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실천

기도에 대한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는 오늘까지 6주에 걸쳐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거의 매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눕니다. 성도님들의 신앙은 물론 우리 교회 사역에 기도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교회에 기도의 열기가 뜨겁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함께 모여서 기도할 시간과 장소가 없는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대신에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에 5분씩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실천하고 계시는 줄 압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제목이 이루어지는 것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나 중심의 기도에서 하나님과 이웃으로 기도의 지경이 넓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가 기복신앙이나 자기최면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바라보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과 기도 가운데 인격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기도시간에 만나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제목들도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올바른 기도를 위해서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겸손은 하나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 안에 있는 교만과 죄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는 진정한 회개가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 되었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겸손한 기도 속에는 삶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서머나 식구들께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시길 다시금 부탁드립니다.

우리들은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살길입니다. 기도가 우리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시켜주고,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 속으로 데려갑니다. 기도하지 않고 신앙이 자랄 수 없습니다. 기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첫 시간에 배운 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시면 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믿어지는 하나님을 꼭 붙잡고 기도하시면 됩니다. 적어도 기도시간 만큼은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세상의 욕심과 자랑 그리고 교만도 내려놓고 하나님과 단둘이 골방에서 대화하셔야 합니다.

실제로 무릎 꿇고 기도하시길 부탁드립니다.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진실 되게 기도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기도할 것을 세 번씩 명령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마 7:7). 기도에 대한 삼중명령은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애타는 부탁입니다.

 또한 세 가지 명령이 기도에 대한 각기 다른 교훈을 줍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기도를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문을 열어주실 때까지 두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경우에 맞게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가장 선한 것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기도 가운데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분명히 체험하시길 바랍니다.-河-

모세의 순종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목요일) 큐티 본문은

신명기 32:48-5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정하시다고 생각될 만큼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본문입니다.

40년 광야생활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던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모세는 40년 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약속의 땅을 바라만 볼 뿐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일전에 므리바라는 곳에서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치는 경솔한 행위를 한 것이

하나님께 거슬렸기 때문입니다 ( 20:10-12).

52절 마지막 말씀을 듣는 모세의 심정은 어떻했을까요?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모세는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내일 큐티 본문인 신명기 33장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마지막 장(34)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서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는 눈이 흐리지도 않고

기력이 쇠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느보산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2.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순종을 깊이 생각해 봅니다.

모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만 자기 마음대로 (어쩌면 불순종한 백성들을 보면서 홧김에)

반석을 두 번 내리쳤습니다.

그것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 일인지 배웁니다.

하나님의 꼼꼼하심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도 역사하지만

우리의 잘못도 낱낱이 기억하심을 보면서

우리의 삶을 다시금 추스르게 됩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가나안 땅을 바라만볼 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군소리 없이/토를 달지 않고 순종하는 모세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세는 그 한번의 불순종보다

수백 번의 순종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모세입장에서는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예전의 잘못으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최종적으로 순종합니다.

정말로 위대한 순종입니다.

3.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심코 행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불순종을 저지르곤 합니다.

때로는 그 동안 행했던 업적들을 내세우면서

으스대면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도 있습니다.

조금만 억울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고 금방 시험에 빠집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드린 모세의 순종

그 멋지고 위대한 신앙을 본받기 원합니다.

순종이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오늘 하루

순종(obedience)”라는 말을 깊이 묵상합시다.

그리고

매사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순종의 삶을 살기로 결심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서머나 식구들께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6.9 메일 목회서신)

겸손의 기도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또는 사귐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보면 기도가 얼마나 커다란 특권인지 깨닫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들의 마음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기도는 자기최면이나 허공에 외치는 한탄에 불과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서머나 식구들 신앙 가운데 든든히 자리 잡기를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기도드리는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50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12)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되심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은혜로 없애주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구원자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기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의 기도가 허공을 치고 힘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거나 식었다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자리로 나올 때마다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성품, 손길, 역사를 묵상하면서 하나님 품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역대하 7장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긴 기도(역대하 6장)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이 기도의 집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백성들이 성전에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길 바랐습니다. 솔로몬이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드리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대하 7장 15-16). 하나님은 기도하는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기도하는 백성들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항상 생각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세상에 살면서 죄를 짓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이라면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겸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들의 망가진 삶을 고쳐주심을 기억하십시다. 겸손히 주님 앞에 나가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河-

“희망은 깨어있네”

좋은 아침입니다.

1.

