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말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여섯 번에

걸쳐서 수요예배에서는

<성경 바르게 읽기>라는 주제를 갖고 공부했습니다.

수요예배에 오시는

성도님들의 연령대가 높아서

조금 염려도 했지만,

기대한 것보다 더 훌륭하게

즐겁게 말씀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가운데

시편 119편은

매우 특이한 구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다 ( 119:105)

Your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우선,

176절로 이루어진 시편 119편은

8절씩 22개의 연()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22개는 히브리어 알파벳 숫자와 같습니다.

또한 각 연의 8절은

같은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됩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연인1-8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인 알렙으로 시작되는데

첫 연을 이루는 8절은

모두 알렙으로 시작합니다.

그 뒤를 이어서

21개의 연이 같은 구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성경이 쓰여지던 고대 이스라엘에서

성경에서 가장 긴 장(chapter)

시편 119편을 암송하기 위한 장치였을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우리 식으로 하면

A 부터 Z까지 모두 들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가르쳐주는 듯합니다.

2.

늘 강조하듯이

하나님 말씀에는 하나님의 영감

즉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 안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20:31)

말 그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생명 책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앞에 인용한 시편 119 105절 말씀처럼

성경은 우리의 발에 등이 되고

우리 길을 멀리 비춰주는 빛이 됩니다.

신앙은 물론 인생 여정의

지침서요 나침반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며,

암송 하고, 묵상 하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부탁 드립니다.

아침마다 큐티하면서 말씀을 곱씹으시고

시간되는 대로 틈틈이 말씀을 읽으시고

첨부한 지난 주일 설교를 들으신다면

말씀에 뿌리를 내린 심지가 견고한 그리스도인으로

굳게 서실 줄 믿습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시편 기자처럼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편 119:103)

는 고백이 마음 깊은 곳에 임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119:165)

Great peace have they who love your law;

And nothing can make them stumble.

하나님,

오늘 아침에도

서머나 식구들께서

주의 말씀을 대할 때에

눈을 열어 주의 법에 기이한 것들(wonderful things in your law)을 보게 하시고

그것으로 하루 종일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4.7메일 목회서신)

웃음 가득한 인생 10 : 브엘세바

이삭에 대한 연속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줄 알았지만, 모든 것을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고, 그의 이름 뜻 그대로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1)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거한 것,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 3) 앞서 행하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믿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이삭은 하나님과 홀로 교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토를 달거나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쫓아다니면서 괴롭히고 훼방할 때마다 양보했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삭의 인생은 소리 없이 강했습니다. 그에게 포기나 낙심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넓은 곳 르호봇에 이르기까지 우물을 파고 또 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고향 브엘세바에 돌아온 이삭을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고향에 돌아온 확인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끝까지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고 축복하실 것임을 확인한 이삭은 그 자리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된 또 하나의 비결이“예배하는 삶”이었음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할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삭은 고향땅 브엘세바에 와서도 우물을 팝니다. 그때 그를 괴롭히고 훼방했던 블레셋 그랄땅의 아비멜렉왕이 관리들을 데리고 찾아 왔습니다. 이삭은 깜짝 놀랐습니다. 블레셋 땅에서의 좋지 않은 기억들이 다시 살아났을 것입니다. 이삭은 당황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로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그때 아비멜렉 왕이 이삭에게 평화조약을 제안합니다. 아비멜렉의 입에서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언급됩니다.:“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히 이루어졌음을 세상 사람들이 증명해준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자신을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확인한 이삭은 그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서로 평화협정을 맺습니다.

아비멜렉이 떠나던 날, 우물을 찾던 종들이 돌아와서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라고 이삭에게 보고합니다. 블레셋에서 우물을 얻었던 이삭이 고향에 돌아와서도 물(생명수)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고향에서도 살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삭은 아버지를 따라서 그 땅을“브엘세바(맹세의 우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향하신 약속을 지키셨고, 이삭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것입니다.

이삭이 가는 곳마다 함께 하셨고 그를 축복하셨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서머나 식구들 가운데 그대로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河-

우물파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주일예배에서는

창세기 26장을 연속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야곱 사이에 낀 세대로

창세기에 등장합니다.

