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합창단

좋은 아침입니다.

1.

저희 집에 위성방송 안테나를 달고 나서는

한국 방송으로 채널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요즘 한국 방송에서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발견했습니다.

연세가 꽤 되신 분들이 모여서

합창 연습을 합니다.

자세히 보니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제외하면

합창 단원들이 거의 할머니 할아버지이십니다.

합창단 이름도 청춘 합창단입니다.

이 분들은 연습도 열심히 하지만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질문을 받으시면

자신들의 생각을 쭉풀어 놓으십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마치 초등학교 어린이들처럼

순수한 모습으로 노래하시는 것이 보기 좋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연세가 드신 어르신들이 꽤 되시는데

어르신들 합창단을 만들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2.

합창에는 특별한 묘미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화음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운 음색에

남성의 굵은 목소리가 합쳐진 화음!

소프라노부터 베이스까지

각 파트가 어울려서 내는 화음!

합창대원의 숨소리까지 하나로 합쳐지고

그 안에 마음까지 합쳐졌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합창이 완성됩니다.

인생살이가 합창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독불장군으로 혼자서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자기 목소리만 크게 내도 인생의 화음이 깨집니다.

너무 소리를 내지 않으면

인생의 합창에 힘이 빠집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소리를 내지만

그것이 합창으로 어우러질 때

가정이나 교회나 세상이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엊그제 읽었던 전도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전도서 4:9-12)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도우미가 되어야 합니다.

목소리가 합해지고

마음이 합해져서 우리의 삶이

합창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온 세상에 퍼져 나가길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참빛 교회가

한 마음으로 어우러진

신앙 공동체로 굳건히 자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9.22 메일 목회서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God is so good)”이라고 고백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목소리로 들려주시지도 않는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말하고 또 찬양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로 좋으신 분일까요?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긴 어렵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세상에 선한 일만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커다란 세상일 말고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봐도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망설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누가복음 12장 말씀대로 하나님은 하찮은 참새 한 마리도 기억하시고, 우리들의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세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세심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생각해 주신다면 좋으신 하나님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자식을 끔찍이 생각합니다. 자식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줄 아버지가 없습니다. 알을 달라고 할 때 전갈을 주는 아버지도 없습니다. 자식을 낳은 친 아버지라면 절대로 이런 일을 자식에게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자기 자식을 챙기는 것이 인륜지도(人倫至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를 언급하신 다음에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라고 하나님을 소개하십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참새 한 마리와 머리카락을 언급하신 다음에 제자들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신 것과 같은 패턴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더욱 좋은 것으로 자녀된 우리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육신의 부자지간은 아버지와 아들의 친자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과 분명한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확실히 알고 믿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마음에 모셨을 때 비로소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증합니다. 또한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면서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게 되는 것부터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받게 되는 모든 과정에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진리의 길로 가야합니다. 생선이나 계란과 같은 육적인 필요를 넘어서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성령 하나님께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좋으신 분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자녀 삼아주셨기에 가능함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을 믿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는 참빛 교회 식구들 되시길 부탁드립니다.-河-

No! 변덕쟁이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주보에 나오는 큐티 말씀이

마태복음의 마지막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오늘은 로마 군병들에게 잡히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제 내일부터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는 말씀으로 쭉이어지겠지요.

복음서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어찌 보면

십자가위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절정(클라이맥스)으로 삼고

거꾸로 소급해 가면서 바둑 복기하듯이

복음서가 기록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와 부활이 중요하지요.

2.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면서 제자들이 모두 흩어집니다.

흩어진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도망갔다고 원색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26:56)

Then all the disciples deserted him and fled.

예수님께서 잡히자

제자들이 예수님만 홀로 남겨놓고

모두 도망간 것입니다.

두려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아니면 전능하신 예수님께서 잡히시리라고

생각하지 못하다가 막상 잡히시니까 줄행랑을 친 것이지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엊그제 큐티 본문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베드로에 이어서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똑같이 말했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들 이와 같이 말하니라.( 26:35)

But Peter declared, “Even if I have to die with you, I will never disown you.”

And all the other disciples said the same.

그러고 보니

제자들은

상황이 급변하자

불과 몇 시간 만에 자신들이 했던 말을

뒤엎은 셈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만 남겨놓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멀리 도망가지 않고

바깥 뜰에 머물렀지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3.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많은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변하면 한 순간에 마음을 바꿉니다.

예수님 혼자 내버려두고

줄행랑을 치는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신앙은 상록수처럼

변함이 없어야 하는데

상황에 따라서 또는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을 때

우리들 역시 예수님을 등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외로이 계시는 순간들입니다.

이제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기 원합니다.

행여나 예수님만 홀로 남겨두고

도망간 적은 없는지요?