예년 같으면

정말 날씨가 좋다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파란 하늘에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지역 날씨가

비가 내리고

아침 저녁에는 지나치게 서늘합니다.

하긴 보스턴에 토네이도가 왔다네요.

토네이도는 중서부에서 발생하고

동부에서는 여름에 허리케인이 와도

토네이도는 거의 오지 않는데 말입니다.

요즘은 이래 저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생기는 듯 합니다.

주일날까지 비가 내린다는 예보입니다.

여름철(?) 감기도 유행이랍니다.

건강 조심하셔야겠습니다.

2.

몇 년째 암투병을 하고 계시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

<희망은 깨어있네>를 읽었습니다.

육신의 아픔 가운데

쓰신 시()들이어서인지

한 절 한 절이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몸과 마음에 아픔을 갖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 꿇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

그 아픔이 우리 안에서 기쁨으로 변하는 것을

종종 체험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이해인 시인의

<희망은 깨어있네>라는 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우리 안에 있는 아픔과 연약함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나는 늘 작아서 힘이 없는데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운데

그래도 괜찮다고 당신은 내게 말하는군요.

살아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희망이라고

내게 다시 말해주는 나의 작은 희망인 당신

고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숨을 쉽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노래를 부릅니다.

자면서도 깨어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6월의 첫 번째 주일을 맞는

서머나 식구들께

희망의 빛을 비춰주시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잠잠히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6.2 메일 목회서신)

믿음의 기도

앞으로 3주 동안은 기도에 꼭 필요한 덕목들과 기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기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기도를 두고 자신의 바람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도의 지경은 넓습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로부터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기도까지 기도의 지경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간구”입니다. 기도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는 시간입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기도를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한 대화라고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우리의 기도제목만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양방향 소통인 셈입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신비로운 체험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기도는 허공에 대고 외치는 하소연이나 자기 최면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게 되고, 우리들 역시 살아계신 하나님 품속에 거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 19장의 히스기야 왕은 성전에 올라가서 당시의 강국인 앗시리아 왕이 보낸 선전포고문을 펼쳐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믿음은 물론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 펼쳐놓은 선전포고문을 읽을 수 있으시고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왕하 19:16). 하나님을 향한 히스기야 왕의 믿음은 이처럼 실제적이었고 확실했습니다. 그에게 이정도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에 죽을병에 들었지만 기도함으로 15년의 생명을 연장받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야고보서 말씀에서도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깨우쳐 줍니다. 여기서 믿음은 단지 우리가 기도한 것이 응답될 것이라는 자기 최면식의 믿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믿음에 반대되는 표현인 의심이라는 말도 반복해서 나옵니다. 의심 역시 우리가 기도한 내용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그 기도가 응답되기가 힘이 듭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있습니다.:“오직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말라”(6절).이것이 올바른 기도의 첫 번째 덕목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닷물은 한 군데 있지 못하고 요동을 칩니다. 의심하는 마음은 이처럼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시키지 않고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둘째로 의심을 “두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두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 유무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려지는 믿음의 기도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河-

그 날이 오면…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는 여전히 불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자연 재해에대한 불안함도 여전합니다. 중서부에 내린 비로 미시시피 강이 범람 위기에 처했습니다. 급기야 비상 댐을 열어서 물줄기를 돌려놓았습니다. 언젠가 인터넷에 우주 쓰레기(space junk) 사진이 나왔습니다. 그 동안 각 국가들과 기업체들이 무분별하게 쏘아 올린 인공위성들과 로켓의 잔해들이 쓰레기가 되어서 지구 주변의 우주를 맴돌고 있는데 보는 것만으로기분이 언짢았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베이 지역도 5월임에도 불구하고 비가 자주 내리고 기온도 서늘한 것이 정상이아닌 듯 합니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세상이 뒤숭숭하면 언제나 등장하는 것이 종말론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종말론은 있지만 특히 기독교안에서 종말론을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종파가 꽤 있습니다. 성경이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했기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던 다미선교회입니다. 그들을 믿는 신도들이 종말을 맞기 위해서 재산을 모두 팔아서 헌금하고 기도원으로 몸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던 대로 종말은 오지 않았고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잊을 만 하면 어디선가 몇 월 며칠에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우리동네에 종말론자가 나타났습니다. 오클랜드에 본부를 둔 패밀리 라디오의 설립자 해롤드 캠핑(89)이라는 사람이 엊그제인 5월 21일에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부터 날수를 자기 나름대로 계산해서 종말의 날을산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소수의 사람들은 그에게 현혹되어서 재산을 내놓고 휴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물론 캠핑이 말하던 휴거는 오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세상의 종말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분별한 과학 문명의 발달과 지구의오염이 대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04년에 출시된 <The day after tomorrow>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지구에 다시 빙하기가 온다는 줄거리입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등골이 오싹합니다. 열도 지방인 인도 뉴델리에 눈 폭풍이 몰아치고, 일본에 쓰나미가 밀려오고, LA에 토네이도가 옵니다. 뉴욕 맨해튼에 홍수가 나고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가면서 온 세상이 얼음으로 뒤덮입니다. 영화는 우주선을 타고 있던 우주인이 지구의 절반이 얼음과 눈으로뒤덮인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지구상에 다시는 빙하기가 오지 않을 것이랍니다. 영화는 사실이 아니라 심각한 환경 오염에 대한 경고인 셈입니다.

