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기독교 (Uncommon Decency)”

좋은 아침입니다.

1.

전에 목회하던

인디애나 교회에서는

수요예배가 없었습니다.

대신에 저는

수요일마다

교회 홈페이지에

“수요단상”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지금 이렇게

목요일 저녁 이-메일 서신을 준비해서

보내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인디애나 교회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올렸던 수요단상의 제목이

“무례한 기독교”였습니다.

풀러 신학교 총장님이신

리처드 마우께서 쓰신 책을 소개한 글이었습니다.

개척해서 5년동안 애지중지했던

교회와 그곳의 청년들이

멋진 그리스도인들로 세상에 나가기를 기도하면서

글을 준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에,
생각이나 삶이 매력적이어야 할 기독교인들이

자꾸만 창피하고 무례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서

속이 많이 상합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너무 교만해 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면 지난 번 설교처럼

상처를 받아서 지나치게 예민해진 것인지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말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하기 원합니다.

2.

오늘은 5년 전에 써 놓았던 글을

약간 수정해서 보냅니다.

조금 길지만, 끝까지 읽어보시고

행여나 우리 안에 추한(ugly) 모습이 있다면 회개하고

멋진(attractive) 모습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합시다.

“무례한 기독교”

이 책의 영문 제목은 “uncommon decency”입니다.

Common decency는 “일상적인 예의”로 번역되는

흔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uncommon decency“라니요?

직역하면 “특별한(비일상적인) 예의범절/품위“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적 교양과 예의 범절에 관한 책입니다.

믿음이 너무 좋으면

세상 속에 작 섞이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자신만이 천국백성이고,

세상 사람들은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정죄하곤 합니다.

말 그대로 “무례함” 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나 신실함은 뒤로하고

세상 속에서 단지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인지 아니면

그냥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인지 종종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

예의범절은 지켰는지 모르지만

기독교인의 정체성인 “특이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세 번째 경우는

하나님을 믿지만

세상에서 전혀 구별됨 없이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큰 일입니다.

얼른 회개하셔야 한다고 매번 말씀 드립니다.

이에 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믿음과 교양을 두루 갖춘 근사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uncommon decency”라는 책 제목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무례하게 행해서는 안됩니다.

친절과 온유함에서 우러나온

예의 범절을 갖추고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던…안 믿던…

우리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친절해야 할 이유는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예술작품이다. 그분이 우리 각자를 정교하게 만드셨으므로 우리는 모두 ‘특별한 피조물’이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분의 작품을 망가뜨렸을 때에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무례한 기독교-, 31쪽)

3.

세상 사람들은 종종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무례하다고 합니다.

배타적이라고 합니다.

이기적이라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탓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 앞에 서 계셨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자기를 낮춰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

죄인들의 친구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급기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누구도 예수님을 향해서 “무례하다”고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핀잔을 들어야 할까요?

마우 총장께서 지적하셨듯이,

우리들에게 기독교적 소양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신앙을 잃지 않고

뭔가 다르게 사는 특별함,

거기에 온유함친절 그리고 너그러움으로 대표되는 예의범절 –

이런 소양들이 우리들의 신앙인격에 베어있다면,

세상 사람들 입에서

“무례한 기독교”라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세상 속에 우리를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모습을 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하나님의 백성다운 거룩함을 잃지 않고

세상 속에서 예의범절을 갖춘

멋지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하라. (마 5:16)

하나님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알고 있지만 자꾸만 넘어지고

세상살이가 힘겹기에

적당히 믿고 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서머나 식구들이 꿋꿋하게

예수님을 닮는 신앙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멋지고 근사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세상을 놀래키게 하옵소서.

하나님

순간순간 실패하고 넘어져도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매 순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10.28 이-메일 목회서신)

주님의 은택

기독교인들은“은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아니 기독교 자체를 은혜의 종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혜택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3장 24절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는데 이것이 곧 구속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죄가 사라졌기에 의인이라 칭함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값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구원을 얻었고, 신앙의 복을 누린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행위에서 얻는 보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쳐주는 온전한 신앙은 우리들이 어떤 것을 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혜택을 누리고 그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은혜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103편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찬양입니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1-2절)는 말씀은 다윗이 자신의 내면을 향해서 외치는 커다란 외침입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체험한 다윗은 자신의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기서 영혼은 다윗의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목숨을 다해서, 자신의 가진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함은 그만큼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다윗이 감사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신하의 아내를 범했고, 결국 그 신하도 전장에서 죽도록 사주했습니다. 그의 집안도 갖가지 죄들로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죄사함에 대한 감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깊은 은혜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자신의 병을 고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살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의 건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육신의 질병도 고침을 받습니다. 건강하게 살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윗은 깨닫고 그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시는 여호와라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자와 긍휼로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육신의 질병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린 것입니다. 모든 죄와 파멸의 세력에서 새로운 삶으로 구원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결단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소원을 만족케하시고 독수리처럼 힘차게 생의 도약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을 향하여 날아오르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수요예배에서는 (5)

