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을 향하여

2011년 새해 첫 번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들의 마음도 소망과 기대로 가득 차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365일이 어떻게 펼쳐질 지에 대한 기대요 결심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몇 년을 돌아보니, 올 해처럼 홀가분하게 한 해를 시작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안에서 갖는 기대도 크고 또한 늘 평안할 때 틈을 타는 사단의 유혹에 대한 경각심도 갖게 됩니다. 올해 교회의 표어대로 사랑으로 서로 섬기면서 가족 같은 교회를 세우기 원합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소아시아에 세워진 교회들이지만, 일곱 교회는 결국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들 각자가 성전이라고 하셨으니 일곱 교회의 모습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교회나 우리들 각 성도들이나 칭찬받을 것을 갖고 있습니다. 신앙을 지키고, 서로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칭찬받을 일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과 교회를 섬긴 우리 서머나 식구들의 믿음은 말씀 속의 서머나 교회처럼 칭찬을 받기에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물론 완벽한 교회나 신앙은 없습니다. 교회든 우리들 각자이든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고 꾸지람을 받을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사랑을 잊어버린 경우,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서 거룩함을 상실한 경우, 죽은 믿음처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교회나 우리들의 삶과 신앙 속에 조금씩은 다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럽거나 잘못된 것들은 깨닫는 대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날마다 아니 순간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칭찬과 꾸지람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약속이 나옵니다. 가장 귀한 약속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입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시고, 작은 일에 죽도록 충성한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또한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이김(승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에게 만나를 주시고 생명책과 흰 돌에 이름을 새겨 주십니다. 만국을 다스릴 권세와 새벽별을 주십니다.

지난주에 사데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요즘 세상이 사데교회처럼 죽은 신앙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데교회에도 흰옷 입은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소망을 두시고 귀하게 사용하실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서머나 식구들 모두 흰옷 입은 자로, 남은 자들로 하나님 앞에 나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오늘 살펴본 빌라델피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함께 꾸지람을 받지 않았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작은 자들이 모여 있었고 교회의 사역이 그리 화려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적은 능력을 갖고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일을 감당했던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라델피아 교회에 열린 문을 주시겠답니다. 문도 열려있고 그 문의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십니다. 빌라델피아 교회와 성도들에게 열린 문에 들어갈 특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문을 그 누구도 닫을 수 없습니다.

새해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도 새해의 문을 활짝 열어주 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문, 신앙의 문, 사랑과 소망의 문으로 서머나 성도님들 모두 들어가시는 귀한 은혜와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河-

삶의 여백

중학교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어렸을 때 화상을 입어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셨고 불같이 급한성격을 갖고 계셨기에 학생들에게 무서운 선생님으로 통했습니다. 외모와 성품이 특별하신 선생님이셨지만 실력만큼은대단하셨습니다. 시골 중학교였고 당시에는 인터넷 같은 대중매체가 발달하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국전에서 입상하신 분이라는 소문도 학교에 돌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선생님의 전공이 동양화였던 것 같습니다. 미술시간마다 창호지와 벼루와 묵을 갖고 오라고 하셔서 난초와 같은 수묵화를 그리게 하셨습니다. 그림에는 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그깊은 뜻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무서운 선생님께 야단맞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그리는 흉내를 내고, 그 와중에도틈만 나면 얼굴에 먹물을 묻히고 키득키득거리면서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늘 진지하게 수업을 진행하셨습니다.

그때 배운 것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림은 여백의 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미술에 문외한이지만 “여백의 미”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성격도 괴팍하시고 한번 화를 내시면 호랑이처럼 무서우셨던 미술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여백의 미는 동양 미술의 진수랍니다. 화판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여백을 남겨두고 그곳에서 예술의 진수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답니다. 여백의 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감성이 발달해야 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한답니다. 여백의 미는 논리와 실적을 따지는 서양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여백을 남겨놓는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빈 곳이 있으면 안달하면서 무엇으로든지 그곳을 채워 넣어야 안심이 됩니다. 여백을 남겨놓는 것은 허술해 보이고, 만족스럽지 못하고, 때로는 창피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2010년 경인년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 초 새해를 맞아서, 범띠인 저는 표범처럼 포효하며 힘차게 한 해를살기로 결심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니 여기저기 허술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쉬움도 많이남고,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 했다는 뉘우침도 생깁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들이 삶의 여백일 수 있습니다.