끝이 온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말론자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그 날이후”에 대한 두려움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그 날과 시간은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지구 최후의 날에 목숨을 걸고 시간과 날짜에 연연하는 종말론자들에게 현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맥 놓고 사는 것도 올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개인의 인생은 물론 이 세상의 끝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오면” 어떻게해야 할 지 준비해야 합니다. 종말론자는 아니지만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세상의 끝이온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그날이 닥쳐도 두렵지 않도록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면서 하루 하루 소망가운데 살기 원합니다. (2011년 5월 27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온전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제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목회적으로

고민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온전함입니다.

온전한교회, “온전한성도,

온전한신앙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지냅니다.

우리는 자칫 온전함이라는 말을

우리 자신의 외적인 신앙행위나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칭찬하는) 모습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온전함

학교에서 받는 A학점처럼

겉으로 들어나는 업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A학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그들을 평가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온전함이라는 말을 두고

우리들끼리 키재기를 하고

서로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전함이 이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2.

온전하다는 말은

사람의 평가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겸손을 뜻할 것입니다.

복음성가의 가사 그대로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아는 것

곧 온전함일 것입니다.

일종의 역설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온전함이나

겉으로 들어나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온전함은

어제 배운 고린도전서 말씀대로

우리 안에 있는 묵은 누룩을 없애고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옷 입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전5:8)

묵은 누룩으로 더러워진 우리의 마음까지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겨 주시고

한없이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온전한 신앙일 것입니다.

3.

그러고 보니

온전함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부족함을 발견해가는 과정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하나님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인정하는 것이

곧 온전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부족을 채우는 것이

온전함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겸손이 나오고

섬김이 나오고

진실된(거짓 없는)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4;13)

오늘 하루

저와 서머나 식구들 모두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신앙의 길로 나가기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발걸음을 따라서 걷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온전한 신앙을 추구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의 부족함을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채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5.26 메일 목회서신)

기도의 지경

기도에 대한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세 주 동안에는 기도의 파장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교회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펼쳐나가야 합니다. 반대로 그 파장은 교회와 가정으로부터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안으로 밀려들어와야 합니다.

이처럼 기도의 파장이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퍼져나가고 밀려들어올 때, 온 교회로부터 각 성도님들에 이르기까지 기도의 물결에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강력한 기도의 파장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물론 가정과 개인의 삶이 기도를 통해서 세워짐을 구체적으로 체험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모두 기도의 물결에 참여하고 실제로 기도의 사람, 기도의 가정, 기도하는 교회를 세워나갑시다.

이제 오늘은 우리의 기도가 어떤 지경으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 기독교에‘나만 복 받으면 된다’는 식의 개인주의가 팽배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서 기도의 지경이 자기 자신, 자기 가정 그리고 기껏해야 자기 교회정도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것도 복을 달라고 하는 간구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연약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필요하기에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곳에 눈을 돌릴 틈이 없을 만큼 다급할 때도 많습니다. 또한 처음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으면, 기도가 자신의 소원이나 마음을 드리는 것에 머물게 됩니다. 처음 예수 믿는 신앙을 어린아이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자기 것을 먼저 챙기고 자기만 더 많이 가지려고 하듯이,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졌을 때는 자기를 위한 기도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의 지경이 늘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란 표시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달라는 간구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묻는 기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던 어린아이가 철이 들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행실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때가 되면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배운 대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대신에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있다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연령으로 말하면 사춘기를 지나서 청년기에 접어든 셈입니다.