이삭에 대한 말씀은 아브라함과

야곱에 대한 말씀에서 겹쳐서 나오는데

창세기 26장만은

이삭에게 거의 모든 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6장에서

특별하게 눈에 띠는 말은
우물입니다.

흉년을 피해서

블레셋 땅 그랄에 머문 이삭은

가는 곳 마다 우물을 팝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파 놓았던 우물을

다시 팝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쫓아다니면서

이삭이 파놓은 우물을 자기들 것이라고

우겨댑니다.

이삭은 그때마다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옮겨 다니면서 우물파기를 계속합니다.

이렇게 이삭은

다툼과 대적함이 있던 에섹과 싯나를 지나서

넓은 곳 르호봇에 이르기까지

우물을 파고 또 팝니다.

2.

흉년이 지나서 고향 땅으로 돌아온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26:24)

(Do not be afraid, for I am with you;

I will bless you and will increase your descendents)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향한

약속을 다시금 확인한 이삭은

그 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삭은

종들을 시켜서

또 다시 우물을 팝니다.

이처럼 창세기 26장은

이삭을 우물 파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우물을 팠습니다.

물을 얻어야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우리들도 삶의 현장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우물을

끊임없이 파야 함을 배웁니다.

3.

이삭이 팠던 우물은

말 그대로 생명수 (living water)였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이삭이 얻은 생명수는 단지 물(water)이 아님을 느낍니다.

그는

흉년으로 대표되는

죽음의 세상에서

생명(살길)을 찾아낸 것입니다.

요한복음 7 38절의 예수님 말씀이 연상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 7:38)

이삭은 땅 속에서

생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들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은혜가

깊고 귀함을 다시금 느낍니다.

오늘 하루 서머나 식구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생수의 강이 흘러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우물을

꾸준하게, 끝까지

파고 또 파실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파이팅!!!

하나님,

서머나 식구들

마음 속에

삶 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3.31메일 목회서신)

폭풍 속에서

일본에 몰아 닥친 지진과 쓰나미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혼란과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자동차들이 마치 장난감처럼둥둥 떠다닙니다. 거친 바다를 항해해야 할 배들이 육지로 올라와서 지붕 위에 올라앉기도 했습니다. 정착촌을 이루던집들도 정처 없이 파도에 밀려갑니다. 그 동안 경험했던 쓰나미와 달리 선진국 일본에 밀어닥친 이번 쓰나미는 인류가자랑하던 것들이 자연재해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쓰나미에 이어서 들려온 방사능누출 소식은 자연재해를 넘어서 인간이 쌓아 올린 기술문명이 빚은 인재(人災)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번 쓰나미로 일본인 아내를 잃은 한국인 남성에 대한 기사가 눈시울을 적게 했습니다. 남편은 트럭운전을 하고 아내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던 부부였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던 날, 밀려오는 쓰나미를 피하기 위해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 육지를 향해 달렸답니다. 간신히 학교까지 내달아서 이제 몸을 피하려는 찰라,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왔고 남편은 잡고 있던 아내의 손을 놓쳤습니다. 남편이 학교 난간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채 아내를 찾았지만파도에 쓸려간 아내는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눈깜짝할 사이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일본 국민들이 국가적 재난 앞에서침착하게 질서를 지키면서 대처했다는 것이 미담처럼 전해지지만, 그들의 아픈 가슴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순식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폐허로 변한 도시에 망연자실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애처롭기 그지 없습니다.

