우리들도 기도하는데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묵상하고, 우리가 사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성령 강림절을 준비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은혜(grace)는 값없이 임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해서 얻게 되는 보상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어서 받는 상급도 아닙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할 수 있는 여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은혜 속에 사는 것은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아무 조건도 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깊이 만납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성경에 나오는 네 명의 여성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특별한 상황에서 은혜를 경험한 인물들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인 하갈입니다. 하갈이라는 이름에는 “훌쩍 떠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이삭이 태어나자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사막으로 쫓겨납니다. 마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키울 여력이 없자 죽음을 택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들 모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샘물이 터지게 하시고 사막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십니다. 주인에게 추방당한 여종과 그녀의 아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없이 임합니다. 할렐루야!河-

십자가 십자가

1.

고난 주간 한 가운데 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캘린더가 약간 달랐지만
우리 식으로 바꿔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겟세마네에 가셔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후에
잡히셔서 밤새도록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성금요일,
빌라도를 통해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12시부터 운명하시던 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전합니다(눅23:4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일곱 번 말씀하셨는데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였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고난 주간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함께 걸어가는 시간입니다.
매우 세세하게 예수님을 느끼는 주간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고난을 깊이 느낄수록
부활의 기쁨도 그만큼 클 것입니다.

2.
올해 부활절을 맞으면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한 구절을 갖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모두 외우시길 부탁 드렸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who lives in me. And the life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 2:20 ESV)

우리들도 바울처럼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기 원합니다.
우리의 죄를, 욕심을, 염려와 근심을
우리들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몽땅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New being)
다시 태어나는 것이
십자가의 은혜요
부활의 능력입니다.

3.
존 스토트는 그의 책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마지막을
캄벨 몰간의 글로 마무리합니다.

“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자는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다.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다. 런던의 파커 박사는 도마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을 세상은 지금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세상은 모든 복음 전파들에게도 역시 말하고 있다: 당신 손에서 못 자국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이다.”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438)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우리들의 손과 옆구리에 예수님처럼 못과 창자 국이 있을 때
우리를 보고 세상은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장식품이 아닙니다. 그냥 바라만 볼 대상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곳에 올라가야 하고, 우리의 옛 자아가 그곳에서 죽은 것을
세상 사람들이 확인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인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여정에 참여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확연히 드러나길 바랍니다.

온 세상의 고난 받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위로가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4.2 이-메일 목회서신)

하나님의 형상

1.

요즘 비행기 사고가 자주 일어납니다.
엊그제도 독일 비행기가
알프스 산맥에 추락하는 대형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비행기 사고의 원인으로
부조종사의 고의 추락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금문교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함께
부조종사에 대한 기사가 뜨는 것이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 동안 심리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어떤 징후도 없었기에
그분의 행동이 더욱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만약에 언론보도처럼
이번 사고가
여객기 조종사가 저지른 단독 범행이라면
목숨을 잃은 150명에 가까운 승객들과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요.
너무 안타까워서 말문이 막힙니다.

2.
구약성경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고
그 만큼 우리 인간이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피를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피는 곧 생명의 상징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피를 먹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경건한 행위였습니다.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레 17:14)
For the life of every creature is its blood: (Lev 17:14 ESV)

3.
사고를 낸 부조종사의 기사를 읽으면서
분노와 안타까움이 겹쳐서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사고를 저질렀는지,
그 맘 속에 얼마나 큰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길래,
자기 통제(self-control)를 하지 못하고
그토록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동시에
안전을 책임져야 할 조종사가
자신을 믿고 탑승한 승객들의 생명을
눈곱만치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음에 화가 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귀하고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이번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세상 곳곳에서 생명을 천시하고
폭력과 테러, 전쟁을 일삼는 일들이 비일비재한데
그곳에 주님의 평화가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고
이웃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은혜가 임하길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존귀한 이웃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God bless you” – 축복해 줍시다.

하나님 아버지,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무엇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3.26 이-메일 목회서신)

그리스도와 함께 (2)

2015년 부활의 아침 밝았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9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세례도 헛되고 믿음도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기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부활절에 세례 받는 자매와 아기가 있습니다. 세례 받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첫 걸음을 내딛는 성도님을 축하하고 앞으로의 신앙 여정을 위해서 온 교회가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유아세례의 경우 그 책임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의 믿음으로 세례를 받기에 앞으로 자녀가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다음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입술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기도로 키우고 부모님들이 먼저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예식은 공동체가 함께 행합니다. 교회는 오늘 세례 받는 성도님과 아기를 책임감을 갖고 지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부활절을 맞아서 온 세상에 새로운 생명이 전파되길 원합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폭력, 미움, 시기, 불의, 차별 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모두 해결하셨건만 여전히 세상은 그것들을 손에 쥐고 쩔쩔매며 싸우고 갈등합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우리들 마음속에도 욕심과 염려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함께 살펴보았듯이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기 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담대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 번째로 살펴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우리들은 여전히 육체 가운데 거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여기서 믿음은 신뢰(trust)입니다. 신뢰는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믿음은 또한 결단입니다. 저절로 믿어질 수 없습니다. 믿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매 순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듯이 매 순간 예수님을 의지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는 동참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드는데 동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죽으면 사는 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내려놓으면 얻게 되고 나를 비우면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지고 걷는 갈보리 언덕길이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길을 가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우면서 함께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나서 부활의 영광을 맛보기 원합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He is risen!) -河-