우리들이 나이가 들면서 주변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연락하지 않던 지인들과도 교제를 시작하고, 무엇보다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마지막 지경은 이웃을 위한 기도입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거쳐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위한 기도까지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말씀이 기도의 지경을 잘 보여줍니다.: “1)하나님이여 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아멘 -河-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우리 동네에 이상한 말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세가 89세가 되었으니

노망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의 이름이 캠핑이니 약간 정신 줄이 나간 것 같기도 하지만

지역 한인 신문에까지 전면광고가 나올 정도이고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세상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내일 모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휴거(rapture)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해롤드 캠핑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오클랜드에 있는

패밀리 라디오 설립자인데

노아의 홍수로부터 날짜를 인위적으로 계산해서

5 21일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예전에도 휴거를 주장했었는데

자신의 주장이 빗나가자

이번에 다시 개정판을 내놓은 셈입니다.

휴거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속에 있기에

그 날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캠핑과 같은 종말론자들의 주장에 맞춰서

예수님께서 오실 것 같지 않기에

저는 지금 열심히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2.

휴거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을 좇아 강림 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여기에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왕국과 예수님의 재림이 결합해서

복잡한 이론들이 발전되었습니다.

이번에 오클랜드에서 시작된

해롤드 캠핑의 휴거는 예수님의 재림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휴거하고, 앞으로 5달 동안 환난이 온 후에

10 21일에 예수님이 다시 오심과 동시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캠핑의 주장은

하나님의 계획을 자기 마음대로 추측하고 판단하는

교만이고 월권입니다.

물론

성경은 앞으로 될 일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캠핑과 같은 사람들은 물론

여러 가지 이론들이 제시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할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면 지금처럼 죄악된 세상이 사라지고

의와 희락과 화평의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의 징조에 대해서

마가복음 13장과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셨기에

그것을 기준으로 마지막 때를 가늠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3.

요즘 세상의 모습으로 보아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캠핑과 같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그 날에 연연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25) 부탁하셨듯이

언제든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정결한 마음,

그 동안 나누지 못한 사랑을 마음껏 나누고 용서하는 마음,

아침안개처럼 없어질 세상 것에 미련을 두었다면, 이제 영원한 것을 쫓는 마음을 갖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인생에/세상에 종말이 있다고 생각하고

주어진 삶을 맞이하고, 준비하고, 정돈하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캠핑과 같은 종말론자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누구에게나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오신다면

우리들은 요한계시록 마지막 말씀처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흔쾌히 기쁨으로 맞을 수 있을런지요?

오늘 하루

우리 각자의 신앙과 삶이

과연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돌아보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모으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에 손색이 없는

우리의 신앙과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5.19 메일 목회서신)

기도의 사람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교회가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살펴보았고 두 번째 시간에는 우리들의 가정이 기도하는 가정이 되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우리가 생각해도 그리 완벽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로 모이기를 바라십니다. 나 혼자 잘되고 나 혼자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기를 바라십니다. 따라서 좋은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의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가 그냥 세워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말씀과 기도로 세워집니다. 서머나 식구들께서 기도의 체인으로 연결되고, 기도 가운데 사랑을 실천하실 때 더욱더 멋진 교회가 세워질 것입니다.

둘째로 가정이 기도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보금자리입니다. 세상의 삶에서 지치고 힘들 때 가정에 돌아오면 편안한 쉼과 재충전을 얻는 오아시스와 같은 곳입니다. 가정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고 세우는 터전입니다. 요즘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정들까지 세상의 풍조와 유행을 따르고 있기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부로 맺어주셨고 그 안에서 가정을 허락하셨음을 믿고 신앙의 가정을 세워가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로 가능합니다. 부부가 서로 손을 잡고 기도하고, 부모와 자식들이 둘러앉아서 기도하고, 할머니 권사님들도 장성한 자녀들과 후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어떤 세상의 파도가 닥쳐와도 능히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 번째 시간은 우리 자신이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교회와 가정이 서로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가족과 교회 식구들이 여러분을 위해서 뒷전에서 기도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들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골방기도가 풍성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 기도하는 것은 실제로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나가서 벌거벗은 것처럼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골방기도, 은밀한 기도를 말씀하시면서 문을 닫고 골방에 들어가라고 하셨겠습니까? 하나님과 만나는 그 시간만큼은 세상과 통하는 문을 차단하고, 온전히 하늘 문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란을 떨면서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불필요한 말이나 미사여구로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솔직한 기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간절한 기도가 바로 골방기도입니다. 은밀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사랑의 밀어입니다. 친밀한 기도입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신비로운 기도입니다. 교회가 기도하고, 가정이 기도하고, 우리 각 서머나 식구들이 골방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