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좋은 아침입니다.


1.

세상에는

아름다운 말이 꽤 많이 있지요.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할 좋은 말이 바로
더불어또는 함께일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을 두고

우리의 옛 자아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는다고 했습니다( 2:5-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함께의 은혜를 체험한 우리들 역시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지체들과

더불어/함께 거해야 합니다.

2.

어제 수요예배에서는 고린도전서 12장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어떤 은사를 가졌든지

어떤 지위를 갖고 있든지

모두 그리스도의 몸(body)을 이루는 지체들 (parts)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몸의 모든 지체가 다 필요하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각각의 성도들이

다 필요하고 제 몫(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주 쓰는 말로 하면

한 식구” “하나님 나라의 한 가족입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들은

서로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동고동락(同苦同樂)해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모습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6-27)

손가락에 티눈만 생겨도

온 몸이 아픕니다.

그 티눈이 없어지면 얼마나 개운한지 모릅니다.

한 몸을 이루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3.

우리 참빛 교회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기 원합니다.

아픈 지체들, 고난 가운데 있는 지체들과 함께 아파해야 하고,

어려움의 짐을 서로 나눠져야 합니다.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함께 한다는 표시로

그저 손을 꼭 잡아주고,

뒤에서 간절히 기도해 주면 됩니다.

또한

좋은 일이 생긴 식구들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아무리 같은 교회 식구라도

남들이 자신보다 잘되면 시샘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

사단이 주는 유혹일 것입니다.

또 우리 본성이 그렇게 생겨 먹었습니다.

교회 식구들의 좋은 일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기 원합니다.

함께의 은혜를 서로 나누는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이 생각나거든

그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그들의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함으로 오늘 말씀을 실천해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참빛 교회 식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7.21 메일 목회서신)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엊그제 신문에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 대한 소개가 실렸습니다. 그곳에서는 특별한 것을 요청하지 않았고 그냥 와서 편하게 명상하고 마음을 수련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동하면 그 종교로 귀의하고 그렇지 않아도 마음 편하게 모임에 참석하면 된답니다. 요즘 세대에 잘 맞는 종교적 처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종교를 믿는 것은 일단 편할 것입니다. 내가 편한 대로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우리 기독교는 신자들에게 확실한 믿음과 분명한 결심을 요청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보다 더 확실한 길이 없기에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요청합니다. 물론 억지로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충분히 생각하고 마음이 열렸을 때 지난주에 배운 것처럼 빛 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음으로 신앙의 세계에 들어왔음을 온 교우들 앞에서 고백하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인격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기독교에서 확실한 믿음과 결심을 요청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하고 나면 저절로 믿음이 견고해 지고 하나님만이 구원자라고 스스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신앙의 진수인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가장 큰 비결은 바로 기도입니다. 지난 번 연속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접촉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세 주간에 걸쳐서 살펴보게 될 시편 116편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한 시편기자가 성전에 예배하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고백하는 간증이자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셨지요.

그렇게 하나님을 체험하고 난 시편기자는 오늘 본문 1-2절에서 평생에 기도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고백입니다.:“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맞습니다. 우리들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무엇보다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요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순간순간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맞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고난도 맞이합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시는 참빛 교회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신앙의 숙련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코스타에 갔었기에

목요서신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일주일 동안

젊은이들과 더불어 아주 좋은 시간을 갖고 왔습니다.

1.

오늘 신문에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간에 참전했던 페트리(32) 상사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는 사진과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을 하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때

탈레반이 던진 수류탄이 동료 병사들

옆에 떨어졌습니다.

페트리 상사는 자신의 부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류탄을 집어서 멀리 던지려다가

그만 수류탄이 그의 손에 터지면서

손에도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기사와 더불어 실린 사진에 보면

오바마 대통령과 악수하는 페트리 상사의 손은

인조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당시에는 훈련에 따라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페트리 상사는

수류탄이 동료 병사들 옆에 떨어지자

그 동안 훈련한 대로

어쩌면 반사적으로 집어 던지려 했다는 것입니다.

훈련한 것이 몸에 베어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2.

매사에 훈련이 중요합니다.

반복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지루해 보이고

당장에는 별로 유익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어려운 일이 갑자기 닥치거나

매우 중요한 순간에 그 위력이 나타납니다.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만으로는

신앙의 훈련이 되기 어렵습니다.

