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신 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에는

졸업식을 위해서 인디애나에 다녀오느라

목요서신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만큼 발걸음이 가벼웠던 여행도 없었습니다.

미국에 공부하러 온 지 13년 만에

그리고 인디애나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지 11년 만에 졸업을 했으니

제가 얼마나 홀가분할지는 상상이 되시지요?

주일날 여선교회 회장님께서

풍선 13개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언젠가 스쳐 지나가듯이 했던 말을 기억하시고

준비해 주신 것을 보고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신

서머나 식구들께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2.

시작이 반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만 하면

일을 끝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 경우

시작 보다 끝이 더 어려웠습니다.

이토록 학업이 늦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습니다.

교회가 힘들 때는 거의 포기했었습니다.

아니 제 공부를 챙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제 인생 속에

학업의 줄도 꼭 붙잡고 계셨습니다.

작년에 우리 교회 역사이래

아주 평온한 시간을 맞았고

논문을 지도하시는 교수님들께서 기대이상으로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저 역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일주일에 나흘은

하루에 10시간 이상 논문과 씨름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제가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음을

개인적으로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인디애나를 다녀오면서

제가 틈틈이 묵상하며 붙잡고 있는

빌립보서 1 6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Being confidence of this, that he who began a good work in you will carry it on to completion until the day of Christ Jesus.

물론 이 말씀은 빌립보 교회에 심겨진 복음과

빌립보 교인들의 신앙을

예수님께서 끝까지 지키시고 이루실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확신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시작하신 이

이루시는 이가 모두 예수님이십니다.

어디 구원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신앙과 삶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산다면

예수님께서 친히 시작하시고 이루실 것 입니다.

서머나 식구들의 인생길에

서머나 식구들의 삶 속에

예수님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또한 이루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서머나 식구들께서 하시는 일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간섭하셔서

시작하게 하시고, 이루어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새 날이 밝았습니다.

아버지를 부르면서 하루를 시작하신

서머나 식구들의 삶을 지켜주시고

저희 속에 시작하신 선한 일을 분명히 이루어주옵소서.

지금은 눈물로 씨를 뿌리지만

결국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옵소서.

힘을 주시옵서!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5.12 메일 목회서신)

기도하는 가정

지난주에는“서로 기도하라”라는 제목으로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서로 서로 기도의 체인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온 교회가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병이 낫는 일은 물론 영생을 얻는 은혜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기도”/“의인의 간구”는 하늘을 움직일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 가운데 서로 서로 연결되고, 기도를 통한 섬김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Mother’s day입니다. 미국에서는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이 따로 정해져 있지만, 한국에서는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지킵니다. 이 세상에 부모님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육신의 부모님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님께 공경하라는 덕목은 성경은 물론 세상의 모든 윤리와 도덕의 근간을 이룹니다. 그 만큼 부모님의 은혜가 크고,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십계명의 다섯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이어서 부모님을 공경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약속이 나옵니다.:“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합시다.

우리 교회에는 자녀들보다 부모되신 성도님들께서 많이 계십니다. 성경에는 부모들에게 주는 교훈도 나옵니다.:“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5:4). 부모라고 해서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자식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의 심령에 상처를 입혀서도 안 됩니다. 자녀들을 주의 말씀으로 훈계하면서 양육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이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신앙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초기 교육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들이“나를 위해서 늘 기도하시는 부모님이 계셔”라고 느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장성한 자녀들은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기도하는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교회가 서로 서로 기도로 연결되듯이, 가정 역시 부부사이에 그리고 부모와 자식들 간에 기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죄를 회개하면서 간절히 간구하듯이, 가정에서도 믿음과 간절함으로 드리는 기도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날 가정에 이런 일들이 많이 부족합니다. TV와 인터넷과 같은 매체들과 이민가정의 경우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서 가정에서의 대화와 기도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님들도 자녀들을 위해서 매일같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 가정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가정 안에 기도가 막혀서는 안 됩니다. 서머나 가정들이 기도로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河-

서로 기도하라

지난주일 목요서신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교회력에 따르면 우리들은 지금 부활절을 지나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40여일을 함께 계시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함께 기도하면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정도가 지나서 유대인의 절기인 오순절을 맞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때 함께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말 그대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성령강림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 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치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행전 2:1-4, 표준새번역).