완벽한 인생길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인생을 여백 없이 가득 채우며 산다면, 그것 역시 숨막히는 일이겠지요. 인생길 이곳 저곳에 남겨진 여백을 바라보면서 마음 한 켠에 여유를 느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이 남겨놓은 여백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채워주실 지 기대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니 남겨진 여백도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 삶 속에 남겨진 여백 자체가 축복이고 소망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구약 성경의 전도서 기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전도서 7장 29절, 표준 새번역). 평범하고 단순하게 사는 인생은 여백의 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자신을 스스로 복잡하게 만드는 인생길은왠지 모르게 숨이 막히고 나중에 허탈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전도서의 일관된 가르침대로 우리의 인생길은 이십 보백 보요 거기서 거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송구영신의 계절에 우리의 삶에 남겨진 여백으로 인해서 아쉬워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신에 여백을 즐기고, 남겨진 여백이 새해에 어떻게 채워질 지 기대하면서 소망 가운데 새해를 맞기원합니다. (2010년 12월 31일 SF 한국일보 종교 칼럼)

흰옷 입은 자

오늘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성탄감사주일이자 올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해는 경인년 범띠 해였습니다. 범처럼 포효하면서 힘차게 한 해를 시작했고, 그동안 계속되던 불경기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2010년을 맞이했었는데 여전히 미국의 경제는 한 겨울입니다. 더 힘든 한 해였다는 생각이 들만큼 서머나 식구들의 삶이 힘겨웠습니다. 그래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때로는 안타깝고, 감사하고, 목사로서 더욱 힘껏 돕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올해의 시작이 아주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성도님들께서 한 마음으로 교회를 지켜주셨기에 감사함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비록 큰 부흥은 이루지는 못했어도 교회가 양적으로 조금씩 자라가고, 교회의 사역도 소박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 올바른 곳으로 방향을 잡고 한걸음씩 나가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 올 한 해도 전도사님과 연로하신 권사님들께서 건강하게 지내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해가 갈수록 기운이 떨어지신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전도사님과 모든 권사님들께서 아름답고 견고한 믿음으로 새해를 맞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돌아보니 우리 서머나 식구들과 우리 교회는 힘은 들었어도 감사한 가운데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있었고,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어떻게든 온전한 신앙의 길로 나가려는 마음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신앙 가운데 열심히 사신 서머나 식구들께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올 한 해 동안 주변을 돌아보니 안타까운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경제가 여전히 어렵고, 한국에서는 연평도 사건이후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또한 인터넷을 비롯한 세상의 여론은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반감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심지어 성탄절을 맞아서 “메리 크리스마스”대신에 “해피 할러데이”라는 인사가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에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없어지고, 세상의 여러 풍조와 상술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사데교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사데교회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진정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으니 형식과 껍데기만 있는 추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려 했지만 이미 복음이 사라진 교회를 되살리기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사데 교회를 묵상하면서, 메리 크리스마스에서 해피 할러데이로 성탄절의 참뜻이 놀고, 먹고, 마시는 세상의 휴가철로 변질된 요즘 세상이 생각났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일그러지고 망가진 세상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 통치와 주권이 세상에도 그대로 임하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데교회가 죽은 교회였지만 그곳에도 신실한 사람들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지난 주 두아디라 교회의 남은 성도들처럼 “이기는 자”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사데교회가 거룩함을 상실하고 어두운 세상의 세력이 교회에 드리웠는데, 그곳에서 흰옷을 입은 성도들이 남아 있었다니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이들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고, 예수님께서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변호하신답니다. 흰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망가져도 서머나 성도님들은 흰 옷 입은 성도들로 이기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시면서 새해를 맞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메리 크리스마스

좋은 아침입니다.

1.

내일이 크리스마스 이브,

모레가 성탄절이군요.

어렸을 때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도 기다리고,

성탄절 이브 발표회 준비와

새벽송 등등

거기에 하얀 눈까지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렸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무덤덤해 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샌프란에 살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평생

볼 수 없겠지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우리들의 마음만 변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훨씬 많이 변했습니다.

크리스마스하면

세일과 샤핑을 가장 먼저 생각한답니다.

이제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대신에

해피 할러데이가 대세인 듯 합니다.

2.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2010 12 25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과연 어디에 머무르실까?”

