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독서

우리가 사는 베이 지역은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지만 여기저기 떨어져서 뒹구는 낙옆을 보면서 어느덧 늦가을로 접어 들었음을 느낍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불립니다. 가을이 되면 날씨가 선선해져서 책을 읽기 좋고 또한 수확의 계절 가을에 책 읽기를 통해서 마음의 수확까지 거두라는 뜻에서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책을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자랐고 부모님께서 연로하셨기에 저를 위해서 책을 사 주실 여유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70년대에는 자유교양경시대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매년 주최측에서 선정한 책을 읽고 군이나 도대회에 나가서 독후감을 비롯한 독서 시험을 치는 대회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골 학교의 대표가 되어서 선정된 도서들을 샅샅이 읽는 훈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회에 나가서 시험을 치러야 했기에 방과후에는 학교에 남아서 선정된 도서들의 내용을 정리하고 선생님께서 미리 내주신 예상 문제를 풀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우연찮게 독서훈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지금도 책을 읽는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그러고 보니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맞는 듯 합니다.

여러 권의 책을 빨리 읽는 다독(多讀)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독을 통해서 많은 지식을 두루 섭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 읽기의 정석은 뭐니 뭐니 해도 정독(精讀)에 있습니다. 줄을 치고 여백에 메모를 해 가면서 한 줄 한 줄 치밀하게 읽어가는 정독은 책 속에 빠져드는 독서 삼매경의 기쁨을 만끽 할 수 있게 만듭니다. 정독에 해당하는 적절한 영어 표현을 찾는다면 “close reading(자세히 읽기)”일 것입니다. 책과의 간격을 최대한 줄이고 책 속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독서를 즐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도 한 단어, 한 표현, 한 구절까지 놓치지 않고 자세히 정독해야 합니다. 그때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이미 중세시대부터 성경을 자세히 읽는 거룩한 독서법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렉치오 디비나”라고 불리는 독서법인데 여기에는 적어도 네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을 차근차근 읽는 것입니다 (렉치오). 성경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연애편지라고 생각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읽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읽은 말씀을 마음으로 곱씹는 묵상 (메디타티오)입니다. 성경 읽기에 묵상이 빠지면 마치 한 귀로 들은 것이 한 귀로 나가듯이 읽은 말씀이 어디론가 빠져나갑니다.묵상은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작업입니다. 말씀을 마음 속에 꼭 붙들어놓으려는 노력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읽고 묵상한 말씀을 붙들고 입술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라티오).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길 기도하는 것입니다.말씀을 갖고 자신은 물론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으니 이제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말씀 안에서 쉼을 얻는 안식입니다 (콘템플라티오). 말씀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동안 자신이 말씀을 읽었다면 이제부터는 말씀이 자신을 읽도록 말씀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집착이나 이기심을 내려놓고 온전히 말씀 앞에서 평온함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어지럽고 복잡한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한 독서는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단독자로 서서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말씀 속에서 힘과 지혜를 얻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안에서 쉼을 얻는 귀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말씀의 깊이에 푹- 빠져 드는 거룩한 독서를 통해서 우리의 내면이 부요해지고 하루 하루의 삶에 말씀의 은혜가 넘치길 원합니다. (2011년 10월 28일 SF한국일보 칼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이라는 찬양 가사처럼 우리들은 참 좋으신 하나님(God is so good)을 믿습니다. 여기서“좋다”라는 말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틀림없으시고(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분으로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늘 아버지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호세아 말씀에서 가정을 버린 아내를 끝까지 찾아갔던 남편처럼 하나님께서는 등을 돌린 자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이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모습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 그대로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삶 속에서 체험한다면 우리들도 앞에서 소개한 찬양의 마지막 가사처럼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좋으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의 하나님(God is love)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요한일서 4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8절/16절)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두고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자식이 알아주지 않을 때가 많지만 부모님은 무조건적으로/변함없이 자식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내리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그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목숨까지 바치면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받은 사랑을 이웃들에게 조건 없이 나눠줘야 합니다. 값없이 받은 사랑이기에 값없이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분수처럼 넘쳐서 세상으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갖고 있기보다 이웃과 더불어 나눌 때 더욱 풍성해 지고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죽음이나 심판이 와도 담대합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임하고 그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갈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로 변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기 원합니다.-河-