그리스도와 함께 (1)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지금 구원해 주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대우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신 예수님께서 로마권력을 물리치고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메시야 왕국을 세워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정치범 또는 강도들이나 달리는 수치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고 속죄 제물로 죽으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구원 계획을 갖고 세상에 오셨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언하신대로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사망권세와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세력들에 대해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억하며 동참하는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기 원합니다. 우리들 신앙이 대체로 이기적이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들 자신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쳐주는 온전한 신앙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번 고난주간에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바라보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그 십자가 앞에 나가기 원합니다. 예배는 물론 삶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삼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 각 구절과 표현들을 꼼꼼히 읽고 말씀을 곱씹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과 똑같이 고백하면서 부활절을 맞기 원합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의 삶에 드러납니다. 바울의 과거도, 그가 범한 죄들도, 그를 유혹하는 악한 세력들도, 그를 핍박하고 힘겹게 하는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바울이 육신의 몸을 입고 살고 있지만 그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영은 온전히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 얽매입니다. 죄에 지배를 받습니다. 악한 영이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합니다. 자아가 강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염려와 근심을 온 몸으로 느낍니다. 두렵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에 모두 던졌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십자가의 능력에 동참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부활은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요 새로운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온전히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河-

듣는 마음

지난 주간에는 먼저 하나님께 가신 선배 목사님의 추도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갑작스런 비보를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홀로 남으신 사모님께서 꿋꿋하게 잘 지내시고 두 딸이 이제는 대학을 모두 졸업해서 사회인이 되었으니 하늘나라에 계신 목사님께서도 흐뭇하게 내려다보실 것 같습니다.

목사님과는 30여 년 전 군대에서 만났습니다. 직장은 서로 달랐지만 같은 건물에서 그것도 같은 금융 쪽에서 일했기에 종종 만나서 식사를 했고, 사회생활 선배로서 저에게 조언도 해 주셨습니다. 대학시절 목회자가 되기로 헌신했다는 얘기를 자주 하시더니 결국 좋은 직장을 뒤로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저도 2년 후에 같은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목사님의 뒤를 따라서 미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10년 전 샌프란시스코로 임지를 옮기면서 생각지도 않게 같은 지역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목회현장에서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배 목사님이 계시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커다란 힘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구약성경 가운데 욥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욥기는 구약성경에서 지혜문학에 속하는데 욥기를 좋아하시는 것에 걸맞게 현인(賢人)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여러 분야에 박식하셔서 어느 하나 막히는 곳이 없을 만큼 부지런히 공부하고 생각하고 그것을 나름대로 정리해 놓으신 훌륭한 목회자셨습니다. 목사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가신 지 6년이 지났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생각이 나고 그립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일찍 데려가신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듭니다.물론 하나님의 더욱 깊은 뜻이 있겠지요. 목사님을 추모하는 예배에서 저는 “듣는 마음”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솔로몬이 왕이 되어서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거의 백지수표를 솔로몬 앞에 내미십니다. 그때 솔로몬은 모든 것을 제하고 단지 지혜로운 마음을 구합니다.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마다하고 지혜를 구한 것을 칭찬하시면서 다른 것들도 덤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마음”에 해당하는 말씀을 히브리어 본문 그대로 읽으면 “듣는 마음”이 됩니다. 그것도 현재 진행형이 쓰였으니 매 순간 듣고 있는 마음이라고 풀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듣다는 히브리어 동사에는 이해하다 또는 분별하다는 뜻도 있어서 지혜로운 마음 또는 분별하는 마음으로 읽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래도 히브리어 본문을 읽다 보면 제일먼저 “듣는 마음”이라는 의미가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니 지혜는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늘의 지혜를 얻습니다. 앞에 가신 선인들의 말씀이나 그들의 인생을 살피고 들으면서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세상에 많은 지혜로운 현인들의 글을 읽고 들을 때 우리들도 지혜로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무엇보다 세상을 살면서 잘 듣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서둘러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지혜롭기 보다 어리석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말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SNS)가 발달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앞세우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인터넷 상의 댓글 문화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너도 나도 자기가 옳다고 말하니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차분하게 남의 얘기를 경청하고, 남의 사정을 마음으로 공감해 주는 “듣는 마음”을 가진 이웃들이 그립습니다. “지혜는 들음에서 나오고 후회는 말함에서 생긴다”는 영국속담이 있답니다. 성경에서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기도했듯이 듣는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일같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말 가운데서 들을 것을 듣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을 하나님께 구합니다.(2015년 3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