2천년 전,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이셨는데

오늘날 세상에 오셔도

거하실 곳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분명 예수님이신데

이름만 성탄이지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배하는 모습은

더 이상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어김없이 성탄절이 돌아오듯이

예수님은 대강절을 지내온

우리들에게 구세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들렸던

천사들의 음성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들려올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2:14)

내일이 성탄절 이브인데

차분하게

아기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기 원합니다.

성탄절을 맞아서

서머나 식구들과

한 해 동안 이메일 서신을 받고 함께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하늘의 평화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하옵소서.

어려운 한 해를 살아온

서머나 식구들 위에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이 새로운 소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0.12.23 메일 목회서신)

“새벽별을 주리라”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살펴보는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은 명칭 그대로 각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교회마다 장점이 있습니다. 동시에 책망 받을 일들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되었지만 여전히 죄를 짓는 부족한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있기 때문이겠지요.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 성도들의 신앙을 흔들고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에 온전한 교회를 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마다 흠이 있습니다. 티가 있고 주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고 사도들이 사역하던 초대교회들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로부터 2천여 년이 지난 지금 완벽한 교회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 것입니다. 대신에,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차례차례 살펴보면서, 교회의 부족함과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유혹의 세력들을 분별해 내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다함께 기도하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살펴 본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 보다 나중이 좋았습니다. 지난번에 살펴 본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잃어버려서 책망을 받았는데, 두아디라 교회는 끝이 좋았으니 그들의 섬김과 사역이 훌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있던 두아디라는 우상숭배와 세상 풍습이 만연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버가모 교회가 산위에 세워진 요새와 같은 교회였다면, 두아디라 교회는 분지에 세워졌습니다. 그만큼 세상의 풍습과 물품들이 쉽게 흘러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복음이 전해져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과 사랑 위에 인내까지 겸비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두 얼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냈지만, 동시에 우상을 겸해서 섬겼습니다. 이세벨이라는 자칭 여선지자가 교회를 혼란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합왕의 왕비 이름입니다. 구약 성경의 이세벨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바알과 우상숭배를 전했듯이,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도 교회에 음란한 세상 문화와 우상숭배를 전했습니다. 이들이 행했던 죄는 행음과 우상숭배입니다. 행음은 쾌락을 좇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겨야 할 교회가 다른 신들을 겸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해서 섬기는 것을 두고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하나님과 세상을 겸해서 섬기는 혼합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해서 섬기는 물질주의, 하나님을 이용(?)해서 성공하려는 세상의 욕심과 이따금 들려오는 성적인 타락 등이 대표적인 혼합주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반면에 물에 물 탄 듯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행하기는 쉽습니다. 요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쉬운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두아디아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경고와 축복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커다란 환난이 임한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이 짓는 죄를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에“각 사람의 행위대로”심지어 자녀들까지 심판하시겠답니다. 반면에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신앙을 굳게 지킨 신실한 성도들을“이기는 자, 끝까지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 만국을 다스릴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만국을 다스리고, 새벽별처럼 빛나는 영생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켜서 새벽별처럼 빛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기도, 기대, 기다림

좋은 아침입니다.

1.

나이가 들고

신앙의 연조가 쌓이면서

연말이 되어도

차분하게 마음과 삶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내면의 풍성함과 평온함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모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교회의 연말은 늘 기도가 필요합니다.

새해를 계획하고

교회를 섬길 일꾼을 세우고,

교회의 행정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교회와 성도님들의 마음을 흔드는

악한 영의 유혹이 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수요예배 전에

30분 기도하는 시간이 참 귀합니다.

말 그대로 소박한 기도시간입니다.

각자의 책상 앞에 놓인

기도제목을 갖고

조용히 기도하지만

은밀히 들으시고, 은밀히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귀한 시간입니다.

수요기도회를 통해서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의

내면의 신앙이 더욱 풍성해 지기를 바랍니다.

2.

연말 연시를 맞고 있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세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세 단어 모두

한글 자로 시작됩니다.

기도, 기대, 기다림

입니다.

기도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대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소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하면서 한 해를 접고

또 새 해를 맞이합니다.

기다림

기도와 기대가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저는

기다림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기다림은

기도하고, 기대한 사람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믿음의 시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가능성이요,

신앙과 삶의 여백들입니다.