너는 내 백성이라

하나님 – 어려서부터 또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던 분들에게는 익숙한 말이지만 뒤늦게 하나님을 믿으신 분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라고 말해도 그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어도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지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쳐주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신들을 찾아가서 그것들을 숭배했습니다. 대표적인 신이 가나안의 토속 신이었던 바알이었습니다. 바알은 황소와 같은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면 큰 복을 받고 자식을 많이 낳는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알을 믿는 종교는 성적으로도 문란해서 육체의 탐욕을 채워주기도 했습니다. 일단 눈에 보이고 자신들에게 물질적인 복을 갖다 주고 자유롭게 즐기면서 종교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구약 성경의 호세아서는 이스라엘에 바알을 비롯한 이방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을 때 선포된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알기 쉽게 설명하십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한 것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부부관계로 가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생각하신다면 신부된 이스라엘은 남편 되신 하나님께 순결한 모습으로 나갔어야합니다.

남편만을 사랑하면서 평생을 사는 것이 올바른 신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신랑 되신 하나님을 놓아두고 다른 신인 바알을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결혼한 부인이 다른 남자를 따라 나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자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다시금 신부로 맞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9-20절은 신랑 되신 하나님께서 신부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대우해 주시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약속은“의로움”“공평함”“은총”“긍휼”“진실함”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아무리 못되고 그릇된 길로 가도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변덕스럽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약속을 지키십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신부된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저희들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길 기다리십니다. 그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에 임하십니다. 우리들 마음에 임하시고 우리의 삶속에 임하십니다. 우리의 생업에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심을 이 땅의 복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한 가지 뿐입니다.:“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23절) 아멘 -河-

바로 그분

좋은 아침입니다.

1.

언젠가 한국 방송을 보는데

어떤 연애인이 홈 쇼핑에 중독이 되었다고

남편이 흉을 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중독까지는 아니지만

제 경제행위가운데

도서 구입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빠듯하게 돌아가는 살림에

아내와 두 아들에게 미안해서

이제는 구입한 책만 보겠다고 다짐하지만

신간이 소개되면 저도 모르게 크레딧 카드 번호를 주면서

책을 구입하곤 합니다.

엊그제도 책 한 권을 구입했습니다.

제목 (what God thinks when we fail)이 마음에 들었고

책 표지에 거북이가 벌러덩 누워있는 것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2.

이 책의 저자는 런던의 한 음악가에 대한 일화를 소개합니다.

이 분은 음악적인 재질이 많고 연주를 꽤 잘하던 바이올린 연주가인데

많은 청중들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답니다.

워낙 재능이 있는 음악가였기에 한번은

큰 연주회에 초청을 받아서 멋지게 음악을 연주했답니다.

연주가 끝나고 모든 청중이 일어나서 박수를 치는데도

이 사람은 객석을 두리번거릴 뿐 반응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있다가 아주 기뻐하면서

객석을 향해서 인사하고 무대 뒤로 나갔습니다.

나중에 한 비평가가 청중들의 박수에 곧바로 반응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더니

이 음악가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답니다.

오늘 제 선생님께서 오시기로 했습니다.

연주를 하면서 선생님을 찾을 수가 없어서,

연주가 끝나고 선생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찾다가 그만 박수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제 선생님께서 발코니에 계셨고 저를 향해서 기립박수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박수만 받으면 되었거든요!”

3.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을 의식하고 살아갑니다.

누군가 중요하게 생각되는 사람(significant other)의 인정을 받으면

그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늘 다른 사람()의 반응에

마음을 쓰고 때로는 자신이 마음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기도 합니다.

제가 읽은 책의 저자는

우리들이 정말로 신경 써야 할 분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바이올린 연주가가

자신이 선생님께만 인정받으면 자신의 연주는 성공이라고 생각했듯이

우리들 역시

한 분의 인정만 받으면

우리의 삶이 어떡하든지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실패의 기준에 상관없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 분은

우리가 믿고, 예배하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가장 중요한 그 분(the ultimate significant other)이시지요.

오늘 하루

여러 사람을 만족시키려 애쓰기 보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기 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온 힘을 쏟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꼭 기억할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기립박수를 쳐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힘내십시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참빛 교회 식구들을 주목하시고

한없이 사랑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10.13 메일 목회서신)

하나님의 붙드심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커다란 주제로 다섯 번째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향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선한 뜻을 갖고 계시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사실 교회에 오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체험이라고 누누이 말씀드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될 정도로 우리를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특히 성령을 주셔서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펼쳐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들의 백합화나 공중의 새와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장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좋으신 분으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마음과 삶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예비하시기에 우리들은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적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면서 마음이 분산되는 것 역시 올바른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신앙의 길을 경주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을 체험할 수 있음을 꼭 기억합시다.