남은 6일 동안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신앙을 훈련해야 합니다.

성경말씀 전체는

하늘 나라 백성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연습하고 따라 살아야 할 훈련 교재입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훈련해야 할

세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말씀이지요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세가지 명령을 평소에

열심히 훈련해서 Master(숙달)해 놓는다면

우리들 인생 길에 위기가 닥치거나

중요한 결정의 순간을 맞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참빛 교회 식구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훈련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7.14 메일 목회서신)

빛으로 오신 예수님

신약성경 요한복음 1장은 구약 성경이 시작되는 창세기 1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되기 이전에 세상은 공허했고 어둠이 깊었습니다. 하나님께서“빛이 있으라”말씀하시니 빛이 생겼고 그때부터 어두운 세상이 빛으로 밝아졌습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로고스”인데 이것은 단순히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진리”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창조될 때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창조사역에 동참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이처럼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소개합니다. 말씀과 더불어 중요한 단어가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생명”과“빛“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생명 되신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장 9절에서는 예수님을“참 빛(true light)”으로 소개합니다.:“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이 말씀은 첫째로, 예수님께서 세상을 비추는 유일하신 빛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 여러 개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세상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심을 우리 모두는 똑같이 고백합니다. 둘째로, 예수님만이 진리이심을 보여줍니다. 참 빛을 다른 말로 ”진리의 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이 진리라고 했듯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빛도 진리입니다. 진리 안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빛 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들의 신앙은 물론 삶도 밝아질 수 있습니다. 셋째로 참 빛 되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각 사람을 비추십니다. 예수님의 빛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빛 되신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인 것을 뜻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빛 되신 예수님을 무시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어두움의 세력이 모두 물러날 것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할 때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이 펼쳐집니다.

우리 교회 새 이름은 바로 요한복음 1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참 빛은 예수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참 빛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와 각 성도님들을 빛으로 밝혀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참 빛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언제나 새로운 생명으로 임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참빛 교회가 빛 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세상 속에 생명의 빛으로 나가길 원합니다. SF 참빛 교회로 새롭게 출발하는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진리로 임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길 기도합니다.-河-

어린 왕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책꽂이에서

<어린 왕자>라는 책이 눈에 들어와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작은 문고판인데

1982 6 7일 구내서점에서

샀다고 메모를 해 놓았네요.

먼지 알러지가 있는 저는

읽는 내내 몸이 근질근질했지만

옛날 생각을 하면서 읽어 내려갔습니다.

줄을 쳐 놓은 것을 보면서

청년시절 제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 좋았고

이제 50을 바라보면서

새롭게 줄을 쳐야 할 구절들도 있었습니다.

2.

어린 왕자는

어른들을 위한 소설로 유명합니다.

주인공인 ” (저자인 생떽쥐뻬리의 가상인물)

어릴 적 화가가 되려는 꿈을 접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합니다.

그때 아주 작은 별에서 온 어린 왕자를 만납니다.

어린 왕자는 지구에 오기까지

여섯 개의 작은 별들을 지나왔습니다.

모두 한 사람씩 살고 있는 작은 별들이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어린 왕자가 지나온 여섯 개의 별은

위선과 쾌락과 물질 등에 사로잡혀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어린 왕자는 일곱 번째로 지구에 도착해서

여우를 만납니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길들임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것은

누군가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랍니다.

세상에 수 많은 같은 것들이 있지만

서로 길들여지고 관계를 맺게 되면

서로에게 아주 특별한 하나로 다가온답니다.

여우는 작별인사를 하는 어린 왕자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잘 가라. 내 비밀을 일러 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3.

어린 왕자를 읽으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삽니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들도 꽤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길들여져야 함을

어린 왕자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어디 하나님과의 관계만 그렇겠습니까?

부부관계나 이웃과의 관계나

서로에게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때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특별한 너와 나의 관계가 이뤄지고

거기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길들여지는 것은

서로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순수한 믿음으로

길들여지길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과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는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로 길들여질 때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로마서 8:38-39)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길들여지게 하시고

그 어떤 세력도 끊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항상 느끼며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6.30 메일 목회서신)

전능하신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서머나 식구들께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하루를 시작하시길 오래 전부터 부탁드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실천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하루 하루 살면서

하나님의 함께하심,

인도하심 그리고 도우심이

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보에 있는 큐티는

시편 114편이었습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시편기자는 마지막 8절에서

광야 40년을 회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서 광야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셨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 114:8)

광야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 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단단한 돌이지만 그것이 변해서 샘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물은 대개 땅 밑에서 나오지

반석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반석은 물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반석이 변해서 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인생길에서 갈증을 느끼고

기진맥진할 때가 있습니다.