기다림에는 꼭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을

신앙 안에서

참고, 누리는 것이 곧 믿음이요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안데

기도, 기대, 기다림

살아서 역사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연말연시를 맞는

서머나 성도님들께서

기도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대로 드린 기도가

성취되기를 기대하고

기다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0.12.16 메일 목회서신)

흰돌에 새겨진 이름

진품(眞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조품 또는 위조품의 반대말입니다. 진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품의 가치는 더욱 커지고 저절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소위“짝퉁”이라고 불리는 위조품은 어딘가 어색하고 결국에는 가짜인 것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때가 되면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고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살펴보고 있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서머나 교회는 말 그대로 진품입니다. 죽도록 충성했고 비록 세상에서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지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첫 사랑의 감격과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초심을 잃은 신앙은 위험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변질된다면 가짜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버가모 교회 역시 안티바라고 하는 순교자를 낼 정도로 명성이 있었지만 교회 안에 가짜 교리가 침투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로 소개하는 것만 보아도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가 있던 버가모라는 도시 자체가 영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그곳에는 각종 신전이 있었고, 쾌락과 세상 풍습이 판을 쳤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는 버가모 교회에 침투해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무리들을 니골라당이라고 부릅니다.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에베소 교회에서도 잠깐 언급되었습니다.(계 2:6). 교회사에 의하면, 니골라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일곱 집사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유대교로 개종했던 헬라인으로 다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행 6:5). 사도행전에서 일곱 집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가운데 선출되었습니다. 니골라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니골라는 교회를 인도하는 집사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단의 우두머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니골라당은 성경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다음에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적인 일이기에 육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답니다. 하나님은 영에만 관심을 가지실 뿐, 육체는 어떻게 살든 관여하지 않으신답니다. 그래서 니골라당은 버가모에서 유행했던 세상의 음란과 쾌락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육체로 짓는 죄는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교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쾌락과 음란 그리고 거짓을 일삼으면서 자기 편할 대로 즐길 것 다 즐기면서, 교회에 와서는 거룩한 척하면서 사람들을 포섭했기에 사단의 무리라고 부른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직접 검으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랍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회개하고 끝까지 진품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두 가지 약속이 나옵니다.:“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에 새겨진 이름”입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양식이자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가리킬 것입니다.“흰돌”에 새겨진 이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입니다. 니골라당이 세상의 풍습을 따라갔지만,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은혜를 양식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니골라당이 검으로 심판을 받고 죽을 운명이지만, 진품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은 흰돌에 새겨져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흰돌에 새겨진 이름에 걸맞게 순결하고 거룩해야 함을 다시금 배웁니다. -河-

“완벽”보다 “최선”을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은근히(?)

완벽주의 성향이 있습니다.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지만

이것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합니다.

오십 가까이

완벽주의 성향을 갖고 살아 왔지만

점점 깨닫는 것이

완벽주의가 성경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죄인이고,

쉽게 부숴질 질그릇으로 빚어진 불안한 존재이고,

아무리 힘을 써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죽을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완벽 하려고 애쓰는 것은

어찌 보면 교만일 수도 있습니다.

2.

지난 주일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

(우리 교회와 동명이기에 헷갈리기도 하고 또 괜히 웃음을 짓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의 헬라어 본문을

그대로 옮기면
죽을 때까지 신앙을 간직하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영어 성경이

Be faithful until death라고 번역했습니다.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물론

그의 제자였던 폴리갑,

그 외의 수많은 무명의 에베소 교인들이

순교하는 순간까지 (죽을 때까지)

신앙을 지켰으니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지킨 셈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모습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순간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목숨 걸고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완벽한 신앙을 가지려고 애쓰기 보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죽도록 충성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과 삶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12월도 중순으로 달려갑니다.

한 해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려고 하면

스트레스만 받습니다.