지난 수요예배는 매우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2년 전에 시작했던 구약성경의 소예언서 공부를 모두 마쳤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부터 시작되는 12권의 소예언서는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일예배에서 설교하려면, 그 내용이 너무 무겁습니다. 지루하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도 많이 있어서 혼자 읽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소예언서 말씀을 강해나 설교로 함께 나눌 기회가 적습니다. 아니 교회를 수십 년 다니셨어도 소예언서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지 못한 경우도 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2년여 소예언서를 모두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소예언서의 마지막인 말라기 4장을 공부하면서, 구약 성경 예언서의 주제를 “남은 자의 신앙”이라고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불안하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숭배를 일삼았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도 그 지위가 세습된다는 안정감에 구태의연하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왕들도 역사의 흐름 속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급기야 주전 6세기에는 남북으로 갈렸던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무너집니다. 이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세우셔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신앙은 물론 당시 사회적으로 타락한 도덕과 신앙양심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백성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씀도 거침없이 선포했습니다. 심판을 선포하지만 그 안에는‘헤세드’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이 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끝까지 신앙을 지킨 남은자들이 늘 구원의 기쁨에 참여하게 됩니다.

요즘 세대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처럼 영적으로 많이 타락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함(구별됨)을 상실한 채, 세상에 섞여 살아갑니다. 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혼합주의 신앙을 갖고 있었듯이, 요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재물, 명예, 권력, 쾌락을 하나님과 겸해서 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 지난 2년 동안 함께 살펴본 소예언서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하고 바른 믿음을 갖기를 교훈합니다. 무엇보다 신앙과 삶이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거룩하라고 가르쳐줍니다. 우리 교회와 신앙 속에 예언자들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살아서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앞으로 10주 동안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를 한 가지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딱딱한 말씀을 들었다면, 예수님의 비유 속에 깃든 보화와 같은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하늘나라의 비밀이나 꼭 필요한 신앙의 진리를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비유에 예수님의 실제 목소리가 들어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들에게 익숙해서 말씀을 묵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남은 올 한 해 동안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의 신앙이 한창 성숙되기를 기대합니다. 수요예배에서 뵙겠습니다.  -河-

달인 (達人)

한국에서 방송되는 개그 프로그램가운데 “달인(達人)”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키가 작고 다부지게 생긴 개그맨이 나와서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장기를 하나씩 보여줍니다. 지난 추석에는 그 동안 시청자의 관심을 끌었던 일곱 가지 장기를 특집으로 엮어서 방송했습니다. 체조 선수도 아니면서 링 위에서 가진 묘기를 부립니다. 온 몸에 먹칠을 하고 전위예술 하듯이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데 괜찮은 작품이 탄생합니다.

자신은 십여 년 이상을 얼음에서 생활했다고 허풍을 떨면서 얼음 위에서 책을 읽고, 심지어 얼음 신발까지 신고 추위를견딥니다. 물속에서 잠수한 상태로 콜라와 컵라면을 먹고 책을 읽습니다. 급기야 맛을 느끼지 못하는 달인이라는 명목으로 청양고추를 질겅질겅 씹어먹고, 맵기로 유명한 태국고추를 팝콘처럼 한 입에 가득 넣습니다. 매운 고추를 먹을 때는 그분의 건강이 은근히 걱정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의사까지 대동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달인 코너가 인기를 끄는 것은 이 분이 보여주는 장기가 허풍이나 거짓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청자는 물론 수 많은 방청객들 앞에서 실제로 달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를 씁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링에 매달려 있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 역력한데도 그분은 ‘아니라’고 능청을 떱니다. 청양고추를 먹으면서 웃음을 짓지만, 시청자들은 그가 달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매운 맛을 참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어려움을 피해가지만, 그가 보여준 장기만으로도 시청자들은 박수를 보냅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보여주는 달인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감동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달인(達人)은 말 그대로 “무엇엔가 통달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기에 쉽게 채택할 수 있지 (달인 코너의 개그맨은 결코 쉽게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달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꽤 어렵습니다.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입에담기도 어려운 말입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의 달인 코너를 보고 있으면 왠지 우리도 달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적어도 우리들이 하고 있는 생업 또는 취미나 특기를 살려서 달인이 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낍니다. 작은 체구의 개그맨이 우리에게 주는 은근한 힘이요 커다란 용기입니다.