오늘 살펴볼 시편 139편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 가지 모습을 연상해야 합니다. 첫째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5절에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르시고 우리를 안수해 주십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안에 내재(內在)하십니다.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멀찍이 존재하십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늘에 계신다고 말했고 이런 하나님을 초월적인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 세상은 물론 우리들의 인생길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십니다. 9절 말씀대로 우리가 바다 끝에 가 있더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치를 다 파악하십니다. 여기서 바다 끝은 절박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시편이 쓰이던 당시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바다 끝에는 폭포수와 같은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다 끝에 있다는 것은 백척간두의 아찔한 순간에 처해 있음을 뜻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오장육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신체가 얼마나 신묘막측합니까? 우리들이 모태에서 조성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알고 계셨다고 오늘 시편기자가 고백합니다(15절). 그 하나님을 우리가‘아버지’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좋으신 하나님으로 우리들 각자에게 임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를 감싸시고, 하늘에서 돌보시고, 우리를 신묘막측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그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삶 속에서 체험하시길 바랍니다.-河-

한 사람의 죽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우리는

한 사람의 죽음을

한 마음으로 애도하고 있습니다.

애플의 창업자였던

스티브 잡스의 죽음입니다.

56년의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지만

혹자는 그를 에디슨과 비교할 정도로

세상에 혁신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한

위대한 한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지

그의 삶과 일을 통해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종착역(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이라고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잡스 자신이 말했듯이

그는 많은 유산과 감동을 세상과 사람들 마음 속에 남겨놓고

죽음의 길을 떠났습니다.

2.

2천년 전

서른 세 살의 젊은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주 받은 나무에 매달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3년 동안 유대 땅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기적과 말씀 그리고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지만,

실제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보고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다음과 같이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도다/it is finished.

물론 이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종착역인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외롭게

십자가 위에서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종착역이 아니라

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춰 주는 시작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입었고

허물과 죄로부터 구원받았고

무엇보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온 인류를 살린 것입니다.:

그런즉 한[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5:18)

Consequently, just as the result of one trespass was condemnation for all men, so also the result of one act of righteousness was justification that brings life for all men.

게다가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He is risen!).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으심과 부활!

유한한 인생길을 가는 우리들이

마음에 꼭 품고 있어야 할 믿음이요 확신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참빛 교회 식구들의 마음과 삶에

깊이 깊이 뿌리내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10.6 메일 목회서신)

너희는 먼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우리들은 염려를 달고 살아갑니다. 밖에서 밀려오는 염려에 대처하고 나면 마음속에서 염려가 생깁니다. 반대로, 안에서 생기는 염려를 해결하고 나면 밖에서 염려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먹고 사는 것과 관련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염려는 믿음이 적다는 표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시는데 염려한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이나 들의 백합화를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목숨까지 바꾸면서 사랑하신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안다면 하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을 때 마음의 염려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에 맞추는 것입니다.“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먼저”입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가 눈앞에 닥칠 때에도 그 문제보다 먼저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신앙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는 우선순위만 확실히 정해지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저절로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실패하곤 합니다. 그래서 수 천길 아래 낭떠러지 밑에 있는 물을 먼저 바라보고는 잔뜩 겁을 먹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곳은 어디나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주관하신다면 우리 마음도 곧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가정과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도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하나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여기에 어울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듯이 우리들도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손색이 없도록 멋지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더함의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34절에 있듯이 내일 일을 두고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의 거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일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의 염려는 그때 닥쳐서 해도 됩니다. 오늘 이 순간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삶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오늘(present)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선물(present)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주어진 삶에 충실할 때 미래의 염려가 사라집니다. 염려가 밀려올 때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지금 주어진 삶 속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십니다.-河-