이처럼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이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 위에 임한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었습니다. 제자들이 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각 지방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 이후에 온 세상의 언어는 혼잡하게 되었고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나뉘었던 언어가 다시 하나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온 교회와 세상을 진리 가운데 하나로 묶어주는 능력입니다.

부활절을 지낸 우리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사모하면서 앞으로 50여일을 지내야 합니다.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함께 기도했듯이 우리 교회도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기도처가 없어서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지만, 6월 둘째 주 성령강림주간까지 온 교회가 매일 밤 10시에, 그리고 하루에 5분씩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물론 서머나 식구들의 신앙과 삶 속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기대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성도로서, 부활의 생명을 체험한 성도로서 앞으로의 인생길이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근사한 인생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눈 야고보서 5장 말씀에서 온 교회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서로 기도할 때 기도의 능력이 나타날 것임을 약속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였던 제자들처럼,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면서 간절히 기도하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주님 뜻이면…

지난 주간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부활주일에 앞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제 마음속에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평소에도 자주 찾으셨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제자들에게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이미 일러두신 후입니다.겟세마네 동산에 가신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십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으면 예수님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성경이 기록했을까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의 고뇌가 가슴에 사무쳐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물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랑했던 제자의 배신으로 곧 잡히게될 것이고, 심한 고초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심도 아셨습니다.

그런데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이 두려워서 그렇게 기도하셨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도 살려낼 능력이 있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사람들의 죄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가야 하는 그 자체가 슬픔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왜 이토록 죄에 빠져사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진리의길로 가지 않을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 이후의 세상을 눈에 그리면서 한탄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십니다. 그리고 죄에 빠진 온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십니다.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 한 가운데 있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면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 매우 큰 빚을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빚을 갚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빚쟁이가 주인에게 이것 저것을 달라고 요청해서는 안됩니다. 빚을 갚는 일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하는 것이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거꾸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참 많은 것들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이 기도한 것을 녹음했다가 다시 들어본다면,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빚쟁이 주제에 뭐 그리 많은 것을요구하는지요. 거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을 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라니 얼마나 창피하고 하나님께 송구스러운지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던 겟세마네의 예수님을 닮기 원합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부끄러울 만큼 이기적이라 해도, 기도의 끝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그러나”로 마무리해야합니다. “그러나 주님 뜻이면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뜻이면 양보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뜻이면 희생하겠습니다. 주님 뜻이면 십자가의 길도 기쁨으로 걷겠습니다. 주님 뜻이면 멈추겠습니다. 주님 뜻이면 앞으로 나가겠습니다.” 우리가 걷는 신앙의 여정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겟세마네의 신앙이 되기 원합니다. (2011년 4월 29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부활절 그 이후

좋은 아침입니다.

1.

이제 4월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캘린더를 갖고

우리의 인생을 셈하고

하루, 한달, 그리고 한 해를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곁에 두고 따라 살아야 할 캘린더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력입니다.

오래 전부터

교회가 지켜왔던 캘린더이지요.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인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로 시작됩니다.

성탄절을 맞은 후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3년간의 공생애 (public life)를 묵상하는

주현절이 두 달 이상 계속됩니다.

주현절이 끝나면

우리가 방금 지냈던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은 십자가의 고난을 넘어서

부활의 아침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주현절과 사순절 기간 동안에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사역과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합니다.

부활절을 축제로 지낸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대하면서

7주간을 보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까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임재를 기도 가운데

아주 아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오순절이 지난 다음에는

11월의 대림절을 맞을 때까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삶을 살아 갑니다.

오순절 이후의 기간이 긴 것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 가운데 사는 것임을 깨우쳐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부활절 이후에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읽으면서

우리의 신앙은 물론

교회, 즉 신앙 공동체가 어떻게 세워져야 할 지를

묵상하면서 보내는 것이 좋습니다.

2.

이제 우리는

부활절을 지내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향해서 나가고 있습니다.

부활절은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 왔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오순절은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함이 꼭 필요함을 깨우쳐 줍니다.