달인 코너를 보면서 저도 어떤 영역에서인가 달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목사이니 목사와 관련된 달인의 모습을 하얀 종이에 적어 봅니다: 설교의 달인, 인간관계의 달인, 섬김의 달인, 상담의 달인, 언어의 달인 등등. 달인이 되고 싶은영역이 꽤 많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되고 싶은 달인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기도의 달인’입니다. 목사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의 달인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깨어있으면 늘 기도하고, 꿈을 꾸면서도 기도하고, 운전하면서 기도하고, 일을 하면서도 기도하고, 누군가 만나면서도 기도하고, 밥을 먹거나 무엇을 하든지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기도의 달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방송에 나오는 개그맨처럼 일상 생활 속의 어떤 일이나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달인의 모습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은 수없이 연습해야 합니다. 때로는 고통도참고 이겨야 합니다. 달인 코너의 개그맨을 두고 동료들이 했던 말 가운데 한 가지가 마음에 남습니다:“그는 악바리입니다!”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끝까지 견디는 근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여러분들께서는 어떤 영역에서 달인이되고 싶으십니까? (2010년 10월 1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천국 백성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에서 오래 살아도

우리들의 마음은 늘 고국에 가 있습니다.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을 향한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입니다.

2년 전에 위성방송을 신청했는데

그 가운데 한국 TV 방송이

끼어 들어왔습니다.

그 이후로 TV를 틀면 먼저 한국방송으로

채널을 옮기는 것을 보면 저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고향의 힘,

민족의 힘,

아니 핏줄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2.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 20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 시민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우리를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곧 하늘나라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당시에

로마 시민권의 특혜와 비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 시민이라고

그 지위와 소속을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이 말씀을 읽고 있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

많은 경우 로마시민권이 없어서

신분상의 불이익과 천대를 받고 있었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위안과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삽니다.

하늘나라 백성으로

아니 하늘나라의 대사(ambassador)로 살아갑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삶을 누리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들입니다.

3.

엊그제는 아내와

천국백성,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자녀들이 잘 되고

돈을 많이 벌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폼을 재는 것이 축복일까?

하늘나라에 소망이 있으니

이 세상과 담을 쌓고

인생의 정거장을 서성대면서

빨리 하늘나라에 가기만을 기다리는 지루한 모습일까?

이런 것이

천국 백성의 삶이 아니라는 데

부부간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천국 백성의 삶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지나치게 금욕을 하고

세상 것을 억제하면서

수도승과 같은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비록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에 보내시면서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라는 사명입니다.

어그러지고 뒤틀린 세상 속에서도

천국 백성답게 살아내라는 명령이십니다.

빛은 자체발광입니다.

소금 역시 맛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빛 되신 예수님을 품고 있기에 저절로 빛이 나야 하고

소금의 맛을 내야 합니다.

가진 것이나 겉으로 보이는 외모가 아니라

삶 또는 성품이 바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들이 누리는

다음의 네 가지 표지들(marks)로 나타납니다.:

내적평안, 기쁨, 감사, 자유함.

이 네 가지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누리고

그것을 통해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위의 네 가지 표지들을 누리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 안에 거한다는 증거이고

세상에 자랑해 보일 수 있는 천국백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도

서머나 식구들께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

천국백성으로 자긍심과 사명감을 갖고 살게 하옵소서.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안, 기쁨, 감사, 자유함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10.14 메일 목회서신)

인생을 사는 지혜

한국에서는 수십 년 동안 행복한 인생에 대해서 강연을 하면서 행복전도사라는 별칭까지 얻은 분이 남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분의 강연을 들은 적은 없어도 그분이 어떤 강연을 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연의 주제는 행복이었고, 어떻게 하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론을 강연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 앞에 불치병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지, 또한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프리드만이라는 구약학자는 본문을 출애굽기 32장과 연결시켰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는 동안 지상에서는 모세의 형 아론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앞에 절을 하고 흥청망청 즐겼던 사건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백성들을 위해서 애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그의 기도는 힘이 있었습니다.

