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날을 맞읍시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이 음력 설날 입니다.

미국에 있으면

설날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날씨마저 한국의 겨울처럼 춥지 않아서

한국에 있을 때의 설 기분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점심때

중국 음식점에 갔는데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리고 종업원들이

우리를 중국사람으로 생각했는지

해피 뉴 이어라고 인사했습니다.

미국 분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음력을 세는지,

양력을 세는지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양(중국)사람들이 많은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누리는

또 다른 혜택(?) 같습니다.

2.

이처럼 우리들은

신정과 구정

새해를 두 번 맞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설날에서 이라는 말은

새해의 처음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네요.

어릴 적에는

신정과 구정을 맞는 것이 이상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설을 두 번 맞이하는 것이 싫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정(설날)에 새해의 결심을

다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심삼일이라고

새해 초에 했던 결심들이 흐려질 때쯤 되면

꼭 음력 설을 맞이합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남은 1년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고 보니

설날이 더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구약성경의 창세기 11절은
태초에 (In the beginning)”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신약성경의 요한복음 1 1절도

태초에라는 말씀으로 똑같이 시작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시작,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요한 복음의 시작이 맞물려 있는 셈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시작이 꽤나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롭게 신앙을 가진 것을

거듭남 (Born again)”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두고 중생(衆生)”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저는 거듭남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 펼쳐질 새로운 삶 (new life)을 강조해서

신생(新生)”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매일같이 새롭게 펼쳐지는 경이로운 삶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고

내일도 오늘과 다른 새로운 날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만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우리에게 성실함으로 임하십니다.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애가 3:23)

우리들 안에 새로운 삶을 주시고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 1:6)

오늘도

늘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잠깐씩이라도

새로움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느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서머나 식구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시든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날을 힘차게 시작하게 하옵소서.

아침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성실과

결국에는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마음에 품고 새 날을 맞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2.3 일 메일 목회서신)

웃음 가득한 인생 1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한 연속 설교를 마쳤습니다. 일곱 교회의 모습은 곧 우리 교회의 모습이었고, 우리들 각자가 그리스도의 성전이라고 했으니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께 칭찬받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동시에 질책을 받아서 마땅한 교회의 모습, 삶의 모습도 있습니다. 교회에 주신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약속은 “흰옷 입은 자”의 반열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자신을 돌아보는 회개와 주님을 찾는 열심”이 필요함도 깨달았습니다. 지난 겨울동안 함께 나눈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설교말씀 가운데 깊은 깨달음이 있었던 것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신앙생활 가운데 실천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성경의 마지막 장이었는데, 성경 맨 처음인 창세기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저는 이번 연속설교의 제목을 “웃음 가득한 인생”이라고 정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 그의 아들 이삭의 이름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아브라함이 웃었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와서 아내 사라가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사라가 천막 뒤편에서 듣고는 사라 역시 웃었습니다. 자신에게 생산능력이 모두 끊겼는데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듬해 사라가 아들을 낳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고 짓습니다.

창세기에 이삭에 대한 말씀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삭만을 위한 말씀은 한두 장 정도에 불과하고,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과 야곱에 대한 말씀 가운데 샌드위치처럼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여러 가지 일을 당하고, 야곱의 인생이 말 그대로 험악했던 것에 비해서 이삭은 그의 이름처럼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이삭의 어떤 점이 하나님 안에서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하였을까요?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이삭이 웃음 가득하고 어려움 없는 인생을 살았던 비결을 발견하고 우리들 역시 이삭의 믿음을 닮기 원합니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그냥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의 몸에서 아들이 낳을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습니다. 아내 사라의 태가 닫혔고 게다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연령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다른 방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로 그가 생각했던 것은 자기의 종 가운데 다메섹이라는 사람을 상속자로 삼아서 그를 통해서 큰 민족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몸종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상식과 이성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복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태를 여셔서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도 그것을 듣고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상식을 초월해서 일하시는 분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새 해 첫 달을 보내는 요즘,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우리들 상식에 가둬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河-