성령은 보혜사(保惠師, the counselor)가 되십니다. ( 15;26)

우리를 도와주시고,

신앙과 인생 여저의 상담자가 되어 주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 16:13)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시고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은 능력이십니다. (1:8)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고 그것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부활절을 지내고

새로운 생명의 은혜를 체험하신

서머나 식구들 모두

이제부터 오순절 성령강림을 향해서 나가시길 부탁 드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삶과 사역

그리고 교회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를

묵상하면서 한 해 한 해를 살아갑니다.

이것이 행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부터 앞으로 50여일 동안

서머나 식구들이 삶 속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체험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4.28 메일 목회서신)

부활절 아침에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주일을 맞습니다. 한국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 부활주일에 삶은 계란에 색깔을 입혀서 나눠주곤 했습니다. 계란 속에서 병아리가 태어나는 것은 계란 속에 생명이 들어 있다는 표시로 계란을 나눠준 것입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계란을 갖고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쁜 색깔의 계란을 가지려 아우성입니다. 그래도 집에 가서 예쁘게 색칠한 계란을 보면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예수님께서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부활절은 교회가 지키는 가장 큰 절기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듯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이 전하는 복음도 헛것이고 우리들의 믿음도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고전15:14). 아니 기독교 자체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믿음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셨기에 우리들도 육체의 죽음 너머에 계속되는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 줍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하면 죽음의 세력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지 못합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베다니의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러 가면서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11:23).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지난 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부활신앙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과 삶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죽은 자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것은 마르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서 믿는 자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새롭습니다. 우리들도 살아서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그 말씀이 더욱 마음에 깊이 다가옵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생명을 누리고 산다면 이 말씀을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곧 생명을 품고 있는 셈입니다. 생명은 죽음의 반대말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주어진 것입니다.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계란이 생명을 품고 있듯이, 우리들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 안에 계십니다. 2011년 부활절 아침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서머나 식구들께 그대로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河-

성 금요일에…

1.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

성금요일입니다.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서머나 식구들께도 금식하시면서

성금요일을 경건하게 보내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매년 맞는 사순절, 고난주간

성금요일과 부활절이기에

무덤덤하게 형식적으로 보내기 쉽습니다.

하지만

2011년 성금요일은 우리들 개인의 인생은 물론

인류 역사에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매년 맞는

교회력의 절기들을 소홀히 보낼 수 없습니다.

때마다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들 각자를 향하신 초청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저는 성금요일에

이사야 53편을 묵상합니다.

그가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이사야 53:4-6, 표준새번역)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

수치요 저주의 십자가에 맨 몸으로 달리신 예수님,

그리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신 예수님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이사야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천천히 읽으면서 묵상하는 것이지요.

무한 감사가 넘칩니다.

눈에 눈물도 흐릅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찬송가 가사와 함께

마음 속에 메아리처럼 퍼져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께 드린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자꾸만 더 달라고만 졸라댑니다.

그 귀한 생명의 은혜를 받았건만

아침안개처럼 없어질 이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몸 버려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로 결심하시는

2011년 성금요일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시고,

우리들 대신 십자가에 달력 죽게 하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서머나 식구들 위에

십자가의 은혜가 잔잔히 임하게 하옵시고

그 은혜를 따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4.20 메일 목회서신)

십자가의 길

지난주에는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한 가운데 위치합니다. 처음부터 십자가가 신앙의 상징이 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약은 물론 로마 시대의 십자가는 반역죄나 살인 등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을 처형하는 형틀이었고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대속의 은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들이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구속의 은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화목의 은혜).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이렇게 형틀이었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그 위에 달리심으로 더 이상 형틀이 아니라 구원과 승리의 십자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깃든 은혜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생전에 예언하신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가 영광스런 부활로 이어지는 길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십자가 복음을 전했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이후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회는 십자가의 은혜를 세상에 전했고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갈보리 언덕길을 생각하면서, 기독교인들 역시 세상 속에서 외롭고 힘든 신앙과 삶의 순례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가 부활로 이어짐을 믿기에 소망 가운데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듯이, 기독교인들도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을 몸소 실천해야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희생했을 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갈 2:20).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철저한 자기부정입니다. 자존심도, 고집도, 욕심도 십자가에 못 박고 온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을 때, 우리 앞에는 하나님께서 예비 놓으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은혜요, 우리들이 그 은혜 속에서 경험하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제 고난주간을 맞습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시고 그 은혜를 흠뻑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한 걸음 나가셔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인생의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2천 년 전에 이미 그 길을 오르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은 골고다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매일같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河

그리스도의 십자가

좋은 아침입니다.