신앙이 조변석개

변덕스러움의 극치를 달린 적은 없는지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굳게 서시는

참빛 교회 식구들 되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신앙이

상황을 따라서 변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나님만 바라보는

참빛 교회 식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9.15 메일 목회서신)

참새 한마리와 하나님

오래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을 그냥 일상의 삶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삶 자체가 신앙이 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감격과 감탄을 상실한 무덤담한 신앙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을 오래 믿었지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믿음이 약해서 회의를 머리에 달고 살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통 좋으신 하나님이요 완벽하신 분이라고 믿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좋으신 하나님의 작품과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세상에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불공평과 불의가 판을 치는데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신앙에 회의가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셔야(계시하셔야)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감지하기에는 우리들이 너무 부족합니다. 게다가 우리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 까지 하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입니다. 그 가운데 한명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지 못한 채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도 나머지 열 한명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습니다. 훗날에 이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초대교회를 세우는 사도들이 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시대를 역행하면서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수만 명이 예수님 곁에 모여들었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병이 낫고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였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위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사리온(페니)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카락의 숫자도 세고 계실 정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신을 따라 나선 그리스도인들의 형편과 처지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인 우리들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고 체험했을 때 우리들의 신앙이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감격과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거기에 그치 지 않고 세상에 나가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河-

고난이 주는 세가지 유익

좋은 아침입니다.

수요예배에서

고린도후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는

첫 번째 장부터 고난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세우는 것도 어렵지만

당시에 고린도라는 세속도시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타락한 세상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가기 전까지

세상 속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잔잔한 파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습니다.

아니 파도타기를 하면서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인생의 파도도 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앞 길이 깜깜할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오는

환난도 웬만한 쓰나미급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 속에서

세가지 유익이 들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훗날 똑같이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을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 1:4)

…So that we can comfort those in any trouble with the comfort we ourselves have received from God.

둘째는,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크고 깊은 위로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하나님의 위로도 그만큼 넘친다는 바울의 고백이고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후 1:5)

For just as the sufferings of Christ flow over into our lives, so also through Christ our comfort overflows.

고난이 주는 마지막 세번째 유익은

우리로 하여금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 앞에 밀려오는 어려움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것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기회로 역전시켜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 1:9)

Indeed, in our hearts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But this happened that we might not rely on ourselves but on God, who raises the dead.

바울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죽음의 순간에

생명을 주관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의지했습니다.

이쯤 되면

어떤 인생의 쓰나미가 밀려와도

능히 맞닥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힘이 나옵니다.

p.s.

9.11 10주년을 맞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사랑하는 친지들을 잃고 어려운 기간을 견뎠던

많은 분들께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길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우리 앞에

크고 작은 인생의 파도가 밀려 올 것입니다.

어려움을 예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능히 이길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9.8 메일 목회서신)

사도행전 속의 교회들 (5) : 에베소 교회

사도행전 속의 교회들에 대해서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함께 살펴본 사도행전의 교회들은 어렵게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예배하심 가운데 복음의 전진기지로 굳건하게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향하여 마음이 열린 사람들을 예비해 놓으셨고, 이들은 교회가 세워지는데 초석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역시 복음전파가 지체되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주님의 때와 능력을 기다리면서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2천 년 전, 회당에서 또는 가정에서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들이 오늘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고 공동체로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시작점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격스럽고 책임감도 느껴집니다.

이제 오늘은 마지막으로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는 처음에 살펴보았던 안디옥 교회가 있었던 소아시아에 위치에 해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항구도시로서 로마에서 아시아로 오는 무역선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르곤 했습니다. 당시 인구가 25만 명에 이를 정도였고,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디옥에 이어서 네 번째로 큰 로마도시에 속했습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다이애나)라는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에베소가 당시에 중요한 항구도시였기에 바울도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를 자주 들렸습니다. 유럽에서의 2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일행은 에베소를 거쳐서 자신들의 파송 교회인 안디옥으로 귀환합니다. 그때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났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에베소에 남겨두었는데 이들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이들을 통해서 복음의 씨앗이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제일먼저 에베소를 들렸습니다. 그때 바울이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들은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지만 형식적으로 믿을 뿐 마음 깊은 곳에 확신과 능력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주니 이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때 세례를 받은 열두명의 제자들이 곧 에베소 교회를 세우는 일꾼이 됩니다.

바울은 세달 동안 회당에 가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에베소에서도 바울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생깁니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입니다. 완고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리 잡을 틈이 없었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바울을 공개적으로 비난합니다. 바울은 회당을 떠나서 두란노라는 서원에 가서 날마다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바울은 에베소에 2년 간 거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또한 에베소에 머물면서 그동안 개척한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권면하고 격려했는데 고린도전/후서가 대표적입니다. 훗날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도 에베소를 중심으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 훌륭하게 자라갔습니다.