내적 부요함

신약성경의 마지막인 요한 계시록은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들을 향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은 말 그대로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라오디게아는금융, 의학, 염색등 산업이 발달했던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속한 성도들도 물질적으로 부유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고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물질주의가 팽배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교회에서 부(富)가 자랑거리가 되었고. 부족함이 없을 만큼 세상에서 부유함을 누리는 것을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은 이들의 자랑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계3:17, 표준새번역). 자칭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했습니다. 심지어 눈이 멀어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면서 요즘 기독교의 모습이 자꾸만 중첩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새해 들어서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부끄럽고 안타까운 소식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차마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추한 모습들이지만,문제가 생긴 원인을 가만히 살펴보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의 모습들입니다. 첫사랑을 잊어버린 기독교인들, 성적인 타락과 그릇된 영적 지도자들,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는 죽은 신앙, “나는 부자”라고 물질적인 축복을 자랑하는 기복신앙 –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안타깝고 때로는 분노하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들입니다.

그 동안 우리들은 지나칠 정도로 눈에 보이는 축복에 연연해 왔습니다. 교회는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라오디게아 교회가누린 물질적인 풍요함을 동경해 왔습니다. 예전에 춥고 배고플 때는 믿음 가운데 물질적인 필요도 채워졌어야 합니다.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솔직히 우리들이 현재 기도하고 소원하는 물질적인 축복은 더 가지려는 욕심과 남들보다 앞서려는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속에서 기독교가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고 목청껏 외쳐도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도리어 배타적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이제는 물질과 성장 그리고 축복을 강조하는 외적인 신앙보다 내면의 성숙을 생각할 때입니다. 현재 기독교를 향해서쏟아지는 비판도 그 동안 교회가 물질과 성장 등 겉모습에만 신경을 쓰다가 진작 중요한 내면을 놓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내면을 살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정도의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기독교회들이 물질주의와 기복신앙을 하루속히 뛰어넘어야 합니다. 축복 신드롬을 벗어나야 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하박국 선지자의 영성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영생이라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들이 교회 안에들어와 자리잡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생명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의내면을 가득 채우기 원합니다. 세상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들과 다른 그렇지만 세상이 흠모할만한 내면의 거룩함임을 기억합시다.

(2011.1.28. SF한국일보 칼럼)

내면의 성숙

좋은 아침입니다.

1.

시간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새해의 첫 달도 이렇게 훌쩍 지나가고 있으니까요!

새해에 세워 놓은 계획들이 무색하고

주보에 나오는 성경일독 스케줄이 벌써부터 부담이 됩니다.

저는 이제 한국 나이로 오십이 되었습니다.

물론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도 미국 나이로는 48세입니다.

제게 있어서 앞으로 10년은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

남은 10년을 잘 잡으면

인생의 후반전 또는 연장전을

감사와 기쁨으로 보람 있게 보낼 것 같습니다.

우리 서머나 식구들은

50대를 훌쩍 넘으신 분들이 꽤 많으시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할 때라는 말을

여러분의 간증으로 만들어 보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또한 사무엘 울만이 70이 넘어서 썼다는 시구(詩句)

기억하시면 새로운 힘을 얻으실 것 같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Youth is not a time of life; it is a state of mind)


2.

나이가 들면서 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음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부리는 욕심을 노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피해를 입힙니다.

둘째는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입니다.

그 동안 해 왔던 일들 가운데,

또는 나이가 들면서 새롭게 열리는 인생 가운데,

무엇보다 이웃과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은사를 찾고

그것에 집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 후반전의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셋째는 내면의 성숙입니다.

어차피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육체는 힘을 잃습니다.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외모나 가진 것에 대한 관심보다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는 것이 노년을 아름답게 사는 비결일 것입니다.

연세가 들으셨지만

무척이나 곱고 아름다워 보이시는 어르신들을 만납니다.

그분들과 조금만 대화를 해보면

내면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말씀묵상과 기도는

내면의 성숙에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3.

젊은 청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리시지요?

그런데 금방 그 자리에 서 있게 됩니다.

세월을 막을 수가 없거든요.