대신에

하루 하루

아니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감사와 기쁨 그리고 평안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올 해의 마지막 달을 살면서

최선을 다하는

서머나 식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0.12.9 메일 목회서신)

12월을 맞으며

“올 해의 마지막 달을 살고 있습니다. 한 해가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요! 우리말로 나이가 드는 것을 두고 “나이를 먹는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먹는 것으로 비유한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음식을 먹어 치우듯이 지나간 시간은 사라집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에 유익이 되고 삶 속에 열매로 남습니다. 시간도 먹으면 (나이를 먹듯이) 그것이 우리 삶에 귀한 열매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나쁜 음식을 먹으면 도리어 몸에 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옳게 사용되지 않은 시간은 우리의 삶과 인생길에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이를 먹는 것이나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시간을 잘 선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척 부끄럽고 창피할 것입니다. [중략] 2010년 한 해 동안 336일을 먹고 이제 29일이 우리 앞에 남겨져 있습니다. 남겨진 날들 하루하루, 믿음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웃을 섬기면서 살아봅시다.“

위의 글은 지난 목요일에 보낸 이-메일 서신 가운데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저 역시 목요일에 메일을 보내고, 올 한 해를 알차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헛되게 보낸다 싶으면 얼른 정신을 차립니다. 그동안 보낸 시간이 과연 하나님 앞에 기쁘게 드려졌는지 돌아보고, 제가 보낸(먹은) 시간이 어떤 열매로 나타날지 겸허하게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인생 통장에 365일을 꼬박꼬박 넣어주시는데 연말연시가 되어야 시간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니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만, 그래도 남은 한 달여 열심히 살기로 결심해 봅니다.

저는 올 해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큐티를 강조했습니다. 주보에 있는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대로 따라 사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저와 함께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서머나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전하고,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관심입니다. 아침에 하나님 말씀을 읽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을 때 저는 춤을 출 듯이 기쁩니다. 송이꿀보다 달고,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서머나 식구들에게 임하기를 뒷전에서 정말 애절하게 기도합니다.

이제 2010년은 한 달도 남지 않았고, 다시는 2010년이라는 시계추를 되돌릴 수 없습니다. 남은 한 달여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 말씀 붙잡고 사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큐티하시고, 성경말씀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셔도,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받고 그 말씀을 곱씹으면서 하루하루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소망이 됨을 분명히 체험하실 겁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살 길입니다. 기도는 하늘과 땅을 잇는 신비로운 능력입니다. 장소가 허락한다면 연말연시에 특별기도회를 가지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하나님께로 맞추고 싶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에 각자의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밀하게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덧붙인다면, 사랑이 그립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수요예배에서 배운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말입니다:“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河-

12월을 맞으며

좋은 아침입니다.

1.

올 해의 마지막 달을 살고 있습니다.

한 해가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요!

우리말로 나이가 드는 것을 두고

나이를 먹는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먹는 것으로 비유한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음식을 먹어 치우듯이

지나간 시간은 사라집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에 유익이 되고

삶 속에 열매로 남습니다.

시간도 먹으면 (나이를 먹듯이)

그것이 우리 삶에 귀한 열매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나쁜 음식을 먹으면

도리어 몸에 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옳게 사용되지 않은 시간은

우리의 삶과 인생길에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이를 먹는 것이나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시간을 잘 선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척 부끄럽고 창피할 것입니다.

2.

11월의 수요예배에서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를

차례로 살펴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이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어지는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첫 번째

열처녀의 비유에서는

기름과 등을 준비한 다섯 처녀만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기름과 등을 준비하고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종말을 맞는데

제일 먼저 해야 하는 필수사항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맞을 준비 첫 번째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입니다.

이것은 남에게 꾸어줄 수도 없고

꿀 수도 없는

우리 각자가 준비해야 할 믿음입니다.

두 번째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각각 종들에게 나눠준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이지요.

구원에 만족하고 멈춰있다면

그것은 자칫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에 걸맞은,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맡겨주신 달란트가

크던 작던 (작을 때는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

예수님이 오셨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가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관리라면

세 번째 양과 염소의 비유는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웃사랑입니다.

비유 속의 양들은 세상에 헐벗고, 외롭고, 힘겨운

지극히 작은 이웃을 도와준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깜짝 놀랄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25:40)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웃들에게 실제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특별히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대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3.

올 해의 마지막 달을 살면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에

우리 인생의 끝을 맞춰놓고

우리의 신앙과 삶을 점검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맞을 기름은 확실하게 준비하셨습니까?

맡겨주신 달란트를 잘 관리하고 계십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예수님을 대접하듯이 사랑합니까?

2010년 한 해 동안

336일을 먹고

이제 29일이 우리 앞에 남겨져 있습니다.

남겨진 날들 하루하루,

믿음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웃을 섬기면서 살아봅시다.

하나님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기쁨으로 주를 맞을 준비를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0.12.2 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