어떻게 에베소 교회가 이렇게 굳건하게 세워졌을까요? 그것은 첫째로 에베소 교회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말씀 위에 세워졌습니다. 셋째로 에베소 교회에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처소에서 교회를 세우게 될 우리 참빛 교회 위에 무엇보다 더 크고 강력한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임하기를 기도합시다.-河-

변화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을 믿는 것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변화입니다.

신약 성경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육신의 질병이 고침 받고 건강해 지는 변화,

평생 구두쇠로 살았던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변화

제자들은 세상 직업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인생의 변화!

이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어떤 모양이든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변화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증표(sign)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변화되지 않았다면,

아직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신앙에서 변화가는 중요합니다.

생각의 변화.

마음과 성품의 변화

삶의 변화,

인생을 내다보는 인생관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전반적으로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9월의 첫 번째 날이 지나고

두 번째 날을 맞이합니다.

새달을 맞으면서

이번 한달 동안

예수님을 믿는 우리 각자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예수임을 닮은

진정한 그리스도인(Christian)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합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후 5:17)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

하나님 아버지

또 한번 새 달을 맞는

참빛 교회 식구들에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변화가

날마다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9.1 메일 목회서신)

사도행전 속의 교회들 (4) : 고린도 교회

지난주에 살펴본 데살로니가가 마게도니아 지방의 수도였듯이, 고린도는 마게도니아 밑에 있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도 바울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곳에 교회를 세운 셈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울의 전략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파장이 당시 강대국인 로마를 거쳐서 땅 끝까지 전파되는데 대도시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인 샌프란시스코에 세워진 우리 교회의 사명이 적지 않음을 다시금 느낍니다.

고린도는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었고 무역의 요충지였기에 경제적으로도 윤택했습니다. 무엇보다 고린도에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음란한 행위가 합법적으로 자행되곤 했습니다. 게다가 항구에 접해 있어서 여러 사람들의 발길이 고린도를 오갔습니다. 고린도는 이처럼 소위 양반의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행하는 말 가운데 도덕적으로 문란한 경우를 두고 “고린도 스럽다(to act the Corinthian)”는 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러갑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복음은 준비된 사람에게 임했고, 그들이 교회를 세우는 기초석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그곳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귀한 동역자를 만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에 살다가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인해서 고린도로 이주한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텐트와 가죽을 수선하는 사람들로 사도 바울과 직업이 같았습니다. 이처럼 공통점이 많았기에 이들은 바울과 쉽게 친해졌고 고린도에서의 사역은 물론 그 이후에도 평생 동역자가 됩니다.

바울은 전례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숫자가 많아지면서 다시 한 번 유대인들과 부딪칩니다. 바울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서 별도로 모임을 갖습니다. 회당 옆집에서 모임을 갖다보니 유대인의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건도 생겼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났는데 결국은 회당장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이것도 기적입니다.

이렇게 고린도라는 세상적인 도시에 복음이 들어갔고 그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힘을 불어넣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것을 부탁하십니다.“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주님의 백성들이 많으니 복음 전파에 더욱 열심을 내라고 격려하십니다. 바울은 그곳에 1년 6개월 거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준비되고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서 세워짐을 또 다시 배웁니다. 로마에서 추방당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고, 핍박으로 교회를 옮겼을 때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에 있다는 말씀을 통해서 바울과 교회에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축복입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더욱 헌신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우리 함께 세계적인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멋진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봅시다. -河-

조급증 벗어나기

2주 전쯤에 교단 목회자들의 수련회가 있어서 몬트레이에 다녀올 때였습니다. 저희 부부는 사정이 있어서 수련회 첫날만 참석하고 밤늦게 돌아와야 했습니다. 자동차에 타서 계기판을 보니 개스가 한 눈금 남짓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원래 미리 미리 개스를 넣는 편인데 그 날은 무심코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내와 둘이 교회에 대한 이야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야 데이트를 즐기고 있을 즈음, 갑자기 개스 경고등이 켜졌습니다. 그래도 20여 마일은 문제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눈금이 생각보다 아주 빨리 떨어집니다. 앞으로 몇 마일을 더 갈 수 있는 지 계기판을 점검해 보니 7마일 가면 개스가 모두 소진된답니다. 깜짝 놀라서 고속도로 출구를 찾았지만 좀처럼 나오질 않았습니다. 280 하이웨이는 자주 다니던 곳인데 스탠포드를 지나서부터 깜깜한 산길이 연속인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결국 1마일 남았다는 표시등이 들어왔습니다. 등줄기에 땀이 흐릅니다. 아내는 옆에서 기도를 합니다. 여행길도 아니고 산길도 아니고 우리 동네에서 그것도 밤 12시에 개스가 떨어지면 이거 무슨 창피입니까? 앞에 92번 하이웨이 출구가 보입니다. 개스를 아끼려고 기아를 중립에 넣고 내리막길을 따라 갔습니다. 주유소가 보였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요! 기름을 넣고 나니 제 배가 다 부른 듯 했습니다. 이제는 대륙횡단도 할 수 있을 만큼 기분이 홀가분했습니다.