구약 성경의 욥은 까닭 없이 고난을 받습니다. 세상에 의인이 있느냐는 사단의 질문 앞에 하나님께서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을 지목해서 그를 시험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욥이 잘 대처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신앙의 친구들 마저 자신을 비난했을 때 고뇌에 쌓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십니다. 심하게 폭풍이 부는 가운데 욥이하나님을 대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에게 수백 가지 질문들을 폭풍처럼 퍼부으십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피조물인 욥이 과연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결국 얼굴을 땅에 묻고 엎드려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이번에 밀어닥친 쓰나미를 통해서 그 동안 인간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하게 쌓아 올린 인류문명, 천년 만년 이 세상에 살듯이 애지중지했던 집들과 인생의 자랑거리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우리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왜소하고 초라한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쌓아놓은 모든 것이 그토록 허무하게 쓰나미와 함께 사라질 수 있는데도 우리들은 한 푼이라도 더 갖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 아등바등 살아갑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면서 피조물인 인간이 최고인양 교만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니 도리어 안쓰럽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이번 일을 눈으로 보면서 우리들의 삶을 정돈하기 원합니다. 우리 스스로 욕심껏 펼쳐 놓았던 삶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사라질 세상 것들보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삶으로 모드를 전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앞서서 자신이 최고라고 자랑하던 교만도 거둬들여야 합니다. 욥이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우리들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조용히 무릎 꿇고 겸허한 삶을 살기로 다짐하기 원합니다. (2011년 3월 25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웃음 가득한 인생 9 : 예배하는 이삭

흉년을 피해서 블레셋 땅 그랄로 피신했던 이삭은 그곳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습니다. 피난생활이 여의치 않았는지 이집트로 내려갈 계획을 세웠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랄 땅에 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머물면 이삭과 함께 하시고 그를 축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삭은 그랄땅에 머물지만 곧 이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잘못을 범합니다.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블레셋에서 농사를 지어서 백배의 결실을 맺는 축복도 받습니다.

하지만 타향살이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거부가 되면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우물을 팔 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은 쫓아다니면서 훼방했습니다.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던 이삭은 양보했고 희생했습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믈을 팠습니다. 이삭은 결국 광활한 곳,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 르호봇에 이르게 됩니다. 이삭의 피난살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 덕분에 이처럼 르호봇에 이르는 축복으로 끝이 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삭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브엘세바는 이삭이 있던 그랄에서 서쪽에 위치해 있었고 아버지 아브라함도 브엘세바에서 우물을 파면서 지냈습니다. 창세기 21장에 의하면 아브라함도 브엘세바에서 블레셋 아비멜렉왕과 협정을 맺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이삭도 그곳에서 아비멜렉과 평화협정을 맺게 됩니다. 이처럼 이삭은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신앙을 계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신다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아브라함처럼 이삭도 하나님을 확실히 의지하면서 약속의 자녀로 산 것입니다.

고향인 브엘세바에 돌아오던 밤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발걸음을 인도하셨고, 이삭이 가는 곳마다 미리 가셔서 그를 맞으시고 그에게 함께 하심과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2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그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삭에게도 똑같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방해합니다. 두려울 때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확실한 믿음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두려울 때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두려움에 쌓여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함께 하심과 축복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십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 약속의 말씀을 또 다시 받은 이삭은 곧바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된 비결은 그가 예배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단을 쌓는 행위는 자신의 거처가 예배처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이삭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표시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장막을 치고 종들로 하여금 우물을 파게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줄 믿고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처럼 이삭은 예배하는 인생, 믿음을 삶에 실천하는 행동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음 한 주간 삶 속에 하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을 예배하시길 부탁드립니다. -河

“깨어 있으라”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 Newsweek의 헤드라인은

지금이 종말 (Apocalypse Now)”이었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지진과 쓰나미,

방사능 누출,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혁명들,

거기에 계속되는 불확실한 경제위기 등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나 봅니다.

뉴스위크에서는

이상한 기호 넷이 들어간

다음과 같은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What the #@%! Is Next?

다음에 일어날 것은

아무도 모르고

행여나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 같습니다.

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지나친 종말론은 금물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삶을

종말이라는 잣대에 올려 놓고

다시 한번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지나치게 세상을 추구하면서

지나갈 것들에 목숨을 걸고 에너지를 사용했다면

이 참에 과감히 정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내어 보일 수 있는 삶의 모습과 내용으로

모두를 전환하는 것이지요.