바위로 꽉 막혀 있어서

그 어디에서도 물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절박한 순간도 경험합니다.

그때도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내일 큐티인 시편 115

(114편과 115편은 짝입니다의 말씀처럼

우리의 도움이시요 방패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 115:11)

(You who fear him, trust in the Lord – he is their help and shield)

오늘 하루

반석이 변해서 물이 되게 하시고

차돌이 변해서 샘물이 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서머나 식구들께,

인생 길에서 힘들고 지친 모든 분들께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주님의 능력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6.23 메일 목회서신)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 (2)

올 해 우리 교회 표어인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에는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통해서 표어의 첫 번째 부분인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었습니다. 이제 그 사랑을 무엇보다 교회 식구들에게 나눠주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교회가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표어의 두 번째 부분인 “섬김”에 대한 말씀을 나눕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예수님으로부터 임했듯이, 그리스도인의 섬김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빌립보서 2:5-8절에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종의 형체, 즉 인간의 몸으로 입고 오신 성육신 사건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신 것이 곧 섬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서 낮은 자의 자리로 내려오셨듯이 우리들 역시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교만해서는 섬길 수 없습니다. 높은 자리를 고집해서도 섬길 수 없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신 예수님의 섬김을 우리들도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섬김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섬김은 구원사역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섬김의 삶을 살 때,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로 돌아 올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예수님은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매시고, 대야에 물을 떠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섬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발을 씻긴 놀라운 순간입니다. 발을 모두 씻기시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내가 주와 또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예수님께서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심으로 우리들에게도 섬김의 삶을 살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섬김 속에서 자신은 죽고 온전히 하나님과 이웃만이 드러납니다. 섬김은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고,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올바른 섬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서 섬김의 삶을 기억하시고 은밀히 갚아주십니다. 섬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시고 그리스도인만이 누리는 행복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 섬기는 서머나 식구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河-

익숙함의 잔재들

저는 종종 미국에 처음 오던 때를 회상하곤 합니다. 13년전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내렸을 때는 무척 더운 한 여름이었습니다.네 식구가 이민가방 일곱 개를 카트에 밀면서 꿰제재한 모습으로 공항을 빠져 나왔었습니다. 처음 미국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학교 기숙사 앞에 있던 아름드리 나무는 다람쥐 가족의 보금자리였습니다. 30분만 운전해서 가면 대서양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세심하게 관찰하길 좋아하는 저에게 미국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 행동 그리고 말투까지 신기하게 다가왔습니다. 프리웨이에서 한국 차를 보면 온 식구가 “저기 한국 차가 있다”고 소리치면서 애국심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습니다. 아침에 창문 틈으로 들리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눈을 뜨는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이처럼 미국에서의 첫 경험은 일종의 희열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새롭게 다가왔던 것들이 점점 익숙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시사철 피어있는 길가의 들꽃 앞에 한참 동안 멈춰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늘 거기에 있었다는 듯이 눈길 한번 주고 지나갑니다. 프리웨이를 달리면서 “야- 미국이 참 넓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던 것과 달리 지금은 행여나 교통 티켓을 받을 까 염려하면서 속도계를 점검합니다. 미국의 신선한 공기도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이 거추장스럽기도 합니다. 이처럼 언제부터인지 미국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감탄사를 쓰던 말투가 평서문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왜 이렇지?”라고 투정 섞인 의문문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첫눈에 반한다고 하지요.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면 한없이 좋아서 몇 날 며칠을 함께 붙어 다닙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증을 느끼고 또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습니다. 결혼생활도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끓여주는 김치찌개 하나에도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아내의 음식 솜씨를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진수성찬에도 무덤덤합니다. 칭찬은커녕 맛이나 간을 두고 투정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는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성경말씀을 눈을 비비면서 읽었습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이런 저런 일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단지 믿음으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감사였고 감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앙이 아니라 교회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새로운 것을 깨닫고 그것을 삶에 실천하려는 신앙은 뒷전으로 밀리고 교회 안의 인간관계와 이런 저런 가십에 신경을 씁니다. 점점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야 하는데 간신히 주일만 지키는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익숙함이 신앙 속에 남겨놓은 잔재들입니다.