시편 90편은 1-12절과 13-17절의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소위 ‘세상살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곧바로 임하지 않았을 때 불평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고 번쩍거리는 금송아지가 근사해보였기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앞에 절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자신들 좋을 대로 먹고 마시면서 춤을 추며 즐겼습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인생살이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줍니다. 모든 육체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마지막 인생길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도 아침에 돋는 풀처럼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시편기자 당시에는 칠십을 살면 수를 다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팔십을 살면 특별히 장수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한평생을 돌아보면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먹구름이 끼여 있던 인생길이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좋았던 시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금방 지나갈 것, 언젠가는 사라질 것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시편 90편이 후반부 (13-17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인생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아침에 돋는 풀처럼 시들어버릴 세상 것들을 추구하기보다 아침마다 임하시는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구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이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견뎌내는 것입니다.

수고와 슬픔뿐인 세상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과 기쁨을 평생 동안 누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후대에게도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라는 시편 기자의 기도를 따라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만들어주시는 인생길을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때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세상에 진정한 행복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 믿음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진정한 행복을 전하는 행복전도사가 되어 봅시다.-河-

“한 길 가는 순례자”

1.
오늘 저녁에는
안타까운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모든 장례가 마음이 아픈 가운데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지만
20대 젊은 자매의 장례식은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이었고,
매주 보내는 이-메일 서신을 계속 받아 보고 싶다고 해서
메일링 리스트에 이름을 간직했던 자매였습니다.

모든 것이 안타깝고
목사로서
책임감과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2.
집에 돌아와서
목요서신을 준비하는데
아내가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책이
책상에 놓여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한 길 가는 순례자”라는 책입니다.
영어 제목은
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이지요.
이 책의 번역자는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이라고 옮겼습니다.
그냥 “한 길 가는 순례자”라는
우리말 제목도 마음에 깊이 와 닿습니다.

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길을
순례길이라고 여깁니다.

순례길은
관광길이 아니기에 힘이 듭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때로는 참으로 외롭습니다.

그래도 순례자는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갑니다.
그 길이 어떤 모양이든지,
아무리 힘이 들고 지치더라도
순례자는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가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4.
지난 주일 설교본문인
시편 88편이 가르쳐주듯이
순례길이 고난으로 점철될 수도 있습니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가슴으로 부르짖으면서
꿋꿋하게 그 길을 걸어갑니다.

정말 말 그대로 순례길은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 입니다.
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

그때 함께 가는 순례자가 곁에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순례길이 될 것입니다.
같은 방향으로 나가는 동행(同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아니
동행을 찾기 전에
내가 먼저 다른 순례자의 동행이 되어주는 것도
순례길에 임하는 행복이고 멋입니다.

5.
유진 피터슨은 시편 129편을 갖고
“인내”라는 글을 써내려 갑니다.

인내란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꾸준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직 미숙하고 우리 앞에는 여전히 긴 여정이 남았음을 느낄 때도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인내는 그들이 가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무조건 견뎌 내면서 세월이 흘러도 판에 박힌 듯 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거나, 스스로를 사람들이 신발에 묻은 흙먼지나 털고 가는 발깔개로 취급하는 체념의 상태가 아니다. 필사적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서 능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사야에게서 지친 기색이나 무료함을 발견할 수 없고 예수님에게서 바울에게서 무미건조한 기색을 찾아 볼 수 없다. 인내는 의기양양하고 생동적인 것이다.

시편 129편의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 129:2)

우리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그 무엇이/그 누군가 있더라도
꿋꿋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라고 시편기자처럼 선포하십시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붙어 있으셔야 합니다.
능력에서 능력으로
의기양양하고 생동감 있게
각자에게 주어진 순례길을 걸어가셔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순례길을 걸어가시는
서머나 식구들 한 분 한 분과 동행하여 주옵소서.
무엇보다 우리 젊은 청년들이
그들 앞에 펼쳐진 순례길을
신앙 가운데 끝까지
능력에서 능력으로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10.7 이-메일 목회서신)

고난 중의 부르짖음

늘은 토요일 큐티 말씀인 시편 88편을 설교본문으로 삼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시편은 모두 150편의 시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이들은 다시 크게 5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것은 구약성경의 첫 번째 다섯 책인모세오경을 따라 구분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시편에는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고, 그 밖의 시편들은 아삽이나 고라와 같은 구약시대에 음악을 담당하던 시인들이 기록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시편 88편은 “전체 시편가운데 가장 슬픈 시(the saddest Psalm in the whole Psalter)”라고 불리곤 합니다. 시편 88편을 개인탄식시라고 불립니다. 개인이 겪는 신앙과 삶의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에는 이와 같은 개인 탄식시가 꽤 많습니다. 대부분의 탄식시는 후반부에서 기도응답과 희망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시편 88편은 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증이 없습니다. 바이저라고 하는 구약학자는 시편 88편에는 한 줄기 위로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시편 88편을 기록한 시편기자는 현재 개인적으로 무척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3절에 의하면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모든 삶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죽음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무덤에 누워있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돌보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시편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주의 진노가 자신을 눌러서 현재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편 기자의 영혼과 육체에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힘이 빠졌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곁에 있던 친구들도 모두 떠나갑니다. 세상에 시편 기자를 위로하고 격려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극도의 외로움입니다. 사람에게마저 버림받은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처럼 칠흑과 같은 어둠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습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해서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라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친구들마저 떠난 지금, 시편 기자가 바라볼 수 있는 곳은 하늘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움