무엇보다

세상 욕심을 절제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

내면의 성숙을 이루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새해 첫 달이 빠르게 지나갔듯이

남은 열 한 달도 그렇게 지나갈 것입니다.

기차에 앉아서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듯이

인생을 살지 말고

모래를 품고 사는 조개가 아픔과 고난을 견디면서

갚진 진주를 만들어 내듯이

올 한해 서머나 식구들의 인생길에

감사와 기쁨의 열매가

내면 깊이 풍성히 맺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서머나 성도들의 신앙과 삶에

내면의 성숙과 풍성함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 것으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하루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1.30메일 목회서신)

내가 사랑하는 자

지난주에 이어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칭찬만 들은 교회는 죽도록 충성하였던 서머나 교회와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빌라델피아 교회였습니다. 반면에 다른 네 교회들은 칭찬과 동시에 질책도 받습니다. 그런데 유독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 없이 질책만 받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부족함이 없던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자칭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자기 만족도가 높았던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미지근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번드르르했지만 실상 신앙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벌거벗은 영적상태입니다. 라오디게아의 신앙의 모습이 17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겉으로 보면 멋진 교회였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형편없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다는 것입니다.

칭찬할 것이 하나도 없었던 라오디게아를 향한 예수님의 교훈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두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열심을 내는 것은 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형식적인 신앙과 자기 우월의식에서 돌아서라는 깨우침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명칭이 확실히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칭찬할 것도 없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십니다. 이들은 진실된 신앙에서 떠나갔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필레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친구간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이들을 친구로 대해주십니다.

20-21절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들이 회개하고 열심을 내는 신앙을 회복했을 때 임하게 될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친히 자신의 목소리로 이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문을 열면 예수님은 들어가셔서 식탁을 함께 나누실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식탁을 나누는 것은 매우 친밀하다는 표시였고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앚을 것이라는 약속도 주십니다. 여기서 보좌는 왕의 보좌입니다. 그곳에 함께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왕의 자식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미지근한 신앙과 자기 교만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도 회개하고 다시금 신앙을 회복하면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문이 열릴 때만 고대하십니다.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오실 수 있지만,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문을 열기를 기다리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문 밖에 서 계시도록 홀대할 때가 많다는 증거입니다.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신앙의 식탁을 나누고 왕의 보좌에 앉을 준비를 합시다. 할렐루야!-河-

“뜻을 정하여”

좋은 아침입니다.

1.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은 없이 질책만 받았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3:17)

라고 스스로 말할 만큼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은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자” “부족함이 없는 부요함

축복으로 생각하면서

세상 것들을 정신 없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간의

차이점인 거룩함을 상실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성경이 가르쳐주는 진리에 깊이 뿌리를 박고

세상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2.

요즘 큐티 본문인 다니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을 사는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이라는 당시 고대근동의

최대강국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왕궁에서 바벨론 언어와 문화를 습득했지만

뜻을 정하여”( 1:8)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신앙을 굳게 지킵니다.

자신들을 포로로 데려온

바벨론 왕들의 꿈을 해석해 주고

높은 지위에 오르기도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다가

친구들과 더불어 죽을 위기도 겪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은

세상에 지혜롭게 적응했으면서도

구별된 삶, 즉 거룩함을 잃지 않았고,

그의 신앙을 통해서 바벨론 왕들의 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영향력도 발휘했습니다.

3.

우리들도 세상에서 다니엘처럼 살아야 하는데

자꾸만 우리의 발걸음은 세상의 부유함을 추구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좇아가는 듯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고

들어가야 하는데

도리어 우리들 신앙에 세상의 가치관이 들어와서

신앙을 흐릿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2011년 첫 달을 보내면서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다니엘 처럼 뜻을 정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거룩함을 잃지 않을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안에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세상을 좇는 마음과 습관이 있다면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올 한 해

미지근한 신앙이 아니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참된 신앙의 길로 나가기 원합니다.