거울속에 비친 모습

요즘 한국에서는 동안(童顔)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얼굴이나 모습이 나이에 비해서 현저하게 젊어 보일 때 그것을 두고 동안이라고 합니다. 동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운동은 물론 심한 경우는 성형수술까지 불사한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동안은 노안(老眼)으로 바뀌는 것이 순리일 찐대 지나치게 외모에 집착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키가 작아서인지 나이에 비해서 젊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얼굴에 주름도 있고 눈가에 다크써클도 생겼지만, 멀리서 얼핏 보면 대학교 4학년 아들을 둔 50세 중년 남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10년은 젊은 30대 후반으로 보았고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저를 아직도 젊은 목사로 생각하시는 것을 보면 제 판단이 아주 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동안을 자랑할 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느낍니다. 염색을 하지 않으면 머리는 거의 백발입니다. 사진은 거짓말을 시키지 않는다고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데, 저 역시 사진에 나온 제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중년 아니 이제 50대에 접어든 노년의 모습도 보입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고등학교 동창들의 인터넷 까페에 들어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까까머리에 검정색 교복을 입고 미소년 같았던 친구들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조금 심하게 말하면 늙수그레한 남자들이 등산을 가서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때 그 시절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입니다. 30년 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의 얼굴이 생소할 만큼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저도 슬쩍 일어나서 거울을 봅니다. 동안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도 인터넷에 올라온 고등학교 동창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친구들도 나를 보면 똑같은 생각을 하겠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쓸쓸해 집니다.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예전의 부모님들이 그토록 사진 찍기를 싫어하셨고 거울 앞에서 심난한 표정을 지으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이렇게 지나갑니다. 한 세대가 지나면 다음 세대가 오고 세상은 변하지 않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자꾸만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익히 간파한 구약 성경의 전도서에서는 인생살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전도서1:1). 그러니 너무 세상살이에 집착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물 흘러가듯이 세상의 순리에 순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얼굴이 변해가는 것은 정상입니다. 동안만 좋은 것이 아니라 노안 속에도 매력이 있습니다. 그 동안 살아온 인생 경험이 얼굴에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까지 꿋꿋하게 여러 가지 풍상을 겪으면서 견디고 살아온 것만도 대단한 것입니다. 물론 신앙인이라면, 이것이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도와주셨고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의 손을 붙잡고 동행해 주셨기에 가능했던 지난 날들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거기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의 얼굴 속에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비록 동안이 아니어도 행복한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거울 앞에 서서 행복한 표정으로 웃어봅니다. 멋진 모습입니다. 세상에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매우 독창적인 얼굴입니다. 웃는 모습 속에 희망이 보입니다. 남은 인생을 한결같이 인도해 주실 하나님을 향해서 저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시편4:6). 아멘.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11.9.30)

그리스도의 사랑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이 벌써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올해도 이제 정확히 세달 남았네요.

종종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냥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일을 끝낼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모여서 한 달이 되고

한달 한 달이 모여서 한 해가 되는

시간개념도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나이에 대한 개념도 없겠지요.

그런데

인간이 시간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서

도리어 시간에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닌지

2.

시간뿐 아니라

우리들은 무엇엔가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스스로 홀로서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제

수요예배에서

고린도후서 5장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중간쯤 갔을 때

사도바울의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후 5:14)

The Love of Christ controls us.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에 흠뻑 젖어 있습니다.

그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그가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겼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 잡습니다.

참 리얼한 번역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휘어 잡힌 그리스도인!

얼마자 멋진 고백입니까?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우리를 휘어잡으려고 유혹하고 접근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에 휘어 잡혀서 살아가야 합니다.

3.

이 아침에 바울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 이길 원합니다.

9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하루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그 안에 흠뻑 빠져봅시다.

그리고 세상에 그 어떤 것에 휘둘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통제 받기를 기도합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The Love of Christ controls us!

하나님

참빛 교회 식구들의 신앙과 삶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휘감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9.29 메일 목회서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우리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여긴다면 두 가지를 꼭 인정해야 합니다.

첫째는 히브리서 11장 6절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의 삶과 세상사에 간섭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번 연속 설교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섭리는 참새 한 마리까지 기억하실 정도임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지요.

둘째로, 우리가 찬양하듯이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의로우신 분인데 우리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모두 용서함 받게 되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하고 믿을 때 우리들은 비로소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믿은 후에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머리로 믿어도 그것이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신앙이 냉랭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진실된 기도가 그대로 응답된다면 그리고 이런 경험이 반복된다면 우리들은 비로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인생길에서 염려와 근심이 밀려올 때 기도해야합니다.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생기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분산되었을 때 염려가 생기고 근심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또한 염려와 근심은 우리들이 두 마음을 품었을 때 생깁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보면 마음에 혼란이 찾아오고 그것이 깊어지면 염려와 근심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에 속한 말씀으로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부탁하십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따라나선 제자들이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들의 백합화도 공중에 나는 새들도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이신데 자신을 믿는 기독교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반어법적 교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근심이 밀려오면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염려하는 대신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먼저”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고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그때 우리 안에서 먹물처럼 올라오는 염려와 근심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이 참빛 교회 식구들 신앙과 삶 속에 임하고 흔들림 없는 신앙으로 나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