직이면 움직일수록 깊이 빠져드는 수렁에 빠진 그 순간에도 시편기자는 밤낮없이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여호와여 오직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요즘은 형통의 신학(prosperity theology)이 유행입니다. 하나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현대판 기복주의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의 풍조 속에서 시편 88편은 진실된 신앙이 무엇인지, 신앙의 진수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깊

은 신앙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잊지 않고, 주님을 향하여‘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도리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이끄는 축복으로 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씨름하면서 주님께 부르짖는 것이 진실된 신앙입니다. 정금과 같은 아름다운 신앙이지요! -河-

은혜의 단비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에도 그랬는데

올 해도 10월이 되면서

(rain)가 그립습니다.

어렸을 적 마루에 앉아서

뒤뜰 처마를 따라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면

마음이 시원해지곤 했습니다.

작년과 올 초 우기 때

비가 많이 왔지만

어느덧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본지

여러 달이 지났습니다.

내일부터 10월이 되니

곧 우기로 접어 들겠지요.

비가 오는 날은 창문을 열고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올해도

여름 동안 쌓였던 먼지를 모두 씻어내고

산천을 초록으로 물들이기 충분할 만큼

비가 내리기를 기대합니다.

2.

이제 건기가 끝나고

우기로 접어드는 캘리포니아의 가을!

올 가을에는

우리들의 마음에도 은혜의 단비가

촉촉히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반기에는

큐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읽고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서머나 식구들의 마음에

은혜의 단비로 임하기를 바랍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있던

모세가 그곳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 가운데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을 비에 비유했습니다.

나의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 32:2)

Let my teaching drop as the rain,

My speech distill as the dew,

As the droplets on the fresh grass and the showers on the herb.

10월의 첫날입니다.

말씀의 은혜가

이슬비처럼 촉촉히 임하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듯이 때에 맞게 임하길 바랍니다.

한달 동안 아니 올 가을에

온 몸과 삶을

소낙비처럼 생명으로적셔주는

말씀의 은혜를 사모합시다.

하나님!

올 가을에 말씀의 은혜가

서머나 식구들 위에

이슬비처럼, 소낙비처럼,

단비처럼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9.30 메일 목회서신)

새로운 삶의 법칙

주보에 있는 큐티 본문이 골로새서에서 디도서로 넘어갔습니다. 골로새서는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한 적이 없어서 만나본적이 없는 성도들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기에 기쁨과 간절함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이번 달 말까지 큐티하게 될 디도서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신실한 동역자 디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레데 섬에서 사역하던 디도가 교회를 섬길 일꾼들을 잘 세우고, 바른 신앙으로 성도들을 이끌 것을 조목조목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임원들께서는 디도서를 깊이 묵상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지난 화요일 큐티본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옛생활을 정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누릴 것을 부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과거의 삶을 모두 청산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기에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전에는 땅엣 것을 추구하면서 세상과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에 하늘을 바라보는 새로운 삶이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보면 예수님을 믿기 전의 상태를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육체와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자신의 쾌락을 쫒는 것입니다. 허무한 삶입니다.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입니다. 3장 5절에서“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육체와 욕심으로 살면 분쟁과 훼방에 휘말리게 마련입니다. 서로를 비교합니다. 시기하고 경쟁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져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져야합니다. 비교하는 가운데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삶이 불안하고 늘 무엇엔가 쫓기게 마련입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은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모두 벗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었습니다. 그 옷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입게 된 구원의 옷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롭게 입은 옷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긍휼”“자비”“겸손”“온유”“오래참음”입니다. 이 다섯 가지 옷을 입고 세상을 살면 사는 것이 황홀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끝까지 오래 참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새로운 삶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용납하고 용서합니다. 사랑이 넘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과 삶을 주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언제나 풍성하게 거합니다. 말씀이 주는 지혜로 서로를 대하고 세상을 살아가니 그 길에 찬양이 넘칩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그 안에 감사가 넘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요즘에는 교회도 많고 기독교인들도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옛 생활에 젖어 있고, 육체와 탐욕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배운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河-