아마 많은 것을

버리고, 포기하고,

정돈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신약의 묵시록이라고 부르는

마가복음 13장에서는

주의하고 깨어있는 삶이라고 부릅니다.

주의하라 깨어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느니라 ( 13:33)

Be on guard! Be alert!

You do not know when the time will come.

주의하고 깨어있는 삶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종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삶을 미리 포기하면서

목을 쭉빼고

다시 오실 예수님만 기다리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주의하고 깨어있는 삶은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무엇을 보여드릴 지

매일같이 준비하고 예비하는 삶입니다.

신앙 안에서

깨어서 기도하고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쭉정이 인생이 아니라

깨알처럼 가득 찬

알곡 같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면서

하루 하루 천국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것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기로

매일같이 점검하고 결단하게 하옵소서.

서머나 식구들께

담대한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3.24메일 목회서신)

웃음 가득한 인생 8 : 에섹에서 르호봇까지

이삭은 이방땅 블레셋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축복하심을 모두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목하셨고 언제나 이삭보다 앞서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삭에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이 임할 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시기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생명줄인 우물을 모두 흙으로 매웁니다. 흉년이 찾아왔는데 우물까지 없으면 농사는 물론 목숨을 부지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삭에게 호의적이던 블레셋 그랄 왕 아비멜렉까지 이삭을 찾아와서 그 땅을 떠나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축복을 받았지만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시기를 사게 된 것입니다.

이삭은 백배의 결실과 많은 재산을 모았던 장소를 미련 없이 떠납니다. 이삭답게 아무런 토를 달지 않습니다. 이삭이 이렇게 세상에서 얻은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창26:3)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길을 예비해 주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이삭으로 하여금 새로운 터전을 향해서 길을 떠나게 했습니다.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 거합니다. 그곳도 예전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떠난 후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놓았던 우물을 다시 파기 시작합니다. 물을 찾는 일입니다. 과거의 영광에 도취되지 않고, 현재의 모습에 낙심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우물을 모두 복원한 다음에 아버지가 불렀던 우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이삭이 이방 땅에서 아버지를 기억한 것입니다. 아니 아버지가 믿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신의 신앙을 아버지의 신앙에 비추어 새롭게 하려는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물줄기가 터졌습니다. 이삭의 새로운 터전에서도 하나님은 이삭과 함께 하셨고 그를 축복하시면서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그때 블레셋 그랄 땅에서 양을 치던 유목민들이 또 다시 훼방합니다. 이삭이 판 우물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우겨댑니다. 이삭이 잘되기만 하면 이들이 나타납니다. 이삭은 그 우물을“에섹(다툼)”이라고 부릅니다. 우물로 인해서 블레셋 사람들과 다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다시 우물을 팝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두 번째 판 우물을 두고도 시비를 겁니다. 이번에는 그들의 훼방이 훨씬 심했던지 우물의 이름을 “싯나(대적함)”라고 부릅니다.

이삭은 다툼이 일어날 때마다 장소를 옮겨가면서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주실 것을 믿었기에 세상의 훼방과 간섭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우물을 팠을 것입니다. 이삭이 그곳에서도 물을 얻었고, 더 이상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삭이 우물 이름을“르호봇(장소가 넓음)”이라고 짓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창26:22). 이삭의 마지막 감사의 고백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을 굳게 믿고 다툼이 그칠 때까지 우물을 파고 또 팠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약속을 마음에 품고 에섹에서 르호봇까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서머나식구들 모두 믿음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예비된 르호봇에 이르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河-

현재 진행형

좋은 아침입니다.

1.

살다 보면

시계추를 뒤로 돌려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지나온 삶에 대한 아쉬움 때문입니다.

아니면 반대로

과거의 영광에 다시금 도취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엄습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앞으로 펼쳐질 인생길을

미리 살펴보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합니다.

뒤로 갈 수도 없고

앞 길을 미리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현재뿐입니다.

2.

종종 삶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고통이 언제 지나갈 지 막연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의 빛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의욕을 잃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게 마련입니다.

머리가 멍해 지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지금/여기(here and now)의 삶입니다.