개스를 넣고 집으로 향하는데 슬그머니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1마일 남았어도 그곳에 주유소가 있었는데 너무 초조해한 것 같았습니다. 개스가 떨어지면 AAA를 부르면 되고, 아내가 옆에서 열심히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우리 길을 인도하실 텐데 지나치게 안달을 떨었던 것 같았습니다. 산골도 아니고 도시에서 개스가 떨어졌다고 큰 일이 생길 것도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위기상황이 닥쳐오자 조급증이 발동했던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다급한 상황 앞에서 조급해 지기 마련입니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물을 찾았습니다. 광야 길을 걷다 보면 갈증이 났을 것입니다. 또 언제 오아시스가 나올지 모르기에 더욱 초조했을 것입니다. 기껏 샘을 만났는데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모세가 기도하고 나뭇잎을 물에 던지니 쓴 물이 단 물로 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증을 해소하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것이 왠 일입니까? 그들 앞에 엘림이라고 하는 커다란 오아시스가 나타났습니다. 눈 앞에 오아시스가 있었는데, 조급한 마음에 참지 못하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했던 것입니다.

개스 경고등에 1마일이 나왔지만 개스가 떨어지기 전에 주유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느긋하게 그 위기의 순간을 도리어 즐겼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열 두 개의 샘물이 있는 오아시스가 있는 것을 알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중간에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앞을 훤-하게 내다보는 투시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조급해 하고 안달하면서 살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로 돌려봅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앞을 내다보신다”)라고 소개합니다. 우리들의 앞을 내다보시고,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믿는다면 개스가 떨어져가더라도, 갈증에 쓰러질 것 같더라도 조급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보다 앞서 가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길을 가다 보면 끝이 없는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힘들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연속해서 밀려오고, 이대로 추락하는 것이 아닌지 초조한 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보다 앞서가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너무 조급해 하거나 목적지를 눈 앞에 두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인생의 오아시스를 향해서 나가기 원합니다.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엘림을 예비해 놓으셨음을 믿고 침착하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가는 것이 조급증을 벗어나는 비결입니다. (2011년 8월 26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땅에 묻고 다시 시작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의 삶이

어렸을 적 눈덩이 굴리기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지만

눈덩이를 굴리다 보면

점점 커집니다.

커져서 좋지만

나중에는 눈덩이에 지저분한 물질들도 붙게 되고

눈덩이를 굴리는 것이 힘에 부칩니다.

그때는 적당한 곳에

눈덩이를 놓고

새로운 눈덩이를 굴리곤 했습니다.

2.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21년간의 종살이를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말씀이 나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와 극적으로 화해하지만

딸 디나가 낯 모르는 지방에서 산책을 나갔다가

그만 그 땅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여동생이 치욕을 당한 것에 분노한 오빠들이

세겜 사람들을 죽인 복수를 보면서

다시 한번 야곱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리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처음 고향을 떠날 때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돌아가서 예배자의 삶을 살 것을 부탁하십니다.

야곱은 가족들을 모으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이방 신앙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35:2)

Get rid of the foreign gods you have with you,

And purify yourselves and change your clothes.

하나님 말고

그들이 의지하던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내적으로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겉모습을 치장하던 옷도 갈아입으라는 부탁입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출발입니다.

야곱은 가족들이 가져온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등 장식품들을

자식들이 죄를 지은 그곳

세겜 땅에 묻습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 묻고…(35:4)

So they gave Jacob all the foreign gods they had and the rings in their ears, and Jacob buried them under the oak at Shechem.

이제 한결 홀가분해졌습니다.

자신들의 잘못과 과거를 땅에 묻었기 때문입니다.

벧엘로 향하는 야곱 일가의 여정을

우리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 35:5)

Then they set out, and the terror of God fell upon the towns all around them so that no one pursued them.

3.

우리들도 종종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 동안 굴려왔던 눈덩이를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 동안 우리의 마음가짐과 삶을 점검하고,

하나님과 관련 없는 것들을

땅에 묻는 결단과 행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땅에 묻는 시도를 해 봅시다.

그리고 야곱처럼

우리의 인생길을 새롭게 발행(to set out)해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

옛 것을 땅에 묻고

새로운 길을 발행하는

참빛 교회 식구들의 발걸음을 지키시고

친히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8.25 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