하나님

한 해를 살면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에 두고

우리의 발걸음이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뜻을 정하고

굳건히 신앙의 길로 나가는

서머나 성도님들을 지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1.20메일 목회서신)

차든지 덥든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 가운데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두 주에 걸쳐서 전하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셀류시드라는 왕조가 소아시아를 다스렸는데 그때 왕이었던 셀류시드 2세가 라오디세라는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안약을 비롯한 의학도 발달해서 지금으로 말하면 의과대학 같은 학교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도시가 부유하다보니 라오디게아 교회에 모여든 성도들도 세상의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많은 소위 ‘난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였습니다. 본문 17절에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의 수준과 모습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였지만 이들의 믿음은 말 그대로 형편없었습니다. 자칭 부자라고 할 만큼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이들의 영적 상태는 벌거벗은 모습이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가난하다 못해서 가련해 보였고 영적인 눈이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겉만 화려한 신앙입니다. 또한 세상적으로 풍족하고 어려움이 없다보니 믿음이 식었습니다.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간혹 본문의 찬 것과 더운 것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이해하려는 경우가 있는데, 본문의 핵심은 찬 것과 더운 것에 있지 않고“미지근함”에 있습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과 명예가 교회에 흘러 들어와서 교인들의 신앙을 미지근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라오디게아는 물 공급이 어려웠습니다. 약 6마일 떨어진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 뜨거운 온천수를 갖고 왔지만 라오디게아에 도착하면 미지근한 물로 변했습니다. 또한 동쪽으로 11마일 떨어진 골로새에서 차가운 물을 갖고 왔는데 차가운 물 역시 라오디게아에 도착하면 미지근해졌습니다. 물이 미지근하면 먹기 힘듭니다. 물로서 가치가 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을 미지근한 물에 비유하시면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해 내치리라”(16절)고 강력히 경고하십니다. 입에서 토해 내서 내친다는 말씀은 보통 무서운 말씀이 아니지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은 풍족함을 누리는 미국이나 한국에 있는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불경기라고 하지만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합니다. 세상의 물결이 교회에 흘러 들어와서 교회 안에 물질주의, 세상의 명예, 개인의 욕심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난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과 상관없이 교회에서 큰 소리를 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꽤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예수님의 명령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청산해야 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으로 우물쭈물하는 것보다 확실한 신앙으로 무장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세상 것을 자랑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님의 이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올 한 해 세상의 가치들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기뻐하고 그 능력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인도하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 가운데

인내와 신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신앙이 크고 적음은 바로 인내로 나타납니다. 처음과 끝이 시종여일하다면 이것이 곧 성경이 말하는 신실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즉 처음과 나중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신실하시듯이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처음과 나중이 똑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래 참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곧바로 나와야 하고

적어도 잘 될 것이라는

(자기 생각대로 될 것이라는)

표징이 나타나야 안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거나,

중간에 포기하거나,

쉽게 낙심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기 뜻이 너무 강해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에 사로잡혀서

뜻대로 되지 않거나

자기가 정해놓은 시간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불안해 하고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2.

온전한 믿음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쫓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신실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금방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내 생각대로 한다면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면 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의 삶을 맞추다 보면

인내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3.

새해를 맞아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그것에 맞춰서 기도제목도 작성했습니다.

올 해만은 계획한 것을 모두 이루기 위해서

대단한 결심도 했습니다.

대부분 그렇게 한 해를 시작하지만

작심삼일입니다.

새해의 결심은 사라지고

적당히 한 해를 보내는 것이 우리네 모습입니다.

그런데 한번쯤

우리의 생각을 바꿔볼 필요도 있습니다:

제가 세운 계획도 중요하지만

올 해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펼쳐주시는 인생길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쫓아가겠습니다.”

를 조금 뒤로 밀어놓고

우리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쫓아 살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생각보다 인생의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스트레스가 많이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곁눈질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걸어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49 7절 말씀을 기억합니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올 한 해

우리에게 선하고 유익한 길을 보이시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신앙의 길로 나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서머나 식구들이 주님 뜻대로 살게 하옵소서.