현재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거기에 에너지를 쏟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 먼 것을 생각하지 말고

너무 많은 것들을 복잡하게 고려하지 말고

현재 해야 할 일들과 할 수 있는 일들을

잘게 잘게 쪼개서 한 가지씩 해 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었을 때

후계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모세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명기 31:8)

오늘 하루

서머나 식구들 모두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어진 삶 속에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나온 삶에 대한 미련이나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한 근심과 염려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이 약해지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더불어

현재 진행되는 모든 삶을 힘차게 살아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3.17메일 목회서신)

웃음 가득한 인생 7 : 신실하신 하나님 (2)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신약성경이나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보다 세상 역사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즉각 심판하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축복도 세상 속에서 눈에 보이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창세기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흉년을 피해서 블레셋으로 피신 간 이삭은 그곳에 머물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 땅에 머뭅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넘보는 것을 알아차리고 리브가를 아내가 아니라 누이동생이라고 속입니다. 이방 땅에서 이삭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사이인 것을 알아내고 온 백성들에게 이삭과 리브가를 해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을 구해주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움직이셔서 이삭과 리브가를 구해주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블레셋 땅에 머물라고 하시면서, 이삭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리라”(창26:3).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의지해서 그랄에 머물기고 결정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셨습니다.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삭과 함께 하셨고 아비멜렉을 통해서 그를 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블레셋 땅에 머문 이삭은 그곳에서 농사를 짓습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삭이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생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이삭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삭은 백배의 수확을 얻게 되고 블레셋 땅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아주 큰 부자가 됩니다. 백배의 결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13절에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게 임했다는 히브리어 표현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니 온 세상이 흉년이 든 상황에서도 이삭만은 기적 같은 풍년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환경에 상관없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한없이 축복하신 것을 본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시기했습니다. 이삭의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면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을 텐데, 흉년을 피해서 자기 땅에 온 이삭이 부자가 된 것만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파놓은 우물을 흙으로 메우면서 이삭을 훼방합니다. 당시는 우물이 중요했고, 흉년이 드는 경우 우물을 갖고 있는 것은 커다란 재산이었습니다. 우물을 메웠다는 것은 이삭에게 아주 치명적인 손해를 입힌 것입니다. 결국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자기 땅을 떠나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삭은 그랄 평지를 떠나서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 거합니다. 이삭은 이미 거부가 되어 있었고 종들도 있어서 블레셋 사람들의 요구에 힘으로 대항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아비멜렉 왕의 요청대로 그동안 일구어놓았던 삶의 터전을 떠납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하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이삭처럼 담대해야 합니다.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하더라도 여호와 이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河-

행복이란…

좋은 아침입니다.

1.

아프리카 수단에서

의료선교를 하면서

아프리카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던

이태석 신부에 대한 영화와 자료화면들을

유트브로 보았습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뒤늦게 신부수업을 받고

한국의 노모를 뒤로 하고

아프리카 수단에 의료선교사로 가서

10년여를 살다가 마흔 여덟에 삶을 마감했습니다.

저와 같은 해에 태어난

어쩌면

친구였기에 더욱 마음이 찡했습니다.

그는 짧다면 짧은 삶을 살았지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누렸던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가난한 나라,

내전으로 국토와 나라가 찢겨진 곳에서

삶으로, 아니 무엇보다 마음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던

우리 시대의 작은 예수였네요.

2.

진정한 행복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겠지요.

세상이, 삶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작은 빛 줄기를 따라 사는 것이

행복이겠지요.

말씀대로 라면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 (소명)을 따라 사는 것이

행복이겠지요.

제가 가는 목회의 길이든지

또한

우리 서머나 식구들의 삶이든지

힘에 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삭처럼

(이태석 신부의 웃는 모습처럼)

웃음을 머금고 사는 것이

행복이겠지요.

쉬워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 앞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던

선배들이 있기에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3.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날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루 동안

어떤 인생의 그림을 그리고 싶으십니까?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3)

하나님,

오늘 하루 동안

서머나 식구들의 마음과 삶에

진정한 행복을 보여주옵소서.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3.10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