그런데 “익숙해졌다”고 느끼는 순간에 뒤를 돌아보면 놓친 것들이 너무 많음을 발견합니다. 조금만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텐데 익숙해졌다는 선입견으로 대충대충 넘긴 것들입니다. 길가에 피어있는 꽃들을 힐끗 보았듯이 소중한 순간들과 이웃들을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숙하다는 핑계로 무례하게 행하고 그들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만 주변을 신경 쓰다가 신앙의 진수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감사와 감탄이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아쉽기만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젠가는 현재의 익숙함도 커다란 아쉬움으로 밀려올 것 같습니다. 모든 것들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재생도 불가능하고 뒤로 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소중한 것입니다. 올해도 반이 지나갑니다. 그래도 우리 앞에는 새로운 반년이 남아 있습니다. 익숙함이 남겨놓은 잔재들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하루 하루 새롭게 그리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살아갑시다. (2011.6.24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 (1)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사랑으로 섬기는 교회”입니다. 연초에는 이삭에 대한 연속설교를 하느라 표어에 대한 말씀을 나눌 기회가 없었습니다. 물론 틈틈이 올해 표어를 언급했었지만 늘 부족했습니다. 이제 6월이 지나고 2011년도 하반기를 맞게 됩니다. 지금까지 잘 하셨지만 하반기에는 더욱더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앞으로 두 주 동안 올 해 표어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핏값으로 사신 거룩한 모임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도들은 그 몸의 지체로 비유합니다(엡4:15-16). 각각의 지체가 모두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각자 맡은 사명을 감당하면 됩니다. 건강한 지체가 건강한 몸, 곧 튼튼한 교회를 만들 것입니다.

교회의 사역을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worship), 복음과 사랑을 세상에 전파하는 구제와 선교 (Evangelism),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는 양육(education), 성령 안에서 서로 사귀는 교제(love)입니다. 교회는 이상의 네 가지 – 예배, 구제와 선교, 양육, 교제-를 통해서 균형 있게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샘(WELL)인 교회로부터 생명수가 세상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이 모든 교회의 사역은 사랑과 섬김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교회를 이루는 뿌리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교회는 세상의 사교단체 또는 자선단체와 똑같습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고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성도님들은 물론 교회도 소망가운데 거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 하우스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충만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 위에 사랑이 더해져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교만이나 위선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이 빠진 소망은 구원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엄격한 잣대만을 제시합니다. 사랑은 우리들 신앙에 힘을 주는 에너지입니다. 사랑은 신앙의 꽃이요 열매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삶 속에 드러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것도 거저 받은 것이기에 우리들 역시 이웃과 세상에 그냥 나눠줘야 합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도“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은 이처럼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나눠야 합니다. 그 중에 먼저 믿음의 가정들, 우리 서머나 식구들께 사랑을 나눠줘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행함과 진실함 그리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교회로 자라가길 우리 함께 노력합시다. -河-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좋은 아침입니다.

2주전 수요예배에서

고린도전서 7장를 공부하면서

“부르심(calling)”을 강조했습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7장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대한 교훈이었는데,

저는 그때 부르심을 결혼이라는 구체적인 이슈를 넘어서

우리들 인생 전체에 대입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르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스 기니는 그의 책 <소명 (The Call)>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소명[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인생의 중심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길이다.

Answering the call is the way to find and fulfill the central purpose of your life.

우리가 어떤 삶을 살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했고

부르신 뜻을 이루면서 살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각자를 향한 부르심에 대해서

고민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젊을 수록

부르심에 대해서 더욱 기도하고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부르심!

저는 지금 이 순간

제가 서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가는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가

편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다음 단계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확실해 질 때까지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거하게 하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부르심을 두고

남들과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부르심을 두고

갈팡질팡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가정, 교회, 직장, 학업, 사업체가

부르신 곳인 줄 믿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이미 예비하셨음을 믿고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고전 7:24)

Brothers, each man, as responsible to God, should remain in the situation God called him to.

오늘 하루

서머나 식구들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사시는

행복한 발걸음이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힘내십시요!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부르심을 좇아 살기로 결심하는

서머나 식구들을 기억하시고

저들과 늘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6.16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