그른 길로 가면 바로잡아 주시고

서두르면 속도를 늦춰주시고

게으르면 발길을 재촉해 주옵소서.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해 주시고

끝까지 주님과 동행하면서

인내신실을 이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1.13 메일 목회서신)

하나님 성전의 기둥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여섯 번째인 빌라델피아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더불어 질책 없이 칭찬만 받았던 교회라고 했습니다. 두 교회 모두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유대인들을 두고“사단의 회”라고 표현했을까요!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몸에 할례를 받음으로 선택받은 백성의 표시를 지니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엇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기독교가 점점 커지자,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동네나 도시에 있던 회당에서 기독교인들을 좇아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저주하였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도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회당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가 큰 힘을 가진 교회가 아니었기에 유대인들의 핍박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능력의 교회였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앙 하나만은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빌라델피아 교회를 칭찬하시고 이들을 축복하십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빌라델피아 교인들 앞에 절하는 일이 생길 것이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빌라델피아 교회를 붙잡고 계시고,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시겠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지금 자신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장차 그들의 발 앞에 절할 날이 온다는 사실은 빌라델피아 교인들이 믿음을 지키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힘든 것을 예수님께서 보상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둘째로, 끝까지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훗날 세상이 당할 시험을 면제해준다는 약속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끝가지 참고 신앙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상해 주십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둘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는 말씀대로 빌라델피아 교회는 비교적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참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우리의 삶이 형통할 것입니다. 시험의 때를 면해 주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임할 줄 믿습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신답니다. 빌라델피아 교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은 유대인들의 비난과 핍박을 참게 만들어 주는 소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면류관을 빼앗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얻게 된 구원을 빼앗을 세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열린문은 그 어떤 세력도 닫을 수 없습니다.

넷째로, 신앙으로 끝까지 승리한 자들을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당시 빌라델피아에는 많은 신전이 있었고, 신전에 기둥이 있어서 그곳에 성자들의 얼굴이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델피아 교인들을 기억하신다는 칭찬입니다. 세상의 신전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 성전에서 안전하고 존귀하게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이처럼 빌라델피아 교회는 칭찬과 축복만 받았습니다. 비록 적은 능력이었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결과입니다. 올 한 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기대와 소망을 갖고 끝까지 말씀 가운데 살아갑시다. 약속을 붙잡고 이기는 자의 신앙으로 나아갑시다. -河-

2011 새 해에는…

Happy New Year1

1.

2011년의 여섯 번째 날이 지나고 있습니다.

새해의 첫 주간을

말씀과 기도로 보내시기를 부탁 드렸는데

잘 지키고 계시는지요?

우리가 사는 시대는

후기 기독교 시대(post-Christianity era)입니다.

기독교가 한창 힘을 쓰고

기독교의 진리와 신학이 서양철학과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던 시대가 지났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기독교 없이도 세상이 잘 돌아갑니다.

아니 도리어 기독교가 거추장스러워져서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절대자 하나님이나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주장에 반기를 듭니다.

이 같은 후기 기독교 시대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젊은 청년들과 우리 자녀들은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 뿐만 아니라,

보통 결심과 믿음이 아니면

갖고 있는 신앙마저 빼앗길 지경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청년들과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로 돕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아니 성경의 진리가 퇴색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쓰지 못하시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성경은 여전히 우리들 발의 등불이요

우리들 길의 빛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성경이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대와 사람들이 변했을 뿐입니다.

2.

한 해를 시작하는 새해 첫 주간에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께 조율하기 원합니다.

다시금 우리들 신앙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성경의 진리 속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그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탁 드렸듯이

올 한해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짜는 가짜보다 세련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가짜가 더 요란한 법이거든요.

가짜는 자기를 변명하고 자랑하기에 급급하지만

진짜는 가만히 있어도

그 성품과 삶으로 진짜인 것이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진짜 그리스도인들

요한 계시록 말씀에 나오는 흰 옷 입은 자들”-

을 주목하시고, 그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고린도후서 6 1-10절에 잘 나옵니다.

그 가운데 9-10절만 옮겨왔습니다.

이름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표준새번역)

올 한해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진짜로 살기를 힘씁시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진짜 그리스도인을 찾으시고

그들과 더불어 한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서머나 성도님들의

신앙과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되고

세상에서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빛을 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1.1.6 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