1.

사순절 막바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매년 맞는 사순절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늘 새롭게 다가오십니다.

올해는 특별히

일본에 밀어닥친 쓰나미와

계속되는 원전의 방사능 유출을 보면서

인간이 쌓아놓은 문명과 우리의 생명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실감하면서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염려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점검하고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을

하나님께 두기로 결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어야 함도 기억합니다.

2.

지난 주 설교 제목 그대로

사순절은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무한한 은혜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라졌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승리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죄의 세력을 모두 이기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앞에 놓고 묵상할 때

십자가의 세로목(I)을 따라서 하나님께

제 마음을 올려 드립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가로목 (-)을 따라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맨 나중에는

십자가의 세로목과 가로목이 만나는 한 가운데

제 마음을 고정시키고

나를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온 세상을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3.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A. W. Tozer The Radical Cross라는 책에서

십자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에게 나타난 일들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 때, 예수님은 분명히 살아 계셨습니다. 하지만 6시간 후,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렸을 때는 완전히 숨을 거두신 후였습니다. 십자가가 기독교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전한 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제자들은 세상 어디를 가든지 십자가를 갖고 갔고, (십자가의) 획기적인 능력이 똑같이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복음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다소 사람 사울을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복음의 사도로 변화시켰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모르던 세상을 뒤흔들었고, 사람들의 생각은 물론 양심과 삶을 완벽하게 바꾸어놓았습니다.

사순절 막바지를 지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그대로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십자가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고

충만케 임하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온 세상에 임하게 하옵소서.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서머나 식구들께 능력으로 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4.13메일 목회서신)

고린도전/후서 강해를 시작합니다.

우리 교회 수요예배에서는 주일예배와 구별해서 성경강해나 신앙생활에 필요한 덕목을 심층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수요예배를 회상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년 가깝게 구약의 소예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살펴 본 것입니다. 이어진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말씀은 비유 속에 깃든 예수님의 구체적인 교훈을 배우고 삶에 적용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요즘은 성경 본문을 차례로 살펴보는 것에 열심을 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단지 듣기에 좋고 재미있는 설교나 축복을 강조하는 말씀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을 갖고 강해를 하고, 본문과 씨름하는 성경공부는 자칫 지루하고 너무 딱딱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 위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읽고, 공부하고, 외우고, 묵상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웬만한 시험에 넘어지지 않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이제 이번 주 수요일부터 고린도전/후서 강해를 시작합니다. 바울 서신가운데 에베소서와 빌립보서를 부분적으로 강해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해하기는 처음입니다. 이번 공부에 앞서서, 지난 여섯 시간에 걸쳐서 <성경 바르게 읽기>라는 주제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관찰-해석-적용으로 이어지는 귀납적 성경연구도 간단히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번 성경강해가 기대가 됩니다.

고린도전/후서는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운 교회였습니다. 고린도는 로마의 항구도시로 우상숭배는 물론 여러 가지 세상의 모습들이 섞여 있던 말 그대로 세속도시였습니다. 이처럼 세상 풍습이 가득 차 있던 곳에 복음이 들어갔고 교회가 세워졌지만, 고린도 교회 역시 분열, 우상숭배, 음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자신이 개척해서 세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 전/후서입니다.

저는 이번 공부를 통해서, 우리 교회가 다시 한 번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고린도서를 공부해 가면서, 교회의 망가진 모습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간의 차이를 발견하고, 우리 교회에 부족한 것과 그릇된 것은 회개하면서 더욱 아름다운 교회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가 하늘나라의 모델하우스임에 분명한데, 죄인들인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우리들 자신은 물론 교회의 모습을 점검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안이 넘치는 교회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한된 시간에 모든 말씀을 살펴볼 수 없을 것입니다. 대신에 저는 각 장에서 중요한 구절이나 사건을 깊이 공부하고 그 말씀이 주는 교훈을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는 시간이 되도록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이번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고린도전/후서 강해에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